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의 P와 67%의 S (上)
아오키는 게시판을 지나쳤다. 평소 같았으면 저녁은 뭘 해먹을지, 다큐멘터리는 어떤 시리즈를 볼 지를 고민하면서 게시판 앞에서 한참을 서성거렸을 테지만, 오늘만큼은 그 아오키마저도 지쳐서 주변을 둘러볼 여유가 없었다. 연장 근무가 이어진 탓에 캐비닛 안에 있던 옷으로만 생활한 지 벌써 110시간 남짓이 되어간다. 범인이 잡힌 후 협력 기관에 감사인사까지 다 돌리고 나서야 겨우 퇴근한 참이었다.
손가락 마디 가깝게 닿는 점자는 오늘도 굳건히 제 할 일을 했다. 반면 닷새 만에 돌아온 현관은 묵묵부답이었다. 아오키는 손을 들어 센서 아래를 휘저었지만 여전히 현관 등은 켜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센서가 나갔나 봐요.”
다행이랄지 그림자 하나 없는 햇빛이 집을 밝히고 있었다. 아오키는 집의 방향에 감사하며 거실로 발을 들였다. 그간 솜이 잠시 부풀어 오르기라도 한 건지 발아래에 닿는 밑창이 폭삭 소리를 내었다. 지친 손길로 구두를 벗은 코즈키가 따라 들어왔다.
“점검한 지 오래 됐나요?”
“오래됐다면 오래된 정도인 것 같아요.”
“사람 불러야겠네요, 그럼.”
“…. 내일 부를까요?”
“난 상관없어요.”
아오키는 고장 난 것을 바로바로 고치는 스타일이었지만 오늘만큼은 아주 작은 게으름을 부리기로 했다. 서재에 가방을 두고 나온 아오키는 어깨를 늘어뜨리며 냉장고를 열었다. 한여름도 아닌데 물이 고팠다.
“센서만 고장 난 게 아니었나본데요.”
언제 온 건지 등 뒤에서 넘어오는 말에 아오키는 냉동실 문도 열었다. 냉기 하나 없이 처참한 몰골이기는 매한가지였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아오키는 혹시나 싶어서 부엌의 불을 켰지만 혹시가 역시라고 불이 들어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코즈키는 아오키가 하는 양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현관으로 가 두꺼비집을 열었다. 전체 스위치가 보란 듯이 내려가 있었다. 코즈키는 스위치를 가볍게 밀어올리고 중문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머리 위에서 미백색의 빛이 쏟아져 내렸다.
냉장고의 작동 음이 들리자 아오키는 온도 조절기를 조작해 전원을 내렸다. 고개를 돌리자 중문 너머로 빛이 새어 나오는 게 보였다. 다행히도 고장 난 것 하나 없이 전력만 차단된 모양이었다. 머리와 어깨 위로 피로가 쏟아져 내렸다.
“저녁은 나가서 먹는 게 어떨까요?”
현관 등을 몇 번 반복해서 켜 본 뒤 다시 부엌으로 다가오던 코즈키는 그럴까요, 하고 호응하고는 아오키의 뒤에 서서 함께 냉장고 속을 훑었다. 애매하게 남아 그대로 보관해둔 냉동식품이 흐물흐물하게 녹아있었다.
“다 버려야겠네요. 내가 냉동실을 맡을게요.”
“네. 남은 게 별로 없는 게 참 다행이네요.”
아오키의 말처럼 냉장실은 물과 음료를 제외하고는 한 칸이 간신히 채워져 있었다. 그것마저도 절반은 계란이 3분지 1도 차지 않은 보관함이었다. 장보러가지도 못 할 만큼 바빴던 게 이렇게 돌아올 줄은 몰랐다. 아오키는 찬장에 고이 접혀있던 파란색 봉투를 꺼냈다. 오늘만큼은 쓰레기를 태워버릴 수 있는 능력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루한 반복 작업이 끝나고 나니 어느새 해가 천장을 넘어가고 있었다. 시계를 본 아오키는 쓰레기를 한 데 정리해 묶어 중문 앞에 가져다 두었다. 식기세척기의 전자음이 짧게 울렸다. 빈 접시들을 넣은 코즈키가 익숙하게 버튼을 조작했다.
아오키는 의자에 앉아 식탁에 턱을 괴었다. 식탁보가 아오키의 팔꿈치에 밀려 식탁 한 구석으로 도망갔다. 코즈키는 아오키의 맞은편에 앉아 작은 생수병 하나를 따서 물을 마시고 있었다. 냉장고에서 유일하게 살릴 수 있었던 생수 세 병 중 하나였다. 아오키는 식사를 하고 돌아오는 길에 간단하게라도 장을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두 블록 앞에 있는 정식집 어때요?”
“두 블록…. 아, 신카이야?”
“네, 거기. 전골도 제법 괜찮았어요.”
“아오키 씨가 추천하는 데는 모두 평균 이상이니까요.”
