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터 모렐리

Champ's Melancholy

빅터 모렐리

서른셋 생일을 넘기던 시절, 빅터는 여러 의미로 제정신이 아니었다. 일중독이었던 사람에게 남는 게 시간인 생활은 권태롭기 짝이 없었다. 시간을 죽이고 죽여도 날이 저물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삶이 완전히 녹아 바닥에 눌러붙은 것 같았다. 처음에는 일정한 루틴을 만드려고 노력했으나 나중에는 그 마저도 의미없게 느껴졌다. 저녁 대여섯시 즈음 일어나 첫끼를 먹고 동이 틀 때 즈음에 잠드는 생활이 이어지자, 밤에 깨어있는 시간이 긴 탓인지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지금은 대체로 기억나지 않는 것을 보면 죄다 쓸데없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그래도 그때는 그것들이 제 목을 죄는 것만 같았다.

그 중 어느날이었다. 파티마는 갑자기 그의 집에 들이닥쳤다. 그래도 그녀가 세 시간 이전에 방문을 예고하는 최소한의 염치를 발휘한 덕에, 집안은 제법 정돈된 상태였다. 그런데도 그녀는 주위를 둘러보더니 바로 정곡을 찔렀다.

"와. 완전 죽상이네 너? 꼴 좋다."

그게 퍽 파티마 다웠다.

 

파티마 사이코와 빅터의 악연은 무려 그가 열여섯이던 시절로 거슬러 올라갔다. 당시 빅터는 덩치만 크고 인상이 어두운 꼬맹이였다. 당연한 일이었다. 사고로 부모를 잃고 새 동네에 이사오자마자 갱들에게 린치를 당해 전치 9주. 의사의 말에 따르면 어딘가 불구가 되지 않은 게 다행이라고 했다. 제 잘못은 아니라지만 그를 도맡자마자 뒤치닥거리나 해야하는 보호자에게 죄지은 마음이 들었고, 빅터는 더는 눈에 띄지 않기 위해 매사에 조심하며 지냈다.

그에 반해 파티마는 꽤나 발이 넓은 동네 유명인사였다. 아웃스커트의 변변찮은 동네에서 유명한 게 뭐 그리 대단하냐 물을 수도 있겠지만, 당시 그녀의 나이가 고작 열살 전후였던 것을 생각하면 떡잎부터 남달랐다 볼 수 있다. 그녀는 그 동네에 사는 모든 소년소녀들과 안면을 트고 있었는데, 특히 제 나이 또래로만 한정지으면 사실상 대장격의 존재였다. 오육년 차이 정도는 가볍게 무시하는 강단있는 성격은 기본이었고, 뒷골목 소년들과 연이 있다는 이야기도 심심찮게 들려왔다. 좋은 평가도 나쁜 평가도 극단적이었다. 같이 놀기 재밌고 행동력 있다는 평가 뒤에는 어김없이 이기적이고 제멋대로라는 험담도 뒤따랐다. 그런 입소문 마저도 그녀의 존재감을 증명하는 듯 했다.

두 사람이 처음 이야기를 나누게 된 것은 빅터가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무렵이었다. 그는 종종 이웃이 운영하는 이삿짐 센터 일을 도우며 용돈을 벌고 있었는데, 어느날 사장이 동행을 소개했다.

"사이코씨의 딸, 나데즈다와 파티마다."

둘은 자매라고는 해도 머리색 말고는 썩 닮은 외관은 아니었다. 빅터와 비슷한 나이 또래로 보이는 나데즈다는 털털하고 수수한 인상인 데에 반해, 파티마는 어린 나이에도 이목구비가 제법 또렷해서 화려한 인상을 주었다. 둘은 성격도 완전 딴판인듯 보였는데, 먼저 살갑게 인사해 오는 나데즈다와 달리 파티마는 이곳에 온 것 자체가 불만스러운 듯 부루퉁한 표정이었다. "고생 죽어라해도 돈은 쥐꼬리만큼밖에 못버는 일이잖아." 그 말에 나데즈다는 파티마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얘는. 어린애가 이보다 큰 돈을 받아서 뭐하게? 그리고 쉽게 돈 벌 궁리만 하면 언젠간 큰 코 다친다 너."

