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폐허의 잔상

유월의 낙원

준 이엘

내 이름은 준, 준 이엘. 유토피아 프로젝트의 리더. 빛나는 세상으로 나아가는 선도자. 어둠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가여운 장님들을 낙원으로 이끄는 선구자.

나는 언제부터 ‘준 이엘’이었더라. 언제부터 낙원으로 향하는, 얼어붙은 꽃이 피어난 가시밭길을 자처해 걸어가게 되었더라.

…그래, 모든 것은 그 순간부터 시작되었다. 아카식 레코드라는 끝없는 바다에서 올리비아 노바의 영혼이 하염없이 익사하고, 새롭게 준 이엘로 눈을 뜨기까지 있었던, 기적의 순간.

그 아름다운 광경을 어찌 말로 설명할 수 있을까. 가슴을 절로 뛰게 하는 그 감정을 어찌 인간의 단어로 담아낼 수 있을까.

내가 보여줄 수 있는 것은 그저 나의 신념뿐, 곧게 걸어 나가는 걸음뿐.

나는 흔들리지 않는다. 나는 낙원을 향해 나아간다.

나는, 미래를 꿈꾸는 사람이기에.

* * *

눈을 감으면 살짝 어둑한 분위기의 작은 방이 암흑에 휩싸인다. 쓸쓸하다고 평가할 수 있는 방이 사라지면 남는 것은 황량하고 무한한 나만의 공간뿐.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맺힌다. 나는 명상의 시간이 좋았다.

내가 하루하루, 빠짐없이 떠올리는 것은 늘 똑같다. 경계 따윈 없다는 듯 펼쳐진 드넓고 새파란 하늘. 푸르게 또는 색색을 띠며 바람이 스치는 나무와 꽃. 온기 있는 세상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이 세상에 슬픔도, 눈물도 없다고 증명하는 행복한 웃음소리. 한 치의 어긋남 없는, 올바른 세상. 바로 눈앞에서 보는 듯 선명했다.

하루하루, 단 하루도 떠올리지 않은 적이 없었다. 아카식 레코드가 이 광경을 내게 보여준 이후, 이 꿈은 언제나 나의 마음에 각인되어 있었다.

아니, 이것은 꿈이 아니다.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절대로 꿈‘만’으로 치부해서는 안 될 선견지명이었다. 누구는 예언, 누구는 신탁, 무어라 부르고 싶어 하든, 꿈보다는 확실성 있는 비전이었다.

‘가능성.’ 아카식 레코드는 그 무한성에 손을 뻗는 자에게 수많은 갈래, 수많은 미래, 수많은 가능성을 보여준다. 그중 내 손에 주어진 것은, 그것은.

나는 그 아름다운 황홀경을 ‘낙원’이라 불렀다.

* * *

부스럭. 작은 기척을 민감하게 감지했다. 누군지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가 원한다면 소리, 기척 없이 다닐 수 있으니, 이것은 나에게 제 도착을 알리려 일부러 낸 것이 분명했다.

눈을 떴다. 불빛이 어두워 눈이 부시지 않았다. 천천히 고개를 돌려 불빛보다 밝은 새하얀 머리카락을 눈에 담았다. 나와 색은 조금 다르지만, 시린 온도는 똑같은 녹색의 눈동자. 객관적으로 판단해도 잘생겼다고, 그리 감상했다. 잘 만들어진 동상을 보듯 별다른 감흥은 없었지만.

차가운 겨울의 신령, 산타. 산타 이엘. 나의 ‘실행자.’ 나의 의지를 수행하는 ‘처형자.’ 그를 보며 버릇처럼 다정함을 담아 미소 지었다.

“어서 와. 임무는 어땠어?”

“문제없이 끝냈어. 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답해온다. 마지막 음절에 들어간 조그마한 따스함을 잡아챘다. 유일하게 나만을 향하는 그 감정은, 아마 그가 내보이는 유일한 온기가 아니었을까.

가차 없이 나의 걸음을 방해하는 싹을 전부 얼려버리는 산타. 나의, ‘준’의 오빠.

당연히 그랬겠지, 확고한 믿음이었다. 그의 실력을 향한 신뢰였다. 앉아있던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려 손을 내밀자, 단단하고 서늘한 손이 내 손을 잡아 온다.

