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목꾼

뭔... 숙제

1차창고 by 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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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걸 ‘이상 없음’으로 보고해야 하나? 가가는 고민했다. 체크 혹은 엑스 둘 중 하나로 표시하는 점검표로 걸러낼 수 있는 이상 징후는 없었다. 냄새, 고약하고. 방 온도, 얼어붙었고. 조도, 어두컴컴하고. 모든 게 정상이다. 대통령 각하께서도 보존액의 점도가 마음에 드시는지 누워서 만족스럽게 웃고 계신다. 가가는 페페를 전 대통령이라고 불러야 할지 고 대통령이라고 불러야 할지 헷갈려서 그냥 ‘대통령 각하’라고 불렀다. 가가는 어릴 때 그 눈부신 후보에게 표를 던질 권리가 아직 없다는 것을 진심으로 아쉬워했다. 조바심을 낼 필요는 없었다. 가가에게는 어른이 되고 나서도 세 번이나 페페의 당선에 표를 보탤 기회가 있었으니까. 14년 동안 대통령이 바뀌지 않은 것처럼 페페의 모습 자체도 약간 나이 먹는 걸 제외하면 크게 변하지 않았다. 짙은 눈썹과 의지가 강한 눈, 중후한 코. 그러나 입은 14년 동안 똑같은 모양의 풍성한 콧수염에 가려서 안 보였다. 가가는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방금 처음으로 각하의 미소를 봤구나!

 각하의 콧수염이 사라졌다. 각하께서는 생전에 모든 것을 계획해 두셨지만 이건 아닐 것이다. 각하께서는 서거 후에도 그 육신을 영구 보존하여 조국의 국민들에게 사라지지 않는 혁명의 상징이 기꺼이 되고자 하셨다. 하지만 아무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지도자라도 죽고 나면 할 수 없는 일이 있다. 알 수 없는 이유로 감쪽같이 사라진 콧수염을 다시 기르는 것이다. 누가, 어떤 의도로, 어떤 악의를 품고 이런 짓을 한 걸까?

 여길 들어오려면 보안 카드가 필요하다. 페페의 시신은 8개월간 보존액에 담가 놓기로 되어 있었고, 격일로 당번 두 명이 상태를 점검하러 온다. 점검표는 보존액 탱크 옆에 있어 지난 점검 기록들을 모두 볼 수 있다. 가가는 그걸 들춰보았지만 아무도 이 참사에 관해 언급하지 않았다. 가가는 이게 당번들 사이에서 최초 발견자가 되지 않기 위해 폭탄 돌리기를 한 결과라고 추측했다. 가가의 직전 근무는 일 주 전이었는데 분명 그때까지만 해도 각하의 콧수염은 멀쩡했다. 그러니 이 재앙은 그 7일 사이에 일어났을 것이다.

 가가는 만약 이 일을 상부에 보고하면 범인으로 몰릴 가능성이 있는지 진지하게 따져 보았다. 반역자로 몰리는 상상을 하면 배신당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가가는 자신의 사상적 순결에 자신이 있었다. 다른 당번들이야 켕기는 게 있겠지. 하지만 가가가 생각하기에 자신은 달랐다. 그가 페페 정부에 헌신적이었다는 사실은 상부의 누구나 알고 있으니 이 기이한 사건을 언급한다고 해서 자신의 신용이 크게 깎이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다 이 일을 누군가 보고해야 한다면 자신이 해야 한다는 중압감마저 느꼈다. 