"아 그러셔? 그럼 너는 그렇게 평생 따분하고 시시하게 살아. 근데 난 싫으니까 관심 좀 꺼줄래?"

나데즈다와 파티마는 그 뒤로도 틈만 나면 투닥거렸다. 가끔은 한지붕에 사는 사람들끼리 어떻게 저렇게 하나부터 열까지 반목할 수 있는지 신기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감상도 잠시뿐, 빅터는 대체로 그들의 싸움에 무관심했다. 굳이 따지면 조금 시끄럽다고 생각했고, 그런 생각이 어느정도 그의 태도에 묻어났을 것이다. 그래도 파티마는 빅터를 그렇게 싫어하는 것 같지 않았다.

"너, 힘 좀 쓰네. 왜 애들이 너한테 관심있는지 알겠다."

어느날 파티마는 나데즈다가 자리를 비운 사이 그렇게 말을 붙여왔다. 빅터가 그 말을 완전히 이해하는 데에는 시간이 좀 걸렸다. 그는 대꾸하지 않은 채 박스 몇 개를 트럭에 싣다가 문득 파티마가 말한 '애들'이란 그를 린치했던 유소년 갱단을 말하는 것임을 알아챘다. 그놈들도 빅터를 괴롭히기 전에는 그런 비슷한 말을 했었다─너 같은 놈이 들어오면 좋을 거 같은데. 어때? 한탕 크게 벌 수 있을 거야.

빅터는 짐을 내려놓고 파티마를 가만히 내려다 보았다. 그 나이대 아이들에게 다섯살 차이는 천지 차이었고, 그녀는 빅터가 고개 숙여야 시선을 마주할 수 있을만큼 작았다. 그녀가 아무리 영악하다한들 그놈들이 무슨 일을 하고다니는지 전부 파악하고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래서 힘 쓰는 일 하고 있잖아."

빅터는 대충 대꾸했다.

"정말 이런 걸로 만족해?"

"만족 못할 것도 없지."

"흥. 뭐야 너도 그쪽이야?"

파티마는 실망스럽다는듯 눈을 흘겼다.

"그래도 넌 잔소리는 안하니까. 존중해줄게."

파티마는 그것이 뭔가 대단한 호의라도 된다는 것처럼 말했다. 그게 퍽 황당해서, 빅터는 저도 모르게 소리내어 웃으려다 황급히 줏어담았다. 그는 처음으로 그녀에게 조금 귀여운 면도 있다는 생각을 했지만 티를 내지 않으려 애썼다. 그랬다간 인상을 잔뜩 구기며 그를 맹렬히 비난할 것이 뻔히 보였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그의 무심한 태도가 마음에 들었는지 파티마는 나데즈다를 피해 빅터 쪽 일을 거들곤 했다. 그렇게 몇달을 간간히 붙어있던 파티마는 언제부턴가 아르바이트처에 나타나지 않았다.

처음에는 그다지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지금까지 나타난 것이 신기하다 싶을 정도였으니까. 그러나 어느날 나데즈다는 걱정이 가득한 얼굴로 빅터에게 다가와 속삭였다. "저기, 뭐 하나 부탁해도 될까?" 나데즈다와 사이코씨는 빅터를 이상하리만치 신뢰하는 편이었다. 성인남자에 준하는 덩치와 묵묵한 태도가 근거없는 믿음을 주는 모양이었다. "뭔데?" 그는 별 생각없이 질문을 던졌다가 자신이 심상찮은 일에 끼어들게 되었음을 직감했다.

"파티마 말이야, 사실 며칠 전부터 집에 안 들어오고 있어. 연락도 안 되고…. 아무래도 가출한 거 같아."

"…갑자기?"

"사실, 걔가 우리 몰래 돈을 모으고 있다는 걸 들켜서 혼을 냈거든. 그게 걔 자존심을 건드렸는지 박차고 나가버리더라고. 혼자 뭐 얼마나 버티겠나 싶어서 내버려뒀는데 설마 아예 집을 나갈 생각을 할 줄이야…."

