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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과 커피와 축일

K=Potassium by KPo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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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필규에게 있어 오동현이라는 남자의 존재는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항상 로펌에 출근하는 것은 아니다. 로펌 홈페이지의 사무원 명단에도 그의 얼굴과 이름은 실려있지 않다. 하지만 업무에 골몰해 있다 보면 어느샌가 나타나선 진변의 근처에서 서성인다. 진변도 이상해하지 않는다. 오히려 사무원에게도 시키기 미안한 단순 잡무를 (이를테면, 커피를 타 오라든지, 이 문서를 프린트해 오라든지) 그에게 거리낌 없이 지시한다. 싱글싱글 웃는 얼굴로 잡무를 처리하곤, 이젠 다른 변호사들에게 얼굴을 들이민다. 그들 역시 그를 반긴다. 다시금 손에 단순 노동을 얹어준다. 그가 제이 로펌에서 하는 일은 복합기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

하루는 그가 홀로 담배를 피우고 있기에, 필규는 자연스럽게 말을 붙였다.

"저, 안녕하세요."

안경 너머의 사람 좋게 휘어진 눈이 필규를 마주했다. 상대가 윤변임을 확인하자마자 허둥지둥 담배를 치운다. 필규는 괜찮다며 만류했지만, 식어 빠진 담배꽁초는 이미 일반 쓰레기 수거함으로 다이빙한 지 오래였다.

"아아, 안녕하세요. 잠시 휴식 타임?"

"네. 커피를 좀."

"커피 좋죠. 진변은 항상 마시는 곳이 있는데, 윤 변호사님은?"

"가까운 곳 아무 데서나 먹습니다."

"커피 얘기하니 땡기네. 같이 갈까요?"

"그럴까요?

두 사람은 짧은 동행을 한다. 가장 가까운 커피 전문점은 한 블록 너머에 있다.

"제가 담배 안 피우는 건 어떻게 아셨어요?"

외투를 여미던 동현은 어깨를 가볍게 으쓱인다. 주름투성이인 녹갈색 점퍼를 걸친 채다. 그다지 따뜻해 보이지 않는다.

"윤 변호사님은 깔끔하시잖아요?"

"음, 그렇긴 한데."

완전히 납득하지는 못했다는 표정을 띤다. 동현은 필규의 얼굴을 살피다가, 입꼬리를 시익 올려 웃는다. 거뭇하게 올라온 수염이 턱을 뒤덮고 있다.

"담배 타임 가지러 나가시는 걸 못 봤거든요."

"아, 하긴. 그렇죠."

동현은 흐흐, 하며 웃는다. 필규도 따라서 멋쩍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사무원이신 건가요?"

"사무원?"

"항상 이것저것 도맡아 해주시는 것 같아서."

"도맡다니, 그래봤자 문서 카피 정도잖아요?"

"로펌은 항상 일손이 부족하니까요."

대형 프랜차이즈 커피 전문점이 시야에 들어왔다. 점심과 저녁 사이에 낀 애매한 시간대라 그런지, 매장 밖을 보고 선 키오스크 앞이 휑하니 비었다. 아메리카노와 카페라떼를 한 잔씩 주문한다. 두 잔 모두 핫이다. 요즘은 살을 에는 한파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

"저는 정식 직원은 아니에요."

"어, 그러면?"

"진변의 비서 정도?"

"비서요?"

"네, 비서. 대표님은 언제나 업무가 과중하시니깐. 제가 바로 옆에서 서포트해드리고 있죠."

"개인 비서신 것 치곤 이런저런 일을 많이 하시던데."

"변호사분들 많이 알아두면 좋죠, 뭐."

필규는 멍하니 고개를 끄덕인다. 확실히, 대표는 열성적이다. 분야를 막론한 다양한 안건을 검수한다. 인원수가 적은 로펌도 아니니 손댄 일을 혼자서 처리하기엔 그야말로 24시간이 모자랄 테다. 그렇다면 개인 비서를 두는 것도 이상하진 않다.

대표는 사람을 보는 눈이 있음과 동시에 그 기준점이 높으니, 눈앞의 그도 제법 유능한 사람일지 모른다......

