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키야야

枯山水

빛과 모래의 기억

drunkenness by 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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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I0cZukTFXNw?si=23chkYNVO6yKCEKi

정원은 자연의 함축이고서야 의미가 있다. 어머니의 신념에 따라 아오키 자택의 정원은 지극히 인위적인 자연으로 변모했다. 그 중에서도 테츠야의 흥미를 끌었던 것은 시로(白)정원이라 불렸던 모래정원이었다. 테츠야는 어릴 때부터 장지문을 열어두고 바람을 맞으며 정원을 즐겼다. 시로정원은 1실이라고 불렸던 응접실에서 가장 아름답게 보이는 정원이었는데, 테츠야는 센(淺)정원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시로정원을 보는 것을 가장 좋아했다. 그런 테츠야를 위해 아오키 부부는 기꺼이 2실을 비워주었고, 2실은 아오키 형제들의 아지트가 되었다.

고향집에는 매일 다른 그림자가 드리웠다. 나무의 푸른빛과 구름의 보드라운 흔적, 꽃의 쾌활함과 청명한 물빛이 가득한 곳이었다. 아오키는 정원이 만들어내는 일상을 사랑했고, 그 안에서 자랐다. 그 중에서도 가장 기대했던 것은 밤 정원의 그림자였다. 사람의 손길이 닿은 정원은 밤이 되면 빛을 받아 낯선 얼굴을 하곤 했다. 7살의 아오키는 큰 형의 품속에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오키가 유년기를 떠올렸을 때 가장 선명하게 떠오르는 기억이었다.

11시 30분은 정원사 카나메 씨가 시로정원을 정돈하는 시간이다. 아오키는 한 폭의 그림과도 같은 그 모습을 배경 삼아 책을 읽는 것을 좋아했는데, 어린 아이의 작은 행복을 알아차린 어른은 기꺼이 그 장단에 맞춰주었다. 한날은 아오키가 읽던 책을 덮고 카나메 씨가 정원을 정돈하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한 줄기를 완성한 카나메 씨는 아이의 열렬한 시선에 한 층 더 정갈한 몸짓으로 화답했다.

 

“카나메 아주머니. 이건 왜 매일 하는 거예요?”

 

카나메 씨가 조경용 나무 밀대를 한편에 세워두고 물을 마시자 테츠야가 말을 붙여왔다. 카나메 씨는 수건으로 얼굴을 닦고 정돈된 정원을 바라보았다. 바위를 중심으로 굽이쳐 흐르는 강과 계곡이 보였다. 사람의 마음에 자연을 심기 위함이지요. 카나메 씨는 전래 동화를 읽어주기라도 하듯 음률적으로 답했다. 테츠야는 그의 말을 잘 이해하지 못했는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름다운 자연을 가지고 싶기 때문에 하는 거예요.”

“그럼 왜 그 상태 그대로 두지 않아요?”

“우리가 갖고 싶은 자연은 말 그대로의 자연이 아니라 한 폭의 풍경이니까요.”

“그럼 지금 모습 그대로 풀로 굳히면 안 돼요?”

“좋은 생각이네요. 하지만 그 순간부터 자연이 아니게 된답니다.”

“왜요?”

“테츠 도련님은 자연을 무어라 생각하세요?”

“사람의 손이 닿지 않은 그대로요.”

 

카나메 씨는 테츠야가 읽다 덮은 책을 바라보았다. 나는 우주를 가꾼다. 이제 막 초등학교에 들어간 아이가 읽기에는 꽤나 거창한 책이었다. 카나메 씨는 저 아이가 아무리 영특하다 해도 책의 10분지 1도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라 생각하며 어떤 답을 해야 이 문답이 끝날지를 고심했다. 고용주의 아이에게까지 친절하기에는 날은 덥고 일은 고되었다.

 

“이 카나메 씨는 자연은 시간에 따라 변화하는 현상 그 자체라고 생각한답니다. 이 정도면 답이 되었을까요?”

 

테츠야는 카나메 씨의 말을 듣고 시선을 살짝 올려 카나메 씨와 눈을 맞추었다. 카나메 씨는 3년 전 테츠야를 처음 만난 날을 떠올렸다. 부친인 아오키 소이치로를 빼닮은 눈을 한 아이를 마주친 날을. 카나메 씨는 미소를 지으며 시로정원을 떠났다.

