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폐허의 잔상

12월의 빛무리

아리스카 레인즈 x 디셈버

오늘도 밤을 조용히 주시하는 녹색 눈동자는 흔들림이 없다. 어둠 속으로 잠식된 붉은 머리칼도, 카디날의 색을 띤 붉은 망토도 마치 그림자와 다름없었다.

차디찬 겨울밤에도 미동 없는 너의 눈에는 무엇이 담겨있는가. 어떤 생각을 하며 밤을 지새우는가.

기억을 더듬어보아라, 아리스카. 너는 아직도, 그 머나먼 12월을 어제처럼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겠지.

손에 쥔 것 하나 없이 처음 이 얼어붙은 가시밭길로 발을 들이게 된 12월. 타오르는 감정을 가면 뒤에 숨기고 하늘을 날아오르게 된 12월. 언젠가 자신의 손으로 매듭지을 마지막 12월을 기다리며.

오늘도 너의 붉은색 천 위로 수놓아진 물망초에 바친 맹세를 되새겨본다. 「 - 」를 절대 잊지 않겠노라고.

glow - vocal: グリリ. music: keeno

회색으로 물들여진 도시를 창밖으로 내다본다. 적갈색의 부드러운 반곱슬 머리칼, 진한 옥색의 눈동자와 창백한 피부가 옅게 비치는 유리창 너머로 겨울의 풍경이 펼쳐졌다. 하얀색의 반짝이는 빛이 떨어지는 것을 보니 비가 오는 모양이었다. 아니, 이제 막 12월로 들어섰으니 겨울의 첫눈이려나. 서글서글한 빛이 차가운 아스팔트의 회색으로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다가 침묵을 깨뜨리는 문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걸음 소리와 기척으로 이미 누군지 알아차렸지만,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기도 했으니 반갑기는 매한가지였다.

“일찍 왔네?”

부러 친근하게 인사를 건넸다. 돌아오는 건 작은 끄덕임, 그 옆에서는 활짝 피는 미소. 서로 똑 닮은 흑색의 머리칼과 갈색 눈이 그를 응시해온다. 쌍둥이지만 성격도, 반응도 참 달랐다. 아무리 같은 시각에 태어난 남매라도 엄연히 다른 사람이자 인격이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했겠지만. 붉은 리본으로 반을 묶어 올린 머리칼을 찰랑거리며 자윤이 가벼운 발걸음으로 곁에 다가왔다.

“오랜만, 아리스카! 오후 수업도 없고 딱히 할 것도 없다 보니 그냥 조금 일찍 오기로 했는데 괜찮지?”

“이미 와버렸으니 괜찮지 않다고 해도 어쩔 수 없지만….”

신나게 말을 붙이는 자윤의 뒤에서 유천이 작게 중얼거리자 자윤이 고개를 슬쩍 돌려 그를 가볍게 흘겨봤다. 유천은 쌍둥이 누나의 눈초리를 못 본 척 피하고, 아리스카는 절로 작은 미소를 지었다. 여전한 모습인 것이 위로이자 안심이었다.

“일찍 온 만큼 기다리는 시간이 늘어나겠지만. 란은 지금 막 학교를 마쳤을 테니까.”

고개를 들어 시계를 봤다. 오후 3시가 조금 지난 시각이었다. 아마도 쌍둥이들 오는 날이라고 평소 보다 서둘러서 오고 있지 않을까, 제법 정확하게 예상한다. 그들과 같이 맨해튼이 아닌 퀸스에 사는 쌍둥이는 일주일에 두어 번 볼까 말까 했으니, 정이 많은 란이라면 그들을 보고 싶어 했을 터였다. 떨어져서 살기 시작한 게 1년도 채 안 되었으니.

“그쪽은 별다른 문제 없고?”

20살이라면 제가 부모처럼 따라다닐 나이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재차 안부를 확인했다. 오기 전에도 매일 꼬박꼬박 연락은 주고받았지만 재확인해서 나쁠 건 없었다. 스페셜이라면, 특히 그중에서도 래디컬의 이중생활을 살아가는 그들이라면 어디서 위험에 처할지 모르는 법이었다. 다행히 둘은 고개를 저었다.

“히어로 활동이 맨해튼 쪽에 치우쳐있으니 별달리 보고할만한 것도 없어. 다른 래디컬이 가끔 난동을 피우는 경우를 제외하곤….”

“유토피아 그것들은 코빼기도 안 보이고 말이야. 오히려 이쪽이 더 위험하지 않아? 테오도르도 빠졌으니 이제 필드에서 뛰는 건 아리스카밖에 없잖아. 그러고 보니 테오도르는 언제 온대?”

잠시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었으나 그대로 인정한다면 걱정할 게 뻔했다. 자신이 감당하지 못할 정도도 아니었으니 굳이 아이들을 신경 쓰게 하고 싶지 않았다.