하루가 멀다하고 다투는 사이어도 자매간의 정은 깊었는지 나데즈다는 긴장한 얼굴로 손톱을 물어뜯었다. 그러고보니 눈밑이 퀭한 것보면 걱정되어 한숨도 못잔 듯 보였다. 빅터는 어릴 적부터 그런 얼굴을 외면하는 데에 통 재주가 없었다.

"어디 짐작가는 곳은 있어?"

"우리가 알 만한 사람한테 간 건 아닌 거 같아. 며칠 수소문했는데도 봤다는 사람이 한 명도 없어."

 

근무시간이 끝난 빅터는 제 직감이 가리키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가족이나 지인이 수소문해도 연락이 닿지 않는다면 남은 곳은 한 곳 밖에 없었다.

상점가 어느 길목에서 안쪽으로 서너번 꺾으면 유독 인적이 드문 어두운 골목길로 이어진다. 볼품없는 그래피티로 뒤덮인 낡은 벽 사이로 날카로운 철골이 모습을 드러낸 그 골목에는 평범한 사람이라면 곧장 발을 돌릴 만한 스산한 기운이 감돌았다. 빅터는 그 거리의 끝자락에 버려진 놀이터가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빅터가 예감한 대로 파티마는 그곳에 있었다. 후드를 눌러쓴 채였지만 작은 체구나 특유의 제스처에서 그녀라는 걸 쉽게 유추할 수 있었다. 그녀의 고개가 향한 곳에는 갱의 멤버로 보이는 소녀가 노후한 정글짐 위에서 위험천만한 곡예를 하고 있었는데, 건물 뒤에 숨어 귀를 기울이자 둘의 대화가 어렴풋 들려왔다.

"…아무리 그래도 너처럼 어린애는 안 받을걸. 쓸모가 없거든. 한 삼년 후에 다시 와라."

"쓸모가 있는지 없는지 어떻게 알아? 네가 결정하는 것도 아니잖아?"

보아하니 둘은 파티마의 갱 입단을 두고 실랑이를 벌이는 듯 했다. 대화의 모든 내용을 알아들을 순 없었지만 마지막 한 마디만큼은 분명하게 들렸다.

"뭐 그렇게 자신 있으면 내일 밤 10시에 '오두막'으로 가보던가."

빅터는 그 말을 듣자마자 서둘러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소리를 죽여 걷던 발걸음이 점차 빨라졌다. 소녀의 저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빅터는 알고 있었다. 파티마는 자신과 달리 자발적으로 입단을 원한다고는 하나, 그런 것은 조금도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저들이 어떤 무리한 요구하든 거기에 맞춰줄 요량이 있느냔 것이다.

'저 미친 놈.'

대로에 다다른 빅터는 숨을 몰아쉬며 속으로 되뇌었다.

'역시 덜 여문 머리로 약삭빠르게 굴어봐야 제 무덤 파기밖에 못하지.'

그는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황급히 다이얼을 눌렀다.

 

다음날 밤 10시, 빅터는 마을 외곽 폐가에 도착해 있었다. 그가 두어달 전 갱단에게 피떡이 되도록 맞은 곳이었다. 자신이 제 발로 이곳에 돌아오게 될 것이란 걸 며칠 전의 그는 상상이나 했을까. 하지만 빅터는, 나데즈다의 간곡한 부탁이 없었다 하더라도 이곳에 오게 됐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 후 폐가에 나타난 파티마는 빅터를 발견하곤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뭐야? 네가 왜 여깄어?" 예상을 어긋나지 않는 반응에 빅터는 한숨을 쉬었다.

"뭐, 나 대신 갱단 놈들이 나왔으면 니 계획대로 잘 풀렸을 거 같아? 갱단이 네 나이 애를 가지고 뭘 하겠어. 인신매매나 안 당하면 다행이지."