테츠야는 카나메 씨가 떠나는 걸음을 바라보았다. 7살이라는 나이는 어리지만 그리 어리지 않았다. 어른들은 종종 간과하는 사실. 테츠야는 다시 책을 펼쳐들었다. 정갈하게 찍힌 글씨 옆으로 살짝 번진 필기체가 보였다. 테츠야의 큰 형은 닥치는 대로 책을 읽는 테츠야를 위해 종종 이렇게 주석을 달아주었다. 테츠야는 콩닥거리는 마음을 책에 흠뻑 쏟아내었다.

 

아오키는 음악 위로 덧씌워지는 둔탁한 소리를 느꼈다. 이제 코즈키의 방이 될 손님방과는 조금 떨어진 곳에 있었는데도 소리가 넘어왔다. 아오키는 여지껏 의심할 일이 없었던 이 집의 방음을 가늠해보며 음악을 껐다. 어느새 30분이 지나있었다.

 

“도와드릴까요?”

 

방을 나선 아오키는 코즈키의 방을 지나가다 열린 방문을 보았다. 이것 때문이었을까. 아오키는 열린 방문과 눈싸움을 하다가 그 틈 사이로 보이는 색이 바랜 얼굴에 시선을 빼앗겼다. 방문 앞에서 뻗대던 자신이 들킨 것 같아 괜히 방문에 노크를 하고 코즈키에게 말을 붙였다.

 

“괜찮아요. 거의 다 했거든요.”

“…LP 수집하세요?”

 

아오키는 말을 뱉고 나서야 코즈키의 웃는 낯을 마주했다. 슬 휘어지는 눈매를 마주하자마자 목구멍에 차오르는 후회를 애써 모른 체 하며 입을 꾹 다물었다. 오사카 아저씨. 부친의 것인 게 분명해진 상냥한 얼굴을 바라보다가 공간이 부족하면 말하라고 언질을 주고는 걸음을 옮겼다.

아오키는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차를 탁상에 내려놓고 소파에 파묻히듯 앉았다. 읽으려고 들고 나온 책은 어쩐지 마음이 가지 않아 잔 옆에 같이 내려두고 눈을 감았다. 시로정원의 연못이 그리웠다. 아오키는 소파 위를 배회하던 손을 올려 눈 위를 덮었다.

 

아오키의 자택은 집보다 넓은 정원으로 유명했다. 본채와 별채를 다 합쳐도 정원보다 작았지만 아오키 부인은 그 모습을 기꺼워했다. 어린 테츠야는 정원이 아름다운 것은 알았지만 종류를 구분하지는 못했다. 정원을 배경삼아 노는 것은 즐거웠지만, 정원을 읽어본 적은 없었기 때문이리라, 가볍게 짐작할 뿐이었다.

시로정원은 센정원을 관리하던 후지미네 씨가 같이 관리하던 정원이었다. 테츠야가 4살을 바라볼 무렵 후지미네 부인이 아이를 낳으면서 후지미네 씨를 보조해줄 새로운 인력을 데려오게 되었는데, 그가 바로 카나메 씨였다. 요시다 부인의 추천을 받아 아오키 가에서 일하게 된 카나메 씨는 테츠야를 처음 본 순간 다시 도쿄로 돌아가고 싶었다.

카나메 씨는 계산적인 사람이었다. 남편의 죽음으로 알게 된 현실은 그를 계산적으로 만들기에 차고 넘쳤다. 그런 카나메 씨는 성실한 정원사로서 아오키 가에 녹아들었다. 작은 자연은 사람의 손을 필요로 했고 카나메 씨는 돈과 미래를 필요로 했다. 그뿐이었다.

테츠야는 시로정원을 좋아했다. 정확히는 시로정원을 한 폭의 그림처럼 배경으로 두고 노는 것을 좋아했다. 그 배경 속 작게 그려진 인물이 카나메 씨로 변한 이후 테츠야는 종종 책을 덮고 카나메 씨가 하는 양을 구경했다. 그린 듯한 부잣집 도련님이라고 카나메 씨는 생각했다.