 가가는 이제 앞으로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머리를 굴렸다. 후환이 두렵다면 수습할 수 있을 때 상부에 보고하는 게 맞다. 문제는 언제나 지각하는 당번 파트너 티티였다. 티티가 지각하는 바람에 콧수염이 사라진 걸 처음 봤다고 서로 증언해 줄 사람이 없었다. 물론 그런 증언은 짜고 칠 수 있으니 그렇게까지 방탄은 아니겠지만, 최소한 파트너와 함께 이걸 발견했다면 티티가 먼저 온 자신이 각하의 수염을 밀어버렸다고 믿어 버리는 위험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티티가 가가에 대해 나쁜 착각을 하는 건 법정에서는 별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증거가 없으니까. 하지만 티티가 가가에 대해 어떤 종류든 의견을 가지는 것은 상당히 위험했다. 장의사든 묘지기든 죽음과 가까운 데서 일하는 사람은 가끔 이상할 정도로 현재에 탐닉하는데, 티티가 그랬다. 티티는 아무리 나눠줘도 닳지 않는 커다란 사랑을 품고 살았다. 티티는 페페의 시신을 관리하는 일을 맡기 전 민간 기업에서 일했다. 엠버밍이라는 일을 했는데, 운 나쁘게 죽는 외국인들이 비행기에 실려 고국에 돌아갈 때까지 부패하지 않도록 처리하는 것이다. 관광 사업으로 먹고 사는 이 나라엔 발을 들였다가 해파리에 쏘이든 강도에 당하든 죽는 외국인은 많았다. 티티는 이 직업에서 배운 영어를 휴양지에서 외국인을 유혹하는 데 써먹었다. 그는 말을 잘 했다. 약간의 소수언어 악센트조차 음악적 효과를 발휘했다. 그가 타깃을 설정하고 마음을 먹으면 대화 주제로 검열하는 소재는 없었다. 그러니 가가는 걱정할 수밖에 없었다. 걸신 들린 떠벌이가 콧수염 실종사건을 지나칠 리 없다. 그러니 자신이 암묵적으로 반역자인 것처럼 소문이 도는 경우는 피해야 했다. 

 티티가 이 방에 들어온 건 가가가 콧수염 사태를 발견한 지 35분 후의 일이었다. 가가는 티티가 콧수염을 확인하기 전부터 처음부터 이렇게 되어 있었다고 해명을 시작했다. 티티는 가가의 말을 들은 척 만 척하면서 페페의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한참을 그러고 있다가 심각하게 말했다.

 “뱅크시 짓일 거야. 뱅크시는 신출귀몰하니까. 분쟁지역이나 전쟁터에서도 예술 작품을 남긴대. 이번엔 여기까지 들어온 거지.”

 가가는 어이가 없었다.

 “철문이 다섯 갠데?”

 티티는 장난 치는 것 같지 않았다. 그러나 가가는 이게 명백히 장난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티티는 장난을 칠 때마다 학술원에서 발표하는 듯 행동했으니까. 

 “하지만 이건 참여예술적인 측면이 있어. 우리 나라의 정치에 한 방 일침을 날린 거야. 각하의 콧수염을 잘라 가져가서 뭐, 액자에 넣어 미술관에 걸어 놓을 수도 있는 거고.”

 “그럼 그게 진짜 각하 콧수염인지 누가 어떻게 알아.”

 “현대미술은 그런 거래. 작업의 과정을 모두 아카이빙하고 증거 사진을 남겨서 작품보다 작품을 만들게 된 맥락을 부각하는 거야.”

 보나마나 티티는 얼마 전에 예술가와 데이트라도 했을 테다. 이런 심각한 상황을 자신의 교양을 뽐낼 구실로 삼는 게 징그럽긴 했지만, 그래도 가가는 티티가 자신을 의심하지는 않아서 한숨 돌렸다. 티티는 보존액 튜브 뚜껑에 바싹 들이댄 얼굴을 떼지 않고 말했다.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야?”

 “보고해야지.”

 “미쳤어?”

 “일이 더 커지기 전에.”

 “우리 정부가 언제 일이 커질 때까지 기다리는 꼴을 본 적이나 있어? 그냥 초기에 싹을 자르겠답시고 끌고 가서…….”

 “말 조심해.”

 가가가 콧수염 때문에 심란해하고 있는 동안에도, 티티는 당번으로서 해야 할 작업을 마쳤다. 그리고 라텍스 장갑을 벗어 의료 폐기물 쓰레기통에 돌돌 말아 버렸다. 그리고 결심이 선 듯 무겁게 입을 열었다. 

 “그냥 가짜 콧수염을 붙여 놓자. 소장님은 구분 못 하실 거야.”