빅터가 무언가 개입했다는 것이 명확해지자, 파티마의 얼굴이 짜증으로 구겨졌다. "니가 뭘 아는데? 나이 좀 먹은 거 밖에 없으면서 뭘 유세야?" 그녀는 빅터에게로 성큼성큼 다가와 턱을 치켜들며 쏘아붙였다. "너, 뭘 어쨌어?" 그가 딱히 뭘 대단한 걸 한 건 아니었다. 그는 단지 개인적이고 불미스러운 사정으로 인해 이곳이 갱단의 아지트 중 하나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경찰에게 다음 모임 날짜를 전달했을 뿐이다. 경찰의 순찰 동선이 평소와 다르단 소문이 퍼지면 조직에 연루된 사람들도 몸을 사리지 않을까하는 기대를 품은 채.

"그건 니가 알 거 없고. 아무튼 걔네가 니 얘기 진지하게 들어줄 일은 절대 없을테니까 포기하고 집에나 가라."

그 말에 파티마는 잠시 고민하듯 녹색 눈동자를 도르륵 굴리더니 무언가 깨달은 얼굴로 외쳤다.

"설마, 나쟈가 이러라고 시켰어?"

빅터는 대답하지 않았다. 변명할 이유도 없거니와 달리 둘러댄다해서 납득시킬 자신도 없었다. 그는 어깨를 한 번 으쓱인 뒤 현관을 향해 몸을 돌렸다. 그때였다. "미친 새끼." 파티마는 그렇게 짓이기며 돌아서는 그의 옷자락을 힘껏 쥐고 당겼다. 그리고 주먹이 닿는 곳마다 사정없이 때리기 시작했다.

"진짜로 첩자짓을 해? 내가 그 놈의 집구석 얼마나 지긋해하는지 알면서?"

파티마는 온 힘을 다하고 있었지만 체격 차이 때문에 사실상 그냥 분풀이에 가까웠다. 빅터는 달려드는 그녀를 뿌리치지 않고, 제게 쏟아지는 짜증과 좌절감을 전부 받아냈다. 그다지 아프지 않은 것도 있었지만, 그녀가 절실하게 생각하던 무언가를 좌절시킨 것에 조금은 책임감은 느꼈기 때문이다. 빅터는 천성적으로 타인의 인생에 간섭하는 것을 껄끄럽게 여겼다. 그것이 명백히 잘못된 길이어도 그랬다.

아무리 때려도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파티마는 갑자기 악을 쓰며 소리를 내질렀다. 별 타격없어 보이는 빅터의 태도에 약이 오른 것 같기도 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조용해졌다. 빅터는 감았던 눈을 뜨며 무릎에 손을 얹은 채 숨을 가쁘게 몰아쉬는 그녀를 넌지시 내려다보았다.

'끝났나?'

그러나 방심하기가 무섭게 파티마는 다시 매섭게 달려들었다. 그녀는 정강이로 빅터의 가랑이 사이를 가격하며 외쳤다.

"그냥 죽어!"

 

솔직히 말해서 그 한 마디에는 일말의 진심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인생의 아이러니한 점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이 17년 동안이나 우정을 유지했다는 것이다.

두 사람의 유년 시절을 아는 사람들은 빅터가 그와 결이 비슷한 나데즈다가 아닌 파티마와 더 가깝게 지내는 것을 제법 신기해 했다. 사실 빅터도 파티마가 자신을 쉽게 용서한 것이 조금 의아하긴 했다. 어쩌면 그녀도 나이를 먹을수록 그때의 선택이 자신에게 손해였단 걸 깨달았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파티마는 빅터의 가랑이를 노렸던 전적이 있는 사람으로서 그보다 보잘 것 없는 공격 쯤이야 거리낌이 없었다.

"니가 그렇게 미련하게 사니까 쓸데없는 마음의 병도 얻는 거야."

그녀는 빅터가 만들어온 미트볼 스파게티를 포크에 돌돌 말았다. 그녀는 그것을 입속에 넣으려다말고 가볍게 비아냥 댔다.

"그냥 지금까지처럼 까라는대로 까고 살면 그 능구렁이 상사가 특수부장까지 만들어줬을텐데 뭐 그렇게 어렵게 생각해? 남들은 못가져서 안달인 자린데, 복에 겨운 거 아냐?"

빅터는 팔짱을 낀채 야무지게 식사하는 파티마의 뒷통수를 노려보았다.

"남의 집 쳐들어와서 밥 처먹으면서 하는 소리가 그거냐?"