후지미네 씨는 카나메 씨가 의외로 테츠야 군과 친하지 않은 것 같다고 생각했다. 한날은 테츠야 군이 작은 형이 선물로 준 파란색 풍경을 모든 어른들에게 자랑하고 다녔다. 제 나이 또래들처럼 신이 나 흥분을 주체하지 못하고 뛰어다니지는 않았지만, 평소보다 빠른 말씨로 테츠야 군이 기뻐하고 있음을 알아챘다. 테츠야 군은 마지막으로 카나메 씨에게 가서 풍경을 자랑했다. 해파리 같다는 감상도 덧붙였다. 후지미네 씨는 어쩐지 테츠야 군이 카나메 씨를 시험하는 것 같다고 느꼈다. 자신에게 자랑하던 모습과 크게 다름이 없었음에도.

카나메 씨는 테츠야 군에게 센정원에도 작은 바다가 있다고 알려주었다. 거리가 가까워 둘의 대화를 들은 후지미네 씨는 손을 흔들어 자신을 바라보는 테츠야 군에게 인사했다. 카나메 씨가 풍경을 조심스레 처마에 매다는 것이 보였다. 딸랑거리는 청명한 소리가 정원을 울렸다. 센정원의 수면이 청명한 소리를 따라 일렁였다.

 

취조실 바닥에 떨어뜨린 볼펜이 달그락 거리는 소리를 내었다. 적막한 취조실이 창에 푸르게 일렁였다. 지지부진하게 이어지는 심문에 아오키는 과격파의 대가리들을 쪼아댈 때가 더 편했다는 생각을 짓씹으며 볼펜을 주웠다. 눈앞의 피의자는 대략 30분 째 입을 열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아오키는 지루함에 움찔거리는 입술을 손으로 가리며 턱을 괴었다. 이런 일에는 인내심을 길러야 하는 것인지 체력을 길러야 하는 것인지 잠시 고민하며 눈썹을 까딱였다. 그런 아오키를 바라본 코즈키는 책상 위에 가지런히 겹쳐두었던 손을 들어 아오키의 어깨를 두드렸다.

 

“아오키 씨. 감식 상황 좀 확인하고 와주세요.”

“…네.”

 

상냥한 축객령이었다. 아오키는 재킷의 단추를 채우며 취조실을 나섰다. 철문이 무겁게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벽에 기대어 숨을 고르자 미뤄뒀던 지긋지긋함이 밀려왔다. 아오키는 안주머니에서 손목시계를 꺼내 시간을 확인하고는 머리를 벽에 기대었다. 심문을 시작한지 거진 한 시간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30도의 느긋한 움직임을 눈으로 확인하고서야 혹사당한 허리가 찌뿌둥하게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아오키는 저녁에 샤워하면서 시계를 빼고 아침에 출근 준비하면서 시계를 채우는 것이 오랜 습관 중 하나였다. 다시 말하면 그 외의 시간에는 시계를 거의 빼지 않았다. 그러나 수1로 이동을 한 후의 네 번째 심문을 거친 아오키는 취조실에 들어가기 전에는 시계를 빼기로 마음먹었다. 대단한 이유가 있는 행동은 아니었다. 그저 자신은 느긋하게 시간을 잡아먹는 취조에 능숙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을 뿐이다. 처음에는 먼저 취조실로 들어가던 코즈키도 지금에 와서는 아오키가 시계를 안주머니에 넣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취조실 문을 열었다.

코즈키는 사람을 보는 눈이 좋다. 눈치는 빠르지만 필요한 때가 아니면 눈치를 보지 않는 편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코즈키는 자신도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자신의 상태를 알아차리고 은근한 배려를 보일 때가 자주 있었다. 아오키는 코즈키의 말을 곱씹다가 감식과실로 걸음을 옮겼다. 처음 그의 배려를 받을 때만해도 취조실을 나와 허탈함에 몸부림쳤지만, 지금에서는 질리지도 않고 용의자와 마운트 싸움을 하는 그가 대단하면서도 징글징글하다고 느꼈다.

 

돌아온 아오키를 바라본 쿠로노는 아오키가 자리에 앉자 입꼬리를 끌어올려 미소를 지었다. 아오키는 목 언저리에서 들끓는 고까움을 애써 모른 체했다. 어디선가 본 적 있는 미소였다. 쿠로노는 아오키가 코즈키에게 건네는 더미용 서류를 따라 시선을 옮기는가 싶더니 다시 아오키를 바라보았다. 질척한 시선이 피부에 달라붙었다.

