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투구

미완성 초고. . . 어떤 만화로 그릴 우화

1차창고 by 지정
8
0
0

돼지치기

기사님, 여긴 제가 잠복하는 곳입니다.

기사

이 천한 것아, 내 땅에서 빌어먹고 사는 주제에 감히 나한테 영토권을 주장해?

돼지치기

그런 문제가 아니라, 지휘관이면 전황이 불리할 때 숨어 계시면 안 되지 않습니까?

기사

돼지치기 주제에 나한테 전술에 대해 훈계하냐? 적들이 곧 여기까지 수색하러 올 거야. 적들은 누구부터 죽이려고 할까? 당연히 너 같은 쓸모 없는 졸병 하나가 아니라 지휘관일 거야. 그러니까 당연히 내가 여기 숨어야지.

돼지치기

기사님, 하지만 솔직히 말씀드리건대 숨어 있는 지휘관이나 죽은 지휘관이나 아무것도 안 한다는 점에서 특별히 어느 쪽이 더 나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기사

그게 무슨 말이지?

사이.

아, 내가 지금 시체보다 쓸모 없다는 거냐? 이 천벌 받을 놈, 주인한테 그런 얘기를 하면 지옥에나 가는 거다.

(적군이 쳐들어오는 소리)

이쪽이다!

분명히 검은 투구의 지휘관은 여기 있을 거야.

잡히면 뼈도 못 추리게 발라내서 수레바퀴에 걸어 놓자고.

기사

야, 투구 벗어.

돼지치기

예?

기사

못 들었냐? 적군은 검은 투구의 기사를 노리고 있다. 저 머저리들은 검은 투구만 쓰고 있으면 좋다고 잡아갈 거야.

돼지치기

저 보고 대신 죽으라구요?

기사

나 대신 희생하면 넌 아까 말로 지은 모든 죄를 용서받고 천국에 갈 거다, 그럼 너한테는 이득인 거 아니냐?

돼지치기

하지만…….

기사

토 달지 말고, 시키는 대로 해! 안 그러면 내 칼에 먼저 죽는다, 너.

(투구를 벗는다)

이제 네 투구를 내놔, 만일 네가 살아서 돌아가면 그 화살이 숭숭 박히는 투구와 내 3대째 내려오는 장인의 투구를 바꾼 값만큼 추수철에 더 징수할 테니 그리 알고…….

돼지치기

(투구를 내민다)

기사

그럼 자리를 잘 지키고 있으라구…….

(나가자마자 화살에 투구가 뚫려 죽는다)

돼지치기

머저리.

아버지

오, 아들아! 3대째 내려오는 테나르도 가문의 검은 투구가 저 멀리 보일 때부터 너를 알아봤단다.

돼지치기

그럼요, 3대째 내려오는 테나도르 가문의 검은 투구를 이렇게 그대로 쓰고 돌아온 것을 보시면 제가 이번 전장에서 아버지처럼 훌륭한 기사로 자라나 돌아왔다는 데 의심의 여지가 없죠.

아버지

아들아! 먼저 너를 뜨겁게 껴안고 싶구나. 하지만 그 전에, 이제 평화로운 영지로 돌아왔으니 이 투구는 벗는 게 어떻겠니?

돼지치기

저도 이 축복받은 영지에 스치는 산들바람을 두 뺨으로 느끼고 싶지만, 그럴 수 없습니다. 전쟁터에서 저는 얼굴에 끔찍한 상처를 입었습니다. 혹여나 노쇠하신 부모님 마음을 놀라게 할까 두려워 당분간은 얼굴을 가린 채 지내야 할 것 같습니다.

아버지

아버지는 주님의 피조물이 어떤 모습이어도 사랑할 수 있단다. 나를 믿고 얼굴 가리개를 올려 보겠느냐?

