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키야야

불완전성, 그 너머의 의심

drunkenness by 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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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지가 자주 찾는 바는 늘 클래식 음악이 작게 흘렀다. 테츠야는 문손잡이를 타고 흐르는 흐릿한 진동에 슬며시 미소 지었다. 에이지와의 약속은 늘 편안하면서도 낯선 향을 내었다. 바 요츠바노히비. 아오키는 얼굴이 익은 바텐더와 간단하게 고개인사를 했다.

목제 파티션, 흐릿한 조명을 받아 어둡게 묻히는 가죽 소파와 마호가니 테이블. 테츠야는 익숙하게 걸음을 옮겼다. 가장 깊숙한 자리에서 좌로 두 칸 떨어진, 창밖이 잘 보이는 테이블. 에이지는 늘 그 자리를 고수했다.

테츠야는 파티션을 가볍게 짚고 고개를 내밀었다. 에이지는 언제나처럼 창에 기대어 바쁜 도시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직 해가 다 지지 않아 눈이 부실 텐데도 개의치 않고 붉은 도시를 멍하니 홀린 듯 바라보고 있었다. 아오키는 부러 테이블을 두 번 두드려 에이지를 불렀다.

 

“얼음이 다 녹았네. 내 거 주문하면서 같이 시키자.”

“일찍 왔네?”

 

에이지는 테츠야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활짝 웃었다. 에이지는 아오키 가족 중에 돌연변이 같은 인물이었다. 특출나게 자유롭고 쾌활한 사람. 그런 성격 탓인지, 어쩌면 덕인지 유일하게 예술의 길을 걸었다. 사촌까지 꼽아 봐도 예술로 빠진 사람은 에이지가 유일했으니 유별나다고도 볼 수 있었다. 테츠야는 그런 에이지를 제법 부러워하고 있었다.

에이지는 테츠야가 주문을 끝마치자마자 넉살이 좋게 말을 붙였다. 이틀 전에 화상통화도 했으면서 무엇이 반가운 것인지 테츠야는 잠시간 고민했지만, 자신의 사고로는 에이지의 생각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일찍이 배웠기에 그저 웃으며 무던하게 맞장구를 쳤다.

테츠야는 이 바에 올 때마다 스카치 온더락으로 시작했다. 바텐더가 그걸 알아서인지 스카치 온더락과 러스티 네일은 주문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테이블에 도착했다. 잔을 하나씩 내려놓는 낯선 직원이 에이지와 테츠야를 곁눈질로 힐끔거렸다. 에이지 또한 그 시선을 느꼈는지 눈썹을 까딱였다. 이런.

직원이 테이블을 떠나고서야 다시 대화가 재개되었다. 가벼운 신변잡기용 인사부터 일상을 담은 에피소드들까지 갖가지 문장들이 테이블 위를 넘나들었다. 에이지는 최근으로 넘어올수록 테츠야의 일상에 파트너가 빠지지 않음을 알아차렸다.

 

“그 파트너랑 아직도 같이 살아?”

“의외야?”

“의외네. 진즉에 내쫓았을 줄 알았어.”

“…그런 말 안 통하는 사람이야. 애초에 내쫓을 마음이었으면 들이지도 않았겠지만.”

“그래 뭐, 오사카 사람이라는 건 들었어.”

“내가 그런 것까지 말했었나?”

“네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하하.”

“에이지 형, 경시청에도 아는 사람이 있어?”

“나야, 뭐. 말문 트면 아는 사람이지.”

 

온더락 잔은 어느새 비어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테츠야는 다리를 꼬고 소파에 등을 기대었다. 소파의 비적거리는 소리가 에이지의 웃음소리 위로 겹쳤다. 어색하게 웃던 에이지는 금세 표정을 울상으로 바꾸어 우는 소리를 내었다. 요는 그 일 이후로 신경이 쓰여 좀 알아봤다는 것이었다. 에이지의 걱정을 몰랐던 것은 아니기에 테츠야도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그래도 그 사람은 신경 쓰지 마. 제법 괜찮은 사람이야.”

“….”

“그 눈은 뭐야?”

“제법 평이 후하다 싶어서. 얘기만 들으면 성격 꽤나 안 맞을 것 같은데.”

“생각보다 괜찮아.”

“그러게 많이 편해졌네.”

“무슨 소리….”

“그래서, 그 파트너란 친구도 너 괜찮대?”

“….”

