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mp's Apathy
빅터 모렐리
그 사건은 빅터가 형사로서 맡은 마지막 사건이었다.
“신분조회가 안 되는 어린 애야.”
사건을 인계하러 온 다른 부서 동료는 그렇게 운을 떼었다. 그 한 마디로 많은 것을 유추할 수 있었다.
뒷골목에서 흔히 일어나는 폭력사건이었다. 조잡한 이권 다툼으로 싸움이 일어나고, 누군가 머리가 깨져 피떡이 되고, 병원에 실려 갔으나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해 중태. 이번 달에만 벌써 세 번째 일어나는 일이었다. 이런 사건은 대부분 피해자가 유민이거나 범죄조직과 엮여 있어서, 경찰부로서는 실속 없이 성가시기만 했다. 다시 말해 아무도 원하지 않는 사건이었고, 강력계 3팀으로 넘어오게 되어있다는 이야기였다.
거기에 용의자가 유민에 미성년자라면 사건의 진상은 뻔했다. 어느 범죄조직 조직원이 자기가 저지른 범행을 뒤집어씌운 거겠지. 사건이 일어난 동네를 봤을 때 누군지도 대충 짐작이 된다. 문제는 이런 일에는 대체로 증거가 별로 없다는 것이다. 경찰부가 체계적인 과학수사 같은 걸 지원해줄 리 만무하니 지문과 혈흔 검사만이 진행되는데, 범죄가 밥벌이인 갱단으로선 그 정도 조작하는 건 일도 아니었다. 당연히 목격자 심문도 의미 없었다. 유민 애새끼 하나 살리겠다고 제 목숨 걸고 정의의 투사가 되어줄 사람이 이 동네에 존재할 리가. 뒷돈이나 안 받아먹었으면 양심적인 수준일 것이다.
정말 판에 박힌 듯 진부한 사건이었다. 피해자의 피를 뒤집어쓴 채 연행된 소년. 그의 지문이 묻은 흉기. 그가 때리는 걸 봤다고 강력하게 주장하는 목격자 한 명. 강력계 3팀이 없었다면 이미 사건은 거기서 종료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파고들 틈은 있었다.
‘동기가 전혀 없어.’
피해자는 밀수 혐의로 예의주시 받는 작은 택배회사에서 일하는 일용직이었고, 소년 역시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은 지난 한 달간 두어 번 만난 게 전부였다. 직장동료들을 심문하자 둘이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걸 본 적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단 한 명, 이 사건을 보고한 목격자라는 인물을 제외하고는.
진상은 너무 뻔했지만, 이 정도로는 결과를 뒤집을 수 없었다. 새로운 증거를 수집해야 했고, 나아가야 할 방향은 정해져 있었다. “아직 심문해야 할 목격자가 한 명 더 있지 않나요?” 빅터는 그렇게 말하며 자신이 사건을 책임지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그것은 오코예가 팀장이던 시절 자주 쓰던 기법이었다. “지금 유치장에서 울고 있을 비운의 소년 말인가?” 오코예는 빅터에게서 자신의 흔적을 보는 것을 좋아했고, 추가 조사 승인은 쉽게 떨어졌다.
오코예의 예상과 달리 소년은 울고 있지 않았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그런 부류와 세상에서 제일 멀어 보였다.
소년의 체구는 어린 나이에도 자신과 비슷했고, 몸 이곳저곳에 나 있는 흉터나 시선을 사로잡는 피어스와 타투가 불량해 보였다. 그는 철제 의자에 삐딱하게 몸을 기대고 앉아 있었는데, 범인이 왜 죄를 뒤집어씌울 희생양으로 이 녀석을 선택했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가정의 보호도 법의 보호도 받지 못해 일찌감치 성인의 삶으로 내몰린 녀석들은 대체로 그와 비슷한 모습이었다.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으리란 인상을 주는 녀석들. 그나마 얼굴에는 자기 나이다운 앳된 기색이 남아 있었으나, 그마저도 건드리면 한 대 칠 것 같은 험악한 표정에 가려져 있었다.