"말은 바로 해야지. 내가 만들어 달라했어? 네가 먹고 가라며."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었기 때문에 빅터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어휴 말을 말자.' 빅터는 제 몫으로 내린 드립커피를 홀짝이며 갑자기 밀려오는 두통을 달랬다.

"근데 이거 맛있네. 넌 안 먹어?"

"용건이나 말해. 한 시라도 빨리 내쫓고 싶으니까."

"아 그러세요? 얼굴이 아주 죽상이길래 좀 놀아주려 했더니만 매정하긴."

파티마는 그의 가시돋힌 말 따위 전혀 믿지 않는듯 빙글거리는 얼굴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파티마가 꺼낸 얘기는 말하자면 법률 상담이었다. 빅터는 경찰이지 변호사가 아니었지만, 그녀는 어차피 그 정도면 자신의 지인 중에서 가장 법에 가까운 직종이라는 기적의 논리를 펼쳤다.

그녀는 도시유적에서 이권 다툼이 생길 경우 유민이 제 몫을 빼돌린 체류민을 고소할 수 있는지, 있다고 하면 그 범위가 어느정도인지 물어왔다. 파티마는 마치 제 3자의 일을 상담해주는 것 마냥 말했지만 빅터는 몇 분 지나지 않아 금방 사건을 재구성했다.

"벼룩의 간을 빼먹어라 아주. 얼마나 양아치같이 했으면 유민 입에서 고소소리가 나오냐?"

그러자 파티마는 되도 않는 거짓말을 멈추고 어깨를 으쓱했다.

"좀 모르는 척 해주면 안 돼?"

"지랄. 날 17년 보고도 그런 요행을 바라냐?"

"하여간 도덕책이세요. 나도 다 사정이 있었거든?"

그녀에게 사정이란 '그랬어야만 했던 피치못할 이유'같은 게 아니라 '완벽하게 뒷처리를 하지 못한 이유'를 뜻하는 것일테다. 파티마 사이코의 셈법이란 그런 것이다. 빅터는 그 사실을 잘 알면서도 17년전의 그날을 마지막으로 그녀의 선택을 진지하게 가로막은 일이 없었다. 그녀의 가족처럼, 그녀의 삶의 방식에 도덕적인 비난을 쏟아낼 생각은 더더욱 없었다.

빅터는 파티마의 선명한 녹색 눈동자에 드러난 분노와 좌절감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어쩌면 그때, 빅터는 그녀가 느꼈을 삶에 대한 지긋지긋한 감각에 조금 공감했는지도 모른다. 그 지긋지긋한 삶을 살아내기 위해 그녀가 택한 삶의 방식엔 동의하지 못할지라도.

밤이 깊은 시간, 파티마는 기지개를 켜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잖아." 그녀는 외투를 챙겨 나가려다 말고 빅터를 돌아보았다. "나 그냥 자고 갈래. 귀찮아." 빅터는 그 말에 곧장 미간을 좁혔다. "지랄 말고 가 좀." 파티마는 빅터의 화법을 잘 알았고, 그것이 완전한 거절이 아님을 눈치챘다. 그녀는 킥킥 웃으며 외투를 코트걸이에 걸고 소파에 풀썩 누웠다. "소파 정돈 내 줄 수 있지?" 빅터는 막무가내의 미소를 띤 얼굴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그녀를 가만히 마주보다가 결국 한숨을 내쉬었다.

"들어가서 자. 내가 거기서 잘테니까."

다음날 빅터는 햇빛이 가득한 거실에서 눈을 떴다. 그는 멍한 정신을 털어내며 소파에서 일어나 집안을 살폈다.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걸 보면 파티마는 이미 집을 떠난 모양이었다. 침대 위에 구겨져 있는 이불과 식탁 위에 놓인 씨리얼 보울이 그녀가 그날 아침까지 이곳에 있었음을 알리고 있었다. 빅터는 이불과 시트를 빨래통에 던져넣고, 개수대의 물을 틀어 그릇을 닦았다. 그러다 문득, 자신이 잡념없이 잠들어 빛 속에서 깨어났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불면이 시작되고 세달만의 일이었다.

 

"다이너를 열 거야. 장소도 다 봐놨어. ■■번가 모퉁이에."