 가가는 이번에도 티티가 농담을 하고 있는 줄 알았다. 그런데 티티는 인모를 구할 수 있으면 제일 좋다느니, 이런 걸 잘 복원해 주는 친구를 안다느니, 보존액에서 몇 달식이나 불어도 떨어지지 않게 하려면 접착제가 아니라 살갗에 수염을 꿰매야 한다느니 하는 구체적인 계획을 제법 진지하게 늘어놓는 것 아닌가. 가가는 티티를 이해할 수 없었다. 

 “왜 솔직하게 말하면 될 일을 복잡하게 만들어? 네가 이렇게 일을 얼렁뚱땅 수습하려는 건 진짜 범인을 잡는 걸 늦추는 꼴밖에 안 돼.”

 티티는 가가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말했다. 

 “네가 이 일을 보고하면 범인은 정말로 빠르게 잡히긴 할 거야. 소장님의 리스트에는 총살당해야 할 사람이 죄목보다 많거든.”

 가가는 미간을 찡그렸다.

 “그런 농담은 공무원이 할 만한 게 아냐.”

 티티는 대수롭지 않게 받아쳤다.

 “공무원이니까 이런 농담 하지.”

 하지만 가가는 도무지 마음을 가볍게 먹지 못했다.

 “반역자가 여기까지 침투했으니 보존실을 옮겨야 할지도 몰라. 역시 보고해야겠어.”

 가가가 날쌔게 보존실 밖을 나가려고 했을 때, 티티는 마지막으로 그를 가로막고 서서 말했다.

 “네 말대로 여긴 철문만 다섯 개야. 누군가 들어올 수 있을 리 없고……. 소장님께서는 수염을 밀어버린 범인이 우리 중에 있다고 생각할 거야. 일단 그렇게 되면 반드시 네가 얼굴을 아는 사람 중 한 명은 죽어. 아마 우리 중 제일 윗선에 밉보인 사람이겠지. 옛날에 레닌의 시신이 잘못되었을 때 스탈린이 기술자 두 명을 처형했대.”

 가가는 또박또박 말했다.

 “우리 나라는 소비에트 같은 독재국가가 아니야.”

 티티는 답답해서 죽을 것 같았다. ‘국가 원수로 미라 만드는 나라는 명백히 독재국가다’라고 말하고 싶은 마음이 차올랐지만, 그랬다가는 가가한테 밀고를 당해서 으슥한 지하실로 끌려갈 것 같아 그냥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이 나라에선 대통령의 콧수염을 잘랐다는 이유로도 죽을 수도 있어!”

 가가는 태연하게 말했다.

 “너는 안 죽어. 나도 그럴 거고.”

 “왜?”

 가가는 완전한 믿음으로 대답했다.

 “우린 각하의 콧수염을 밀지 않았으니까.”

 가가는 티티를 뿌리치고 ‘기타 특이사항’란이 채워진 점검표 파일을 들고 보존실을 나갔다.

 

*

 가가는 연구소장 제제의 사무실에서 나오는 길이다. 약간의 흥분으로 맥박이 살짝 빠르게 뛰었고, 뺨도 평소보다 붉었다. 흥분한 건 평소 만날 일 없는 소장과 대화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역시 근본적인 이유는 자신이 틀리지 않았다는 데서 오는 희열이었다. 솔직하게 보고하길 잘했다! 가가는 새 업무를 맡아 추가수당을 받게 되었다. 가가는 비밀 조사 작전의 총책임자가 되었다. 

 티티의 예상과는 다르게, 제제 소장은 사악한 권력자가 아니었다. 티티가 외국인들과 난잡한 관계를 갖거나 정부에 대한 위험한 농담들을 즐긴다는 이유로 그에게 모든 죄를 뒤집어씌워서 총살하지는 않았다. 제제는 합리적인 사람이었다. 소장은 가가에게 이 황당한 사건의 전말을 탐정처럼 밝혀줄 것을 요구했다. 국민들에게 대통령의 시신이 훼손되었다는 사실이 알려져서는 안 되기 때문에 수사기관을 개입시킬 수는 없었다. 그래서 내부에서 범인을 물색할 믿을 만한 사람으로 가가가 낙점된 것이다.

