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키야야

Love Me Less

여름은 여전히 매섭도록 기운을 앗아간다.

drunkenness by 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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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속끼리 부딪히는 소리는 익숙하면서도 낯설었다. 가령 예를 들면 수갑과 귀걸이가 있다. 그리고 비슷하게는 자동차 열쇠 소리 정도. 테츠야는 하루 이틀 있었던 모임도 아닌데 특히 피곤하다고 느꼈다. 테츠야는 눈을 깜빡이며 원인을 짚어나가다가 순간 모든 생각을 놓았다. 일하는 중도 아닌데 괜히 신경을 곤두세울 필요는 없었다.

테츠야가 귓불을 매만지자 화려한 귀걸이가 손톱에 걸렸다. 테츠야의 취향이기도 한 귀걸이는 대학을 졸업한 이후 자주 착용하지 않아 금세 신경이 쓰이고 마는 것이었다. 옆에서 연락을 확인하던 이즈미도 따라 손을 뻗었다. 깔끔하게 정돈된 손톱이 테츠야의 귓불에 닿았다. 귀걸이가 이즈미의 손길을 따라 흔들렸다.

 

“불편해?”

“응? 아냐. 그냥 어색해서.”

“그게 불편하단 소리 아니니.”

 

후후 웃은 이즈미는 손을 거두며 불편하면 빼도 된다고 테츠야에게 언질을 주었다. 테츠야는 고개를 절레 젓고는 손을 내렸다. 이즈미는 흔들리는 귀걸이에 한 번, 사선으로 내려앉은 테츠야의 눈동자에 한 번, 소매 아래서 이따금씩 빛을 발하는 커프스에 한 번 시선을 흘리고 거두었다. 누구의 안목인지 참 잘 어울렸다.

 

“유우, 부모님에게만 연락하지 말고 우리한테도 연락 좀 하렴. 에이지가 서운해 하더라. 나도 그래.”

“에이지 형이? 으응…. 그럴게.”

“연락한 지 얼마 안 됐다느니, 엄살이라느니 그런 생각하고 있지. 어쩌겠니. 에이지는 특히 유우를 아끼니까. …저번에도 오랜만에 연락이 와서 반가웠는데 가구 얘기부터 했다느니….”

 

이어지는 이즈미의 잔소리에 테츠야는 무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테츠야가 자신의 말에 집중하지 않고 있다는 걸 알아챈 이즈미는 테츠야를 가볍게 타박했다. 그는 이게 다 부모님이 오냐오냐 기른 탓이라며 속으로 질책했다. 자신의 모습은 생각도 못하는 실로 뻔뻔한 자세였다. 맨션 앞에서 자동차가 매끄럽게 멈추자 이즈미는 테츠야를 향해 두어 마디를 더했다.

 

“들어가. 연락 자주하고.”

“으응.”

“같이 사는 사람에게도 안부 전해주렴.”

“….”

“어머?”

“응.”

 

이즈미는 창 밖으로 손을 뻗어 격려하듯 테츠야의 팔을 두드렸다. 테츠야는 손을 흔들어 인사하고는 운전석에 앉은 기사에게도 가볍게 목례를 했다. 테츠야의 목례를 받은 기사가 천천히 출발하자 테츠야도 느릿하게 발걸음을 떼었다. 손에 든 종이가방이 바스락거리며 흔들렸다. 아직 밤이 되기에는 한창이었다.

 

아오키는 식탁에 노란색의 종이가방을 내려놓자마자 코즈키에게 안부를 물었다. 저녁은 먹었어요? 꺼내는 상자에는 아마 만주가 들었으리라, 유명 상표가 붙은 종이가방을 흘기며 짐작한 코즈키는 느긋한 발걸음으로 다가왔다. 만주 좋아해요? 코즈키는 싱긋 미소 지었다.

아오키는 만주를 작은 접시에 하나씩 나눠담고는 상자를 다시 닫아 냉장고로 향했다. 길게 늘어진 귀걸이가 아오키의 걸음을 따라 흔들렸다. 코즈키는 아오키를 바라보다가 접시 두 개를 들고 거실로 향했다. 제 몫의 머그컵을 들고 따라온 아오키는 컵을 탁상에 내려놓기 무섭게 재킷을 벗어 소파에 걸쳐두었다. 소매에서 푸른 커프스가 빛났다.