돼지치기

하지만 아버지, 아직은 저의 아름다운 얼굴을 기억하던 세상에 이 흉측한 몰골을 드러낼 준비가 되지 않았습니다. 언젠가, 저의 마음이 놓이는 그날, 제 얼굴을 드러내겠습니다.

아버지

좋다! 너의 귀환을 위해 위해 성대한 만찬이 준비되어 있으니, 어서 들어가서 함께하자꾸나.

돼지치기

만찬이요?

아버지

왜 그러느냐?

돼지치기

제 몫을 하인을 시켜 제 방으로 보내주십시오. 아직 많은 사람 앞에서 얼굴을 드러내는 것이 무섭습니다.

아버지

그래? 그러마. 목소리가 많이 쉰 걸 보니 아직 많이 지친 것 같다. 나도 첫 전쟁을 치렀을 때는 그랬지. 천것들이 돼지 멱 따는 소리 내는 걸 전투 내내 듣고 있는 게 보통 기를 빼 놓는 게 아니니까.

돼지치기(나레이션)

기사의 아버지는 돼지 멱 따는 소리를 정말로 들어본 적이 없는 게 분명하다.

그들은 전쟁터의 인간보다 조용하다.

이득볼 것 없는 전쟁에 강제로 끌려와 비명 지르는 사람들보다.

탑에서 기사도 문학 열다섯 권을 읽었다.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익혔다.

맛있는 음식, 노동으로부터의 해방, 유일하게 불안하지 않은 순간은 가면 무도회.

투구를 쓰고 있으면 숨 쉬기 어렵다.

진짜로 얼굴에 끓는 기름을 붓고 이 투구를 벗어버릴까 생각도 해 봤지만 무서워서 그만두었다.

기사에게는 전쟁 전부터 얘기가 오간 약혼자가 있었다.

나는 결혼하기 전까지 그 레이디에게 연서를 써야 했다.

—사랑하는 레이디,

그대 생각에 잠을 이룰 수 없어 이 편지를 쓴다오.

나의 모든 숨은 그대를 위한 것이오.

난 그대를 위해 죽을 수 있소.

지금도 그대를 생각하고 있다오,

그대의 흰 어깨를 타고 흐르는 구불거리는 황금빛 머리칼…….

실수했다.

내 약혼자는 흑발이다.

다시.

—그대의 발갛게 달아오른 뺨에 입 맞추고 싶소, 그대의 짙은 눈썹 아래로 드리운 장난기 가득한 두 푸른 눈동자…….

내 약혼자의 눈동자가 푸른색이었던가?

검은 눈이었군…….

그제야 깨달았다.

나는 여전히 다른 사람을 생각하고 있다.

명랑한 미소의 방앗간집 딸.

전쟁터에 나가기 전, 내게 입맞추고 꼭 돌아오라고 말한 아가씨.

그 사람은 내가 죽은 줄 알겠지.

그 사람은 이야기를 좋아했다.

그 사람은 밤새 소설을 읽고, 음유시인이 마을로 오기만을 기다렸다.

한 번도 이 촌구석에 음유시인이 들른 적은 없었지만.

나는 말주변이 좋은 편이 아니라서, 한 번도 그 사람이 만족할 만한 이야기를 들려준 적이 없었다.

하지만 이제 내게는 어디 내놓아도 꿀리지 않는 이야기가 있다.

검은 투구를 쓰고 기사의 집에서 한 달을 버틴 무용담.

전부 진짜인 이야기.

어느새 나는 방앗간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런데…….

소매치기

당신이 절 사랑하는 걸 알아요.

방앗간집 딸

그러면 얼굴의 붕대를 풀어 보세요, 저는 어떤 모습이더라도 돼지치기 콘래드를 사랑할 거예요.

소매치기

아니, 이 아버지께서 물려 주신 돼지잡이 칼을 보고도 저를 의심하시나요? 전쟁터에서 입은 흉터가 아가씨들이 기절할 정도라서 얼굴을 보일 수 없는 것 뿐이에요.

방앗간집 딸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 해 줘요.