 철문 다섯 개를 뚫고 위치조차 민간에 알려지지 않은 보존실로 외부인이 들어왔을 가능성을 배제하면, 용의선상에는 총 14명이 올랐다. 2인 7조의 인력풀. 그중 알리바이가 확실한 사람들을 제하고 나면 용의자는 4명으로 줄어든다. 랑랑, 노노, 구구, 그리고 티티도 마땅한 알리바이는 없어 여기 들어간다. 가가는 이 네 명을 돌아가면서 심층적으로 조사했다. 필요하다면 미행을 하고 소지품을 뒤졌다. 하지만 아무래도 가가는 프로 수사관이 아니기 때문에 허술했다. 그는 랑랑의 가방을 뒤지려다가 바로 들켰다. 랑랑은 몹시 불쾌해하면서 대체 왜 이런 짓을 하고 있냐고 캐물었다. 가가는 우물쭈물 변명했지만 랑랑은 계속 뭔가 숨기고 있는 게 다 뻔히 보인다면서 오히려 가가를 압박했다. 가가는 결국 실토했다. 

 “선생님께서는 지금 각하의 콧수염을 밀어 버린 범인으로 상부에서 의심을 사고 계십니다. 저도 명령받은 일이라 어쩔 수 없어요.”

 랑랑은 그게 뭔 황당한 소리냐는 듯 가가를 쳐다봤다.

 “각하의 콧수염을 밀어 버렸다고?”

 “상부에서는 제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범인을 가려 낼 권한을 주셨습니다.”

 랑랑은 대체 뭐가 문제인지 모르는 듯했다.

 “콧수염이야 다시 붙이면 되는 게 아닌가? 배우들이 자주 하는 것처럼.”

 “장례업에 종사하는 사람으로서 이게 무슨 의미인지 모르십니까? 이것은 시신에 대한 모독입니다. 반역죄로서 엄하게 다스려야 한다고 소장님께서 그러셨어요.”

 랑랑은 타이르듯 말했다.

 “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군, 각하께서는 서거 직전에 면도를 하고 돌아가셨어. 우린 보존액 속에서 가짜 콧수염의 접착제가 자꾸 떨어지니까 그냥 제거했다가 나중에 붙이기로 한 것 뿐이야.”

 가가는 혼란스러워하는 티를 숨기지 못했다. 

 “‘우리’요? 선생님께서 각하의 콧수염을 밀어 버리신 겁니까? 혼자 하신 일도 아니고요!”

 랑랑은 주변을 살피고 조용히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밀어 버린 게 아니라 원래 없었다니까……. 가가, 이 녀석아.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해. 진짜 콧수염이 문제가 되는 게 아냐. 소장님께는 사건이 필요한 거야. 우리의 시선을 돌릴 만한…….”

 “시선을 왜 돌리죠? 뭐로부터요?”

 랑랑은 대답을 회피했다. 가가가 끈질기게 캐물어도 이런 뜬구름 잡는 말밖에는 하지 않았다.

 “소장님이 실력도 경험도 없는 너한테 왜 이 일을 맡겼는지 알겠다.”

 가가는 어리둥절했다. 대체 그게 무슨 말이냐고 물으니 랑랑은 알고 싶으면 오늘 근무 끝나고 새벽 한 시에 비품실로 오라고 속삭였다. 그날은 화요일이었고 새벽 한 시 전에 제제에게 비밀 조사 작전의 진척에 대한 브리핑을 해야 했다. 가가는 계속 랑랑의 말에 대해 생각했다. 무슨 맥락에서 나온 이야기인지는 모르겠지만, 실제로 이 일을 하게 된 계기는 가가가 생각해도 꽤 특이했다. 예전 직장에서 극비 서류를 전달하느라 제제 소장의 사무실로 직접 심부름을 갔다가 이렇게 된 것이다. 그때 소장이 무슨 일 하냐, 힘들지는 않냐 같은 시시콜콜한 얘기를 몇 마디 물어보더니 바로 다음날 전화로 주소를 전달받았다. 그렇게 보존실에서 일하게 된 것이다. 