가족 행사에 참여하는 아오키는 늘 화려한 차림이었다. 아오키가 미리 알려준 가족 행사 나흘 전에는 늘 정장과 액세서리가 배송되었고, 아오키는 그날에서야 처음 옷을 보는 듯 짧은 감탄사를 내었다. 그런 아오키의 모습이나, 매번 달라지는 스타일을 보면 늘 화려하게 그를 감싸는 정장이나 액세서리들은 아오키의 취향이 아닌 듯 했다.

만주를 작게 잘라 한 입 먹은 아오키는 폭삭 소리가 나도록 소파에 기대었다. 한참을 우물거리다 삼켜낸 아오키는 길게 숨을 골랐다. 마치 업무를 다 쳐내고 술이라도 마시는 듯한 모양새였다. 코즈키도 만주를 우물거리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앗. 여기 팥 앙금(漉し餡) 맛있네.

 

“오늘 잘 지냈어요?”

“그럼요. 아침 샌드위치를 나눠 먹어줄 사람은 없었지만요.”

 

아오키는 개인적으로 약속이 있어 집을 비우게 되면 늘 다녀와서 안부를 물었다. 코즈키로서는 밤을 넘기면서까지 안 본 것도 아닌데 참 성실한 사람(まじめな人)이다, 싶었지만 대답은 착실하게 할 뿐이었다. 심지어 오늘은 아침에 조깅을 나가는 자신과 마주쳤음에도 어김없이 안부를 묻는 것에 코즈키는 그만 아오키답다고 생각했다.

아오키는 코즈키의 대답을 웃어 넘겼다. 아오키는 스스로가 코즈키에게 익숙해진 것을 느꼈다. 사람이 지나치게 스스럼없게 구는 것도 이런 장점이 있구나. 아오키는 여상히 생각하며 만주를 한 입 더 먹었다.

느긋하게 접시를 비우며 밀린 대화를 나누던 아오키가 피로를 이기지 못하고 시계를 보았다. 오후 10시. 애초에 집에 느즈막히 도착한 탓에 별 대화를 하지 않았음에도 금세 밤이 깊었다. 자연스럽게 자리를 파한 둘은 저녁인사를 마지막으로 각자의 방으로 향했다. 아오키는 재킷을 팔에 걸친 채로 느릿하게 방으로 향했다.

아오키는 옷을 의류관리기에 넣고 화장실로 향했다. 거울 속에 비치는 눈가가 오늘따라 특히 거뭇했다. 아오키는 이런 얼굴을 마주하고 잘도 대화를 하는구나, 하는 생각을 고개를 애써 저으며 잠과 함께 떨쳐냈다. 이 상태라면 샤워를 끝마치기도 전에 잠에 들 것만 같았다.

아오키는 마른 수건을 소파 등받이에 걸어두고 앉았다. 드라이기로 말린 덕에 머리에서 떨어지는 물은 없지만 방 전반이 나무나 천으로 꾸며져 있기에 대비해서 나쁠 것은 없었다. 아오키는 소파에 몸을 기댄 채로 협탁에 세워져 있던 책을 들었다.

법치주의 국가에서 피해자에게 만족스러운 처벌은 존재할 수 없다. 교도소라는 글자가 아오키의 손아래에서 쓸려 내려갔다. 아오키는 눅눅한 감상에 빠져들었다. 몸이 피로하니 비생산적인 생각이 신경을 갉아먹었다.

 

아오키는 수갑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다른 사람의 흔적이 잔뜩 묻은 수갑은 제 손 안에서 새로운 기록을 쌓아가고 있었다. 수갑의 동그란 창 너머로 오마모리가 돌아갔다. 보라색 종이와 주황색 매듭. 동그랗게 모양이 잡힌 매듭은 무한대를 떠올리게 했다. 닮았네.

어떤 매듭은 연결의 의미가 있다고 한다. 오마모리에 쓰이는 매듭도 무언가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일까. 이에 대해 들어본 적은 없지만 아오키는 적어도 수갑은 연결의 의미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아오키는 그대로 손을 내려 수갑을 제 손목에 대어보았다. 역시 연결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따지자면 단절이겠지.