소년은 저를 찾아온 이 남자가 자신에게 주어진 마지막 동아줄인지도 모르고, 마지막 발악을 할 기세로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런 상황은 익숙했으므로 빅터는 담담하게 절차를 따랐다.
“이름은?”
“알면서 뭘 물어요?”
“쓸데없어 보여도 따라야 할 절차라는 게 있는 거야. 그래야 나도 이 망할 놈의 직장에서 입에 풀칠할 돈이라도 받을 수 있거든. 무슨 말인지 알지?”
소년에겐 소년의 눈높이로 말해주는 것이 가장 효과가 좋았다. 어차피 그냥 코너에 몰린 쥐새끼의 심정으로 허세를 부리는 걸 텐데, 굳이 건드려서 뭐하겠는가. 얼마 후, 예상대로 소년의 기세가 한풀 꺾였다.
“…키안 도허티.”
“그건 본명이냐?”
“아마도.”
“체류민 등록은 한 적 없고?”
“없어.”
“그럼 불법 고용이군. 미성년 근로기준법 위반에, 유민 고용에, 계약서는 당연히 안 썼겠지? 이 회사 사장, 전부터 수사에 협조도 잘 안 하고 재수가 없었는데 좋은 정보인걸? 고맙다.”
소년은 조금 의아한 얼굴이었다. 그는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눈을 깜빡였다.
“그게 좋은 정보야?”
“불법 고용은 근로기준법으로 기소할 수 있거든. 뭐, 이걸로 실제로 처벌하는 경우는 거의 없긴 하지만 압박하는 용도로는 요긴하게 쓰일 수 있지.”
빅터는 필요한 사항 작성을 모두 마친 뒤 태블릿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그는 팔짱을 낀 채 아직 불신을 거두지 못한 어정쩡한 표정을 짓고 있는 키안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보다시피 내가 두뇌파는 아니야. 그래서 돌려 말하는 걸 잘 못 하거든? 그러니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본다.”
그는 피 웅덩이가 된 바닥이 찍힌 사진을 키안에게로 내밀었다.
“네가 했냐?”
사진을 쳐다보는 키안의 표정이 일순간 다시 험악해졌다. 그는 허공으로 눈을 돌리며 말했다.
“내가 진짜 쳤으면 그 녀석 병원이 아니라 무덤에 누워있겠지.”
“그래. 네 허세는 조서에서 잘 봤고. 그러니까 네가 했냐는 거지. 제대로 대답해 봐.”
대답이 돌아오는 데엔 시간이 걸렸다. 빅터가 이미 항변이나 다름없는 말을 한 소년에게 세게 말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그는 그동안 소년을 자세히 관찰했다. 눈빛이나 동공의 변화, 입술의 달싹임, 손가락의 움직임 같은 아주 사소한 낌새들. 닳고 닳은 조직원이 아니라면, 약간의 압박만 가해도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간단한 조사에 따르면 키안 도허티는 그와 똑같이 유민인 다른 두 아이와 함께 살고 있었다. 가장 나이가 많은 그가 곤경에 처한다면 그 아이들 역시 얼마나 버틸지 모르는 일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처지에 있는 아이들일수록 종종 자신을 수렁으로 이끄는 선택을 했다. 빅터는 가능하면 그의 결백을 믿고 싶었으나, 제 추측에 대한 확신이 필요했다.
“안 했어.”
긴 침묵 후 키안이 겨우 입술을 열었다. 그는 마른세수를 하다가 제 이마를 짚었다.
“안 했다고, 씨발.”
갑주처럼 두르고 있던 허세가 조금 무너지자, 그의 얼굴이 제 나이를 되찾았다. 빅터는 그 모습을 담담하게 지켜보다가 주머니에서 꺼낸 담배를 태웠다. 그리고 연기를 뱉으며 길게 한숨을 쉬었다. 아마도 안도했던 것 같다.
