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의 이름

러셀 답록

김유이 by 김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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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ri2VCCTg7SM?si=KDc3wGNtKapVCO3C

글쓰면서 들었던 노래 두고 갑니다. 그렇게됐다.


0.

흡혈귀는 하늘을 올려다본다.

 

온통 어두운 사위를 만개한 달이 푸르게 비췄다. 빛이 내려앉은 자리에는 하얗게 얼어붙은 대지가 있었다. 생명이 살아남기 힘든 혹한의 자연 속에서 태어난 존재는 살을 에는 추위를 느끼지 못하는 듯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흡혈귀는 하얀 눈 위로 이어지는 제 눈동자만큼 붉은 흔적을 따라 걸었다. 그 끝에는 상처 입은 짐승이 마지막 숨을 내쉬고 있었다. 흡혈귀는 무릎을 꿇고 앉아 짐승의 파란 눈망울과 시선을 맞췄다. 고요한 가운데 그는 짐승의 소원을 들었다. 긴 손가락이 짐승을 어루만지자, 생기를 잃어가던 눈망울에 빛이 깃들었다. 짐승은 저를 어루만지던 손에 머리를 부비고는 달이 비추는 길을 따라 떠나갔다. 그는 제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고개를 기울였다.

 

손에 남은 따스함이 희미해질 즈음, 불멸자는 최초의 결핍을 깨달았다.

 

1.

“죽지 마세요.”

어처구니가 없군. 저보다 한참 약한 존재에게 이런 말을 들으니 제 처지가 조금 우습게 느껴지기도 했다. 입에 발린 말이겠지. 호조 와타루는 내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인지하고 있으니까. 하지만 그의 를 마시고, 제 맹약자가 제법 진지하게 하는 말임을 알았다. 조금 놀라웠다. 비록 이름을 잃어버렸지만 제 본질이 무엇인지는 인지하고 있었으므로. 그렇기에 맹약자의 ‘걱정’이란 것은 꽤 낯설게 느껴졌다.

정말이지… 누가 누구를 걱정하는 건지 모르겠다.

2.

“걱정이라기보단… 동질감 같은 거라고 해두죠.”

너와 나는 다르다. 여러 종류의 개체들을 모아 한 줄로 나열한다면 양 끝단에 위치할 수 있을 정도로 정반대라고 봐도 무방하다. 하지만, 그런 우리 사이에도 비슷한 부분이 있다면 아마도 무언가가 결핍됐다는 거겠지. 그렇기에 네 말을 듣고 알 수 있었다. 너도 누군가를 잃어버렸노라고.

300년, 제게는 긴 시간이 아니다. 하지만 의지할 존재를 잃어버리고 길을 헤매는 아이에겐 너무 긴 시간이었다. 짧고 긴 시간의 간극을 지나, 귀애하는 아이와의 마지막 연무가 불현듯 찾아왔다. 축복을 내린 자로서─ 아스트리드를 아꼈던 아버지로서 그건 마땅히 감내해야 할 일이었다. 누군가의 시간은 이제 영원히 멈춰 마지막 안식 속에서 잠들지만, 제게 새겨진 시간은 멈추지 않았다. 마음 한구석이 텅 비어 아무것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네가 남을 대신하여 울 수 있는 인간이어서 다행이야.

 

3.

“어차피 이게 내 역할이잖아요.”

 

이 인간은 조금, 아니, 상당히 특이하다. 당사자가 듣는다면 ‘그건 러셀의 기준이잖아요.’라고 말할 게 뻔하지만 이건 사실이다. 거의 매일 하는 대련에서 이긴 적이 한 번도 없으면서도 자신을 지키려고 나서는 모습이 이상하게 느껴진다. 필요에 의해 맹약으로 묶어뒀으면서도 흡혈귀를 도구로써 취급하지 않고, 오히려 스스로가 도구인 양 구는 점마저도.

 

마음에 들지 않아.

 

4.

“죽지만 않으면 되는 거잖아요. 이러면 좀 만족하겠어요?”

 

아니, 전혀 만족스럽지 못해. 살아남으라는 말에 담겨있는 함의를, 어길 수 없는 약속을 걸어 행동을 제한하는 이유를 호조 와타루가 눈치채지 못했을 리가 없다. 무언가가 한순간에 사라지는 경험은 아무리 겪어도 익숙해지지 않는다. 더 이상 잃고 싶지 않다.