 

“뭐야, 범죄자 지망생이야?”

“그런 거 아닙니다.”

 

그 순간 조수석의 문이 열리고 아카사키가 고개를 디밀었다. 장난기 어린 말은 덤이었다. 아오키는 수갑을 손목에서 떼어내 외근혁대에 걸었다. 아오키의 덤덤한 대꾸에 호방하게 웃은 아카사키는 안전벨트를 매며 말을 이었다.

 

“뭐, 네가 범죄자가 된다면 내 손으로 친히 잡아줄게. 그간의 정을 봐서 구치소에서 험한 꼴 당하지 않게 편의도 봐주고 말이야.”

“…그간의 정을 봐서 범죄자가 되기 전에 막아주세요.”

 

아오키는 그 말을 끝으로 시동을 걸었고, 아오키의 대꾸를 들은 아카사키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아오키를 바라보다가 운전석을 두드렸다. 운전하는 사람의 어깨를 두드릴 수 없다는 생각에서 우러나온 행동이었겠지만 어꺠를 두드리나, 좌석을 두드리나 똑같이 흔들리는 아오키로서는 그저 손을 거두어줬으면 했다.

차창을 닫고 있음에도 경광등의 사이렌 소리가 요란했다. 심지어 자신은 운전석임에도 귀가 먹먹하게 잠겨들었다. 경광등을 켜기 전부터 들리던 매미 소리가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아오키는 곁눈질로 아카사키를 살폈고, 타이밍 좋게 자신을 바라보는 아카사키와 눈이 마주쳤다.

 

“지금까지 봐왔던 너를 보면 내가 너한테 수갑을 채울 일은 없을 것 같다.”

 

아오키는 순간적으로 아카사키를 향해 고개를 돌렸고, 아카사키는 전방주시라며 타박을 했다. 아오키가 다시 의식적으로 정면을 바라보자 아카사키는 웃음기가 섞인 목소리로 그래봐야 5개월은 봤나, 하며 말을 이었다. 아오키는 들리지도 않는 매미소리에 짓눌리는 기분이 들었다.

 

테츠야는 여느 때와 같이 2실에 책을 들고 들어왔다. 다른 점이 있다면 모든 방문이 닫혀있다 정도일까. 가만히만 있어도 기운을 앗아가는 후덥지근한 여름 공기 탓에 테츠야는 그 좋아하는 정원을 뒤로한 채 에어컨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기껏 가져온 책을 펼치지도 않고 다다미 위에 가만히 누워있자 에어컨 바람이 텁텁한 공기를 밀어내는 것이 느껴졌다.

공기는 한 김 식었어도 장지문을 뚫고 들어오는 매미소리는 여전했다. 부러 움직이기 싫어 바닥에서 구르다가 비척비척 몸을 일으켰다. 테츠야는 장식장의 유리문을 열어 구석에 손을 집어넣었다. 손바닥으로 도자기 뒤를 대충 더듬자 손가락에 MP3가 걸렸다.

바닥에 앉아 주머니에 들어있던 이어폰을 꺼내 MP3에 꽂는 순간 측문 너머에서 말소리가 들렸다. 1실과 연결된 문이었다. 평소라면 무시하고 읽던 책이나 마저 읽었을 터였지만, 들려오는 목소리가 너무나도 익숙하면서 지금 들리기에는 또 의외인 목소리라 테츠야는 무릎걸음으로 측문을 향했다. 1실에서는 아버지가 누군가와 대화를 하고 있었다.

테츠야는 이어폰을 다시 뽑아 교복 주머니에 쑤셔 넣고는 측문을 향해 손을 뻗었다. 아버지도 자신처럼 이르게 일정을 끝마치고 돌아온 걸까, 하는 기대감마저 들었다. 그러나 테츠야는 측문에 닿기도 전에 움직임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마약이라니요.”

 

테츠야는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집안이 조용했던 이유, 자신이 측문으로 들어왔음에도 사용인을 단 한 명도 마주칠 수 없었던 이유를. 테츠야는 자신이 뻗었던 손을 떨어뜨리고 있다는 사실조차 알아차리지 못했다. 마른침이 목구멍을 긁으며 내려갔다.