 

에이지는 입을 다문 테츠야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화제를 돌렸다. 다분히 의도적이고 작위적이었지만 같은 화제를 지속하고 싶지 않았던 테츠야는 모른 척 에이지가 하는 양을 따랐다. 목이 탔다. 테츠야는 신경 쓰이는 직원과 바짝 마른 목을 저울 위에 재어 보고는 한숨을 쉬고 직원을 호출해 새 음료를 주문했다.

자리가 파하고 테츠야는 잠시간 걸었다.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기에 걸어서 돌아가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가만히 차를 타고 있으면 이전의 대화나 곱씹을 것 같다는 계산속도 있었다. 하지만 몸을 움직인다고 해서 머리가 멈추는 것은 아니었다. 누군가의 휘파람 소리가 바람을 타고 흩어졌다.

 

결국 걸어서 돌아온 집은 인기척 하나 없이 비어 있었다. 코즈키가 집을 비우는 날이었다. 아오키는 느직한 걸음으로 방으로 향했다. 서늘한 바람을 맞다가 따뜻한 공기가 고인 실내로 들어오니 갑작스레 술기운이 오르는 기분이 들었다. 천천히 오르는 술기운은 깊은 곳에 뭉쳐있던 감상을 같이 끌어올렸다. 어스름한 노을이 느리게 침잠하고 있었다.

아오키는 애써 물로 술기운을 씻어 내리고는 서재로 향했다. 수1로 옮기기 직전에 정리한 서재는 이제 조대의 흔적을 구석으로 몰아내고 있었다. 수1로 옮긴 후 담당한 사건 파일들이 황갈색 파일 안에 뭉쳐 끼여 있었다.

아오키는 파일들을 죄다 꺼내어 바닥에 펼쳤다. 비합리적인 행위라고 뇌가 아우성쳤지만 적당히 들어간 알코올이 아오키를 부추겼다. 제 시선에서 제 감상대로 적힌 기록들을 읽어 내리다가 돌연 파일들을 팔로 밀어내고 그 옆에 누웠다. 충동적이기 그지없는 행동이었다.

타일바닥에서 한기가 올라왔다. 하가히코 친족 살인사건, 수산화칼륨 연속 살인사건, 긴자 메디컬 빌딩 방화사건. 서류 너머로 황갈색의 파일 보관 상자가 보였다. 봄이 지나고 여름도 절정에 달했는데 비는 그칠 줄을 몰랐다. 언젠가의 스노볼을 보는 것 같았다.

아오키는 감기는 눈을 느릿하게 깜빡이다 몸을 돌렸다. 잠이 몰아침에도 침대로 돌아갈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런 아오키의 시선에 책장에 진열된 접시가 들어왔다. 아오키는 멍한 머리로 되새겼다. 코즈키 씨는 나와의 파트너 생활에 만족하고 있는 것일까. 가물거리는 눈은 서서히 흐리게 감겼다.

 

아라타는 결혼 전 사용하던 맨션을 테츠야에게 흔쾌히 빌려주었다. 설마하니 그 테츠야가 자신의 동료와 같은 집을 쓰게 될 거라고 생각은 못했지만 말이다. 아라타는 집을 둘러보는 테츠야를 바라보다가 종이가방을 하나 내밀었다. 테츠야는 보자기로 포장된 상자를 꺼내더니 아라타를 다시 바라보았다.

아라타가 정치계에 처음 발을 내디뎠을 때, 아버지이자 정치인으로서의 후견인인 소이치로는 값나가는 장식품을 선물했다. 아름다운 문양이 있는 그릇의 파편들이 섬세하게 엉겨 있는 접시였다. 그 때 아라타는 무슨 생각을 했던가. 그런 것까지 기억하기엔 세상에는 신경 쓸 것이 너무나도 많았다. 그럼에도 아버지가 그런 장식품을 제게 선물했다는 사실 하나만큼은 깊게 각인되었다. 그 후로 아라타는 소중한 사람들이 중요한 첫 삽을 뜰 때면 킨츠기 장식품을 선물하곤 했다.

 

“장식품이야. 일하다보면 다양한 사람 만날 텐데, 그 하나하나에 너무 목매달지는 말되 인연을 소중히 하도록 해. 모두 너를 구성하는 조각이 될 거야.”

“모두는 너무 과장 아냐?”

“과장 아냐. 인연은 어떻게든 돌아오게 되어있고, 그 모든 건 네 하기 나름일 거다. 곧 이 말의 의미를 알아차리는 날이 올 거야.”

 

테츠야는 보자기를 풀어보지 않고 다시 종이가방에 조심히 집어넣었다. 테츠야는 큰 형의 조언이 타당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모든 게 자신하기 나름이라는 말에는 다소 삐뚜름하게 반응했다. 과연 자신이 지금과 같은 위치가 아니었어도 모든 게 제 하기 나름대로 돌아갈까.