시선에 익숙하다고 해서 시선이 주는 거북함에도 익숙한 것은 아니었다. 따지자면 아오키는 그런 껄끄러운 감각을 흘려내는 데에는 서툰 편이었다. 다행이라고 한다면 일할 때의 아오키는 표정 변화가 그리 크지 않다는 것일까. 아오키는 곁눈질로 여느 때와 같은 코즈키의 모습을 확인하고 짧게 숨을 끊어 쉬었다. 목이 까끌거렸다.

 

“아오키 형사님. 형사님은 자연과 인간의 공통점이 뭐라고 생각하세요?”

 

품속에 넣어둔 시계가 잘그락거리며 흔들리는 소리가 들렸다. 날카롭게 울려야 했던 소리가 먹먹하게 먹혀들었다. 아오키는 떠올렸다. 센정원의 흔들리던 수면, 함께 일렁이던 시로정원의 수면 그 위로 보이는 카나메의 시선. 그의 보조개가 흐리게 점멸했다.

 

“형사님은 저를 이해하시죠?”

 

서류를 바라보던 코즈키가 느릿하게 고개를 들었다. 코즈키와 눈이 마주친 쿠로노는 당신이 아니라는 듯 눈썹을 까딱이더니 다시 아오키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형사님은 왜 경찰이 되겠다고 생각했어요? 형사님은 제 말을 알 거예요. 히죽거리는 낯이 눈앞에서 점멸했다. 아오키는 들고 있던 황색 파일을 덮어 책상 위에 내려두었다. 아오키의 행동이 스위치라도 된 것 마냥 쿠로노는 양 손을 책상 위로 올리고 몸을 당겼다. 이어지는 말은 사이비 종교에 빠진 광신도마냥 맹목적이면서도 환희에 차있어 어딘가 섬찟한 구석이 있었다. 초점 없는 눈이 코즈키에게로 향했다.

 

“거기 형사님은 세상이 종말을 맞이하는 모습을 본 적 있어요? 얼마 전에 제 손으로 세상을 끝내본 적이 있거든요, 어떨 것 같아요?”

“세상을 종말 시켰다고요.”

“네. 그 날은 일종의 스위치였어요.”

“그 날의 무엇이 스위치였습니까?”

“그 날이요. 그 날 자체가 스위치였어요.”

 

쿠로노는 지독스럽게도 과시적인 인물이었다. 그리고 창 너머의 인물들은 모두 한 가지 명제를 떠올렸다. 쿠로노가 범인이다. 같은 확신을 가진 아오키는 혀로 입을 축였다. 말장난 같은 문장에 웃음이 샐 것 같았다. 손등으로 볼을 가볍게 쓸어내리고는 입을 가리며 턱을 괴었다. 오늘따라 취조실의 조명이 눈이 부셨다.

 

아오키는 소파에 앉아 익숙한 몸짓으로 OTT의 다큐멘터리 카테고리를 눌렀다. 다운폴, 크라임 씬, 성난 지구, 터닝 포인트. 사람은 시간에 따라 변화한다. 누군가는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고들 하지만, 그것도 다 변함의 범주에서 차이가 날 뿐 그들도 시간에 따라 사람이 변화하는 것에는 이견이 없다. 인생에 굴곡이 없는 사람조차도 날 때부터 갈 때까지 동일한 사람일 수는 없다. 아오키는 리모컨을 내려놓았다.

 

“코즈키 씨는 사람이 변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아오키는 마시던 차를 내려놓고 혀로 입술을 축였다. 고개를 숙인 탓에 아오키의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예의 무표정을 떠올리기는 어렵지 않았다. 코즈키는 소파에 기대며 아오키를 바라보았다. 그는 감정을 알 수 없는 흐릿한 낯을 하고 있었다. 아오키는 포커페이스에 능숙한 사람이기 보다는 감정 표현이 적은 축에 속했다. 다시 말하면 감이 좋은 사람은 그의 감정을 알아채기 어렵지 않다. 지금의 아오키는 생각이 많거나, 정말 단순한 호기심이거나.

 

“…변할 수 있죠. 아오키 씨는 변할 수 없다고 생각해요?”

“아뇨. 저도 변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갑작스럽네요. 뭐 재밌는 거라도 있었어요?”

“아뇨, 그냥…. 사람은 어쩌다 변하는 걸까, 싶어서요.”