“필드는 아니어도 란이 돕고 있고, 히어로는 잘 피해 다니니까 그다지. 테오도르는 오늘 야근. 어제 멀지 않은 곳에서 래디컬 관련 사고가 터졌다 하더라고.”

공무원의 폐해에 걸려들었구나, 자윤이 심심한 애도를 보냈다. 그럼 오늘은 란이 혼자서 서포트 하느라 바쁘겠네, 유천이 중얼거렸다. 그리고 마치 자신의 이름을 들은 것처럼, 문을 벌컥 열고 란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리스카의 예상대로 뛰어왔는지, 약간 숨이 찬 상태로 란이 그들을 보며 밝은 웃음꽃을 피웠다.

“일찍 왔네! 나도 빨리 온다고 왔지만.”

아리스카가 처음 건넨 인사를 란이 되풀이했다. 어느새 란의 옆으로 자리를 옮긴 자윤은 란의 밝은 금발을 헝클어뜨렸다. 잠깐만! 작게 항의하는 란을 자윤은 쉽게 무시했다. 아직은 내가 크구나, 우리 막내는 언제 나보다 키가 커지려나, 애잔한 표정으로 놀리면서.

유천이 그 광경을 조용히 응시하다가 갈색 눈동자를 깜박이며 말리지 않을 거냐는 의문의 눈빛을 아리스카에게 보냈다. 저대로 두는 것도 나쁘진 않겠다 싶었지만, 아리스카는 시계를 재차 확인했다. 오후 3시 42분. 슬슬 회의하고 준비에 들어갈 시간이었다.

“자, 그쯤하고 이쪽으로 모여봐. 요즘 경찰이 예민해져 있고 어제 사건 때문에 정예 히어로도 순찰하고 있을지 모르니 특히 조심해서 다녀야 해. 오늘 우리가 확인하러 갈 곳은….”

그들의 일상은 다시 밤으로 잦아들어 갔다.

* * *

도시의 밤도 본래는 고요한 시간이었다. 환한 전구가 아침이 올 때까지 꺼지지 않는 곳이 많을지언정, 아무리 처리해도 끝나지 않는 업무에 시달리는 이들이 뜬눈으로 밤을 새울지언정, 낮에 비하면 적막하기 그지없었다. 기온 또한 급격하게 떨어져 도시는 더욱더 차가움을 발산하고 있었다.

아무도 살지 않는 유령도시처럼. 마치 디스토피아 소설에 그려질 만한 분위기였다.

얼어붙은 적막을 뚫고 총성이 밤을 갈랐다.

“저쪽이다! 잡아!”

“두 팀으로 갈라져서 도주로를 봉쇄해!”

그 소음을 시발점으로 밤은 붉게 달아올랐다. 시민들의 잠을 깨우는 경찰의 목소리에 몇은 부스스 창밖을 내다보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신경을 끄고 다시 잠을 청했다.

그다지 드문 사건도 아니었다. 세상의 법에 순응하지 않고 날뛰는 래디컬. 무법을 통제하려 하는 경찰. 히어로가 지원한다면 문제없이 해결될 일이었다. 현재 추격 중인 래디컬이 디셈버인 것을 알았다면 맹목적인 믿음만큼 불안감 역시 존재했겠지만.

그림자에서 그림자로, 이질적인 붉은색이 스며들었다. 사람의 형상이 거의 구르다시피 땅에 착지해 벽에 몸을 기대어 숨을 가다듬었다. 잉크처럼 새카만 밤에 몸을 숨긴 청년은 가만 서서 주변을 살폈다. 아까의 소란이 거짓처럼 느껴지는 텅 빈 골목이었다. 잘 따돌렸나, 중얼거리며 아리스카는 조용히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손에 든 무전기가 치직거리는 소음을 내며 아리스카의 발을 붙들었다. 고글 뒤로 숨겨진 녹안이 빠르게 주변을 다시 훑고 나서야 아리스카는 무전에 귀를 기울였다.

“일단 진입하는 덴 성공했어! 별로 중요한 건 없어 보이지만.”

“그렇게 성급하게 단정 짓지 말라고 몇 번을 말해….”

최근 경찰에 체포된 래디컬 그룹 본거지에 침입하는 역할을 맡은 자윤과 유천이었다. 안전한 곳에서 모니터링을 맡은 란도 대화에 끼어들었다.

“카디날은? 아무리 그래도 혼자서 미끼 역할이라니. 물론 그만한 실력이 있는 건 알지만.”

“걱정하지 않아도 다 따돌렸어. 이걸로 조금은 시간을 벌었을 테니, 판타즈마, 라요, 너희는 빠르게 보고 나와. 너무 오래 있지는 말고.”

빠르고 익숙하게 지시를 내린다. 무전의 반대편에서도 큰 불평불만 없이 알겠다는 대답이 돌아온다. 그만큼 믿고 있었다는 증거가 아닐까 싶었다. 그들의 일상에서 아리스카는 의지할 수 있는 존재였고, 카디날로서 밤의 도시를 날아오를 때는 절대적이었다.