빅터는 담배를 피우다 말고 담뱃갑을 그를 향해 기울였다. “피울래?” 키안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왜 그렇게 잘 해주는데?” 그리고 쏘아붙이듯 말했다. 이 녀석이 왜 이러는지는 잘 알고 있었다. 아마도 그에겐 호의를 더 큰 악의로 맞바꾼 경험밖에는 없는 모양이었다. 그런 녀석에게는 상냥함도 독일 뿐이다. “넌 뭐 잘해줘도 불만이냐? 싫으면 관둬.” 그러자 그가 잠시 말이 없다가 담뱃갑을 가로챘다. “하나만 줘.”
빅터는 그의 앞에 재떨이를 밀어주며 담배를 허리까지 태우는 것을 기다려 주었다. 그리고 얼마 후 조용히 말했다.
“니가 안 한 거 알아.”
키안은 잠시 놀랐을 뿐, 별로 감동한 얼굴은 아니었다.
“다들 내가 했다던데요.”
“그거야, 네가 제일 만만하니까. 세상이 원래 좀 그래. 좆같지, 아주.”
빅터는 책상을 톡톡 두드렸다.
“그래도 가만히 당하고만 있을 수는 없잖냐. 짜증 나니까. 적어도 난 그렇거든. 그러니까 몇 가지 좀 물어보자.”
빅터의 예상대로 키안의 증언에는 결정적인 돌파구가 있었다. 그날 피해자는 사실 목격자와 근무 교대를 한 상태였다. 그러니까 그날 키안과 같이 일을 해야 했던 사람은 피해자가 아니라 목격자였던 것이다. 그런데도 피해자가 근무지에 나타난 모양이었다. 일을 시작하기 조금 전에. 키안은 라커에서 옷을 갈아입던 중, 그가 어제 아내한테 줄 선물을 두고 갔다고 떠드는 소리를 들었다고 했다. 그리고 키안이 근무지에 도착했을 때, 그는 이미 둔기로 머리를 맞은 채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놀라서 피에 젖은 그를 흔들어 보았으나 이미 의식을 잃은 후였다. 그때 목격자가 어디선가 갑자기 나타나 키안이 사람을 때렸다고 소리쳐대기 시작했다.
‘그 녀석이 범인이겠군.’
빅터는 키안의 증언을 받아적으며 생각했다.
“그 녀석에 대해 기억나는 걸 전부 말해봐. 그리고 그 녀석이 나타났을 때 뭐 이상한 점이 없었는지.”
키안은 별 걸 다 묻는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평범했는데요. 좀 교대를 자주 하는 편이었지만. 주로 금요일 저녁에. 그래서 사람들이 잘 바꿔줬어. 또 그러고 보니, 상자 더미를 조금 뒤적인 흔적이 있긴 했어. 없어진 물건은 없는 거 같아서 별일 아니라 생각했지만.”
거기까지 들었을 때 빅터는 빙긋 웃었다. 역시 돌파구는 여기 있었군.
“왜 웃는 거예요?”
“글쎄, 왜일까.”
빅터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태블릿을 두들겼다. ■■사에 지난 6개월 간 매주 금요일 저녁에 발송되는 물건의 리스트를 청구할 것. 텍스트 전송을 누르고 뒤를 돌아보자 소년은 눈썹이 뒤틀린 얼굴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야.”
그는 담배를 비벼끄며 말했다.
“세상이 좆같지? 근데 그거 원래 그래. 나이가 들면 나아진다는 말 믿지만. 계속 똑같이 좆같거든. 어른이 된다는 건 말야, 그걸 그냥 웃어넘기는 거지, 별 건 아냐. 그러니까 너 이렇게 다 큰 척할 거면 차라리 얼른 어른이 돼라. 그래야 손해를 덜 보거든.”
그러자 키안은 어이가 없다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보통 어른이면 좀 더 희망적인 말을 해주지 않아요? ‘할 수 있다’든지 ‘꿈을 좇으라’든지.”
“그건 ‘좋은 어른’이 하는 말이고. 나는 좋은 어른이 아니라서.”
