나의 히스클리프

나의 히스클리프 -14화

Espre5S0 by 이화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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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이와 하교도 따로 했다. 뒤에서 바쁘게 따라오는 순이를 애써 무시하려고 그는 노력이었다. 피아노를 칠 때 얼쩡거리는 것도 보기가 싫었다. 하지만 그런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순이는 포기하지 않았다. 매번 조금씩 다가와 곁에 머무르려 했고, 그 모습은 앨리스의 신경을 더욱 날카롭게 만들었다.

그는 장난감 상자에서 비행기 모형을 다시 꺼내었다. 순이에게 던졌다.

“이거나 가지고 놀아.”

말투가 날카로웠다. 순이는 비행기를 받으려다 손이 미끄러져 모형이 바닥에 떨어졌다. 순간 그의 손이 멈칫하더니,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는 어색하게 웃으려 했지만, 손가락이 떨렸다. 저번의 그 비행기 장난감이었다.

“고마워….”순이는 애써 미소 지으며 말하였다. 그럴수록 자기가 나쁜 아이가 되는 거 같았다. 그럴수록 순이가 부모님의 사랑을 독차지 할 거 같아서 불안했다. 곧 앨리스의 생일이었다. 그런데 가족들은 입도 뻥긋 안 하고 순이가 더 이상 침대를 적시지 않는다는 것을 칭찬하고 그가 영어를 얼마나 잘 하게 되었는지만 신경을 쓸 뿐이었다.

앨리스는 밤에 방에서 받고 싶은 생일선물 목록에 대해 적다가 손을 멈추었다. 1950년 봄에 찍은 사진이었다. 순이가 없었을 때, 완벽했을 때 찍은 사진. 부모님 사이에서 행복하게 웃고 있는 자신이 안쓰럽기도 하고 멍청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더는 자기가 중요하지 않다. 폭풍의 언덕을 읽으며 힌들리의 악행에 경악을 하고 어쩜 저렇게 나쁠 수 있냐고 손을 다르르 떨면서 보았다. 이제는 힌들리의 마음을 알았다.

“불쌍한 힌들리.”

중얼거렸다. 엎드린 채 책을 그저 넘기고 넘기고 넘기었다.

어머니가 순이의 방으로 향하는 걸음 소리가 들리었다. 나의 히스클리프.

아침에도 그는 순이를 슬쩍 바라보기만 하였다. 집에는 폭풍전야 같은 공기가 흘렀다. 부모님이 자신을 보는 눈이 더욱 차가워진 것 같았으며 아버지는 빵을 죽 찍어 버터를 바르다가 앨리스와 눈이 마주치자 한숨을 쉬었다.

순이가 고개를 들었다. 캄캄한 눈이 오늘따라 더욱 캄캄하게 보였다.

“앨리스.”

무시했다.

“…앨리스, 생일이야. 맞지?”

“어, 응. 맞아.”

무시할 수 없었다. 순이는 고개를 끄덕이고 자신의 접시에 시선을 돌리었다.

“생일 축하해, 앨리스.”

그 말이 기계적으로 들렸다. 영어를 잘하지 못해서 그래. 하기에는 이미 그는 영어로 문장을 잘 구사하였다. 앨리스는 제 목구멍에서 고맙다는 말이 걸려 나오지 않는 것이 느껴지었다.

오후에 순이가 제 방 앞에 작은 상자를 두고 갔다. 죄책감이 더욱 강해지고 반발하듯 폭력성이 들었다. 상자를 발로 차고 싶었으나 자중해야 했다. “생일선물이야.” 제 방에서 옷을 실내복으로 갈아입고 나온 순이가 말하였다. 방으로 들어가 복잡해진 마음으로 상자를 열었다. 거기에는 전에 잃어버린 호두 깎기 인형이 있었다.

후— 하고 숨을 깊게 내쉬며 무너지듯 침대에 앉았다. 마음 한구석이 무겁게 얹히었다.