무전을 끄자 골목이 고요해졌다. 슬슬 움직여야겠지, 따돌렸다고 해도 한군데에 머무르는 건 현명하지 못하니까. 문득 자기 팔을 스치는 붉은색 천이 눈에 들어왔다. 좀 전의 접전에서 눈먼 총알에 스쳤는지, 아니면 경찰 중에 명사수가 있었는지 소매가 찢어져 있었다. 조금만 위로 맞았더라면 피를 볼 뻔했다고, 아리스카는 혀를 찼다.

“역시 제로가 빠지니까 아슬아슬한 상황에 많이 부딪히네.”

아리스카는 솔직한 아쉬움을 담아 중얼거렸다. 어차피 텅 빈 골목에 들을 사람은 없었다. 적어도 귀에 익은 목소리가 그에게 닿기 전까지는 그렇다고 생각했다.

“내가 있거나 말거나 아슬아슬한 짓만 골라 하는 게 누군데.”

반사적으로 총을 고쳐잡았다. 세이프티는 애초에 장착하지 않았었다. 손이 완전히 올라가기 전에 이성이 목소리의 주인을 인지하고 아리스카는 나오려는 한숨을 삼켰다.

“네가 할 말이야? 너 여기서 이러다가 들키면 어쩌려고 그래.”

골목으로 조금씩 새어 들어오는 불빛에 백금발이 반짝였다. 밤의 흑빛에 물든 어두운 푸른색 눈이 아리스카를 응시했다. 경찰복을 갖춰 입고 나온 걸 보니 실전투입 되었나 보다, 아리스카는 추측했다. 그가 생각하는 것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 누가 누굴 걱정하냐며 코웃음을 치고 테오도르는 흰 장갑을 낀 손을 허공을 작게 휘저었다.

“알아서 잘할 거니까 걱정은 붙들어 매고. 너나 다치지 말고 어서 애들하고 합류해. 경찰은 다른 쪽에서 삽질하고 있겠지만 히어로가 출동할 확률도 적은 편이 아니거든. 심지어 오늘은 캄파뉼라 당번이래.”

그건 곤란한데. 아리스카는 진심을 담아 말했다. 곤란하지, 그러니까 얼른 애들 데리고 집으로 꺼져. 테오도르는 잘생긴 얼굴을 찌푸렸다. 히어로 중에서도 과격파인 캄파뉼라와 격돌해서 좋은 꼴 본 적은 없었다. 래디컬인 그들의 처지에서는 히어로 기관의 누구든 환영하지 않았지만, 유독 캄파뉼라는 손속에 자비가 없었다. 아리스카는 테오도르에게 고개를 까닥이고 날렵하게 담장 위로 날아올랐다.

“그럼 나중에 보자.”

뒤돌아보지 않아도 인사가 끝나자마자 테오도르가 사라진 것을 알고 있었다. 아리스카는 무전을 키고 유천과 자윤에게 연락했다. 아직 중요하다 싶은 거 발견하지 않았으면 그쯤하고 돌아와. 히어로와 부딪혀서 좋을 일 없어. 긍정의 대답이 돌아왔다. 실마리의 실도 못 찾았다고 투덜대는 자윤을 달래고 안전한 장소에서 모이기로 한 후 무전을 끊었다.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차가운 바람이 그의 뺨을 식혔다. 한숨을 쉬자 하얀 입김이 올라왔다. 슬슬 뭐라도 찾아야 나아갈 방향이라도 잡을 텐데. 조바심이 나는 건 어쩔 수 없었지만, 다음을 기약하는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밤은 다시 찾아오리라.

“하긴, 이런 디스토피아 같은 도시에서 유토피아를 찾는 것 자체가 모순적이긴 하다만.”

붉은 카디날이 새벽으로 사라지기 전, 속삭이듯 남긴 말이었다.

* * *

“너 자꾸 그렇게 떼쓰면 여기 버리고 간다. 래디컬이 나와서 널 잡아가도 엄마는 몰라! 무서운 디셈버가 와도 모른 척할 거야!”

차가운 아스팔트 바닥에 주저앉아 세상 떠나가라 우는 아이에게 엄마로 보이는 여성이 혼을 냈다. 그 옆을 스쳐 지나가는 아리스카는 귀에 들려온 말에 기분이 미묘해졌다.

그래, 우린 정부와 대립하는 래디컬이지. 살아남기 위해서였지만, 불법으로 활동하는 것도 맞고. 하지만 일반인에게 직접 피해를 준 적은 없는데, 우리 인식이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걸까.

그렇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세상이 래디컬을, 더 나아가서는 스페셜을 호의적으로 보지 않는 현 정부에게 맹목적인 믿음을 바치는 이상, 우리는 ‘악당’으로밖에 남지 못하겠지. 아무렴 세상의 정의인 히어로가 정부를 대표해 눈에 불을 켜고 우리를 체포하려 드는데.