그건 아마도, 인간에게서, 그리고 호조 와타루에게서 감정을 채워나가고 있기 때문일 테다. 자신은 이미 그로 인해 달라졌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변화해 갈 것이다. 그러니까 이건 당연한 이야기다.

 

네가 나를 ‘걱정’하는 것처럼, 나도 너를 걱정하게 돼. 너의 공허가 채워졌으면 좋겠어.

 

5.

“당신이 원할 때 절 이용하세요. 대신 이젠 말도 없이 사라지지 마요.”

 

첫 문장에는 짜증이 치밀었다. 하지만 이어지는 말에는 감정이 차분히 가라앉는다. 항상 무덤덤하게 굴던 파트너가 어리게 느껴졌다. 드물게 진심으로 화를 내는 모습마저도 나쁘지 않았다.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순수하게 표출하고, 바라는 것을 요구하는 모습이, 기껍게 느껴진다.

 

호조 와타루는 농담이라고 했지만, 다음 파트너를 논하는 말에 어쩐지 거슬렸다.

 

6.

“내가 바라는 건… 당신이 죽지 않았으면 좋겠어….”

 

금속이 바닥에 부딪혀 날카로운 소리를 낸다. 눈물이 타고 흐르는 뺨이 앳되다. 고요하게 감정을 표출하는 모습이 못내 서러워 보인다. 제 맹약자는 많은 것이 서툴렀다. 어떤 유년 시절을 보낸 건지 자세히 묻진 않았지만, 와타루의 스승이라는 자는 그를 인간이기보다는 도구에 가깝게 길렀다는 확신이 들었다. 얼굴도 모르는 작자에 대한 불쾌감이 치밀었다.

나를 위해 눈물을 흘렸던 파트너는, 이제 자기 자신을 향해 울 수 있게 됐다. 내가 너에 의해 변하듯, 너 또한 나에 의해 변하고 있었다. 들리지 않던 네 목소리가 조금씩 선명해진다.

 

“그걸 보고 있으면 아주 조금이지만 뭔가가 채워지는 기분을 느꼈어요, 전.”

“당신 파트너가 된 거 후회하지 않아요.”

 

아직은 작고, 미약하지만, 그래도 자신에게 새겨진 암시에 싸우고 있노라고 속삭인다. 바람을 타고, 공기를 울리는 소리가 부드러웠다. 따갑게 내리는 햇빛 사이로 무언가 벽이 하나 무너졌다.

 

나쁘지 않다. 아니, 오히려….

 

7.

“…걱정 마세요. 죽진 않을 테니까. 약속했으니까….”

 

기억을 잃은 파트너는 날 찾아올 수 있을까. 이데아의 말에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러리라 생각했다. 근거는 없었다. 눈앞에 있는 적에게 얕보이기 싫은 마음도 있었지만, 제 파트너는 저 문을 열고 들어올 거라는 예지에 가까운 확신이 있었다. 기억하지 못할지라도 피에 새겨진 약속은 불변했다.

아타나시오…. 돌려받은 조각은 작았지만, 거기에 담긴 인연의 무게는 아득했다.

목덜미가 뜨거웠다.

 

8.

감정이 선명하게 튀어 오른다. 무수하게 쌓여온 것들 사이에서도 이렇게 날뛰는 감각은 처음이다. 이성으로 통제되지 않는 감정이 너무나도 낯설었다. 타의로 인해 뛰는 심장이 불유쾌했다. 저를 뒤흔드는 감정에 속절없이 휘말렸다. 이 감정에 정의를 내리고 싶지 않았다.

 

“당신이 언젠가 혼자 남겨지게 될 때가 올 거란 사실이 싫어요.”

 

떠나가는 이들은 대부분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 그들은 처음부터 다른 방향을 바라보았고, 마침내 소원을 이뤘으므로. 그렇기에 오로지 나만을 또렷하게 바라보는 그 푸른 눈동자가, 나를 걱정하는 말들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흔인이, 흘러들어오는 감정이 낯간지러웠다.