큰 고민 없이 동의를 표한 코즈키는 웃음기가 가득 묻어나는 말씨로 답했다. 아오키는 제 얼굴에 금칠이라고 생각했지만 제가 생각해도 틀린 말은 아니었기에 부러 속이 빈 겸양을 표하지는 않았다. 아오키가 별 말이 없이 코즈키를 물끄러미 바라보자, 코즈키는 박수를 한 번 쳐 주의를 돌렸다.
“더 늦기 전에 출발할까요?”
아오키는 중문 앞에 기대어 있는 봉투를 집어 들었다. 백색의 비닐봉투는 가득 차지 않아 공기가 빠지는 소리를 내었다. 코즈키가 잡은 문 사이로 빠져나온 아오키는 남은 속으로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눌렀다. 7층, 엘리베이터가 도착하기에는 조금 걸릴 듯싶었다.
외투 주머니에 있던 물티슈를 꺼내 손을 닦은 아오키는 작은 봉투에 다 쓴 물티슈를 집어넣었다. 그러고 보니 두 명 다 며칠 동안 캐비닛 안에 잠들어 있던 정장 그대로였다. 아오키는 게으름을 부리는 머리를 애써 깨우며 걸음을 옮겼다.
점원의 안내를 받아 앉은 자리는 실내 연못이 보이는 자리였다. 코즈키는 자리를 한 번 둘러보더니 아오키를 바라보았고, 아오키는 모른 척 그 시선을 피했다. 메뉴를 확인하던 아오키는 결정한 듯 메뉴를 덮어 테이블 한 쪽에 내려두었고, 찬찬히 훑어보던 코즈키도 따라 덮어 내려놓았다. 아오키는 식전 차를 한 모금 삼켰다. 손바닥도 채우지 못하는 작은 잔에 황록색의 찻물이 찰랑거렸다.
“퇴근하고 첫 끼가 외식이 될 줄은 몰랐네요.”
“냉장고가 멀쩡했어도 요리해먹기는 어려웠을 것 같은데요.”
코즈키는 텅 비어 황량함마저 느껴지던 냉장고를 떠올리기라도 하는지 눈동자가 찬찬히 굴렀다. 아오키는 멋쩍음을 애써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고, 그 모습을 바라본 코즈키가 입꼬리에 웃음을 띤 채로 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장을 보지 않은 건 자신도 매한가지였으니 무어라 말할 처지가 아니기도 했다.
조금은 피로에 잡아먹힌 채로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음식이 테이블에 놓였다. 음식은 보이는 만큼 맛도 정갈하고 따뜻했다. 아오키는 자신도 모르게 밥을 한 술 뜨자마자 몇 번 씹지도 않고 숨을 길게 내쉬었다.
작년 가을에는 밤 갸또, 올해는 밤 페이스트를 얹은 잣 앙금 찹쌀떡. 여기 점주가 제법 밤을 좋아하나보다, 하는 시답잖은 생각이 들었다. 아오키 또한 좋아하는 축에 속했으니 큰 불만은 없었다. 그저 지난해의 디저트와 비교하여 순위나 매기고 있을 뿐이었다.
“집에 가는 길에 간단하게 장보고 들어가요.”
“음, 그래요. 쌀은 남아있던가요?”
“냉장보관이 아니어서요.”
코즈키는 아오키의 말에 눈썹을 까딱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오키 씨의 농담을 다 듣네, 하는 반짝 사라지는 감상이 들었다. 마지막 남은 한 모금까지 다 비운 둘은 옷매무새를 정돈하며 일어섰다. 아이러니하게도 밥을 먹자 잠기운이 가셨다.
아오키는 냉장고의 전원을 켜자마자 생수를 한 병 꺼내 물을 끓였다. 열이 오르는 커피포트를 뒤로하고 아오키는 바쁜 걸음으로 침실로 향했다. 실내복으로 갈아입고 나온 아오키는 물이 다 끓자마자 찻주전자에 옮겨 담고 느긋하게 찻잎과 찻잔을 꺼냈다. 환기가 돌던 식기세척기의 작동 음이 꺼졌다. 집에서 지낼 때에는 도구며 절차며 하나하나 다 갖춰 먹었지만 지금은 약식으로도 충분히 차고 넘쳤다. 증기를 타고 흘러 다니는 향이 은은하게 얼굴을 적셨다.
아오키는 익숙하게 코즈키의 몫까지 쟁반에 담아 거실로 향했다. 아쉽게도 곁들일만한 간식거리는 없었지만, 밥 먹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았으니 이 정도로 만족하기로 했다. 아오키는 쟁반을 탁상 위에 내려놓고 코즈키에게 먼저 보고 있으라 이른 뒤 서재로 향했다. 아오키는 5분도 채 되지 않아 다시 거실로 나왔고, 아오키가 자리에 앉자마자 코즈키는 다큐멘터리를 틀었다.
