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26일
"요새 인형 탈 쓰고 방송들을 하더라. 예능용으로 좀 재밌어 보이던데?"
성훈은 오물대던 입을 멈췄다. 둥그렇게 놀란 눈으로 테이블 건너편의 스트리머를 바라본다. 늘상 고양이 귀 헤드폰을 쓰고 방송을 켜는 그는, 대단히 진지한 표정을 지은 채다. 성훈은 입술을 덮었던 짬뽕 면 가닥을 겨우 후루룩 삼켜낸다. 이 가게는 아무래도 간이 좀 센 편이다. 무의식적으로 스테인리스 물컵을 들어 입을 헹궜다.
"......버추얼 유튜버?"
"그렇게 부르나? 거, 일본에 뭐시기 아이도 있잖아."
"그, 그게 버추얼 유튜버야, 형."
"너 맨날 기계 뒤집어쓰고 하던 거랑 비슷한 거 아니냐?"
VR 채팅의 이야기였다. VR 기기를 착용하고 자신의 3D 아바타를 꾸미고, 다양한 가상의 월드에서 전 세계 사람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는 VR 프로그램. 메타버스니 뭐니 하는 것의 돌풍이 부는 현시점에 있어 아주 흥미로운 프로그램이 아닐 수 없지만, 성훈과 그 지인들은, 몹시 건전하지 못한 방법으로 가상현실 채팅을 즐기곤 한 터라.
성훈은 그 건전하지 못한 꼴을 도화에게 들킨 꼴사나운 과거가 있다.
매운 내가 나는 국물이 코로 역류한다. 성훈은 몇 번을 쿨쩍이고 나서야 (도화가 쯧쯧대며 건넨 티슈로 코를 풀어낸 후에야) 겨우 말을 이을 수 있었다.
"으음, 비슷하긴 한데. 요, 요즘은 풀 트래킹까지 하는 버튜버는 드무니까. 간소하게 안면인식만 하기도하고......"
"그럼 웹캠만 있음 되나?"
그리 묻곤 소스로 젖어 눅진한 탕수육을 오물댄다. 볶음밥 그릇은 비워진 지 오래다. 하여간에 밥을 빨리 밀어 넣는 데엔 선수라니까. 빨리 먹지 않아도 될 때도 급하게 먹어서 문제지만. 성훈은 내심 고용주의 건강을 우려한다. 올해로 40줄에 들어선 도화다.
"움직일 캐릭터 그림도 있어야지."
"그건 뭐, 부탁하면 되고."
"하, 항상 부탁하는 분한테?"
"왜, 안 되냐?"
"아니이...... 그런데 갑자기 왜?"
"뭘?"
"서브컬처 안 좋아하는 거 아니었어?"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난 서브컬처 좋아해. 에반게리온은 극장에서 봤는데?"
"에, 에바......"
성훈은 입을 다물었다. 에반게리온은 지나치게 유명한 작품이지 않나. 물론 수작이긴 하지만 그거 하나로 서브컬처를 좋아한다고 말하기는 좀...... 따위의 덧없는 고민을 머릿속으로 흘려보내다가.
"아무튼, 어떨 거 같냐? 버추얼 어쩌고."
"완전 그쪽으로 전향할 거야?"
"아니, 이벤트 용이라니깐. 슬슬 할로윈이기도 하고."
그러고 보니 벌써 연말인가. 건더기만 남은 짬뽕 그릇을 뒤적이던 성훈은 무심코 휴대폰 액정으로 시선을 떨군다. 10월 26일 화요일. 날씨 맑음. 기온 나쁘지 않음. 대기 질 상쾌함.
"할로윈 방송에 쓸 거면...... 빨리 외주 맡겨야 할 텐데. 일주일도 안 남았는걸."
"흠, 그림쟁이 양반이 어떻게 빨리 그려주지 않을까?"
"표정을 다양하게 그려야 하는걸......"
불퉁한 표정의 도화는 스마트폰을 손에 든다. 무얼 하는지, 맞은 편에 앉은 성훈의 시야에서는 전혀 알 수 없다. 오늘은 안경을 끼지 않았다. 렌즈에 반사된 빛을 볼 수도 없다는 이야기다.
"오옷?"
기묘한 감탄음이 튀어나왔다. 느지막이 식사를 마친 성훈은 티슈로 발간 입을 닦던 중이었다.
"왜 그래?"
"이야, 작가 양반 생일이야. 이런 게 카톡에 뜨네?"
"작가......"
