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eself

여기에 계신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두 눈으로 보지 않았으니 존재하지 않았던 것으로 치부되고야 말까요? 과연?

흔적이나 언행 같은 것들이 흐릿하게, 아주 흐릿하게 지워졌다고 한들. 당신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어떻게 부정할 수 있을까요?

눈치채셨을지도 모르지만, 저는 당신을 찾기 위해 이곳까지 당도했던 것은 아닙니다.

운 좋게도 대면을 피해 갈 수 있었네요. 아니, 그간 아무에게도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셨겠죠? 운이 좋다고 해야 하나, 과연?

용도를 다한 과거의 산물이나 다름없는, 이 건물이 철거를 목전에 앞두게 된다는 가정을 해봅시다. 그러한 가정이 없더라도 앞으로도 날마다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오갈 테고, 당신은 끝까지 자신의 흔적을 전부 부정할 수야 없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당신을 알은체 하지 않을 겁니다. 

당신이 기어이 바깥으로 끌려 나와 안락한 안전 구역의 땅을 밟게 되더라도, 신원을 알 수 없는 먼 과거의 조각들 중 하나로 취급받게 되어도. 저는 당신을 데려가지 않을 겁니다.

당신이 그걸 원하지 않을 테니까요. 그렇죠? 어머니. Mother

케이프는 당신의 몇 안 되는 성취입니다. 남들은 어찌 여길지 모르지만, 저는 오래전부터 그리 믿고 있었어요. 조금은 기특하게 여겨주셔도 되는데?

고작 자식이라는 이유로 희박한 성취로부터 연약한 온기를 빼앗아올 수 있겠습니까? 

… …


곁에 머물 수 있었잖아요?

아니, 처음부터 선택할 수 있었잖아요. 당신은.

당신은 다른 경우와 달랐잖아.

사실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아직도.

이런, 실언을 하고야 말았습니다. 모른 척 넘어가 주실 거죠?

저를 바라보고 계십니까?

눈이 어머니와 똑같죠, 허? 아니, 망각한지 오래이시려나. 본래 자신이 물려준 것은 쉽게 잊을 수 없는 법인데. 물론 유감이라 여기지 않습니다.

굳이 따지자면 역시 머리칼도 어머니를 닮는 편이 나았겠어요. 그렇죠? …… 동의하실 리 없나. 

형태는 제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탐사기지를 거쳐오며 지나친 그 흐릿한 인물들과 당신이 비슷한 처지라고 한들, 뭐.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는 의미였습니다.

실은 말이에요.

저는 자주 실패하고 번번이 괴로워하고, 한순간도 넘치게 기쁘지 않았습니다.

당신이 멀리 달아날 동안 적지 않은 시간을 차디찬 찌꺼기로 끊임없이 작아졌던 것 같습니다. 

어느덧 별 볼일 없는 것이 되었을 때, 당신은 내 이름도 잊고야 말았을 거라고.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역시나 별 유감은 못 되어주었지만.

헌데, 생각이 바뀌었어요.

당신은 늘 나였으니까. 결국.

희소식입니다.

저는 영원히 당신을 잊을 수 없겠습니다. 그 사실을 이제 인정하겠습니다.

당분간 이곳에 홀로 나타날 일은 없습니다.

생명의 우연성은 결국 우주의 물리적, 화학적 조건의 우연한 결합.

각 생명체의 존재 자체는 천문학적 우연의 결과.

그저 젊은 나무를 지켜보는 과정이라 생각해주세요. 재미는 있을 겁니다.

그간 만나뵈어 즐거웠습니다. 점등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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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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