다큐멘터리는 어중간하게 끊긴 내레이션으로 시작했다. 코즈키와 아오키는 지난주, 다큐멘터리를 보다가 급하게 나선 날을 동시에 떠올렸다. 둘의 얼굴에는 희미한 미소가 감돌았고, 코즈키는 리모컨을 조작해 재생 위치를 조금 앞으로 돌렸다.
다큐멘터리는 21년 전 발생한 고등학생 7인의 단체 실종사건을 다루고 있었다. 아오키는 하면에 뜨는 실종자들의 정보를 보면서 그들의 현재 나이를 가늠했다. 큰 형의 나이 정도…. 아오키는 부러 찻잔을 들어 목을 축였다. 쌉싸래하고 구수한 차가 입을 덥혔다.
“저 수사를 담당했던 경찰은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요?”
“…음? 별 일이네요. 그런 말을 다 하고.”
“그러게요. 잠이 깼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좀 피곤한 걸까요.”
“뭐, 굳이 답을 찾아보자면…. 양심적인 경찰이면 죄책감을 느끼면서 진즉에 퇴직했겠지만…. 글쎄요, 별 생각 없이 살고 있을 수도 있겠죠.”
“그렇겠네요.”
21년 전이면 수사 기법이나 과학 기술도 지금보다 덜 발전된 시대였으니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수사가 제대로 이루어진 것이 맞을까 하는 의구심이 피어올랐다. 다큐멘터리는 그런 아오키의 고민을 두고 끝을 향해 달려갔다.
코즈키와 아오키의 찻잔이 끝을 보일 무렵, 다큐멘터리도 끝을 보이고 있었다. 내레이션은 경각심을 일깨우는 말과 교훈적인 말을 아름답게 섞어가며 시청자를 독려하고 있었다. 그러나 경찰의 입장으로는 조금 다른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아오키는 쟁반에 다시 찻잔 두 개를 담아 싱크대로 향했다. 아직 4시도 채 안 된 시간. 오늘은 저녁을 먹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서재에 들어온 아오키는 책장 한 칸을 가득 채운 서류 상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경찰학교에 다닐 시절 다뤘던 미제 사건들이었다.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잡생각을 떨쳐낸 아오키는 컴퓨터 앞에 앉았다. 열린 가방 사이로 흘러나온 수첩을 완전히 꺼내어 키보드 옆에 펼쳐두었다. 내지가 갈피를 못 잡고 파락파락 소리를 내며 넘어갔다. 아오키는 다시 가름끈이 끼워진 페이지를 펼쳐 한쪽 면을 키보드로 눌렀다.
한 달은 족히 걸린 길었던 사건도 고작 열여섯 줄로 정리되었다. 문장 끝에서 깜빡이는 커서가 자신을 재촉하는 것만 같았다. 아오키는 키보드에서 손을 내렸다. 눈이 시큰거렸다. 언젠가 맞춰뒀던 블루라이트 차단 안경이 떠올랐다.
아오키는 파일을 저장한 후 책상 서랍을 뒤적거렸다. 분명 어떤 서랍에 넣어두긴 했는데 어느 서랍에 넣어두었는지는 용을 써도 기억나지 않았다. 아오키는 가볍게 혀를 차고 열린 서랍에 들어있던 약을 꺼내 주방으로 향했다. 아직 꺼지지 않은 모니터가 벽을 흐리게 밝혔다.
냉기가 도는 냉장고 속에는 오늘 산 찬거리 세 개와 계란, 그리고 물이 전부였다. 아오키는 미적거리는 몸짓으로 물을 꺼내 약을 넘겼다. 다시 서재로 돌아온 아오키는 모니터를 바라보다가 어깨를 으쓱이고는 컴퓨터를 껐다. 피곤한 머리로는 뭔가를 더 해도 잘 될 것 같지가 않았다.
아오키는 느지막한 걸음으로 침실로 향했다. 오후 5시. 평소라면 저녁 준비를 했을 터였지만 오늘만큼은 이른 밤을 맞이하고 싶었다. 방문에 먼저 오늘 저녁은 생략하겠다는 메모를 붙인 아오키는 간접조명만을 켜둔 채 욕실로 향했다. 거울 너머로 보이는 얼굴이 초췌했다. 푸석하게 말라 피로감을 호소하는 얼굴이 흐리게 흔들렸다. 역시 경찰은 오래할 일은 아니다.
빠르게 샤워를 마친 아오키는 머리를 닦던 수건을 목에 두른 채로 협탁으로 향했다. 다른 기종의 휴대전화 두 개가 나란히 충전되고 있었다. 33%와 67%. 아오키는 그 중 67%의 휴대전화를 들어 쌓인 알림을 확인했다. 아오키는 잠시 고민하다 작은 형에게 짧은 답장을 보내고 화면을 껐다. 쌓인 피로가 정신을 좀먹고 있었다.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