 

9.

시선을 피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아 짜증이 치밀었다. 와타루의 행동을 통제할 권리가 제게는 없음을 잘 알고 있다. 그야, 호조 와타루는 내 파트너니까. 상하관계가 아니라 대등한 위치에 있었다. 그 사실을 분명하게 자각하고 있음에도 불쾌했다. 이 감정의 기저에 깔린 것이 무엇인지 정의를 내릴 수가 없었다. 너는 날 항상 똑바로 봤잖아. 이제 와서 피하는 게 말이 돼?

 

“오늘 ▒▒ ▒은 다 ▒▒▒▒▒.”

“▒▒할 거▒요. 평생.”

 

몸을 덮고 있는 것을 매만지다 눈을 떴다. 마지막으로 기억하던 온천이 아닌 낯선 방의 천장이 보였다. 따가운 햇빛이 피부에 닿아왔다. 혈전이 어떻게 끝났는지 기억하지만, 그 이후는 흐릿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지워진 것처럼 뭉개져 있었다. 드문드문 제 파트너의 목소리가 스쳐 지나간다. …무언가 비어버린 것 같았다.

 

10.

“남겨지는 건 외롭잖아요.”

 

서로 다른 시간 속에서 많은 인연이 흘러갔다. 남겨지는 건 익숙했지만, 아무런 감정이 들지 않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건 남아있는 이들이 감당해야 할 몫이다.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하지 않았지만, 불현듯이 다시 만나지 못할 기억을 떠올리고 허전함을 느끼곤 했다. 이 세계를 인식하고 가장 처음으로 깨달았던 것처럼. 지금은 그 감정의 이름을 알고 있다. 홀로 태어났지만 살아감에는 혼자가 아니었기에 비로소 알게 됐다. 그리고 그 시간의 길이가 길어질수록, 함께 쌓아온 기억의 깊이가 깊어질수록 그것 또한 커졌다. 외로움. 그래서, 지금은 자신할 수 없었다. 다시 남겨진 나는 감당할 수 있나? …그래, 솔직하게 말하자면─ 두렵다.

 

“당신이 저한테 원하는 게 있으면 좋겠어요. 이왕이면 많이.”

“러셀은 늘 듣는 입장이니까, 당신 소원은 제가 들어주고 싶어서요.”

 

곧게 뻗은 목에 남아있는 흔적은 오래도록 남아있었다. 나쁘지 않았다. 자신을 바라보는 푸른 눈동자도, 나쁘지 않았다. 누구에게도 말한 적은 없지만, 푸른색을 제법 좋아한다. 첫 번째로 인지한 색이기도 했고, 어둠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유일하게 허락된 달의 시리게도 푸른 빛을 닮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따가운 태양 아래에서 최초로 올려다본 하늘이, 야속하게도 파랬다. 그래서 파트너의 푸른 눈동자가 제게 향하는 것이 좋았다.

 

인간의 피를 마시면 간혹 무언가가 흘러들어오곤 했다. 대게는 감정에 가까운 종류이며 아주 강한 무언가는 뚜렷한 기억의 형태를 가지기도 했다. ‘상념’이라고 불리는 인간만이 가진 특이한 것이었다. 대부분의 경우엔 큰 영향을 끼치지 않았지만, 강렬한 상념은 의미를 가지기도 했다. 와타루의 상념은 최초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야말로 텅 비어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비어있다는 건 당연하게도… 차오를 수 있다는 이야기다. 회색빛을 띠고 있던 감정이 다채로운 색을 가지고 넘쳐흘렀다.

 

마음이 울렁거린다. 거대한 파도에, 속절없이 휩쓸린다.

  

11.

“처음부터 당신 거였어요.”

 

늘 생각한다. 인간이 가진 감정은 그 자체로도 귀하고 반짝거린다고. 네 것도 마찬가지다. 아니, 오히려 네 감정이기에 나는 거기에서 눈을 뗄 수 없게 됐다. 더 다양한 빛깔로 채워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끝까지 보여줘. 이야기 해줘. 네가 느끼는 감정의 이름을.
그리하면 나 또한 이 울렁이는 마음을 정의할 수 있을 것 같으니까.
그건 오로지, 너만이 할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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