하지만, 산타, 너도 알고 있겠지? 네 손보다 내가 너에게 내미는 손이 더 차갑고, 냉정하다는 것을. 지금의 나는 네 동생의 몸을 지니고 있지만, 너의 진실된 동생은 아니다. 내가 ‘준 이엘’로 눈을 떴을 때부터, 네 진짜 동생은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나에게, ‘준’에게 매달리는 너를 버리지 않는다. 네게 잔혹한 진실을 말해주지 않는다. 비록 너에게 남매의 정을 품지 않는다고 해도, 너는 그 누구보다 유용한 체스 말이었고, 그 누구보다 나에게 충성했으니까. 그래서 내게 뻗어온 손을 붙잡아주었다. 다시 시작하기 위해서는, 네가 필요했으니까.

입이 호선을 그렸다. 네 눈에 비친 나의 모습은 봄에 만개한 어떤 꽃보다 아름다웠다. 네 녹안에 비친 나의 녹안은 한겨울보다 차가웠다.

네가 이런 나의 비정을 알고 있다는 건 모르지 않았다. 네가 개의치 않아 한다는 건, 확신하고 있었다.

* * *

나는 준, 준 이엘. 그전에는 다른 이름으로, 다른 삶을 살았었다. 떠올리기까지 잠깐의 시간이 걸렸다.

그래, 나는 올리비아, 올리비아 노바였다. 이제는 눈이 빗물에 녹아 사라지듯, 조금씩 뿌옇게 망각에 부식되는 이름이자, 나의 과거였다.

얼굴은 어떻게 생겼었더라. 컵에 담긴 물에 나의 모습을 비춰본다. 단정한 갈색 머리의 미인이 나를 응시해온다. 지금과 달리 기억에 남을만한 인상은 아니었다고 생각해본다. 예쁘다고 하기는 어려웠고, 평범한 외모였었나. 기억을 조금 더 더듬어보자. 웨이브 진, 검은색 머리카락. 눈은 이 도시를 닮은 회색, 회색이 맞았겠지?

지금 와서 과거의 나를 아는 사람들을 찾는다고 해도, ‘올리비아’를 기억하는 이는 거의 없을 것이다. 반대도 마찬가지였다. 내겐 부모님의 이름조차 기억에 남아있지 않다. 저처럼 부모님도 젊은 나이에 요절했으니 그럴 만도 한가, 건조하게 혼잣말해본다. 이 불합리하고 잔혹한 세상은 올리비아에게서 보호자를 너무 일찍 빼앗아 갔으니까.

하지만 그 어렸던 나이에도 슬펐던 기억은 없다. 굳이 따지자면, 나는 분노했었다.

어쩌면 행운이었을지도? 잔인한 기억을 떠올리며 생긋 웃었다. 내게 이 길밖에 없었다는 걸, 덕분에 일찌감치 깨달을 수 있었다. ‘올리비아’로 걸어간 길, 죽음이라는 막다른 벽에 다다랐다가, ‘준’으로 눈을 뜬 후 다시 오른 외딴 길.

이게 내 운명이었다. 처음부터, 길은 하나밖에 없었다. 올바른 길은 하나뿐이었다.

내겐 재시작할 기회가 필요했고, 아카식 레코드는 나를 그 운명의 길로 인도했다. 새로운 몸, 새로운 삶을 통해.

바뀐 건 없었다. 내가 ‘올리비아 노바’이든, ‘준 이엘’이든, 그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오로지 낙원뿐이었다.

* * *

작지만 위대한 시작. 함께 낙원으로 나아갈 선구자를 선별하기 위해 진행한 키메이커 프로그램. 특별한 존재들, ‘스페셜’이 낙원으로 향하는 열쇠라는 건 진작 깨달았다. 그러나 열쇠를 거머쥐어도 열쇠가 녹슬고, 구멍에 맞지 않으면 쓸 수 없는 일. 그러니 다듬어야 했다. 나에게 필요한 건, 완벽한 열쇠, 마스터키(master key)였다.

사방에서 비명이 터졌다. 울음소리, 구원을 구하는 목소리. 열쇠가 달궈져, 새로운 모양을 찾아가는 창조의 선율.

벅차오르는 마음을 감추고 그들 곁에서 순진한 아이의 가면을 썼다. 이겨낼 수 있어, 그래야만 해. 이런 시련도 견디지 못한다면, 어떻게 이 뿌리까지 썩어버린 세상을 바꾸겠어?

재능은 충분해. 이것은 기회란다. 너희가 고난을 뛰어넘어 별에 닿으리라, 나는 믿고 있어.