두 잔의 음료가 나왔다. 필규는 아메리카노를 들었고, 동현은 카페라떼를 들었다.

"진변이 아인슈페너를 좋아하거든요. 맨날 끌려다니면서 마시다 보니 크리미한 커피 아니면 안 넘어가지 뭐예요."

사법연수원 시절에도 그녀는 초콜릿 시럽을 덜 넣은 카페모카를 좋아했다. 카페인과 당을 동시에 섭취할 수 있어서 좋다고 했던가.

하잘것없는 추억이 차례차례 떠올라서, 필규는 부러 생각의 연쇄를 끊는다. 적당히 커피 맛이 나는 아메리카노는 무척 뜨거웠다. 사고의 채널을 바꾸기에 딱 좋은 온도였다.

"요새 도박들 엄청나게 하네. 두 달 동안 들어온 건만 해도 몇 개야?"

"스물세 건."

"이해가 안 돼. 왜 돈을 잃으면서도 발을 못 빼는 거지?"

"진변이 담배를 못 끊는 거랑 비슷하지."

"이게......"

유선은 제 옆에 앉은 동현을 노려본다. 날카로운 시선을 받은 그는 익숙하다는 듯한 얼굴로 이죽거릴 뿐이다. 맞은 편에 앉은 필규는 그런 두 사람을 바라본다.

크리스마스 전야. 제이 로펌의 대표변호사와 그녀의 어쏘는 세계적 축일의 기념을 포기했다. 오늘이 야근이고, 내일이 출근일 예정이라면, 차라리 오늘 철야를 하고 내일 아침에 퇴근해서 쉬자, 라는 의견이 맞아떨어진 탓이었다.

홀리데이 시즌이라도 사람 간의 다툼은 멈추지 않는다.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성인의 말을 하루라도 깊이 되새기는 시간을 갖는다면 좋겠건만, 인간 사회라는 게 그렇게 무르지는 않은 법이다. 이미 일정은 빡빡하게도 잡혀있다. 해가 바뀌어서야 조금이나마 숨을 돌릴 수 있을 테다.

도진에게는 야근이며 철야에 대한 얘기를 이미 해 두었다. 이직 후 상당히 바빠 보이는 동거인을 늘상 걱정하던 그였다. 나는 괜찮으니 신경 쓰지 말라는 요지의 대답을 했는데, 필규는 아무래도 역으로 걱정이 되는 것이다. 제가 어울려 주지 못해 심리 위생이 악화된다면? 불안한 상태로 혼자 집에 있다가 돌발 행동을 한다면? 그러다가 아직 집에 남겨져 있는 장미꽃을 보고, 아아......

그런 고민을 현에게 털어놓으니, 이제껏 나를 탁아소장으로 생각한 게 아니었단 말이냐? 라고 하기에, 필규는 약간이나마 시름을 덜 수 있었다.

제이 로펌의 세 사람은 저녁을 먹으러 나왔다. 로펌 근처의 양식 전문 식당이다. 이미 시각은 열 시를 훌쩍 넘겼다. 밤을 새워야 하므로 저녁을 늦게 먹는 편이 철야 사이클에 도움이 된다.

"대부분 사설 토토 이용자라 딱히 중요한 건들은 아니지마는."

오일 파스타를 입가로 옮기며 유선은 투덜댄다. 필규는 각진 비트 피클을 오물대다가 입을 열었다.

"가담자도 몇 있잖아?"

"잘 기억하고 있군. 근데, 그 사람들은 운영자 유도에 억울하게 넘어갔을 뿐이라서. 증거도 확실하고. 그럼 크게 문제없지."

"음, 그렇네."

"소장 값도 안 나오는 건들이야."

"정말로 깊게 가담한 사람들은 왜 안 보이는 거지?"

"형사 전문 로펌으로 빠지겠지."