히어로 중에서도 과격파인 이들은 사정도 묻지 않고 그들의 머리에 총을 들이대는 경우가 허다했다. 디셈버의 일상 신원이 알려지지 않아서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지금처럼 몰래 사회에 섞여 드는 것은 꿈도 꾸지 못했으리라.

그런 생각이 들 때면 아리스카는 란에게, 유천과 자윤에게 미안해졌다. 그와 테오도르에게 선택 따윈 없었지만, 아이들은 원했더라면 충분히 다른 삶을 살 수 있었다. 보다 안전하고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는 삶. 더 많은 가능성을 꿈꿀 수 있는 삶. 디셈버 활동을 했다는 게 알려지면 래디컬이라는 낙인이 찍힐 테니 불가능한 바람이었다. 바로 감옥행을 선고받지나 않으면 천만다행이었다.

권해보지 않은 건 아니었다. 아리스카도, 테오도르도 처음부터 확실하게 말해두었다. 그만두고 싶으면 언제든지 그만두어도 괜찮다고. 더 이상 목숨을, 인생을 걸고 싶지 않으면 뒤로 물러서도 괜찮다고.

아이들의 의지는 더욱 확고했다. 이건 우리의 선택이야. 떠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우리에게 남은 건, 너희가 전부인데. 아리스카는 그것이 고맙고도, 그 이상으로 미안했다.

쓸데없는 간섭이라고, 테오도르는 그에게 말했었다. 그들의 선택에 네가 뭐라 할 자격은 없어. 그들이 우리가 선택한 길에 간섭할 자격이 없듯이. 냉정한 말이었지만 사실이었다. 아리스카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위태롭고도 위험한 이 길은 아리스카와 테오도르가 함께 선택한 길이었다. 하지만 둘은 모든 면에서 맞지 않았다. 대립하기도 했다. 테오도르는 냉정하고 잘라내야 할 때를 알고 있었고, 아리스카 또한 그 못지않게 고집이 셌다. 아이들을 대할 때도, 히어로의 추격에 대처할 때도, 일반인에게 가는 피해를 줄이고 또 줄일 때도. 어긋나는 건 당연했다.

그러나 아리스카는 알고 있었다. 테오도르도 마찬가지였다. 이 세상에서 기꺼이 목숨을 믿고 맡길 수 있는 사람은 서로밖에 없었노라고. 그 누구보다 자신을 이해해줄 사람은 서로밖에 없었노라고. 서로 한 발짝 물러서서 양보하고 타협했다. 아무리 평행선을 그릴 것 같아도 그들은 교차점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그거면 됐다. 아리스카는 수많은 타인의 소음이 뒤섞인 회색의 거리를 스쳐 지나갔다. 이 도시에서, 세상에서 의지할 곳이 너희밖에 없어도, 다른 이들이 다 등을 돌려 우리를 책망하고 손가락질할지라도, 그거면 충분했다.

* * *

손에 붉은색 천을 들었다. 어젯밤 총에 스쳐 찢어진 부분을 고쳐야 했다. 아리스카는 능숙한 손길로 바늘에 실을 꿰었다. 처음 바늘을 들었을 때와 달리 서투른 기색 없이 한땀 한땀 천을 이었다.

붉은색의 바다에 하늘색이 떠올랐다. 아리스카는 손끝으로 옷자락을 매만졌다. 혹시라도 닿는 순간 지워질까 조심스럽게, 세 개의 물망초 자수를.

울컥 마음속 깊은 곳에 묻어둔 감정이 억류한다. 눈을 감을 필요도 없이 눈앞에 선명하게 떠오른다. 어제의 일보다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잊고 싶어도 잊을 수가 없는 기억이었다.

“키메이커 프로그램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세상을 위해 재탄생하실 선택받은 분들.”

감정도 동정도 없는 기계음은 공포감만 조성했고, 아홉 명의 아이들은 낯선 곳에서 깨어나 갈팡질팡했다. 울음을 터뜨리는 아이도 있었다. 아리스카는 기억한다, 당시 자기 손을 꼭 붙들고 있던 비비안의 온기를.

“여러분은 낙원으로 가는 열쇠가 될 특별한 존재입니다. 그 재능을 우리, 유토피아 프로젝트가 깨워드리겠습니다. 그러니 시련 속에서 살아남도록 모쪼록 노력하시길 바랍니다.”

유토피아 프로젝트. 생소한 이름이었다. 지금은 곱씹고 또 곱씹은 이름이었다. 유토피아라니, 웃음조차 나오지 않을 농담이었다. 이상적인 세상은커녕, 그들이 아이들에게 선사해 준 것은 깊고도 헤어 나오지 못할 어둠뿐이었다.