 

낮은 탁상에 놓인 머그컵에서 김이 올랐다. 아오키는 한 여름에도 저렇게 따뜻한 차를 마셨다. 코즈키는 걷었던 소매를 끌어내리며 반문했다. 늘 눈을 맞추고 대화하던 아오키는 답지 않게 화면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코즈키가 소파에 앉자 아오키는 고개를 돌려 코즈키를 바라보았다. 은근하게 묻어나오는 억양이 이제는 익숙했다.

 

“뭐, 변할 수 있다고는 해도 그 사람의 뿌리가 변하는 일은 잘 없다고 생각해요.”

“핵심…. 그럼 곁가지에 해당하는 것들은요?”

“어떻게 변하냐는 뜻?”

“뭐, 네. 뭘 겪어야 변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건 굳이 거창한 일이 아니어도 될 거라고 생각해요. 아오키 씨도 그렇지 않아요? 왜, 그렇잖아요.”

 

코즈키는 아오키의 빈 손목을 고갯짓으로 가리켰다. 아오키는 코즈키의 말을 듣고 입술을 삐죽였다. 집에서의 아오키는 긴장이 풀어진 탓인지 종종 채 다 정제되지 않은 표현을 할 때가 있었다. 생각이 많은 건지, 자신의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는 건지, 아오키의 표현은 그 수가 적은만큼 모호한 구석이 있었다.

목 안에서 응어리진 소리를 내던 아오키는 낮은 탁상에 놓인 자신의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 필름을 붙여둔 액정 위로 겹겹이 쌓인 손자국이 보였다. 아오키는 소맷단을 끌어당겨 액정을 닦았다. 손자국은 소매를 따라 흔적을 남기며 뭉그러졌다. 아오키는 소파에 몸을 뉘인 채 고개를 젖혔다. 조명의 잔상이 눈꺼풀 위로 푸르게 남았다.

 

코즈키에게 잘 자라는 인사를 남긴 아오키는 방에 들어와 소파에 앉았다. 모형 정원을 가리고 있는 시계를 손으로 밀어냈더니 한동안 정리해주지 않아 흐트러진 모래알이 보였다. 11시 23분. 협탁에 놓인 탁상시계는 희미하게 초침 소리를 내었다. 아오키는 소파에 몸을 맡긴 채 눈을 감았다. 초침 소리는 방 안을 느리게 유영했다.

아오키는 느긋하게 눈을 깜빡였다. 사람의 기억은 생각보다 말랑하다. 중학생 때는 아버지 서재에 있는 책을 몰래 읽으면서 기억에 형체가 있다면 지점토와 크게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사람은 살아가면서 얼마나 많은 기억들을 쌓아가게 될까. 아오키는 몸을 소파에 묻으며 고개를 기대었다. 기억이 남기는 잔상은 제법 강력하다.

 

“테츠야 군. 사람은 자연과 같아요. …기억나죠?”

“시간에 따라….”

“그래요. 근데 후지산 본 적 있어요?”

“네. 으음…. 3번 정도?”

“그럼 세 번 다 달랐어요? 사람도 마찬가지예요.”

 

크게 보면 변한 거 잘 모르겠거든. 그래요. 사람은 참 안 변해요. 테츠야는 문득 후지미네 씨를 떠올렸다. 후지미네 씨의 일이 늘어나겠다는 생각을 한 손으로 대충 밀어두고 다시 카나메 씨의 말에 집중했다. 역시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 것 같아요. 공감하기 어려운 말은 테츠야에게 어떠한 감흥도 이끌어내지 못했다. 테츠야는 그저 풍경이 보고싶었다.

7살이라는 나이는 어리지만 그리 어리지 않았다. 테츠야는 자신에게 일어난 일이 무엇인지 제대로 이해하고 있었다. 테츠야는 집으로 돌아와 어김없이 2실로 향했다. 평소와 달리 이르게 돌아온 가족들은 집에 도착하자마자 2실로 모여들었다. 테츠야는 시로정원을 등진 채 센정원을 바라보다가 가족의 품속에서 잠에 들었다.

그 날 이후로 아오키의 주변은 여러 변화가 있었지만, 정작 그 중심인 테츠야는 큰 변화가 없었다. 그런 테츠야의 모습을 보고 마치 …같다고 평한 작은 형 덕에 테츠야는 한동안 집에서 ‘아이’라는 애칭으로 불렸다. 어린 테츠야는 단순히 어감이 주는 행복이 좋아서, 그렇게 자신을 칭하며 웃는 가족들의 표정이 좋아서 군말 없이 네, 하고 말았다.