제이 로펌은 종류를 가리지 않고 안건을 수임하는 종합 로펌이다. 대표변호사인 유선은 형사 사건 전문이지만, 다양한 분야의 파트너 변호사들이 그녀의 산하에 존재한다. 대부분 그녀보다 연차가 길고 탄탄한 베테랑들이다. 그들은 그녀의 아버지가 대표일 적부터 일해왔다고 들었다. 새파랗게 어린 변호사가 대표가 되었는데도 큰 반발이 없었던 것을 보면, 아마 대표 부녀에 대한 충성도가 높은 게 아닐까. 성격은 좀 깐깐해도 리더로서의 자질은 분명한 모양이다. 필규는 이직 초기부터 그리 생각했다.

유선의 옆에서 하와이안 피자를 복스럽게 입에 욱여넣던 동현이 번쩍 고개를 들었다. 불과 몇 분 전 필규에게 피자 한 조각을 권했다가 괜찮다며 사양 당한 전적이 있다.

"아냐, 요즘은 토토 자체가 단속이 잘 안 돼."

"서버가 해외에 있어서 잡기 어렵다는 얘기는 들었는데."

"에이, 멍청한 놈들은 돈 뜯을 생각에 별 경계 없이 국내에 놓는 경우도 허다해. 그런데 얼마 전부터 국내 장사가 싹 사라졌거든."

"국내 서버가 자꾸 잡히니까 해외로 도망간 거 아냐?"

"아니라니깐. 그럼 내가 왜 이 얘기를 하겠어?"

"뭔가 다른 요인이 있다는 건가요?"

"그럼, 그럼. 그렇게 되죠. 어느 날 갑자기 셔터 내리고 사라졌다니까."

"뭔데? 그 요인이라는 게."

동현은 잠시 이야기를 멈춘다. 열심히 야금대던 피자 조각은 이제 도우 가장자리밖에 남지 않았다. 기다란 밀가루 덩어리를 갈릭 디핑소스에 푹 찍어선 크게 한 입 베어 물고, 맛있게 냠냠대다가, 두꺼운 빨대로 콜라를 쪽 빨아 마신다. 일련의 행동에 이십 초 가량이 소요되었을 쯤 짜증스러운 표정의 유선이 위협적으로 포크를 들이댄다. 동현은 급하게 입 안의 음식을 위장으로 밀어 넣었다.

"아이, 거참 성격 급하긴."

"잘리기 싫으면 잘하라고."

"넵."

"그래서...... 왜 국내 서버가 전부 문을 닫았죠?"

필규는 태연하게 필라프를 한 입 떠먹으며 묻는다. 동현은 싱글싱글 웃으며 대답한다.

"사설 토토의 배후가 대부분 조직 폭력배인 건 아시죠? 더러운 돈, 뒷세계의 돈."

"네."

"조직 폭력배의 적은 누구라고 생각하세요?"

"강력범죄수사대 아닌가요?"

동현은 고개를 휘휘 젓는다. 어느새 새로운 피자 조각을 한 손에 들곤 음미하고 있다.

"그쪽이 아무리 수사를 한다고 해도, 지역 경찰이 뇌물 받고 뒤를 봐주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데. 경찰은 오히려 협력 관계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예요."

필규의 미간이 일그러진다. 이해할 수 없다는 듯 팔 자 모양으로 내려간 짙은 눈썹을 보며, 동현은 말을 잇는다.

"조폭의 적은 더 큰 조폭이죠. 아직도 뒷세계 땅따먹기가 아주 성행이에요."

"어라, 그럼...... 큰 조직이 나타나서 작은 조직들을 정리했다는 건가요?"

"후후, 이해가 빠르시네. 역시 진변이 직접 헤드헌팅 한 분다워."

필규가 애매한 미소를 짓는 사이, 가만히 동현의 이야기를 듣던 유선이 입을 연다.

"큰 조직이 그렇게 갑자기 튀어나올 리 없잖아. 조사 제대로 한 거 맞아?"

"갑자기 튀어나온 게 아냐."

"그럼, 그 전부터 있었던 거대 조직이 토토 판에 뛰어든 거야?"

"아니, 그 반대야."

"뭐?"

"토토 판에 뛰어들었던 작은 조직들이, 하나로 뭉쳐 거대 조직이 된 거야."