 가가는 첫 번째 조사 현황 보고를 위해 보고서 파일을 들고 제제의 사무실로 들어갔다. 용의자를 가려낸 경위와 랑랑의 이상한 진술에 대해 이야기하자, 제제는 손을 비볐다.

 “각하께서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알아?”

 “급성 심장 발작이 아닙니까?”

 “심장병은 갑자기 찾아오는데, 콧수염을 밀고 죽을 준비를 할 수 있겠어? 랑랑은 자네를 교란시키려는 거야.”

 브리핑이 끝나자 가가는 깍듯하게 인사하고 문으로 나섰다. 그러다 불현듯 생각이 나서 왜 자길 보존실에 고용했냐고 여쭈었다. 사실 그는 화장터에서 일했기 때문에 이 일에 적격자는 아니었다. 온도와 습도를 조절하는 기계를 점검하는 일은 할 수 있었지만, 라텍스 장갑을 끼고 시신의 자세를 바로잡는 일은 늘 파트너의 몫이었다. 가가의 질문에 제제는 웃으면서 대답했다.

 “뭐가 힘드냐고 물었을 때의 답이 좋았어.”

 가가는 문을 닫고 나오면서 생각했다. 내가 어떻게 대답했더라? 그는 경찰 밑에서 일했다. 보존실에서의 8개월이 끝나면 다시 거기로 돌아갈 것이다. 가가는 거기서 끔찍한 강력범죄로 죽은 피해자들을 화장했다. 상관은 법의학자들이 시신에서 수사에 필요한 정보는 모두 찾아냈으니 걱정 말고 화장하라고 말했다. 치안이 많이 안 좋은 곳인지 일을 쉴 틈이 없었다. 학대당한 흔적은 심심찮게 보였지만 의외로 끔찍하게 훼손된 시신은 별로 없었다. 물론 업무 특성상 기밀 유지는 기본이었다. 그 생각을 하니 드디어 기억이 났다. 그날 가가는 무엇이 힘드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던 것 같다.

 “실종자를 찾는 포스터에서 제가 화장한 시신의 얼굴을 봤습니다. 그런데도 매뉴얼상 저는 아무것도 말할 수 없었을 때, 그게 힘들었습니다. 언젠간 알려야 하겠지만 그건 경찰이 할 일이지 제가 할 일은 아니니까요.”

 일과를 마친 후 가가는 새벽 한 시에 비품실에 갔지만 별다른 수확은 없었다. 랑랑은 진지한 척 무게를 잡아 놓고 초등학생도 안 믿을 음모론을 펼쳤다. 바로 소장이 대통령 각하를 암살했고, 그걸 덮으려고 콧수염 도둑을 찾는 쇼를 기획했다는 것이다. 콧수염 도둑 잡기 놀이는 모두에게 무엇에 대해 입조심해야 하는지 숨기면서 모두의 자기검열을 심화할 수 있는 좋은 전략이라고 랑랑은 자신의 논리를 설파했다. 

 가가는 다음 주 화요일까지 기다렸다가 이 이야기를 모조리 제제에게 보고했다. 제제는 아직도 그런 얘길 믿는 사람들이 있냐면서 거의 흐느끼듯 크게 웃었다. 가가도 어색하지 않게 같이 웃었다. 소장은 자긴 그저 국영 연구소를 운영할 뿐인데 국가원수를 뒤에서 좌지우지할 정도로 높은 사람으로 봐 줘서 고마울 지경이라고 소탈하게 말했다. 