나는 틀리지 않았어.

선명한 녹색의 눈동자가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참 맑은 색이기도 하지, 낙원의 잔디가 저런 색일까, 그런 생각이 얼핏 들었다. 그 눈동자에 담긴 것은 분노, 익숙한 감정이었다. 그 눈동자에 잠긴 것은 슬픔, 낯선 감정이었다.

무얼 위해, 도대체 무얼 위해서 이렇게까지. 비명처럼, 울음처럼 아이는 토해냈다. 나는 아주 약간 아쉬워졌다.

아, 그렇구나. 아직 세상은 이 원대한 운명을, 우리의 사명을 받아들이지 못하는구나. 새로운 삶을 받아 눈을 뜨고, 수 몇 년이 흐른 후에도, 세상엔 우둔하고 나약한 사람들뿐이구나.

그래, 어쩔 수 없지. 그래도 나는 좌절하지 않는다. 너도, 너희들도 언젠간 깨닫게 될 거라, 확신하고 있다.

작은 새야, 붉은색의 카디날아. 너에게도 보이지? 아카식 레코드에 손을 담근 아이야. 받아들이는 이(Receiver)로써, 너도 그 아름다운 세상을 보지 않았니?

활짝 웃었다. 악마를 보는 눈길 앞에서 지은 천사 같은 웃음이었다.

당연히 세상을 위해서죠.

당연히 낙원을 위해서죠.

* * *

유토피아 프로젝트 (Utopia Project). 미래로, 낙원으로 나아가기 위한 발판. 낙원을 실재하는 곳으로 만들기 위한 수단.

조금씩, 한 명씩, 세상을 더 넓은 시선으로 보는 이들이, 아직은 아름다운 환상에 불과한 세상을 현실로 만들려는 순교자들이 다가왔다. 나의 앞에서 무릎을 꿇고 충성을 맹세한다. 이 모든 것은 유토피아를 위해. 우리를 이끄는 준 이엘을 위해.

나는 준 이엘, 유토피아의 벨라도나. 아름답지만 독이 있는 꽃이라, 나에게 붙여진 이명이었다. 맹목적으로 내게 충성하는 몇은 오명이라 분개했지만 나는 오히려 만족스러웠다.

독이 있으면 어떠리. 필요에 의한 독인데. 썩은 부분을 마냥 방치하면, 구제 못할 부위만 늘어갈 뿐이다. 아예 도려내지 않으면 멀쩡한 부위마저 다 썩어버리고 만다. 괜찮아, 온전한 치유를 위한 좋은 독이니까. 다정한 손길을 내민다. 몇 번씩 내쳐지더라도, 나는 인내심을 가지고 계속 손을 내밀리라.

왜? 누군가가 물었었다. 왜 그렇게까지 환상에 집착해? 쿠레아 아쿠아, 나의 가장 오래된 인연, ‘올리비아’의 동료, 정의로운 히어로의 국장. 이제는 나의, 준 이엘의 적.

그때나, 지금이나, 나의 대답은 달라지지 않았다. 당연히 그만한 가치가 있으니까. 너도 봤으면, 내가 본 광경을 눈에 담았으면, 그런 어리석은 질문은 하지 않겠지.

왜? 끈질기게 물어오는 질문이 조금은 짜증 났었다. 그게 중요해? 지금 와서 굳이 계기를 떠올리려는 노력은 들이지 않았다. 어쩌면 잊혀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게 중요한가? 더 나은 세상을, 완벽한 세상을 바라는 데에, 무슨 이유가 필요할까.

너는 미쳤어. 비난은 익숙했다. 악마의 형상을 띤 사람, 인간도 아닌 것. 욕을 들어도 개의치 않았다. 외로운 길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혼자 걸어가야 한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맨발로 가시밭길을 걸어서 피투성이가 된다고 하더라도, 나는 끝까지 걸어가리라 다짐했다.

겨울에 잠겨 얼어붙은 도시가, 유월의 낙원에 다다라 다시금 만개하기까지.

그것이, 나의, 올리비아 노바의, 이제는 준 이엘의 신념이었다.

* * *

낙원은 실재한다. 그러니 나는 멈추지 않는다. 멈출 수도 없고, 멈추고 싶지도 않다.

나에게 주어진 성스러운 사명을 다할 때까지. 내가 보았던 유토피아에 다다를 때까지.

그것만이 나, 준 이엘을 이루는 모든 것이니.

For endless Utopia.


Written 19-0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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