"아니, 잠깐만. 방금 전이랑 얘기가 다르잖아. 큰 조직이 나타나서 작은 조직들을, 서열 정리한 거 아니었어?"

"반은 같고 반은 달라. 이게 어떻게 된 거냐면, 그러니깐...... 통일이랄까."

"통일이요?"

"통일이라고?"

"왕년의 거대 조직의 재통일. 컴백이라고 해도 좋으려나......"

동현은 비트 피클을 와작댔다.

야마시로구미山白組는 일본 전역을 주름잡던 야쿠자 조직이다. 창단은 지금으로부터 백 년 전. 간토 지역을 나와바리로 삼았던 야마시로구미는 이런저런 사정과 항쟁을 거쳐 마침내 일본의 뒷세계를 손에 넣는 데 성공한다. 그럼에도 야욕을 주체하지 못한 야마시로구미의 두목은 옆 나라까지 손아귀를 뻗치는데, 그것이 야마시로구미의 최고 전성기였던 약 사십 년 전의 일이다.

당시의 경찰은 한국으로 넘어와 나름의 현지화를 거친 그들을 야마시로구미의 이름을 따 산백山白파라고 불렀다. 본토에서 얻은 뒷세계 정복의 노하우를 한껏 발휘하여, 일본인 반 한국인 반으로 이루어진 산백파는 부산을 너무나 쉽게 손에 넣는다. 항구 도시인 부산을 거점으로 하여 자금 조달과 물품 조달 따위가 간단하게 이루어짐에 따라 산백파에게 서울로의 북상은 누워서 떡 먹기 수준이었다.

결국 십 년도 채 지나지 않아 한국의 주요 도시는 산백파와 그 하위 조직의 손바닥에서 놀아나게 되었는데, 여기서 산백파-야마시로구미 관계의 역전이 일어나게 된다.

본가인 야마시로구미의 권력과 재력을 일부분 나눠 받은 산백파가 한국을 장악하여 예상보다 더 큰 이득을 챙기게 된 것이 그 원인이었다. 당시 수십 억대의 막대한 수익을 본 산백파의 두목은 야마시로구미에게 이익을 넘기지 않으려 들었고, 오히려 간부며 부하들을 무장 시켜 야마시로구미와의 항쟁을 벌이게 되었다. 파이를 뜯긴 야마시로구미는 산백파가 성장하던 사이 다른 신생 조직들에게 견제와 작은 항쟁의 대상이 되고 있었으므로, 야마시로구미는 산백파와의 항쟁에 온전히 집중할 수 없었다. 

결국 삼 년간의 항쟁은 산백파의 승리로 끝난다. 분가가 본가를 흡수하는 꼴이 되어, 산백파는 이후 몇십 년간 한국과 일본을 동시에 휘어잡게 된다.

그러나 십 년 전, 돌연 산백파의 두목이 자리에서 물러나는 일이 발생한다. 이유는, 적어도 대다수에게는 오리무중이지만, 동현은 우연한 일로 눈치채고 만 것이다.

두목은 아이를 하나 입양했다. 그리고 그 이후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러므로 은퇴의 이유는 입양한 아이에 기인한다.

남자 혼자서는 아이를 입양할 수 없으니, 흥신소인 당신네들이 알아서 잘해보라며 한바탕 깽판을 치곤 돌아가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동현은 오금이 저리다는 감각을 그 때 처음으로 알았다. 이걸 못 해내면 우린 싹 다 바닷속 저 밑으로 가라앉을 것이라는 선연한 예감 역시 느꼈다.

하여간에, 두목의 은퇴 후 거대했던 산백파는 여러 파로 갈라지고 말았다. 들리는 소문으로는 거의 쉰 개에 가까운 조직으로 산산이 찢겼다고 한다. 한국에 서른 개, 일본에 스무 개 정도로. 이후 한국과 일본의 뒷세계는 춘추전국시대를 맞았고, 지금까지도 그러한 상황이다.

아니, 한국에 한해서는, 그러한 상황'이었다'. 