밤은 깊어졌다. 부모님은 서프라이즈 파티를 할 생각이었는데 아침에 순이가 말해버렸다며 시시하게 선물을 건네었다. 케이크가 달지 않았다. 아니, 달아빠졌다. 그 뿐이었다. 밤은 깊어지고 앨리스는 침대에 누워 인형을 손에 들고 보았다. 어둠 속에서 이것이 화해의 요청인지, 아니면 그저 의무감이었는지. 마음 한 켠에서 복잡한 문장들의 실타래로 얽혀 혼란스러웠다. 자그마한 발걸음 소리가 들리었다. 순이가 씻고 나서 방으로 들어가는 소리일 테다.

잘못을 인지하고 있는 만큼 바로 잡는 방법을 모르는 자신이 미웠다. 그는 넘어지지 않으려 노력이었을 뿐 넘어졌을 때 다시 일어서는 법은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피아노 방 한구석에 있는 장난감 상자 위에 어제의 비행기 장난감이 있었다. 흰 눈이 계속 쌓이고 있었고 그 위로 달빛이 덮였다. 모두가 앨리스에게 순이는 불쌍한 아이니깐 잘 해줘야 한다고 그랬다. 생일 파티 중의 대화가 떠올랐다.

“순이 생일은 언제죠, 여보?”

“그게,….”

“몰라요. …생일을 축하한 적이 그동안 없었어요.”

그 말에 주역이 또 다시 앨리스에서 순이로 바뀌었다. 순이도 생일을 정하는 것이 좋겠다면서 웃는 아버지, 12월에 태어난 앨리스보단 생일이 먼저일 거 같다는 어머니.

앨리스는 비행기 장난감을 들고 가서 순이의 방문을 두드렸다.

“소피아 순 소이어.”

그는 풀네임으로 부르는 것의 의미를 모르는지 그저 멍한, 막 잠드려다 말았다는 얼굴로 방문을 열었다. 비행기 장난감을 순이의 손에 세게 쥐여주었다. 눈이 커다래졌다.

“왜 이거 안 가지고 놀아?”

“미안, …나, 나는 비행기 무서워….” 순이가 말끝을 흐렸다. 앨리스도 이미 알고 있었다. 이미 어느 정도 예상은 되고 있었다. 그의 친부모가 비행기 폭격으로 돌아가셨을 수도 있겠구나, 하고. 보통 아이들이 비행기 장난감을 보고 비명을 지르고 울고 그러는 일은 없을 것이며 비행기 모양만 보면 두려움을 감추지 못하는 것이, 단어 카드 중에서 비행기 단어만 몰래 쓰레기통에 버린 것이 정말 다 티가 났다.

“너 가져, 이 오줌싸개!”

순이를 도 가볍게 밀쳤다. 순이가 엉덩방아를 찢으며 “꺄—.”하는 작은 비명소리를 내었다. 앨리스는 방으로 황급히 돌아갔다. 다음 날 아침에 피아노 건반 위에 비행기 장난감이 올려져 있었다. 순이는 아침 식탁에서 조용히 앉아 있었다. 그의 손은 무릎 위에서 꼭 잡혀 있었다. 앨리스는 식탁 한구석에서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시선이 그에게 닿자, 순이는 고개를 살짝 들었지만 눈이 마주치자마자 다시 아래를 보았다.

“순이," 그녀가 조용히 불렀다. 그러나 그의 대답은 없었다. "피아노 방에서 보자," 그는 식사를 마치고 방으로 나가며 덧붙였다.

순이가 피아노 방으로 걸어 들어갔을 때, 건반 위에 놓인 비행기를 손에 쥐었다.

"네가 두려운 걸 이겨낼 수 있도록 도와줄게."

“싫어….”

앨리스는 주먹을 꽉 쥐었다. 비행기 장난감을 순이에게 세게 던졌다. 다치라는 의도는 아니었다. 절대로. 비행기 날개가 피아노에 부딪혀 날카로운 조각이 튀어 순이의 눈 위를 찢기를 바란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날카로운 비명이 그의 귀를 때렸다.

그의 눈가에서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는 그 곳을 감싸고 다르르 떨 뿐이었다. 눈물이 그의 눈가에 맺혔다. 그는 한 마디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앨리스는 그를 바라보며 자신이 방금 한 행동을 곱씹었지만, 사과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부모님을 부를 용기도 나지 않았다. 순이가 아픔을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트리고서야 어머니가 방으로 들어왔다.

“앨리스 앤 소이어. 방으로 들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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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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