도진서 작가 말이야? 라는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뻔했으므로, 성훈은 급하게 입을 막는다. 손님이 제법 있는 중국집인 것이다. 도화는 맨눈으로 성훈의 행동을 뜯어보다가, 가볍게 고개를 까딱인다.
"음, 들어갈 때 뭐라도 사 가야겠는데."
"형...... 어, 언제부터 남 생일을 챙겼어?"
"이 자식이. 너 생일 때 보너스 땡겨준 건 생각 안 하고?"
맞는 말이다. 솔직히 죄다 탕진해서 까맣게 잊고 있었다. 성훈은 머쓱하게 눈웃음을 흘리다가.
"뭐 사려고?"
"전자담배."
"아, 형이 부쉈다고 했지."
"부순 게 아냐 인마. 떨군 거지."
"그, 그래서 부서졌잖아......"
"이 근처에 전자담배 매장 있나?"
"복잡한 동네니까 이, 있지 않을까... 나가서 찾아볼까?"
평일의 서점은 손님이 많지 않다. 젊은 사장은 지루하다는 표정을 얼굴에 새긴 채 카운터 너머에 걸터앉아 있다. 인테리어용 빈백에 눕듯이 앉아있던 도진은 (sns로 유입된 손님들의 성향을 고려하였을 때, 이곳을 가장 오래 점유하는 사람은 도진일 것이 명확했다) 잠시 졸았던 모양이라, 손님 없는 서점엔 적막만이 감돌았다.
"이거 편하다..."
"빈백이라고 해요. 집에 하나 두세요."
"그럴까? 좋은데......"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기지개를 켠다. 일련의 행동이 제집처럼 자연스럽다. 실제로 도진은 일주일의 절반을 서점에서 보내고 있다. 이곳을 책이 많은 별장 정도로 인식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솔직히 그래도 별 저항감은 없다. 현은 생각한다. 직원 하나 없이 혼자 꾸려나가고 있는 터라, 손님이 없으면 무척 심심한 것이다.
휴대전화 벨 소리가 울렸다. 도진의 것이었다. 꾸밈없는 기본 벨 소리다.
"여보세요...... 응? 작가님? 아뇨, 저 잠깐 밖에...... 네에, 바로 근처에...... 네? 음? 여보세요?"
짧은 전화가 끊겼다. 도진은 멍하니 착신이 끝난 휴대폰 액정을 내려다본다.
"유진 작가님이 있잖아...... 여기 오셨대."
"이 동네에요?"
"응...... 생일이라 들렀다고......"
"......그 분 천안 안 사세요? 편도로 한 시간은 걸릴 건데."
도진은 입술을 몇 번 달싹이다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인다. 생일 축하라면 메시지로 해도 충분한데. 굳이 차를 끌고 나올 필요는 없는데... 아찔할 정도로 기쁘지만 역시 미안함이 앞서는 터라.
"그, 여기로 오신대. 벌써 인터폰까지 눌러보셨나 봐..."
"아니, 그런 건 좀 일찍 얘기하시지!"
카운터 너머의 원형 의자에서 벌떡 일어섰다. 늘상 입는 후드티의 후드가 팔락, 움직인다.
"커피 내려올게요. 작가님은? 차라도 드실래요?"
"아, 난 괜찮아......"
젊은 사장은 순식간에 2층의 스태프 룸으로 사라졌다. 관계자 외 출입금지 팻말이 붙어있는 2층의 스태프 룸. 그 실상은 사장인 현이 혼자 사는 가정집. 도진은 서너 번 정도 스태프 룸에 발을 들인 적이 있다. 혼자 살기엔 조금 넓은 평수라고 생각했는데, 남는 방을 착실하게 창고로 개조해 쓰고 있던 것이 인상적이었다.
아무튼 넓은 서점에 홀로 남았다. 은은하게 흐르는 이름 모를 클래식만이 빈자리를 채운다.
'생일 선물을 주고 싶어서 왔어.'
이상할 정도로 친절하고 상냥한 사람이다. 도진은 생각한다. 그 기저에 대체 어떤 사고가 깔려있는 건지, 도진은 알지 못한다. 여자랑 결혼도 하셨었으니 아마 남자를 좋아하시는 건 아닐 테지. 그렇다면 역시 단순한 친분 혹은 우정으로 접근하는 것이 논리적인데. 과연 나에게 사람 대 사람으로 호감을 가질 구석이 있나......
하지만 상대의 선물이 기대되는 건 어쩔 수 없다.