십 년의 기간을 거쳐, 산백파는 다시금 뒷세계에 얼굴을 들이밀고 있다. 삼십 개로 쪼개졌던 산백파가 어째서인지 하나로 슬슬 뭉치고 있는 것이다. 다만 이전과 같은 본격적이고 물리적인 항쟁 혈전은 벌이지 않는다. 총탄이 오가고 칼날이 번쩍이는 구식 땅따먹기는 최소한의 빈도로만 행한다. 

그들은 다만, 돈에만 관심이 있다. 절박한 사람들의 돈을 쓸어모으기 위해 사설 도박을 광범위하게 개시한다. 그 첫걸음이 요즈음 크게 유행인 사설 토토였고, 구 산백파의 피를 이어받은 작은 조직들이 하나로 모여 사설 토토의 독점을 꾀했다. 그러한 과정에서 비산백파 조직들은 하나둘 나가떨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대부분의 불법 토토 산업을 점유하게 된 산백파는 서버를 해외로 옮겼다. 이미 시장이 돌아가는 꼴을 거진 파악했던 모양이었다. 결국 국내에 서비스되는 사설 토토의 90퍼센트 이상이 국외 서버를 사용하게 되었고, 그리하여 그쪽의 경찰 수사는 실로 난항을 겪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놀라운 건, 사설 토토로 상당한 수익을 본 산백파가 다른 도박 산업에도 손을 뻗치고 있다는 점이다. 불법 도박 산업 중에서도 그나마 당당하게 영업할 수 있는 성인 오락실은 물론, 영업이 잘 되지 않는 보드게임 카페를 포섭하여 불법 도박장으로 개조시키기도 한다. 어딘가의 정보상에 따르면 폐건물의 지하에 작은 카지노마저 설치했다고 하는데, 동현은 아직 자세한 위치까지는 알아보지 못했다.

"그런 사정이 있었군요......"

필라프의 그릇이 비었다. 유선의 파스타 접시도, 동현의 피자 플레이트도 이젠 기름기만 남긴 채 텅 비었다. 시간은 슬슬 열한 시 반을 향해 가고 있지만, 아직 절반가량의 테이블이 왁자지껄한 채다. 이 양식당은 펍을 겸하기 때문이다. 오늘이 금요일이고, 삼십 분 후인 내일이 크리스마스인 탓도 없잖아 있긴 하겠다.

"그래서, 지금 잡혀 들어온 이용자며 가담자들은 전~부 얼마 없는 국내 서버를 이용한 토토의 관련인들이라는 거죠. 수사대도 실적이란 걸 쌓아야 하니까, 눈에 불을 켜고 토토 서버를 이 잡듯 뒤지고 있나 봐요."

"흐음, 외국이랑 공조 수사까지 벌이긴 귀찮다 이거지."

"당연한 거 아냐? 공조 절차가 얼마나 번잡한데. 나라도 국내부터 때려잡겠다. 얍, 얍."

마지막 남은 도우 가장자리를 작게 휘두르던 동현은, 유선의 싸늘한 시선을 받고서야 움직임을 멈춘다. 얌전히 얼마 남지 않은 디핑소스를 찍어 입으로 가져간다. 딱딱한 도우를 몇 번 우물대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더군다나 상대가 어지간히 커야지. 다른 조직도 아니고 산백파라고, 산백파."

"산백파 말인데요, 복귀한 이유가 있나요?"

"음, 흠, 글쎄요. 그쪽으론 별로 들은 게 없어서. 일단 두목이 복귀하지 않은 건 확실한데, 대체 왜 하나로 챡 모였는진 모르겠네. 돈이 궁했나?"

"다른 세력을 견제하려고 그런 거 아냐?"

"에이, 그렇다기엔 지금은 산백파에 맞설만한 조직이 없어. 다른 조직들이 허름한 동네 태권도장 사범이라면, 산백파는......"

동현은 남은 도우를 입안으로 던져넣더니, 잠시 말을 고른다.

"탑 티어 암살자 군단이지."

날이 밝지 않았다.

겨울의 밤은 무척 길다. 일곱 시가 다 되어가는 데도 태양이 머리를 보이지 않는 것을 보면.