애초에 자기가 어떻게 좋은 어른일 수 있겠는가? 자신의 인생도 제대로 간수를 못 하는데. 타인이 닦아온 길을 아무 생각 없이 따라왔다가 체제의 소모품이나 된 자신이 입에 바른 대단한 조언을 한들 와닿을 리도 없을 것이다.
‘그래도… 가능하면, 무사한 게 좋겠지.’
빅터는 심문실을 나가려다가 뭔가 생각난 듯 다시 돌아보았다.
“거…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앞으로도 사람을 진짜 때리진 말아라. 요즘 병원비 비싸.”
그 말에 키안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는 얼마 안 가 곧 웃음을 터트렸다. 끝이 조금 올라가 매서운 인상을 자아내던 그의 눈매가 둥그렇게 접혔고, 뭐가 그렇게 우스운지 조금 킬킬 대기까지 한다. 뭐, 그래도 역시 어린애들은 웃을 때가 보기 좋긴 하네. 당최 해본 일 없는 생각이었다. 빅터는 자신도 나이가 들었음을 실감했다.
빅터가 예감한 대로 그 사건은 결국 그 지역 갱단의 밀수 문제와 연결되어 있었다. 목격자인 척 위장한 범인은 사실 갱단의 끄나풀이었는데, 매주 금요일 ■■사를 통해 갱단이 필요로 하는 물건을 비밀리에 유통하고 있었다. 피해자는 그 택배 상자 중 하나가 자신이 두고 간 아내의 선물인 줄 알고 열어보았다가, 다급해진 범인에게 봉변을 당한 모양이었다.
별 것 아닌 줄 알았던 사건이 더 큰 문제를 해결할 실마리가 된 셈이었다. 사실상 그것이 강력계 3팀의 역할이었고, 오코예는 아주 흡족해했다. 그는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빅터가 파생된 사건을 책임지리라 믿고 있었다.
그러나 빅터는 그의 기대에 부응하는 대신, 다음날 사직서를 제출했다. 사직서에는 3팀장뿐 아니라, 형사 자체를 그만두겠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당연히 오코예는 크게 당황했고, 사직서를 반려했다. 면담을 하자는 메시지가 매일같이 휴대폰으로 날아들었다. 오코예는 그에게 간청하기도 했고, 화를 내기도 했으며, 예전의 추억을 들이밀며 동정팔이를 하기도 했다. 빅터는 그의 전화와 메시지를 모두 무시했다. 그 동안 그가 형사과에 발신한 메시지는 단 하나뿐이었다. 최초 용의자는 제대로 풀려났는지, 풀려났다면 그에게 체류민 등록을 권유하라는 내용이었다.
키안은 심문이 있고 얼마 지나지 않아 풀려났다고 했다. 어차피 ■■사도 당장은 압수수색에 정신이 팔려 다른 생각은 못 할 것이다. 하지만 어쩌면, 그 소년의 난관은 거기서 끝이 아닐지도 몰랐다. 갱단이 자신들이 궁지에 몰린 책임을 엄한 곳에서 찾을 수도 있으니까. 그가 최소한의 보호를 받으려면 일단은 체제의 일원이 되어야 했다. 그래, 최전선에서 지켜온 사람을 도리어 망가뜨리기만 하는 이 망할 놈의 체제.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체제의 부속품이라도 되어야 지속할 수 있는 삶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빅터가 할 수 있는 일은 거기까지였다. 어차피 모든 것은 소년의 선택에 달린 일이다. 빅터는 소년에게 쓸데없는 희망을 심어줄 생각이 없었다. 세상은 그다지 살만한 곳이 아니며, 절대적으로 기댈 수 있는 사람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도 살아가고 싶다면, 그 이유와 방식은 스스로 찾아야 했다.
그것은 빅터 자신이 풀어야 할 숙제기도 했다.