희생양이 불타올랐다. 형용할 수 없는 새된 비명이, 차마 말 못 할 살타는 악취가 맴돌았다. 눈 감아, 비. 아리스카는 여동생의 귀를 두 손으로 막으며 굳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어서. 눈을 감고 돌려도 끔찍한 환영이 보이는 것 같았다.

우리는 과연 어떤 지옥에 던져진 걸까. 우리는 어떻게 이곳에서 벗어날 수 있나. 14살짜리의 머리로 굴려봐도 나오는 답은 없었다. 그래도 비만큼은, 비비안만큼은 잃지 않겠노라 다짐했었다. 하지만 키메이커 프로그램의 악몽은 이제 시작했을 뿐이었다.

“아리스-!”

외마디 비명이었다. 그의 이름인 것을 간신히 알아챌 정도의 정신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분명히 손을 잡고 있었는데. 비는, 비비안은 어디에, 내 옆에서 떨어지면 안 되는데.

동생을 찾아 필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눈앞에서 사라지는 비비안을 향해 몸을 날렸지만, 함정이 아이를 삼키는 속도가 더 빨랐다. 작별처럼 스친 아이의 온기였다. 손톱이 살을 파고들 만큼 빈손을 꼭 쥐었다. 마치 그러면 아이가 다시 품에 돌아오기라도 할 듯이.

작은 새는 추락했다. 붉은 머리칼이 심연에 꽃이 피듯이 흐드러져 있었다.

그 후의 기억은 안개 속을 걷는 것처럼 흐렸다. 너까지 죽을 생각이야? 다른 아이가 단호하게 자신을 이끌었다. 광기 섞인 웃음소리, 아니 울음이었던가. 공황에 빠진 흐느낌. 어느덧 정신 차려보니 같이 있던 아이들 대부분이 사라졌었다. 절망에 집어삼켜지려는 남은 이의 손을 잡았다.

안 돼, 죽으면 안 돼. 너도 사라지면 안 돼. 마지막 남은 간절함으로 붙들었다. 테오도르와 눈을 마주했다. 상실의 아픔은 말보다 생생했다.

불길은 마지막으로 소녀 한 명을 삼키고 사그라들었다. 각성한 여러분, 축하합니다. 지옥의 시작을 선고한 기계음이 다시 들려왔다.

축하, 라고 했는가. 능력을 얻었지만, 세상을 잃었다. 이 잔혹한 등가교환을 진행한 악마는 누구였을까.

악마는 예쁘디예쁜 얼굴로 웃었다. 두 번째로 진행된 지옥, 키메이커 프로그램이었다. 네가 죽은 줄로만 알았다. 불에 삼켜지는 모습을 목격했다. 아니, 보지 못했다. 소각로에 갇힌 소녀의 비명을 들었다. 아직 뜨거운 방에 들어서 남겨진 재를 눈에 담았다. 처음부터 우리 안에 스며들어 겁에 질린 얼굴 뒤로 웃고 있었던가. 한 명씩 죽음으로 떨어지는 것을 그저 보고, 방관하고 있었는가. 도대체 무얼 위해.

당연히 세상을 위해서죠. 연갈색의 머리칼 아래, 악마의 녹색 눈이 활짝 휘었다.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현실이었다. 동시에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었다.

시간이 흐른 후 세 번째 키메이커 프로그램에서 재회한 악마는 여전히 예쁘게 웃고 있었다. 다시 찾아와주다니, 예상외네요. 아리스카와 테오도르는 악마를 향해 총구를 겨누었다. 미소는 흐려지지 않았다. 절 쏘려고요? 청량한 웃음소리가 겨울바람에 울려 퍼졌다. 이해할 수 없네요. 그때나 지금이나, 이렇게 세상을 위해 노력하는데, 커다란 그림을 보지 못하는 이들은 늘어만 갈 뿐이니.

차가운 철이 철을 마주하고, 총알이 오갔다. 하얀 눈에 진홍색이 흩뿌려졌다. 악마도 붉은색의 피를 흘리는구나. 소녀의, 여인의 웃음은 밝았다. 악마라니, 실례네요. 기왕이면 선구자라 불러주세요. 이 세계를 다음 단계로 이끌 선구자요. 백발의 겨울 신령과 함께 악마는 회색으로 물들어가는 세계로 모습을 감췄다.

거짓처럼 유토피아 프로젝트는, 준 이엘은 홀연히 사라졌다. 아물지 못하는 상처를 품고 버려진 아이들은 매정하고 냉정한 세상을 홀로 헤쳐 나갈 수밖에 없었다. 악마를 쫓을 흔적은 남지 않았지만, 그들의 기억에 새겨진 흉터는 무엇보다도 깊고 선명했다. 그렇지만 세상의 눈에는 그뿐이었다. 세상은 그들의 편을 들어주지 않는다는 걸, 그들은 알고 있었다. 단죄를 요구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용서할 수도 없었다.