세 사람은 여섯 시 오십 이 분에야 사무실을 나설 수 있었다. 아무래도 모두 멀쩡한 면면은 아니었으나, 어쨌거나 철야는 끝났다. 열일곱 시간이 조금 더 될 축일을 만끽할 일만 남았다.

동현은 필규에게 잠 깨는 껌을 내밀었고, 이번에는, 다행스럽게도 사양 당하지 않았다.

필규의 차가 주차장을 나서는 것을 보고 나서야 두 사람은 출발한다. 같은 차를 탔다. 유선의 잘 빠진 검은색 아우디. 운전석은 당연하게도 동현의 차지다.

"아깐 대체 뭔 생각으로 그 얘길 꺼낸 거야?"

뒷좌석에 앉은 유선이 물었다. 목소리가 제법 날카롭다. 백미러로 흘깃 보인 얼굴에 피곤이 덕지덕지 발려 있다.

"저녁 먹을 때?"

"그래."

"글쎄......"

"뭐가 글쎄, 라는 거야. 다 아는 놈이."

"그래도 눈치 못 챈 것 같았잖아, 윤변."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난 알지. 탐정이니깐."

엔진이 그르렁댄다. 동현은 천천히 액셀을 밟아 주차장을 나선다. 어둠이 내려앉은 빌딩 숲은 월급쟁이들의 수명으로 반짝이고 있다. 대단한 야경이다.

"설마 자길 찔렀던 게 산백파 두목의 아들이라곤 상상도 못 했을 걸?"

"그러니까, 하아...... 그랬으면 좋겠는데."

"그냥 동네 조폭이라고만 생각했을 거야. 그 아들내미라는 녀석도 그걸 원했을 테고."

인생의 주연은 나라는 허상 말인데, 사람이란 본래 본능적으로 거대한 무대를 회피하게 되어있다. 자신이 겪었던 일이 실은 무시무시하게 큰 카르텔의 일부라면 어떠하겠는가. 아마 당장이라도 그곳에서 벗어나 원래 자기가 누리며 살던 평화롭고 안온한 삶으로 되돌아가고 싶어하겠지. 자극에 신경이 마비된 멍청이가 아니라면야.

하지만 조금 마음에 걸리는 건, 역시 윤변은 신경이 다른 쪽으로 마비되어 있는 것 같아서......

가해자와 피해자의 대면을 떠올린다. 병실 커튼 사이로 희미하게 내리쬐던 햇빛. 그것을 등진 채 침대에 앉은 환자. 그를 마주 보고 선 부사수. 보호자용 의자에 앉아 있던 작가.

두 사람은 닮았다. 문 뒤에서 상황을 살피던 동현은 무의식적으로 느꼈다. 그것이 어디에서 비롯된 판단인지도 알지 못한 채.

───부도덕한 아버지를 갱생시키고 싶었다.

───내 손을 더럽혀서 아버지를 갱생시키고 싶었다.

───아버지는 나를 사랑하니까,

───나를 사랑하니까 갱생시킬 수 있을 거라 믿었는데,

───자리에서 내려왔으니까, 이제 한 걸음만 더 가면 끝일 거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네요. 미안합니다. 심려를 끼쳐드려서.

두목의 아들은 명백하게 사수를 죽이려 들었다.

죽이지 못한 것은 단순한 실수에 지나지 않았다.

사람을 죽이고 벌을 받는 자신을 보며 아버지도 지난날을 반성하라는 의미였을까?

자세한 내막은, 동현은 여전히 알지 못한다.

햇빛을 등지고 앉은 사수는 멍하니 부사수를 바라보다가, 믿을 수 없는 말을 뱉었다.

───지금은, 갱생하셨나요?

부사수는 그렇다고 말했다. 자신이 이곳에 있는 것이 그 방증이라 했다.

───그럼 됐습니다.

───합의를 할 거예요, 저는.

───민백 씨가 거절하든 말든.

문틈으로 병실 안의 모습이 보였다.