빅터는 고향으로 돌아갔다. 아웃스커트 변두리의 크지도 작지도 않은 조용한 거주지. 핏줄은 이어지지 않았으나 대체로 책임감 있는 어른이었던 빅터의 보호자는 이미 비석으로만 남은 지 오래였다. 신기루 같은 정의를 좇는 데 시간을 쏟느라 장례식 이후엔 제대로 된 예우를 갖추지 못했다. 빅터는 한동안 그 밀린 빚을 청산하는 데에 시간을 쏟았다. 그가 자신에게 물려준 작은 집을 청소하고, 그의 묘지를 관리했다. 입맛이 없을 땐 그가 부엌 한편에 모아두었던 레시피집을 꺼내 읽었다. 레시피는 꽤 다양했고 정성스러웠다. 그가 이렇게 다채로운 상상을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는 사실에 빅터는 조금 의아한 기분이었다. 돌이켜 보면 그의 보호자는 말이 없고, 그의 생활에 간섭하지 않았지만, 두 가지는 잊지 않았다. 하루 세끼의 식사. 그리고 그가 크게 엇나가려 할 때면 어김없이 날아드는 단호한 잔소리.
빅터는 문득, 그가 지나가듯이 노년이 되면 다이너를 열고 싶다고 말한 것을 떠올렸다. 정말 한 번뿐이었지만, 어쩌면 그 말은 진심이었을지도 모른다. 그 꿈은 빅터를 맡게 되면서 조금 미뤄졌고, 끝내 이루어지진 못했다.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빅터는 몹시 부끄러움을 느꼈다. 그의 보호자는 그리 사랑이 넘치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단지 누군가의 어른이 되기 위해 자신이 찾은 삶의 이유를 유예한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을 만났음에도, 자신은 철없이 궁상이나 떨고 있었던 것이다.
직장을 그만두고 일 년 정도 지났을 때, 빅터는 다이너를 열기로 했다.
그 시절에는 매일 같이 정말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풀타임으로 사람을 쓸 여력이 없었으므로, 그가 조리, 서빙, 계산, 청소 모든 일을 다 해야 했는데, 차라리 잠복근무가 체질에 맞겠다 싶을 정도로 중노동이었다. 노년에 이런 걸 하는 게 꿈이라니, 정말 취향도 특이한 양반이다.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니었다. 그 일을 제대로 해내려면 반드시 해결해야 하는 생활루틴이 있었다. 매일 아침 일찍 같은 시간에 일어나 장을 보고, 가게를 열고, 자신의 손으로 무언가를 만들고, 사람들과 대화를 해야 한다. 그 일과를 따라가는 것만으로, 빅터는 살아가는 데에 필수적인 행위를 모두 충족할 수 있었다. 별다른 심각한 고민을 할 일도, 자기모순을 견뎌내야 할 일도 없었다. 그것은 어쩌면, 당시의 그에게 가장 필요한 의식이었을지도 모른다.
소년과 다시 만난 것은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았을 무렵이었다.
그를 다시 만난 것은 정말로 우연이라고밖에는 표현할 길이 없었다. 부실공사로 화장실 배관에 문제가 생겼고, 본래 담당하던 배관공을 부르자 휴가를 갔다며 대리를 보내겠다는 답을 들었다. 그렇게 해서 나타난 것이 그 녀석이었다.
키안은 못 본새 키가 더 커져 있었고, 타투와 피어스가 더 늘었으며, 기름해진 밀짚색 머리를 꽁지로 대충 묶고 있었다. 나이를 계산해 보면 성년에서 고작 몇 개월 남았을 그는, 이제 의심할 여지 없는 성인으로 보였다. 그는 이전처럼 가시가 돋쳐 있진 않았지만, 여전히 빈말로도 좋다고 할 수 없는 인상이었다.
키안은 빅터를 바로 알아보지 못했다. 이유야 여럿 있었을 것이다. 형사를 그만둔 빅터는 인상이 변했다는 이야기를 수도 없이 들었다. 늘 단정하게 자르던 머리를 대충 기르고, 옷은 되는 대로 주워 입었으며, 수염이 올라와도 정돈하지 않고 내버려 두었다. 그러나 단지 외면의 문제가 아니더라도, 심문실에서 만났던 강력계 형사를 이런 곳에서 다시 만나게 되리라 예측할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뭐, 굳이 아는 척할 필요 없겠지.'