 

“교토에 마약은 없습니다.”

“저희도 의원님 이름에 먹칠할 이유는 없지요.”

“…일본이 마약에서 자유로워지면 참 좋았을 텐데요.”

“….”

“….”

“하하, 이건 저희의 작은 마음입니다.”

“공직자가 되어서 이런 걸 받을 수는 없습니다. 마음만 받겠습니다.”

“그럼 다음에 식사나 같이 하시지요.”

“다음에 뵙겠습니다.”

 

나무와 나무가 부드럽게 미끄러지는 소리, 요란스레 짝을 찾는 매미의 울음소리, 바람에 흔들리는 문의 소음, 잘그락거리며 부딪히는 금속의 침음, 조용하게 깔리는 에어컨의 진동, 아버지의 한숨, 그 위로 다시 겹겹이 쌓이는 매미의 비명. 고쳐 쥔 MP3의 버튼이 손바닥을 간지럽혔다.

테츠야는 아버지가 집을 나선 이후 사용인들이 다시 돌아오기 전에 들어왔던 쪽문으로 급하게 집을 나섰다. 방 안에 던져둔 가방도, 미처 끄지 못한 에어컨도, 여전히 다다미 위에 너부러진 책도 머릿속에서 아오키를 불러댔지만 정작 테츠야 자신은 아오키를 외면하고 있었다.

정신없이 뛰어 도착한 공원은 아직 하교도 퇴근도 맞이하지 못해 한산했다. 테츠야는 사이좋게 자리를 지키고 있는 그네에 걸터앉았다. 체인이 맞물리는 소리가 소름끼쳤다. 평소라면 머리에 가득 차는 소음이 불쾌했을 터였지만, 지금은 잡생각을 지워준 것에 감사할 따름이었다. 손에 닿는 열기가 너무나도 뜨거워 테츠야는 오기로 손에 힘을 주고 버텼다.

테츠야는 초등학교 5학년 즈음부터 부모님이 청렴결백하지는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큰 형이랑 같이 누워 신문을 읽을 때나, 누나에게 기대 뉴스를 들을 때, 작은 형 손을 잡고 아버지 서재에 몰래 숨어들어갔을 때 만나는 한 문장 한 문장이 아오키라는 이름을 의심하게 했다. 테츠야는 언젠가부터 문장에서 눈을 떼고 형제들을 관찰하는 시간이 들었다.

테츠야는 그렇게 아오키를 인정했고 받아들였다. 형제들의 시선 속에서 자신만의 눈을 찾아나갔다. 아오키를 의심하면서도 받아들일 수 있었던 이유는 아오키가 자신에게 보여주었던 상냥함 덕이었다. 테츠야는 아오키가 청렴결백하지는 못할지라도 자신의 비윤리성을 마주하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그래, 가족이라서 그들을 믿었다.

아직 해가 저물지 않아 푸른 하늘이 보였다. 구름 한 점 없이 푸르고 높은 하늘 아래 싱그러운 녹빛이 일었다. 테츠야는 아오키를 놓을 수 없었다. 아오키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이런 마음가짐으로도 하늘을 떳떳하게 마주할 수 있는 자신이 참 뻔뻔하다고 생각했다.

테츠야가 정문을 지나자, 쟁반을 들고 마루를 지나던 고바 씨가 테츠야를 반겼다. 테츠야는 희미하게 웃으며 목례를 했다. 문득 카나메 씨의 마지막 한 마디가 떠올랐다. 너는 네 아비랑 눈이 똑같구나. 테츠야는 6년이 지난 그 날에서야 카나메 씨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아오키는 차오르는 녹색 게이지를 바라보았다. 퇴원하자마자 산 USB는 대학생 때부터 쓰던 것과는 다르게 3분도 채 되지 않는 음성 파일 정도는 눈 깜짝할 새에 처리했다. 아오키는 구라에 조 건의 내용을 정리해 인쇄한 후 컴퓨터를 껐다. 복직 처리가 되지 않은 한동안은 휴식이었다.