세상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불공정의 장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자신이 노력한 만큼 정량의 결과를 받지 않는다. 그런 세상 속에 살고 있는 사람의 ‘나 하기 나름대로의 결과’는 과연 온전한 값을 하고 있을까. 자신은 늘 노력에 과분한 결과를 얻으며 살아왔기에 크게 불만을 가지지는 않았으나 큰 형의 말은 제법 기만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테츠야가 속으로 딴죽을 걸었지만 그럼에도 아라타의 말은 여전히 옳은 말이었기에 테츠야는 가만히 종이가방을 품에 끌어안았다.

 

서류더미 옆에서 눈을 뜬 아오키는 멍하니 눈을 깜빡이다가 뭉그적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째깍거리는 초침 소리에 고개를 돌려 시계를 보니 날이 넘어가 있었다. 아오키는 지극히 감정적이고 충동적이었던 어제의 자신을 질책하며 서류를 정리했다. 서재에서 아침을 맞은 모습을 코즈키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

서류들을 다시 파일 안에 밀어 넣은 아오키는 10분이 지나서야 책장 앞에 섰다. 간만에 맨바닥에서 날을 지낸 몸뚱어리가 움직일 때마다 비명을 질러댔다. 한숨을 쉬며 파일을 책장 안에 꽂은 아오키는 잘 꽂혔는지 확인하고는 고개를 뒤로 젖혔다. 뻐근함에 침음이 절로 흘렀다.

아오키는 책상에 기대 앉아 몸에 덕지덕지 붙은 피로를 털어냈다. 눈에 힘을 주어 깜빡이기를 수 분, 서서히 돌아오는 정신에 몸을 비틀어 기지개를 켰다. 최근 들어 침대가 아닌 곳에서 눈을 뜨는 날이 부쩍 많아진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 한숨을 짧게 내쉬고 몸을 다시 일으켰다.

시선 한 구석에 접시가 큰 형의 희미한 조언을 매달고 뛰어들었다. 아오키는 멍하니 접시를 바라보다가 속말로 큰 형의 조언을 곱씹으며 서재를 나섰다. 더 이상 시간을 지체했다간 코즈키와 정면으로 맞닥뜨릴 판이었다. 집에서 일하지 말라고 그렇게 잔소리를 했던 건 자신이었는데 이런 꼴을 보이는 건 정말 곤란했다.

부러 발소리를 죽이는 노력을 하지는 않았지만 평소보다는 재촉하는 걸음으로 방으로 향했다. 여름은 이미 충분히 지나가고 있음에도 계절을 모르고 바삐 움직이는 해가 이르게 거실을 비추고 있었다. 휴일에도 몸을 움직이고 자신도 모르는 새 일하는 누군가와 달리 자신에게는 맨바닥에서 밤을 새고 멀쩡하게 출근할 의지는 없었기에 오늘도 휴일임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햇빛을 받아 데워지기 시작하는 침대가 매혹적으로 자신을 부르고 있었다.

 

만 20시간의 짧은 휴일이 지나 덜 풀린 피로를 눈가에 달고 출근한 아오키는 경시청 입구에서 익숙한 얼굴을 마주쳤다. 그 익숙한 낯은 아오키를 마주치자마자 걱정스러운, 혹은 세세히 살피는 시선으로 아오키를 훑었다. 차마 거부할 수 없는 시선을 온 몸을 받아들이던 아오키는 결국 먼저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입니다, 니시다 씨.”

 

아오키는 길게 끌 생각이 없었기에 인사말과 함께 목례만을 남기고는 니시다를 지나쳐 복도로 향했다. 니시다는 그런 아오키를 끈덕지게 살폈지만 아오키가 돌아보는 일은 없었다. 코즈키는 그런 니시다를 한 번 흘겨보고는 아오키와 걸음을 맞췄다. 코즈키의 머릿속에 조대가 떠오르는 것은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니시다와의 만남은 그 날 점심 똑같은 위치에서 다시 발생했다. 아오키를 살살 살피는 묘한 시선도 똑같았다. 다른 점이라고는 니시다의 각오였다. 니시다는 목례를 하고 지나가려던 아오키를 붙잡았고, 아오키는 자신을 붙잡는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코즈키에게 시선을 돌렸다.

 

“조금 이따 따라갈게요.”

“…네에.”