애초에 그럴만한 사이도 아니었다. 오늘이 지나면 다시 만날 일도 없을 것이다. 그래도 다행이라는 생각은 했다. 그가 아직 살아있어서. 그리고 살아갈 의지를 버리진 않은 듯 보였기에.
“다 끝났습니다.”
키안은 가방에 연장을 넣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바 모서리에 팔꿈치를 기대고 삐딱하게 서서 열심히 휴대폰을 두드리고 있었다. 빅터는 자신의 몫으로 내린 커피를 옆으로 밀어두고 새로 커피 한 잔을 뽑았다. 커피가 내려오는 동안 그는 계산대에서 지폐 몇 장을 꺼냈다.
“팁.”
“어, 감사합니다.”
보나 마나 또 코딱지만 한 돈으로 부려먹으려고 어린애를 대타로 고용한 거겠지. 아웃스커트는 정말 어디 가나 진부하리만치 똑같다. 빅터는 지폐를 세고 있는 키안에게 테이크아웃 커피를 밀어주며 말했다.
“일부러 현금으로 준 거야. 사장한텐 말하지 말고.”
키안의 시선이 테이블 위의 커피에서 빅터에게로 향했다. 그때 그가 지은 표정은 과거의 어느 순간과 닮아 있었다. 왜 그렇게 잘 해주는데? 차이가 있다면 지금의 키안은 그 말을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그는 단지 음영진 눈두덩이에 자리 잡은 예리한 잿빛 눈동자로 상대를 기민하게 살피고 있을 뿐이었다. 그는 그사이 딱 그만큼 자란 걸지도 모른다.
"…?"
계산대로 돌아서려는 순간, 그의 표정에 의아함이 번지는 것이 보였다. 정산이 끝났는데도 나가는 발소리가 들리지 않았고, 등 뒤에서 시선이 느껴지는 듯 했다. 빅터는 머리를 긁적였다. 감동의 재회 이런 건 귀찮은데. 그런 데엔 눈꼽만큼도 재능이 없었다. 다행이도 그건 저 녀석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키안은 말없이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바에서 몸을 일으켰다.
“요즘도 하루살이냐?”
제가 생각해도 형편없는 안부 인사였다. 그러나 키안의 마음엔 든 모양인지, 그의 입꼬리가 조금 올라갔다.
“하루살이 말고 뭘 하겠어요.”
주고받을 만한 말은 많이 있었다. 그간 어떻게 지냈는지, 그 후 별 탈은 없었는지. 체류민 등록은 했는지, 그가 무언가 도울 것은 없는지. 그러나 막상 내뱉은 말은 그 모든 평범한 화제에서 빗겨나가 있었다. 그것은 소년도 마찬가지였다. 그땐 고마웠다든지, 왜 이런 곳에 있는지,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그런 얘길 할 수도 있었겠지만, 소년은 그냥 실없는 소리를 뱉었다.
“그때 무슨 마법을 부린 거예요?”
“마법? 그딴 건 없어, 임마. 법의 철퇴지. 이미 망가질 대로 망가져서 보통은 잘 안 듣는데, 넌 운이 좋았지.”
빅터는 어쩌면 그들이 지독하게 닮은 유형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같은 모양의 블록은 아귀가 맞지 않으며, 같은 극의 자석은 서로를 밀어낸다. 두 사람은 닮았기에 좁혀질 수 없는 거리가 있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닮았기에 왜 그 거리가 필요한지도 알았다. 빅터는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당장 소화할 수 없는 관심이 아닌, 언제든 털어낼 수 있는 무관심이란 사실을.
“이 근처 살아?”
빅터는 현관문으로 향하는 키안에게 가볍게 물었다.
“네.”
“가끔 아르바이트 할 생각 있냐? 막 오픈한 가게라서 일손이 딸려 죽겠거든.”