선물받는다, 라는 행위 자체에 기대가 실린다.
가게 문에 달린 작은 종이 딸랑, 하고 울렸다. 빈백에 걸터앉은 채 고개를 떨구고 있던 도진은 무심코 고개를 든다. 예정된 손님은 유리문을 밀고 들어오더니, 무릎을 세운 채 낮은 포대에 앉아있는 도진을 내려다보며 웃는다.
"도진, 잘 있었어?"
독고유진은 붉은 장미 꽃다발을 한 아름 들고 있었다.
상상도 못 한 선물에 어리벙벙하게 얼어 있으니, 그 품에 꽃다발을 안긴다.
크기는 품에 겨우 들어오는 정도. 새빨갛게 물든 장미꽃 스무 송이가 도진을 빤히 올려다본다. 농밀하고 매혹적인 향이 새하얗던 정신을 급박하게 물들이기에, 잘게 떨리는 숨이 비어 나오는 것은 필연. 아아, 머리가 이상해질 것 같은 향이다......
"생일 축하해."
이어진 말에 정신이 들었다. 꽃에 파묻힌 도진은 엉거주춤 일어선다.
"고, 고마워요, 작가님. 여기까지 오실 필요 없는데......"
"기쁘지?"
"네, 네."
"그럼 기쁘다고만 하면 돼. 그 말이 듣고 싶어서 온 거야."
"......감사합니다. 정말 기뻐요."
유진은 살짝 올라간 눈꼬리를 접어 웃는다. 고양이보단 여우를 닮은 눈이다. 이윽고 그 시선이 가게의 뒤편을 향하기에, 도진은 뒤를 돌아본다. 현이 작은 트레이를 들고 계단을 내려오는 중이다. 테이크아웃 커피 컵이 두 개 올려져 있다. 마지막 계단을 밟고서야 두 사람을 바라보더니, 놀람과 황당함이 절묘하게 섞인 표정을 지었다.
"와, 안녕하세요. 프러포즈하신 줄 알았네."
"농담도 참."
"농담 아니에요? 생일 꽃으로 붉은 장미는 좀 과하지 않나?"
커피를 건네받은 유진은 그저 웃다가,
"올해 도진이 길吉색이 빨간색이라."
"길색?"
눈을 가늘게 뜨는 현을 바라본다.
"올해가 신축辛丑년, 도진이는 임술壬戌년 출생, 그렇다면 운성運星은 관대帶에 이번 신살神殺은 반안살攀鞍殺이군. 따라서 길색은 오午, 적색."
하나의 주문 같은 문장이었다. 여전히 꽃다발을 안은 채 얼떨떨해 있는 도진의 옆에서, 현이 고개를 주억인다.
"아하, 사주팔자? 재밌네요. 작가님 답고."
"그럼. 현 씨도 봐줄까?"
"하하, 아뇨. 그런 걸 들으면 계속 신경 쓰일 것 같아서."
두 사람은 가볍게 웃는다. 도진도 어색하게 따라 웃었다.
"전에 도진이 집에 가 본 적이 있는데, 둘이서 사는데도 집이 살풍경했거든. 꽃이라도 두면 분위기가 살지 않을까 싶었어."
"이렇게 큰 장미 다발이라면 확실히 살 것 같긴 하네요. 음, 향기도 좋네."
현이 꽃다발로 얼굴을 들이민다. 짙은 향이 부담스러웠는지, 금세 목을 뒤로 빼고 말았지만.
"기왕 오신 거 저녁이라도 드시고 가세요. 이 근처에...... 흠, 괜찮은 식당은 없지만."
"아아, 아냐. 선물도 전달했으니 이제 가야지. 실은 아직 마감을 못 끝냈거든."
"아, 요즘 웹소설 연재하시죠?"
"응. 한 달도 아니고 삼 일에 한 번씩 연재하려니 생각보다 빡세네."
유진은 그럼 나중에 보자, 라는 인사를 남기곤 훌쩍 떠나갔다. 정말로 선물만을 전하기 위해 자차를 끌고 달려왔던 모양이다. 한 손에 꽃다발을, 나머지 한 손에 물병을(트렁크에서 꺼내 준 것이었다) 들고 집으로 향한다. 해가 빠르게 저물었다. 어두침침한 거리에 가로등 대열이 긴 간격을 두고 서 있다. 확실히 계절이 바뀌긴 바뀌었구나. 그런 감상을 갖고 만다. 낮밤이 미세하게 뒤바뀐 도진에게는 이 정도의 바톤이 생활 패턴에 맞다.