*

4주가 지났다. 제제 소장은 콧수염 사건에 연루된 세력들을 ‘벌목꾼들'이라고 부른다. 그동안 밝혀진 바 그들은 보존실에 침투한 지하 반란 세력의 일원이며, 최고 권력을 조롱하기 위해 각하의 콧수염을 밀었다. 처음 용의선상에서 제외했던 알리바이가 있는 여덟 명도 다시 의심하게 되었다. 뒤에서 작전을 도왔을 수도 있으니까. 그래서 나온 결론은, 14명 중 최소 6명은 이 일에 연루되어 있다는 것이다. 제제는 여섯 명을 모두 처형할 필요는 없다고 말했다. 나머지는 형을 살게 하든 노역을 하게 하든 자비를 베풀어야 다음 대통령을 미라로 만들 수 있는 인력을 확보할 수 있단다. 그래서 제제는 고인의 콧수염을 직접 면도한 한 사람만 본보기 삼겠다고 결정을 내렸다. 사실상 범인은 랑랑으로 좁혀졌지만, 제제는 계속 물증을 요구했다. 

 각하의 묘를 국민들에게 개방할 때까지 앞으로 3개월이나 남았다는 사실이 슬슬 끔찍해졌다. 예전에는 경력에 비해 과분한 봉급을 여덟 달 동안 주는 이 임시 근무가 끝나지 않기를 바랐다. 하지만 이제 가가의 직장 내 인간관계는 파탄이 났다. 모두와 척을 치고 살아가는 건 어렴풋이 상상했던 것보다 더 서글픈 일이었다. 원래도 돈독하다고는 할 수 없는 분위기가 이제는 누구 하나가 죽어야만 끝나는 게임 속에서 살벌하게 흘러갔다. 그리고 모두가 그것을 가가의 탓으로 돌렸다. 

 사실 그게 맞았다. 가가는 환영받을 수 없는 감시자였다. 그의 귀에 들어가는 게 모두 제제 소장의 귀에도 들어간다는 걸 이제는 모두가 알았다. 콧수염 사건과 상관 없는 단순한 직장 욕이라도 그랬다. 어느 날 랑랑은 가가가 쓰는 휴게실 문을 노크도 없이 벌컥 열고 들어왔다. 그리고 가가가 첫 마디도 꺼내기 전에 그의 머리통에 주먹을 두 방 날렸다. 휴게실에 있는 사람들 중 아무도 그를 말리지 않았다. 그러나 랑랑은 굉장히 차분해 보였다. 

 “가가, 널 원망하지 않아. 내 가방을 매일 뒤지고, 내가 총살당할 것을 뻔히 알면서도 내가 한 말들을 모두 소장에게 보고해도 널 원망하지 않아. 하지만 죽기 전에 널 딱 두 대만 때리고 싶었어.”

 가가는 아픈 뺨을 감싸쥐고 말했다.

 “소장님께서는 선생님이 무혐의라고 생각하세요. 증거가 나오지 않는다면요. 선생님의 그 모든 허무맹랑한 음모론도 용서해 주시는 분이세요. 선생님은 정말로 소장님에 대해 크게 오해하고 계세요.” 

 랑랑은 그 말에 이렇게 대꾸하고 복도를 지나 멀어졌다. 

 “네가 어떤 일을 하다 왔는지 알아. 소장은 처음부터 이러려고 그런 일을 하던 사람을 데려온 거야.”

 그 후로 랑랑은 나흘이 지나도록 보존실로 출근하지 않았다. 닷새 째 되는 날에 돌아왔을 때는 사람이 아주 맛이 가 있었다. 그는 시도 때도 없이 페페를 찬양했다. 아무나 붙잡고 자신이 페페의 콧수염을 밀어 버린 6명의 반역자 중 하나였다고 고백했다. 그러나 잠깐 휴가를 얻은 나흘 사이에 꿈에 페페가 강림해서 진지하고 영적인 대화를 나누었고, 그 후로 자신의 죄를 뉘우치기로 결심했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는 반란 조직이 치밀하게 비밀 유지를 지켜서 자신도 진짜 콧수염을 밀어 버린 범인은 누구인지 모른다고 말했다. 이제라도 용서를 받기 위해서는 진범의 증거를 잡아야 한다는 설정도 덧붙였다. 랑랑은 폐인이 되어 콧수염 도둑의 진범을 찾아다녔다. 그 후로 사람들은 가가보다도 랑랑을 더 피해 다녔다.