키안은 빅터를 멀거니 보았다. 그러나 그 아래 숨겨놓은 기민한 시선은 주위를 끊임없이 탐색한다. 상대가 나에게 해를 끼칠지, 무슨 의도가 있는 건 아닌지. 그는 곧 수첩을 대충 찢은 뒤, 전화번호를 적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연락 주세요.”
빅터가 키안을 부르는 일은 한 달에 딱 세 번 있었다. 주로 사람이 정말 많이 몰리는 금요일 저녁이나 일요일 아침에. 빅터는 한 번 그를 부르면 정말 많은 일을 시켰다. 서빙, 청소, 짐운반 혹은 그 모든 것을 동시에 시키기도 했다. 키안이 속으로 욕을 했더라도 할 말이 없을만큼. 그러면서도 식사 시간에는 그가 원하는 메뉴를 챙겨주었고, 늘 일당의 반절 이상을 수고비로 더 얹어주었다. 앞으로 더 부려먹으려고 주는 거야. 빅터가 그 말을 잊지 않고 덧붙이면, 그는 그냥 웃어넘겼다.
그들이 만나는 시간은 그렇게 길지 않았다. 그러나 정기적인 만남을 지속하면, 신경 쓰지 않아도 알게 되는 것들이 생기기 마련이었다. 키안의 삶이 무엇을 중심으로 돌아가는지 알아채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는 일하는 중에 걸려오는 전화를 대개 무시했지만, 어떤 전화는 어떤 상황에서든 반드시 회신했다. 일이 늦게 끝나는 날에는 가끔 그보다 조금 어려 보이는 아이들이 그를 만나러 찾아오곤 했다. 그 아이들과 이야기하는 키안은 이제껏 본 적 없는 표정을 지었다. 그는 유독 많이 웃었고, 개구진 얼굴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빅터는 묘하게 평소보다 차분한 키안의 눈빛에 단순히 친애의 감정만 담겨있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챘다. 그것은 누군가의 어른이 되기로 결심한 사람만이 지을 수 있는 표정이었다.
어느 날 빅터는 마감을 하다말고 찬장에서 아침에 만들어둔 바나나 브레드와 블루베리 머핀을 꺼냈다. 현관문 차임벨이 울리자 아이들은 일제히 그를 돌아보았다. 빅터는 키안에게 간식이 든 봉투를 건네며 말했다.
“내일 되면 팔지도 못하니까 가져가서 좀 먹어라.”
그 말만 끝내고 돌아서려는데, 다른 두 사람보다 유독 더 어려 보이는 남자아이가 불쑥 끼어들었다.
“빅터 아저씨죠?”
아이는 제법 붙임성 있게 말했다. 그의 이름이 라쉬드임을 알게 된 것은 조금 나중의 일이었다.
“꼭 감사하다고 말씀드리고 싶었어요. 정말 감사해요. 그때 저희 형을 구해주셔서.”
빅터는 말문이 막힌 채 그 아이를 쳐다보았다. 두 사람이 필사적으로 회피해 온 대화가 기어코 그들 앞에 던져진 것이 제법 우습긴 했다. 빅터는 아이의 머리칼을 흐트러트리며 키안을 쳐다보았다.
“얜, 너랑 달리 귀염성 있네.”
그러자 키안이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설마 나한테 그런 걸 기대했어요?”
“아서라, 그냥 가라 빨리.”
빅터는 손사래를 치며 그들을 쫓아냈다. 그리고 그것이 한동안 그들이 나눈 마지막 대화였다.
그날도 평소와 다름없이 업무를 위해 연락했으나, 몇 번이고 부재중 메시지가 돌아왔다. 지금까지 없었던 일이었다. 그냥 바쁘다고 생각하고 넘길 수도 있었겠지만, 이해할 수 없는 안 좋은 예감이 들어 몇 번 더 다이얼을 눌렀다. 얼마 후, 전화를 받은 것은 키안이 미마라고 부른 여자아이였다. “오빠는 당분간 이 번호로 연락이 안 될 거예요.” 미마의 목소리는 빅터가 알던 것보다 훨씬 가라앉아 있었다. 빅터는 거기서 전화 종료 버튼을 눌러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 밖에 그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겠는가. 그러나 엄지가 버튼에 닿기 전에, 그는 결국 한 마디 덧붙였다. “무슨 일 있는 건 아니지?” 미마는 잠시 대답이 없었다. “대단한 건 아니에요. 그냥… 오빠, 군에 입대했어요. 당분간 저희도 보러오기 힘들거예요.”