어느날 빅터는 선언하듯 말했다. 파티마는 갓 내온 오믈렛을 반으로 가르다 말고 그를 마주보았다.

"갑자기 왠 다이너?"

"그냥. 그럼 안 되냐?"

"누가 뭐래? 뭐 잘 해봐. 백수보단 낫겠네."

오믈렛을 입속에 넣고 우물거리던 그녀는 무언가 깨달은 얼굴을 했다. "아 혹시 지금 이거 뭐 그런 거야? 레시피 테스트? 그럼 앞으로도 사양 안 할게." 모른 척 태연하게 구는 그녀를 보며 빅터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남일 처럼 말하면 안 되지. 내가 널 왜 불렀을 거 같냐."

"날 끌어들이시겠다?"

"내 주변에 인테리어 업자가 너 말고 또 있냐?"

그러자 파티마는 식사를 하다 말고 자세를 고쳐앉았다. 그녀는 다리를 꼰 후, 양 팔꿈치를 의자 팔걸이에 걸치며 빅터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돈은 있고? 나 몸값 비싼데."

확실히 그 즈음 파티마는 꽤나 유명세를 타고 있었다. <아웃스커트에도 삶은 있다> 번화가 뉴스스탠드에서 흔히 파는 잡지 커버엔 그녀의 이름이 그런 캐치프레이즈와 함께 실려 있었다. 그 익숙한 문구는 오코예가 매번 떠들던 말과 닮아 있어 묘하게 신경을 긁었지만, 세간에선 반응이 좋은 모양이었다. 갱단에 들어가겠다고 사생결단을 하던 꼬맹이가 이런 번듯한 직업으로 승승장구하게 될 줄 누가 알았겠나. 이상한 상담을 하러 오는 걸 보면 여전히 뒤에선 허튼 짓을 하고 다니는 모양이었기에, 빅터는 정장을 빼입고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는 사진 속의 그녀가 영 적응이 안 되었다.

 

작업을 시작하면서 파티마는 자연스럽게 빅터의 집을 제 집처럼 드나들었다. 예술적 사고가 전무했던 그는 인테리어라는 일에 그렇게 많은 사전작업이 필요한 줄 몰랐다. 특히 처음 몇주는 정말로 많은 대화를 필요로 했다. 가게의 지향점부터 시작해서, 그의 세세한 취향, 인간관계, 심지어 인생관에 관한 이야기까지 나와야했는데, 자기 이야기를 구구절절 하는 것을 매우 싫어하는 빅터로서는 대화의 반절은 그녀의 질문을 회피하려다가 잔소리 듣는 것의 반복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들 사이에는 아주 많은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그 여백을 메울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 쌓여있다는 점이었다.

그곳에서 꽤 떨어진 곳에서 살고 있는 파티마는 며칠 연달아 출퇴근에 시간을 허비하는 걸 귀찮아했다. 빅터 역시 그녀를 여관으로 내쫓거나 그토록 싫어하는 가족의 신세를 지게 하기엔 뭣한 기분이었다. 그렇게 암묵적인 합의를 바탕으로 그의 집에 그녀의 물건이 조금씩 늘어갔다. 들고다니기 귀찮은 두꺼운 샘플북이나 자료집같은 것부터 시작하여, 우산, 여벌의 옷, 그리고 화장품 파우치까지.

사실, 파티마가 그의 집에 자주 드나들던 것은 그때가 처음이 아니었다. 빅터가 막 성인이 되었을 무렵, 독립에 열망이 있던 파티마는 그가 살고 있는 셰어하우스에 처들어와 이곳에 눌러앉고 싶다고 떼를 썼다. 그때 빅터가 느낀 심정을 솔직히 말하자면 비에 쫄딱맞은 길고양이를 상대하는 기분이었다. 불쌍해서 돌봐줬다가도 눌러앉게 내버려둘 순 없다는 점이 그랬다.