그렇기에 우리는 손에 검을 들고 총을 장전했다. 세상의 정의가 합당한 처벌을 내리지 않는다면, 우리가 직접 손에 피를 묻혀서라도 그들에게 같은 지옥을 선사하리라 외친다.

잊지 않겠어, 그 피로 물든 끔찍했던 시간을. 피기도 전에 져버린 너희의 어린 목숨을. 무심하고 잔인한 손으로 너희를 꺾어버린 악마의 형상을.

세 번 진행된 키메이커 프로그램. 세 개의 물망초. 추모의 꽃이자 다짐의 상징이었다. 작디작은 꽃에 바친 그들의 맹세였다.

* * *

노트북 화면을 보며 작업하던 아리스카는 뻑뻑한 눈을 거칠게 문질렀다. 한창 집중하다 보니 어느새 시간이 저녁을 지나 한밤중을 달리고 있었다. 몇 시지, 벽에 걸린 시계를 흘끗 본다. 4시가 다가오는 시각이었다.

아리스카는 작업하던 화면을 확인했다. 조금만 더 하면 완성하고 잘 수 있을 것 같은데, 미련이 그의 손길을 잡아끌었다. 조금만 더. 자가최면처럼 되뇌며 팔을 쭉 뻗는다.

“---”

거의 들리지도 않는 작은 소리였지만, 아리스카의 청각은 그 울먹임을 민감하게 잡아냈다. 팔을 뻗은 상태로 잠깐 굳었던 아리스카는 눈을 비비며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마도… 그거겠지. 한동안 괜찮나 싶었더니 악몽이 다시 찾아온 모양이었다.

내리는 눈처럼 소리 없이, 아리스카는 란의 방문을 열고 들어섰다. 책상과 옷장, 침대밖에 없는 다소 소박한 풍경이었다. 불이 전부 꺼져있어 암흑에 익숙해지려 아리스카는 눈을 깜빡였다. 시야가 어느 정도 돌아오자 침대 위에 태아처럼 몸을 웅크리고 잠든 란의 모습이 보였다. 간헐적으로 떨리는 몸과 새어 나오는 신음이 그의 악몽을 증명했다.

아리스카는 란이 깨지 않도록 침대 끝에 가볍게 앉았다. 그를 억지로 깨우면 공황에 빠진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 알았다. 자기 눈가를 문지를 때와 달리, 부드럽게 그의 금발을 다독였다. 아리스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이런 작은 위로밖에 없었다. 말도, 소리도 없는 온기를 줄 뿐이었다.

완전히 깨지 않은 청회안이 녹안을 마주했다. 꿈에서 한참 울었는지 눈시울이 약간 붉어져 있었다.

“가지 마… 나만 두고 가지 마….”

평소 밝게 웃던 아이의 무의식 속 깊은 곳에서 토해지듯 나온 말이었다. 아무리 말을 삼키고 감정을 숨겨도 아리스카도, 테오도르도 란이 지닌 불안을 모를 리가 없었다. 그렇기에 매정하게 대할 수 없는 아이였다. 그의 미래를 위해서라는 명분에도, 그를 두고 갈 수 없는 이유였다.

“아무 데도 안 가. 불안해하지 않아도 괜찮아.”

들릴 듯 말듯 속삭였다. 다시 눈을 감고 잠에 빠져드는 아이를 미동 없이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가 깼을 때 악몽을 기억하지 못하기를 소망했다.

유천과 자윤, 둘에게는 서로가 있었다. 상처 가득한 어린 시절에도, 잔혹했던 키메이커 프로그램 도중에도 쌍둥이는 서로를 의지할 수 있었다. 아리스카도, 테오도르도 서로라는 지지대에 기댈 수 있었다.

란은 달랐다. 세 번째 키메이커 프로그램이 중단되기까지 홀로 버틸 수밖에 없었다. 지금도 란이 버팀목으로 삼을 가족은 그들밖에 없었다. 그러나 란을 확고하게 그들과 잇는 것은 그 무엇도 없었다. 서류상 테오도르의 입양 동생으로 등록되어 있었지만, 종이에 써진 관계가 얼마나 얄팍한지는 란도 알고 있었다.

란이 잠든 것을 확인하고 방을 나가며 아리스카는 소리 없이 한숨을 쉬었다. 그의 불안을 조금이라도 덜 수 있다면 좋으련만,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직 안 자고 있을 줄 알았지.”

낮게 깔린 목소리에 아리스카는 눈을 돌려 테오도르를 응시했다. 자다 방금 깬 걸까. 습관적으로 깊게 잠들지 않고 기척에 예민한 그였으니 그럴 만도 했다. 테오도르는 지금이 몇 시인지 알고 있냐는 책망의 눈빛을 보내다 이내 말해봤자지, 싶은 표정을 지었다. 하긴, 밤을 새운 게 하루 이틀이 아니었으니, 아리스카는 흐릿하게 생각했다.