그 후로 꼬박 5년이라는 시간이 지나는 동안, 빅터가 키안에 대해 들은 소식은 그저 살아있다는 것 정도였다. 빅터는 간혹 자신을 찾아오는 미마와 라쉬드에게 간식거리를 나누어 주며, 어쨌든 그의 팔다리가 제대로 붙어있음은 확인했다. 딱히 섭섭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것은 무엇보다 자신이 의도적으로 벌린 거리였다. 그가 자신과 같은 과오를 범하지 않도록. 타인이 닦아놓은 길에 의존한 자의 말로는 그가 가장 잘 알고 있다. 키안은 영민한 데가 있었고, 결국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선택을 내렸다. 체제의 부속품이 되는 것. 빅터 역시 그가 언젠가 선택하게 되리라 예상했던 그 결말….
그렇게 예고 없이 훌쩍 떠났던 그는, 어느 날 갑자기 불쑥 되돌아왔다.
수요일 오후는 한 주중에 가장 한산한 시간이었다. 빅터는 볕이 잘 드는 창가 자리에서 반쯤 졸고 있는 손님을 내버려 두고 물걸레로 바닥을 닦고 있었다. 그때, 차임벨 소리가 들려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볕이 쏟아지는 유리문 앞에 그 녀석이 서 있었다.
군대 생활을 헛되이 한 것은 아니었는지, 그는 인상이 조금 바뀌어 있었다. 자세가 이전보다 곧아졌고, 그로 인해 덩치가 전보다 더 커 보였다. 햇볕에 그을린 몸에는 전에 없던 상처가 늘어 있었지만, 몸 이곳저곳을 뚫고 있던 피어스는 더는 보이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그는 이제 날카로운 어린아이가 아니었다. 언제 체득했는지 모를 유들유들한 웃음 덕에, 그는 제법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처럼 보였다.
“요새는 장사가 잘 안 되나 봐요? 왜 이렇게 손님이 없어요?”
빅터는 물걸레를 쥔 채 황당한 기분으로 키안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키안은 그런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 침묵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바 스툴에 풀썩 자리 잡고 앉았다.
“배고프다. 아무거나 하나 만들어 줘요.”
“내 살면서 너같이 뻔뻔한 놈은 처음 본다.”
“왜 그래요? 꼭 내가 보고 싶었던 사람 같네.”
얼씨구. 빅터는 속으로 욕지기를 뱉었다. 못 본새 능글거리는 거 보니, 정말 어른이 다 되긴 한 모양이었다. 한 대 칠까 싶었지만, 오랜만에 보는 정이 있어 속으로 삼켰다. 빅터는 냉장고를 열었다. 안에는 1인분 분량의 찹스테이크 재료가 남아 있었다.
“왜 때려쳤어.”
빅터는 재료를 손질하다 말고 넌지시 물었다. 그때, 키안은 삐딱하게 턱을 괸 채 바에 비치된 쿠키를 집어 먹고 있었다.
“그냥, 나한텐 이게 맞는 거 같아요. 하루살이.”
그는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빅터는 혀를 찼다.
“나 원 참. 철 좀 들었나 했더니만.”
말은 그렇게 했으나, 분명 복잡한 사정이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자신이 겪었던 환멸과 비슷한 모양새의. 아웃스커트의 이야기들은 진부했고, 그들은 지독하게도 닮았으니까. 빅터는 그 사실이 지겹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한편으론 이상한 안도감이 들었다.
달궈진 후라이팬에 재료를 볶는 빅터는 희미하게 미소짓고 있었다. 스스로 그 사실을 눈치채진 못한 채. 키안은 그런 그를 가만히 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가 두고 간 물걸레를 집어 바닥을 닦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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