아오키는 책상에 엎드렸다. 등허리가 당겼다. 병원에서 들고 돌아와 그대로 꺼내두기만 했던 책들이 자신처럼 굽은 등을 보이고 있었다. 삶을 위한 죽음의 미학, 교도소의 정원사, 감옥이란 무엇인가. 세 명이서 짜기라도 한 건지 하나같이 예사롭지 않은 제목들이었다.

아오키는 책 세 권을 한 번에 챙겨들고 책장으로 향했다. 적당히 빈 칸의 책을 한손으로 밀면서 세 권을 한 번에 꽂았다. 사이즈가 다소 들쭉날쭉했지만 그런대로 봐줄만 했다. 아오키는 문을 닫았다. 서재에 들어가기 전 거실 창을 열어두었더니 커튼 사이로 바람을 타고 매미 소리가 들어왔다. 여름은 여전히 매섭도록 기운을 앗아간다.

텔레비전 아래의 서랍 위에는 시계와 가족사진을 제외하고는 식탁보 용도로 샀지만 사이즈가 맞지 않아 깔아둔 장식천이 전부였다. 아오키는 소파에 누웠다. 사진 속 아버지와 눈이 마주쳤다. 이제는 더 이상 배신감이니 분노니 하는 거창한 잔상은 들지 않았다. 지친 탓일까. 아오키는 깊은 숨을 내쉬었다.

적어도 아버지를 이해하기 때문에 미워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아카사키 씨조차도 이해하지 못한 자신이 아버지를 이해할 수 있을 리 없다. 아오키는 아카사키의 퇴직 소식을 듣고 그를 동정하는 한편 마음 깊은 곳에서는 그를 거부했다. 둔탁한 소리가 들렸다.

꿈을 꾸었다. 내용은 기억나지 않았다. 그저 밤의 서늘한 바람이 자신을 깨웠던 것만 알아챈 아오키는 미적거리며 일어나 창문을 닫았다. 하늘은 어느새 달을 내걸고 있었다. 아오키는 가족사진이 든 작은 액자를 챙겨 침실로 향했다. 저녁을 먹을 생각은 들지 않았다.

 

책을 물끄러미 바라본 아오키는 소파와 다리 사이에 대충 끼워두고 협탁에 놓인 가족사진을 들었다. 오래도록 볕이 잘 드는 곳에 두었던 탓일까, 액자 모서리의 빛이 바랬다. 아오키는 사진을 한동안 바라보다가 액자를 뒤집어 뒷판을 분리했다. 오래된 돔보가 뻑뻑했다. 납작하게 눌린 노란 접착메모지가 뒷판을 따라 올라왔다가 제자리를 찾아 가라앉았다.

손길에 닳아 둥글어진 모서리, 납작하게 눌렸지만 지워지지는 않은 구겨진 흔적, 멋대로 휘갈겨 날림이 있는 어리숙한 글씨체. MP3는 고장난지 오래건만 종이는 10년이 다 되어가도록 모서리가 닳을지언정 찢어지지는 않았다. 종이도 인간도 생각보다 질긴 구석이 있었다. 아오키는 입속말로 문구를 따라 읽고는 액자를 다시 조립했다. 언젠가 내가 …내리라. 부딪히는 나무의 소리는 언젠가의 문소리를 닮았다.

아오키는 액자 옆에 놓여있던 수첩을 들었다. 내일이면 다시 해가 뜨고 모레면 다시 사건이 우리를 맞을 것이었다. 아오키는 가름끈이 끼워진 페이지를 펼쳤다. 수갑 교체 신청하기. 일상적으로 범죄를 마주하는 사람은 언제나 대비되어 있어야 했다.

아오키는 어쩌면 조대 시절 함께 했던 수갑이 돌아올지도 모르겠다는 기대를 품었다. 수많은 소모품 중 하나에 불과한데 무언가 의미라도 갖고 있는 것일까. 아오키는 졸음이 가득한 눈을 꿈뻑이며 수첩에 작은 동그라미 두 개를 그렸다. 흔들리는 선으로 동그라미 두 개를 연결하며 가벼운 숨을 내쉬었다. 펜촉이 온점을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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