테오도르가 란의 방문을 눈짓했다. 쟤는 괜찮대냐? 아리스카는 미묘하게 입가를 끌어올리며 어깨를 작게 으쓱였다. 일단 다시 재워놨어. 테오도르는 깔끔하게 인정했다. 그래,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그 정도밖에 없지. 테오도르가 소파에 몸을 파묻듯 던지자 아리스카는 눈썹을 추켜세웠다.

“너 오늘도 출근이잖아. 도로 자러 가는 게 좋지 않을까?”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이 돌아왔다.

“네가 그럴 말할 당번이야? 마지막으로 3시간 이상 잔 게 언제야?”

찔리는 구석이 있던지라 아리스카는 시선을 살짝 피했다. 잘 거야. 조금 있다가. 변명처럼 하는 말에 테오도르는 그저 눈을 굴렸다.

아직 켜져 있는 노트북 화면에 잠깐 눈길을 주었다. 이어서 일할 기분이 들지 않았다. 란을 다독이고 나온 후 가라앉은 마음은 원상태로 돌아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악몽에 시달리는 건 비단 란뿐만이 아니었다. 디셈버의 누구도 폐허 같은 과거의 잔상에서 자유롭지 않았다.

아리스카는 말없이 테오도르의 곁에 앉았다. 오가는 말은 없어도 어느 때보다 확실하게 전달되는 감정이었다. 밤은 아직도 깊고 어두웠다.

* * *

디셈버는 래디컬 그룹으로서의 악명도 자자했지만, 별개로 개인의 이명 또한 대중에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림자의 고요함을 이용해 적의 숨통을 쥐어트는 판타즈마. 빠르고 날카롭게, 자기 능력인 전기처럼 파고드는 라요. 얼굴도 능력도 알려지지 않았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서 디셈버의 등을 든든하게 받치는 아논.

그리고 한겨울 같은 혹독한 한기의 손길로 적을 얼려버리는 제로. 붉은색 망토보다 진한 적의 피로 아스팔트 바닥을 적시는 카디날. 디셈버의 중심을 이루는 두 인물이었다. 누구도 그 사실을 의심치 않았다. 동시에 유천, 자윤, 란에게는 지지대이자 안식처이기도 했다.

그럼 아리스카에게 테오도르는 무엇이었을까. 테오도르에게 아리스카는 무엇이었을까.

그들은 인생에서 가장 끔찍했던 시간을 공유한 사이였다. 이제 그 핏빛으로 물든 추억이 있는 사람은 세상에서 셋밖에 남지 않았다. 그 고통을 나눌 이는 한 명밖에 없었다.

아리스카는 고개를 돌려 옆에 앉은 테오도르를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을 느꼈는지 테오도르 역시 눈을 굴려 그를 응시했다. 왜? 소리 내 말 하지 않은 물음이 방안을 잔잔히 울렸다.

기억해? 나와 똑 닮아 누구라도 남매라 알아볼 수 있었던 비비안을. 외모는 다른 부분이 많았지만, 성격도 습관도 너와 비슷했던 네 사촌 티모시를. 우리 곁에 다른 아이들보다 조금 더 길게 머물렀다가 갑작스레 사라진 웬디를.

악마의 실험에 희생된 그들의 생김새를, 목소리를, 유언을 아직 기억해?

물어볼 수 없었다. 차마 생각을 말로 옮길 수 없었다. 자신을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굳이 테오도르의 상처를 후벼 파고 싶지는 않았다. 그가 부러 티모시를, 키메이커 프로그램의 희생자들을 떠올리지 않는 걸 알고 있었다. 때로 잔인할 만큼 냉정했지만, 그는 자신보다 현명했으니까.

거울을 볼 때마다, 유리에 비친 제 녹안을 마주할 때마다 아리스카는 비비안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일부러 흔적을 찾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 누구보다 소중했던 사람이었으니, 작은 추억이라도 잊고 싶지 않아, 희미해지는 기억을 필사적으로 잡았는지도 모른다.

미련한 짓이라는 걸, 쓸데없는 짓이라는 걸 알았다. 더는 이 세상에 없는 비비안도 알고 있겠지. 그러니 꿈에 나타날 때마다 가지 말라고 그리 부탁하고 애원해도, 말 한마디 없이 그저 웃으며 사라질 뿐이겠지.

심장이 뜯겨나가 비명을 지르고 싶은 아픔 속에도, 테오도르가 있었기에 삭힐 수 있었다. 차마 아이들 앞에서는 내색할 수 없었다. 이미 충분히 버거운 짐을 진 그들의 작은 어깨에 무게를 더 지우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기에 테오도르의 존재는 아리스카에게 특별하고, 소중할 수밖에 없었다.

그건 테오도르도 마찬가지였다. 아리스카는 알고 있었다.

동료라고 하기엔 너무 가까웠다. 친구라고 하기엔 공유하는 고통이 너무 컸다. 새로운 가족이라 하기엔 먼저 떠나보낸 이들이 마음에 걸렸다.