그러나 이제 두 사람 모두 삼십 전후의 나이가 된 시점에서 둘 사이의 동학이 예전과 같을 순 없었다. 누가 먼저였는지는 모르겠으나, 어느 순간부턴가 둘다 그 사실을 어렴풋이 눈치챈 듯 보였다. 한편 그 나이가 되었다는 것은 그런 일 즈음은 대체로 모른 척할 수 있다는 의미기도 했다. 그럼에도 선을 넘은 것은 새벽의 집이 썩 고요했기 때문이었을까.

아니, 그건 제가 생각해도 지나치게 낯간지럽고 형편없는 변명이었다. 굳이 따지자면, 그가 제정신이 아니었다는 편이 옳았다. 서른세살의 그는 정말 여러 의미로 제정신이 아니었다.

파티마는 바닥에 널린 제 속옷을 집어 빨래통에 던진 뒤, 방 구석에 놓인 전신 거울을 잠시 들여다 보았다. "그때 네 가랑이 사이를 완전히 날려버리지 않아서 다행이네." 그녀는 땀에 젖은 머리를 팔락거리다 그런 미친 소리를 했다. 침대 등받이에 기대고 앉아 담배를 피고 있던 빅터는 담배연기에 목이 매어 자칫 대참사가 날 뻔했다. "새벽에 발가벗고 집밖으로 쫓겨나고 싶냐?" 그러자 파티마가 뻔뻔하게 웃었다. "어머, 그래봐야 치한으로 고소당하는 건 너일걸." 빅터가 지금이라도 그녀의 엉덩이를 걷어차야 하나 고민하는 중, 그녀는 깔깔 웃으면서 욕실로 도망쳤다.

17년 전의 일이 그들의 관계에 어떤 변화도 일으키지 않았듯이, 그들이 간혹 잠자리를 같이 한다는 사실 역시 관계에 이렇다할 균열을 만들지 않았다. 애초에 두 사람 중 누구도 그런 일에 의미부여를 할 만큼 애틋하고 감성적인 성격은 못되었다. 그래도 한 가지 차이가 생겼다고 한다면, 빅터는 이제 크게 힘을 들이지 않고도 제 시간에 잠들고 일어날 수 있게 되었다.

 

공사에 착수할 즈음부터 파티마는 눈에 띄게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새벽까지 발주서와 씨름하다가 아침부터 여기저기서 걸려오는 전화를 받고 현장으로 뛰쳐나가야했으니 무리도 아니었다. 그 즈음에 빅터가 하는 일이란 그냥 때가 되면 식사를 해다 바치고 그녀가 널어놓고 간 옷가지와 물건들을 치우는 것 정도였다. 그 날도 빅터는 텔레비전을 켜놓은 채 건조대에 빨래를 널고 있었다. 그것이 문제였다. 하필 그날따라 평소 잘 보지도 않던 뉴스채널을 틀어놓은 것이.

뉴스에서는 1년 전 참사의 추모식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러고보니 어느덧 11월이었다. 그걸 알았으면 조심해야 했는데 생각없이 있었던 것이 잘못이라면 잘못이었다. 뉴스는 높으신 분들의 추도사를 하나하나 읊고 있었다. ─지금의 알키마드가 안전하게 지켜질 수 있는 것은, 그날 도시를 위해 용기를 발휘한 수 많은 영웅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오늘 이 자리를 빌어, 그들이 있었기에 인류가 또 다시 상처를 극복하고 한 발자국 나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얻었음을…─ 연사의 말에 맞춰 느리게 움직이는 카메라에, 사람들 사이에 단정하게 앉아 있는 오코예가 잡혔다.

'씨발.'

빅터는 그때 리모콘 전원을 눌렀다. 점심에 먹은 것이 다 올라올 것 같은 기분이었다.

빅터는 섹스 전후로 수다가 많은 부류는 아니었지만, 그날은 유독 어떤 말도 꺼내기가 힘들었다. 파티마는 그의 심경 변화를 눈치챈 듯 보였으나 먼저 끄집어내진 않았다. 스스로 위로에 능하지 않은 것을 떠나서, 상대 역시 위로를 원하지 않는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일 것이다. 그녀는 대신 허공을 쳐다보며 담배만 피는 빅터의 옆구리를 살짝 찔렀다. "나도 오늘 진짜 힘들었거든? 한 대만 줘." 빅터는 그녀를 흘끗 보았다가 담뱃갑을 내밀었다.