한 동짜리 아파트는 시커먼 창문을 잔뜩 머금고 서 있었다. 시간만 따지자면 초저녁이라, 아직 귀가한 입주자가 없는 것이다.
도진은 이상하다고 생각한다.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10층과 11층의 그 사람들이 이 시간에 집에 없을 리 없는데.
10층에는 추리소설을 좋아하는 영상 편집자가 산다. 그 위층에는 인터넷 방송을 하는 사람(비제이? 도진은 가 본 적도 없는 클럽의 자키를 생각한다.)이 산다. 아마 11층이 10층을 고용한 것이겠지.
일전 11층의 집에 발을 들였던 일을 떠올린다. 딱히 긍정적인 감정이 남은 사안은 아니었으나, 그 감정이 11층 입주자를 표적한 것은 또 아니었으므로, 대단히 애매한 추억의 결정을 키워 보관한 채다.
아무튼 도진은 1층 현관의 문을 열고 들어선다. 물병 상자를 안은 팔꿈치로 엘리베이터의 상승 버튼을 누른다. 막 지하에서 올라오던 승강기가, 딩동 소리를 내며 멈췄다. 익숙한 얼굴들이 도진을 바라본다.
"아니, 이게 뭐야. 작가 양반. 결국 프러포즈 받은 거야?"
호들갑 떠는 목소리의 주인은 도화. 그 옆에서 놀란 눈을 하고 꽃다발을 구경하는 사람은 성훈. 11층과 10층이다. 조금 전까지 품었던 궁금증이 풀렸다. 둘이서 어디라도 갔다 왔나 보구나.
"아, 아하하, 아뇨...... 아는 작가님이..."
"작가님? 아니, 같이 사는 그 친구는 어쩌고?"
"어, 어쩌다뇨?"
"이거이거, 엄청 서운해할걸."
내심 놀랐다. 그 애를 가장 잘 파악한 사람은 나라고 굳게 믿었는데.
아니, 어쩌면 나이를 먹어서, 그 애도 방어선이 슬슬 내려간 걸까......
조금의 동요를 모호한 미소로 가렸다. 도화는 재미있다는 미소를 만면에 새긴 채다.
"나도 줄 게 있는데...... 야, 먼저 들어갈 거지?"
9층에 이른 승강기가 감속했다. 갑자기 말이 걸려 놀란 건지, 성훈은 입을 꾹 다문 채 고개를 급하게 끄덕인다. 도화는 도진의 손목을 잡고 내렸다.
현관에 설치된 동작 인식 조명이 켜졌다. 어슴푸레한 주황빛을 띠는 조명은, 일 분 정도 움직임을 인식하지 못하면 툭 꺼져버린다.
"생일 선물을 주려고."
"아니, 괘, 괜찮은데......"
"아무래도 신경 쓰였거든."
한 손에 들고 있던 검은 토트백에서 상자를 하나 꺼낸다.
"이건......"
전자담배다. 서천이 주었던 것과 똑같은 모델이다. 도화와 부딪혀 떨궈선, 소생하지 못할 정도로 박살 났던 그것의 레플리카다.
일순간 정신이 울렁였다.
그 애는 정말로 잘 있는 걸까.
도화의 말은 신뢰할 수 있나?
"부담스러우면 생일 선물이 아니라, 그냥 보상이라고 생각해도 좋고."
"아, 아아...... 네."
현관문이 등에 닿았다. 양손은 한발 앞선 선물로 가득했으므로, 도화는 도진의 아우터 주머니에 박스를 쑤셔 넣는다. 주머니 깊이에 꼭 맞는 사이즈다.
"그럼 다시 한번, 생일 축하해."
도화의 예상대로, 또한 도진의 예상대로, 필규는 장미꽃이 만개한 화분을 보자마자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작가님이 이런 화려한 꽃을 집에 두실 분은 아닌데, 와 같은 추측의 가지를 이리저리 뻗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역시 누군가에게 선물 받은 것일 테고. 보통 장미 꽃다발은 사랑의 의미를 담는다. 가족애, 동료애, 우정 따위가 아닌 순수한 로맨스 백 퍼센트의 사랑을.
"누가 줬어요? 이거."
이미 짐작 가는 사람이 있다는 표정이다. 눈동자 너머에 시퍼런 불길이 일렁일렁. 도진은 잠시 거짓말이라도 할까, 고민하다가, 들통난 사실을 숨겨 좋을 것 없다는 판단을 하였으므로.