소매치기

네?

방앗간집 딸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 해 달라고요.

소매치기

어……. 이건 어때요. 도둑질을 당한 도둑의 이야기요. 예전에 레오라는 도둑이 크게 한 탕 하고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는데…….

돼지치기

그만! 레이디한테서 떨어져.

방앗간집 딸

레이디?

돼지치기

이 아가씨의 애인을 사칭해서 하룻밤 어떻게 해 보려나 본데……. 내가 돼지치기 콘래드다!

방앗간집 딸

콘래드!

소매치기, 얼굴에서 붕대를 푼다.

거짓말한 건 죄송합니다. 저 돼지치기가 전쟁에서 돌아와서 처음으로 당신을 찾아간 게 아니라는 점을 명심하십시오. 저 작자는 성에서 기사 행세를 하는 게 아가씨보다 중요했던 겁니다!

돼지치기

결투다!

소매치기

이렇게 갑자기?

돼지치기

왜, 겁나나?

소매치기

아니, 네가 죽음을 재촉하기 전에 경고하는 거다. 기사 흉내를 낸다고 진짜 기사처럼 칼부림을 잘 할 줄 아나 본데, 넌 길바닥에서 태어날 때부터 굴러먹은 날 이기지 못해.

돼지치기

내가 참전군인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렸나 보군. 밀러 양, 우리 결투의 증인이 되어 주시겠습니까?

방앗간집 딸

음, 재밌겠네요. 이야깃거리는 되겠어요.

돼지치기

날짜는 언제가 좋지?

소매치기

기다려야 하나? 당장 무기도 있는데.

돼지치기

너 같은 비열한 소매치기는 늘 단검을 갖고 다니겠지만 나 같은 신사가 아가씨를 만나러 오는 자리에 날붙이를 가져왔을 리…….

돼지칼을 본다.

좋다.

—결투—

소매치기가 기사 행세만 할 뿐 검술에 서투른 돼지치기보다 검을 잘 다룸, 칼 몇 번 챙챙거리다가 돼지치기를 단검으로 찌르고 결투에서 승기를 잡음.

소매치기는 막판 끝내기로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돼지칼로 돼지치기를 죽이려 하나, 칼을 잘못 다루는 걸 본 돼지치기는 소매치기를 몸으로 제압하고 칼을 빼앗아 팔 한 쪽을 자르고 결투에서 이김.

돼지치기

별처럼 빛나는 이디스 밀러, 저와 결혼해 주겠습니까?

방앗간집 딸

당연하죠! 그럼 저와 함께 이 마을을 떠나요!

돼지치기

네?

방앗간집 딸

전 음유시인이 되어 이 지긋지긋한 촌구석을 떠나 온 세계를 누비고 싶었어요. 모든 민담과 전설을 수집했죠. 하지만 그런 건 누구나 다 아는 거라서, 다른 음유시인과 경쟁해서 이길 수 없어요. 하지만 오늘의 멋진 결투……. 기사 행세를 하는 돼지치기의 이야기는 모두가 좋아할 거예요. 자, 그럼 어떤 마을을 제일 먼저 방문할까요?

돼지치기

잠깐, 잠깐만요! 저는 이제 기사예요, 성에서 산다고요! 고되게 세상을 떠돌 필요 없어요. 당신도 저와 함께 성에서 살아요. 멋진 드레스를 입고 매일밤 무도회를 열 수 있어요. 진짜 레이디가 되고 싶지 않아요?

방앗간집 딸

하지만 콘래드, 성으로 들어간다면……. 다시는 나올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미안해요, 콘래드. 날 따라오지 않을 거라면……. 지금 성으로 돌아가세요. 혼자 떠나죠, 뭐.

돼지치기, 떠난다.

하인

주인님, 어디 갔다 오셨어요?

돼지치기

끓는 기름을 빨리 내 탑으로 가져와. 자네 말고 아무도 몰라야 해.

카테고리
#기타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