"또 뭔 일인데."

"바빠 죽겠는데 나쟈가 전화해서 계속 헛소리를 하잖아. 또 어디 자경단 애들한테 내 소문을 들은 모양이지."

그들 사이에 늘상 있는 대화 주제였다. 빅터도 처음에는 평소대로 대꾸하려 했다. "니가 좀 사고를 치고 다니냐." 그 말에 파티마 역시 익숙한 푸념을 늘어놓았다. "다 알아서 하고 있거든? 아니 까놓고 지랑 무슨 상관인데."

사실 그날의 대화는 거기서 끝이 났어야 했다. 빅터도 그 사실을 잘 알았다. 파티마가 무엇에 가장 자존심 상해하는지, 그리고 무엇을 가장 싫어하는지, 익히 알고 있었으니까. 그런데도 빅터는 이상한 오기가 들어 굳이 쓸데없는 말을 덧붙였다.

"네가 걱정돼서 그러는 거겠지. 그렇게 나쁘게만 볼 거 있어?"

그 말에 파티마는 눈을 깜빡거렸다. 나이트 스탠드의 불빛을 담은 그녀의 녹색 눈동자에 불쾌감이 감돌고 있었다.

"…너 오늘 좀 이상하다?"

그녀는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끄며 덧붙였다.

"기분 안 좋은 거 같아서 참고 있었는데, 왜 시비야?"

"그냥 한 번쯤 생각해볼 수 있는 문제라는 거야. 네 눈엔 요령없어 보일지 몰라도, 주변에 휩쓸리지 않고 최소한의 선을 지키고 살려고 하는 거,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야. 그런 삶의 방식도 존중해 보는 건 어때?"

그러자 파티마는 노골적으로 인상을 찌푸렸다. 그녀는 잠시동안 빅터를 매섭게 노려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흘러내리는 검은 머리를 손가락으로 쓸어올리며, 가라앉은 목소리로 읊조렸다.

"하, 진짜 짜증나게 구네."

그녀는 바닥에 떨어진 슬립을 다시 주워입으며 핸드폰을 꺼내 무언가 두드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방 한 구석에 놓아두었던 캐리어를 발로 차 열어젖히더니, 그곳에 제 물건들을 던져넣었다.

"이제 너랑 안 해. 일 관련 아니면 연락하지 마."

 

파티마는 새벽 두시가 넘은 시간이었는데도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집을 나갔다. 빅터는 이런 결말이 올 것을 알면서도 자신이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곱씹었다. 그것은 실수였을까? 분명 그것이 가장 손쉬운 답이었다. 하필 둘 다 피곤한 날에 실수로 날카로운 말을 내뱉은 거라고, 그냥 타이밍이 좀 나빴던 거라고,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속은 편했을 것이다. 그러나 빅터는 그런 비겁한 결론은 내리지 않기로 한다.

오픈 직전의 한참 바쁜 시기였으므로, 두 사람은 고작 이틀 후 가구 설치를 위해 다시 만나야 했다. 단정하게 머리를 묶은 채, 스트라이프 수트에 붉은 립스틱을 바르고 나타난 파티마는 그날 밤의 일은 마치 없었던 것마냥 담담한 태도였다. 파티마가 현장을 지휘하는 동안 빅터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녀를 넌지시 바라보고 있었다. 시선을 느낀 파티마가 기어코 한 마디 쏘아붙였다.

"미안하다는 말 하지마. 더 짜증나니까."

빅터는 피식 웃었다. 딱히 사과하려는 건 아니었다. 그가 그런 성격이었으면 두 사람의 연이 지금까지 이어지지도 못했을 것이다. 빅터는 변명 대신 사등분된 팬케이크가 담긴 플라스틱 그릇을 그녀의 앞으로 내밀었다.

"그냥 먹어보라고. 가게에서 팔려고 하는 팬케이크 샘플이야."

파티마는 빅터를 가만히 쳐다보다가 팬케이크를 시럽에 적셔 한입 베어물었다. 언제나처럼, 돌아온 대답은 가감없이 솔직했다.

"뭐, 맛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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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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