"유진 작가님이......"
"하아...... 재혼해달라고 하시던가요?"
"아니, 아니야. 그런 거 절대 아니니까......"
지긋지긋하다는 본심을 가감 없이 얼굴에 새기기에, 도진은 다급하게 양손을 젓는다.
"아아, 아뇨. 벌써 삼 년이니까요, 우리도."
"으, 으응?"
"보통 연애는 일 년 반 정도 한다죠."
내뱉듯이 말하곤 침실로 들어간다.
아무리 둔감한 도진이라도, 이렇게 직설적인 어조라면 알아차릴 수밖에 없다.
뒤를 따라 침실의 문을 연다. 여전한 정장 차림이다. 약간 발간 얼굴로 앞머리를 쓸어올리고 있다.
엄청나게 화가 났다......
"저기......"
대답은 없다. 피곤해 보이는 눈으로 이쪽을 흘긴다.
원망하고 있다. 누구를?
"이리 오세요."
손도 까딱이지 않는다. 오로지 낮게 깔린 목소리로 명령한다. 몇 년 전의 너를 보는 것 같다고 생각한다. 가만히 눈치를 보다가, 쭈뼛대며 바로 근처까지 다가간다.
키 차이는 머리 하나 정도.
올려다볼 용기는 아직 없어서, 어깨 부근에 시선을 맞춘다.
팔로 가슴께를 감아왔다. 다른 손으로 허리를 잡는다. 화난 사람치고는 의외인 행동이라고 생각하다가, 그 팔과 손에 힘을 싣고 천천히 침대 쪽으로 밀기에, 역시 화난 게 맞을지도 모르겠다. 판단을 유보한다. 등에 침대 시트가 닿는다. 억누른 숨소리가 귀를 간지럽혀서, 기다랗게 빠진 몸이 다리 사이로 파고들어서, 아, 너도 나이가 들어서......
정장 상의도 벗지 않은 채 넥타이를 풀어 내린다.
분노로 일렁이는 눈을 도저히 마주칠 수 없어서, 시선은 한결같이 각진 어깨를 향하고 있다.
시야가 어두워졌다. 미끈한 실크의 감촉이 눈두덩에 닿는다. 익숙한 향수의 향이 코끝을 스친다.
넥타이로 눈을 가렸다?
"뭐, 뭘 하려고?"
반사적으로 사지를 움찔댄다. 왼 손목을 꽉 잡혔다. 저항하지 말라는 시그널이다.
"가만히 있으세요. 넣기 어려우니까."
시각이 차단되면 나머지 감각은 필요 이상으로 예민해진다.
은은한 향수와 물씬한 살내, 오늘따라 강압적인 톤의 목소리, 움켜쥔 손목으로 전해지는 온기, 내리누른 숨소리는 여전해서, 솔직히 야하다고 생각한다. 나 자신이 타인에게 욕망과 정념의 대상이 된다는 오싹함. 어쩌면 이것이, 연애사정의 한 축을 차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뱃속이 간질거린다. 이 애가 질투를 하고 있다. 사람다워서 사랑스럽다.
마른침을 삼켰다.
왼손가락에 무언가 차가운 게 닿는다.
약지다.
몸을 버르르 떤다.
둘레에 꼭 맞는 사이즈의 금속.
넣어졌다?
"생일 축하드려요."
"......응?"
"생일 축하드린다고요."
"생일이야?"
"생일이시잖아요, 작가님."
"생일 선물인 거야?"
"프러포즈는 해 봤자잖아요."
"왜, 왜 그렇게 되지?"
"법적으로 안 되니까."
변호사다운 말이었다.
도진은 엉거주춤 오른손을 움직인다. 상대의 왼손과 손가락을 얽는다.
넷째 손가락에 반지가 있다.
머리카락이 쭈뼛 섰다. 심장 박동수가 급격하게 상승한다.
아, 설마 아까 얼굴이 발갰던 이유는......
"......넥타이 치워도 돼?"
"아뇨."
맞잡은 손은 뜨겁다. 필시 얼굴도 그럴 테다.
"......하던 거 마저 해?"
"작가님만 괜찮으시면."
손을 끌어당겼다.
달아오른 목덜미에 입술이 닿는다.
흐려져 가는 이성 속에서 마지막으로 들은 말은,
생일 축하드려요, 작가님.
- 카테고리
- #오리지널
- 페어
- #BL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