그 옆을 지키던 작가가 벌떡 일어났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그런 말을 하려고 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말문이 막혀선, 손으로 입을 막아선, 뒤로 몇 걸음을 물러난다.

작가의 공백으로 사수의 얼굴이 보였다.

검게 가라앉은 눈동자는 올곧게 한 곳을 바라보고 있다.

너무나 올곧아서, 동현은 등줄기가 오싹했다.

───제 부상이 헛되지 않았네요.

윤필규는 그리 말하곤 빙긋이 웃었다.

"뭐 하는 짓이야? 지금."

침실 문을 열자마자 튀어나온 목소리치고는, 심각하게 힘이 들어가 있지 않다. 철야에 운전대까지 잡고 돌아왔으니 당연한 일이다.

침대에 누워있던 현이 졸린 눈을 비비며 비척비척 일어난다. 그 옆의 도진은 일어날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다. 색색 대며 위아래로 움직이는 이불만이 눈에 들어온다.

"오, 하이."

"뭐 하는 짓이냐고 묻잖아, 하아......"

"오늘 크리스마스잖아. 손님이 끔찍하게 몰려온다고...... 바닥에서 잤다간 허리가 아파서 접대 효율이 떨어져. 너도 슬슬 알 텐데."

"소파는?"

"맥주를 좀 흘렸더니 끈적끈적해졌다."

"가지가지 하는군......"

"내가 흘린 거 아냐. 참고로 같이 자자고 한 것도 작가님."

현은 크게 기지개를 켜더니, 침대에서 내려와 옷을 툭툭 털어낸다. 늘 입는 후드티다. 무채색인 걸 보니 외출용은 아니다.

"딱 좋을 때 깨워줬네. 그럼, 난 이만."

"언제부터 주무신 거야?"

"두 시쯤이었나."

"너도?"

"비슷해."

필규는 무심코 손목을 내려다본다. 일곱 시 사십 분을 조금 넘겼다.

"영업 힘내라."

"예이. 변호사님만 할까."

현은 침실을 뒤로했다. 거실 소파에 두었던 외투를 부스럭대며 껴입곤 현관문을 나선다. 침실 문간 너머로 그 모습을 바라보던 필규는, 현관문이 닫힌 후에야 정장 자켓을 벗었다. 옷걸이에 단정하게 걸어둔다.

피로감이 정신을 훅 덮쳐왔다. 셔츠 단추를 하나하나 끌어낼 힘조차 들지 않아서, 필규는 침대에 냅다 몸을 던진다. 익숙하지 않은 체취가 아직 배어 있다. 역시 기분이 묘하다. 당장의 기분을 정확히 정의 내리지는 못하겠지만, 천칭에 매단다면 '싫음'으로 서서히 기울어지겠지. 하지만 더 이상 머리를 쓰고 싶지는 않다. 꽉 감았던 눈을 떠 코앞의 상대를 살핀다.

살짝 뜨인 눈과 마주쳤다.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았는지, 초점을 잃은 눈동자가 느릿느릿 움직인다.

"메리 크리스마스."

허리를 감싸 안는다. 저항은 없다. 마악 깨어난 사람의 갈라진 음색으로 끙끙대다가, 어깨에 얼굴을 묻어온다.

"졸리지 않아?"

"이제 자야죠."

"응...... 나도 더 자야지......"

"술은 맛있게 드셨어요?"

"응......"

"좋으셨겠네......"

겨울을 맞아 꺼낸 솜이불은 지나치게 포근하다. 이불과 같은 세트인 베개도 다를 것은 없어서, 매우 폭신하니 좋다.

투명한 창문으로 비쳐 들어오는 늦은 햇살은 야속하게도 밝고 청명하다. 그럼에도 그는 연이은 야근과 철야로 아주 피곤했고, 품 안에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고, 타인의 체취는 더 이상 코끝을 약 올리지 않았으므로, 육체도 정신도 금세 그로기 상태가 되고 말아서.

아, 크리스마스 계획은 자고 일어나서 생각하자......

"안녕히 주무세요......"

대답은 없었다.

새근대는 숨소리만이 지근거리에서 들려온다.

필규는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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