 

코즈키는 니시다와 아오키를 번갈아 보고는 싱긋 미소를 지으며 자리를 떴다. 걸음 뒤로 흐르는 목소리가 서서히 줄어들었다. 말미가 거친 것이 조대에 대한 편견에 딱 들어맞는 사람이었다. 코즈키는 연상되는 아카사키 경부보의 정보들을 거부하지 않고 흘렸다.

걸음을 옮기는 코즈키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아오키는 괜히 일전의 저녁이 떠올라 입을 말아 물었다. 죄책감같이 명치를 찌르는 감정이 스멀스멀 크기를 키웠다. 때늦은 창피함이었다.

 

구석진 복도, 그 흔한 음료자판기마저 한 대도 없는 복도는 이런 상황을 위해 마련된 공간인 것처럼 인적이 드물었다. 니시다는 호기롭게 아오키를 불러 세운 것치고는 오래도록 말문을 트지 못하고 어물거렸다.

 

“잘 지내고 있어?”

 

맥이 풀렸다. 미처 다 풀리지 못한 피로에서 오는 버석한 짜증이 고개를 들었다. 애써 감정을 갈무리하던 아오키는 습관처럼 상대의 행색을 살피고 고개를 들어 그와 시선을 맞추었다. 아오키는 니시다의 목적을 가늠하며 이어지는 질문들에 건성건성 대답을 주워섬겼다. 하나같이 자신의 상태를 살피는 말들뿐이었다. 니시다 씨의 눈에 자신은 어떤 상태로 보이는 걸까, 고민하는 순간 이어지는 말에 아오키는 니시다와 시선을 맞추었다.

 

“복직한 이후로 늘 지쳐보여서 그런다. 정말 잘 지내고 있는 거 맞아?”

 

아오키는 손가락으로 가볍게 눈가를 짚었다. 그 일이 있은 후 다크서클이 짙어진 것은 자신도 잘 아는 사실이었으니 자연스러운 반응이었다. 아오키는 손으로 뒷목을 쓸었다. 피로가 몸 마디마디에 들러붙는 기분이 들었다.

 

“제가 못 지낼 게 뭐가 있나요.”

 

니시다는 그 이후로도 무어라 말을 덧붙였지만 이미 마음이 뜬 아오키의 기억에 남을만한 말들은 없었다. 아오키는 자신을 걱정해주는 니시다의 마음은 고마웠으나, 자신과 고작 2년도 안 되는 시간동안 알고 지낸 사람이 저의 무엇을 보고 있는 건지 궁금했다.

니시다는 시계를 보더니 결국 아오키의 팔을 조심스럽게 잡으며 말을 건넸다. 니시다의 눈동자가 흐리게 일렁였다. 니시다의 걱정들은 크게 와닿지 않았지만, 마지막 한 마디만은 목 언저리에 얹혔다. 아오키는 마른 목을 타고 흐르는 말 덩이를 모른 척하며 애써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니시다의 팔을 걷어낸 아오키는 황망히 자신을 바라보는 니시다에게 상투적인 인사말을 남기고는 고개를 숙여 목례하고 자리를 떴다. 복도를 내딛는 한 걸음 한 걸음에 니시다의 말과 큰 형의 말이 발자국처럼 따라붙었다. 한 가지에 매몰되면 안 된다. 하나하나에 너무 목매달지는 말아라. 모든 것은 나 하기 나름이다…. 말들은 어느새 변질되어 입 안에 고였다.

 

아오키는 천천히 문을 열었다. 예상보다 10분은 족히 더 소요했기에 머리는 몸을 재촉했지만 몸은 게으름을 부렸다. 아오키는 제 옆자리에서 모니터와 씨름을 하고 있는 코즈키를 바라보았다. 불현 듯 휴일 통째로 자신을 괴롭혔던 질문이 떠올랐다. 아오키는 눈을 질끈 감았다 뜨고는 제 자리로 걸음을 옮겼다.

모니터를 켜자 한 구석에 알림이 쌓여있었다. 가장 아래에 깔려있는 알림을 먼저 열자, 소견서가 화면을 채웠다. 두부 관통상으로 인한 뇌내출혈. 장소가 장소인 만큼 당연한 소리가 낯설게 다가왔다. 아오키는 멍하니 검안서를 바라보다가 창을 내렸다.

다른 서류작업을 끝낸 아오키는 다시금 검안서 창을 열었다. 깔끔하게 정리된 서류는 한 가지 길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럼에도 잡스러운 생각 탓에 좀처럼 집중하지 못하던 아오키는 볼펜을 톡톡 두드리다가 일어나 사무실을 다시 나섰다.

 

희미한 사이렌 소리가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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