그들은 그저, 서로에게 ‘유일’이었다.

* * *

유토피아 프로젝트의 파멸. 준 이엘의 속죄. 오로지 그 하나만을 보고 달려왔다. 아직 한참 멀고도 험한 길이 남아있다는 것을 그들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끝나지 않을 것만 같던 가시밭길도 언젠가는 끝에 다다르기 마련이다. 12월이 지나 겨울의 눈이 녹고, 봄이 오는 게 정해진 순리인 것처럼. 끝이 좋지 않을지라도, 살아남아 보지 못할지라도. 한 번쯤은 생각해보게 되었다.

그 끝에 서는 자신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행복일까, 슬픔일까. 성취감, 후련함, 혹은 후회여도. 모든 것을 내려놓고 고개를 들어서 본 세상은 어떤 빛을 띠고 있을까.

아리스카는 알 수 없었다. 아카식 레코드에 접속해서 본 기록은 그 먼 미래를 그에게 허용하지 않았다. 수많은 가능성 중 빛이 발하는 세계를 보게 될지, 어둠에 잠식된 세계를 보게 될지는 레코드조차도 모르는 일이었을까. 그 작은 희망, 가능성에 의지해 그들은 나아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들이 그토록 원하던 세계가 온다면. 그들은 그 세계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을까.

“있잖아, 아직은 먼 가정이라 해도 말이야. 우리가 더는 디셈버 활동을 안 해도 된다면 뭘 하면서 살고 싶어?”

그들 중 가장 일반인의 삶에 동경을 보내는 란이 한 질문이었기에 방에 있는 모두가 진지하게 침묵했다. 그러게, 뭘 하고 있을까. 자윤이 웅얼거렸다. 넌 뭘 하고 싶은데? 유천은 역으로 질문했다.

“나? 나야 뭐… 경찰이 되어 사람들을 돕고 싶은데. 유토피아 프로젝트가 사라져도 여전히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은 있을 테니까.”

현직 경찰로 근무하는 테오도르를 힐끗 보면서 란이 우물쭈물 대답했다. 테오도르는 그저 정보를 더 수월하게 캐기 위해 경찰에 잠입한 것뿐이라고 정정해주지 않았다. 턱을 손에 궤고 고민에 빠져있던 자윤이 대화를 이어갔다.

“난 아마 음악을 계속하지 않을까? 달리 끌리는 것도 없고. 피아노 치는 건 좋아하니까 그런 삶도 괜찮을 것 같애.”

발랄하게 말을 끝내고 쌍둥이를 쳐다봤다. 나도 이어서 말해야 하는 거였어? 다소 귀찮은 기색이었지만 유천도 순순히 입을 열었다.

“다들 좋아하는 것을 하며 살겠지. 난 뭐, 요리로 먹고 살지 않을까. 자윤이 돈을 못 벌면 내가 할 수밖에.”

웃겨 정말. 내가 너보다 잘 벌 거거든? 그 자신감은 대체 어디서 오는 건데. 둘이 투닥거리는 것을 아리스카는 가만히 지켜보았다. 그래. 그날이 온다면, 아이들은 계속 앞으로 나아가겠지. 안도와 동시에 부러움을 느꼈다.

“아리스카는?”

세 쌍의 눈동자가 그를 바라보았다.

아리스카는 잊고 살아갈 자신이 없었다. 오로지 하나의 목표만 보고 달려온 그였다. 그러기에 곤란한 미소만 지었다. 글쎄. 깊이 생각해본 적은 없는데. 마찬가지로 곤란한 얼굴의 테오도르에게 시선을 주었다.

테오도르는 잊고 살아갈 생각이 없었다. 복수와 단죄만이 그를 이루는 모든 것이었기에. 란의 악의 없는 질문이 정곡을 찔렀는지도 모른다. 테오도르 역시 어깨만 으쓱일 뿐 답을 주지 않았다.

멀지 않은 과거의 질문이었다. 지금도 그들이 그 질문에 답을 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그래서 아리스카와 테오도르는 서로의 손을 놓을 수가 없었다. 그들은 서로의 나침반이자 이정표였다.

* * *

새벽이 잘게 부서져 빛을 발하며 방으로 새어 들어왔다. 아리스카도, 테오도르도, 아직 잠들어 있는 란도 고요한 침묵을 지켰다. 옆에는 없지만 유천도 자윤도, 그들의 보금자리에서 조용히 아침을 맞이하고 있겠지.

길고 긴 밤의 끝에는 여명이 떠오른다. 그 빛을 믿고 앞으로 나아간다. 그것이 그들의 결의이자 의지였고, 약속이었다.

아리스카가 창문으로 다가갔다. 자신의 그림자가 옅게 비치는 차가운 유리 위로 손이 닿았다. 그의 손끝에 12월의 빛무리가 모여들어 작게 반짝였다.


Written 18-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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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로그의 그림은 차타(@chata_commi)님의 커미션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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