아오키란 그렇게 만들어진 사람이다. 다른 사람이 들으면 헉, 할 이야기는 아오키에게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아오키가 사람 손을 두려워하게 하지도 못했다. 아오키는 여전히 아오키였다. 아오키를 바꿔온 건 하루하루 쌓이는 일상이었다. 읽다 잠들어 머리맡에 너부러진 책, 서로의 말을 자랑하다 잠들어 마주 잡은 손, 연결되고 끊어지는 사람 간의 관계, 자신을 아껴주는, 혹은 자신을 썩 좋아하지 않는 사람의 손길이 닿은 아오키 자신. 아오키를 변화시킨 건 특별할 것 없는 일상들이었다고 아오키는 자신했다. 시침이 정상을 향해 기어오르고 있었다.

 

아오키는 하루 새에 부쩍 피로해진 쿠로노의 낯을 마주하고 있었다. 아오키는 의미 없이 서류철을 차곡차곡 정리했다. 새로이 발견된 증거들로 쿠로노가 진범임이 입증되었다. 영장도 순조로이 승인될 터이니 굳이 취조실에 다시 들어올 필요도, 쿠로노와 얼굴을 맞댈 필요도 없었으나 아오키는 기어코 한 마디가 하고 싶었다.

 

“어제 이야기 들려줘서 고마워요. 재미있었어요.”

 

쿠로노는 아오키를 바라보다가 입술을 움찔거렸다. 아오키는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쿠로노의 반응은 보기에 퍽 유쾌했다. 제 옆에 앉은 형사라면 제 말에 그래? 하며 생글생글 웃을 터인데 제 앞에 앉은 범인은 제 말의 의미를 이해한 듯 굴었다. 그러나 뒷맛이 떫은 즐거움은 그리 반갑지는 못했기에 아오키는 등받이에 몸을 기대었다. 안주머니에서 시계를 꺼내 손목에 채웠다. 손목에 닿는 금속이 미지근했다.

아오키는 쿠로노에게 그 말이 하고 싶었다. 아오키는 신호를 받아 핸들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리는 코즈키를 바라보다가 넌지시 운을 떼었다. 어제는 고마웠어요. 제가 하고 싶은 말은 본격적으로 심문에 들어가면 할 수 없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아오키는 공과 사가 뚜렷하지는 않아도 사를 공에 끌어들이지 않으려 노력하는 사람이었으므로. 아오키는 정말로 쿠로노에게 유약한 사람으로 남기 싫었다.

사람은 변화한다. 쿠로노도 아오키도, 옆자리의 코즈키도 모두가 동의할 명제. 하지만 사람의 변화는 생각보다 급격하지 않다. 어떠한 큰 사건이 일어났을 때 사람이 변한다면, 쿠로노처럼 인상적인 사건 하나로 변한다면 자신도, 카나메 씨도 그 날 변했어야 했다.

사람은 사건에 영향을 받아 변화한다. 그것은 아마 틀림없는 명제일 것이다. 적어도 아오키의 안에서는 그러했다. 그러나 인생을 뒤흔들만한 큰 사건이 있어야만 변할 수 있는가, 하면 그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사람은 남이 보기엔 보잘 것 없는, 일상적인 사건들의 연쇄로도 충분히 바뀌고도 남는다. 아오키 자신이 그러했듯.

시계를 찬 아오키는 가볍게 손목을 돌렸다. 손목을 느슨하게 감싼 시계가 찰각거리면서 제 자리를 찾아갔다. 아오키는 날 때부터 시선에 익숙했다. 그만큼 자신에게 향하는 시선에 무던했다. 하지만 무던하다고 해서 모든 시선이 편안하지는 않았다. 느껴지는 시선이 피곤했다.

 

자판기 소리가 요란스러웠다. 우롱차. 팥색의 라벨이 손 안에서 잘각거렸다. 아오키는 크게 힘 들이지 않고 뚜껑을 따며 느슨하게 미소 지었다. 창을 넘은 햇빛이 아오키의 시선을 가렸다. 회색의 소음 너머로 모래의 움직임이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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