*

 보존실의 나날도 이제는 끝이 다가왔다. 모든 방부 작업은 끝났다. 내일 400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각하의 시신을 예전부터 이 목적으로 건축된 건물로 운구하여 안치할 것이다. 사적으로 사이가 멀어진 것과 상관 없이, 가가의 파트너는 여전히 티티였다. 티티는 두 달쯤 전부터 가가와 단둘이 있을 때는 절대적 침묵을 지켰고, 가가 역시 한 달 전부터 더 이상 티티에게 말을 붙이는 것을 포기했다. 안치식 하루 전, 티티는 페페의 인중에 가짜 수염을 바느질해서 꿰매어 달고 있었다. 결국 소동은 이렇게 일단락되었다. 진범은 결국 랑랑으로 밝혀졌다. 최대한 형을 줄이고 싶어서 조력자인 척 접고 들어갔지만 물증이 나왔다고 한다. 미처 은폐하지 못한 각하의 수염 몇 가닥이 그의 사물함에 조금 남아 있었다. 가가는 결정적 증거를 잡은 것이 자신이 아니라 아쉬웠다. 수염을 찾아낸 건 누누라는 젊은 법의학자였다. 랑랑은 누누를 진범으로 몰아가기 위해 갖은 술수를 썼고, 참다 못한 누누가 역공을 했더니 바로 들키고 만 것이다. 랑랑의 형은 안치식을 피해 며칠 후 집행될 예정이라고 전해들었다.

 튜브 안에 손을 넣을 권한이 없는 가가는 할 일 없이 멀뚱멀뚱 티티를 바라봤다. 둘 다 껄끄러운 침묵에 익숙했다. 그러나 갑자기, 티티는 침묵을 깨고 가가에게 질문을 던졌다.

 “너, 영어 얼마나 잘 해?”

 가가는 순순히 대답했다.

 “나도 나름 공무원인데. 어느 정도는 하지.”

 티티는 건조하게 말했다.

 “3층 복도 61번 사물함, 비밀번호 3852. 호의도 아니고, 널 바꿀 수 있다고 믿는 것도 아냐. 하지만 나중에 몰랐다는 이유로 변명하는 건 정말로 들어 주기 힘들 것 같아서.”

61번 사물함에는 영자 신문 하나가 들어 있었다. 발행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동방의 끔찍한 독재국가에 대한 특집 기사였다. 이제 가가는 모든 걸 알게 되었다. 왜 경찰 내부에 자체적으로 시신을 화장할 수 있는 시설이 있어야 했을까. 왜 과학 연구소 소장이 경찰로부터 기밀 서류를 받는 위치였을까. 페페가 죽기 세 달 전 아내에게 부쳤던 편지가 인용되어 있었는데, 이 대목이 눈에 띄었다.

—죽고 나서 제제 정권의 우상이 되는 건 원하지 않아. 내 무덤이 성지가 되는 것도 원치 않고. 내가 죽으면 내 얼굴을 훼손해 주게. 코를 자르는 게 심약한 당신 마음에 무서우면 최소한 콧수염이라도 밀어 줘.

*

 장례식이 끝나고, 가가는 옛 직장으로 돌아갔다. 달리 어디로 가야할지 몰랐다. 그는 화장로 앞에서 그날 작업할 시신의 도착을 기다렸다. 철문 위에서 삐 하는 소리와 함께 붉은 전구가 깜빡였다. 시신을 운송하는 말단 경찰이 문을 열어 달라고 외쳤다. 가가는 문득 저 문 뒤에 있는 몸이 어쩌면 랑랑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경찰이 문을 쾅쾅 두드리며 고함을 질렀다. 가가는 주변을 살폈지만 모든 비밀이 불타 사라지는 이 방에 시체 반입구 말고 출입문은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숨을 곳은 있다. 한 사람이 누울 수 있는 크기의 이글거리는 화장로. 영원히 숨을 곳이 있다. 그리고 가가는 할 수만 있다면 영원히 숨고 싶었다. 영원히, 영원히, 영원히, 영원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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