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mp's Falling
빅터 모렐리
치안국 아웃스커트 지부 근처의 술집 <카사블랑카>는 승리의 열기로 가득했다. 소파 곳곳에 술에 취한 사람들이 빨랫감처럼 널려 있었고, 그나마 살아남은 이들도 평소의 다섯 배나 되는 판돈으로 내기 당구를 치며 상여금을 흥청망청 탕진하는 중이었다.
그들이 그렇게 흥분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그날 오전에 토벌한 코뿔소형 괴수는 덤프트럭만 한 거대한 몸집에 다섯 개의 뿔이 나 있는 A급 괴수였다. 그것은 치타를 연상시킬 만큼 재빨랐고, 입에는 맹수처럼 날카로운 이빨이 나 있었다. 만약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면 근처 마을로 돌진해 많은 사상자를 낼 상황이었다.
그들은 간발의 차이로 그 처참한 결말을 막아냈다. 그리고 그 극적인 승리의 중심에는 당시 서른둘이었던 빅터 모렐리가 있었다.
“짜식, 맨날 투덜거리는 주제에 멋있는 역할은 지가 다 가져간다니까? 자, 얼른 한 잔 더 받아.”
그와 함께 임무에 출전했던 티모시 맥도넬은 바닥이 드러난 맥주잔을 거품이 넘치도록 채웠다. 좋게 말하면 친화력이 좋고, 나쁘게 말하면 촉새처럼 경박하기로 유명한 티모시는 그날도 빅터의 무용담을 마치 제 것인 양 떠들어대고 있었다.
하지만 그날 빅터를 추앙한 사람은 티모시만이 아니었다. 그날 임무에 출전한 사람들은 모두 빅터에게 큰 빚을 지고 있었다. 그는 시속 100km를 넘는 속도로 돌진하는 괴수에게 망설임 없이 달려들어, 그 뿔을 한 손으로 낚아챘다. 그는 튕겨 나가듯 뒤로 밀려났고, 사방에 모래바람이 일었다. 사람들은 숨을 죽인 채 그 만용의 결과를 지켜보았다.
곧 빅터의 고함이 모래 장막을 찢고 울려 퍼졌다. 그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코뿔소의 힘과 무게를 온몸으로 견뎌내고 있었다. 날카로운 이빨이 돋아난 입을 두 손으로 다물린 채. 조금이라도 힘이 풀리면 그대로 상체가 물어뜯길 상황이었음에도, 그의 눈동자에는 두려움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날 <카사블랑카>를 뒤덮은 열기는 사실 당연했다. 평소 보상액을 훨씬 상회하는 금전적 보상, 고공행진 할 부서 내 평판, 그리고 남들에게 자랑할 멋진 무용담까지. 찰나의 순간 생사의 기로를 오갔다는 사실도, 살아남은 이상 모두 미화될 뿐이었다.
그러나 빅터는 한껏 들뜬 분위기에 끼어들지 못한 채, 조용히 술잔을 기울였다. 중추신경을 타고 오르던 강렬한 흥분이 걷히자, 어떤 의문점이 점차 선명해졌기 때문이다.
‘역시 조짐이 불길해.’
오늘과 같이 어려운 임무를 맡게 되는 에스퍼들은 대부분 베테랑이었다. 이 업계에서 베테랑이란 단순히 경험이 많고 강하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그들은 대체로 승부사 기질이 있었다. 생사의 확률이 반전되는 순간 느껴지는 스릴과 전율이 죽음의 원초적인 공포를 뛰어넘는 자일수록 이 일을 오래 버틸 수 있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그들은 중요한 점을 놓치고 있었다. 애초에 그들이 하는 일은 게임이나 도박이 아니며, 치안과 방위의 틀 안에서 이루어지는 행정 업무라는 점이었다. 그런 중요한 일이 오늘처럼 운에 좌우된다는 것은 심각한 위험신호였다.
‘이번 괴수도 말만 A급이지 S급이나 거의 맞먹는 위험도였어. 이런 놈들이 도시유적 안쪽까지 들어오다니. 지금 당장은 어떻게든 막아냈지만, 좀 더 체계적인 방어책을 세우지 않으면….’
물론 그의 고민은 이미 고주망태가 된 철없는 동료 놈들 탓에 오래 이어지지 못했다. 어이 챔프! 너 또 쓸데없는 생각 하고 있지. 티모시가 헤드록을 걸었고 다른 이들의 야유가 이어졌다. 여기까지 와서 술맛 떨어지게 궁상떨지 마라. 어서 판돈이나 더 걸지 그래? 야, 이거 다 따면 얼마냐. 빅터는 자신을 둘러싼 동료들을 흘겨보았다.
‘이 철없는 빡 대가리들은 내일 당장 제 인생이 종을 칠 수도 있다는 걸 알기는 할까.’
그는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애써 내리누르며 길게 한숨을 쉬었다. 물론 그의 망할 동료들은 그가 그러든 말든 대체로 관심이 없었다. 반응을 보이는 것은 한 시도 입을 다물지 않는 티모시는 정도였다.
“근심이 가득 찬 표정이신데, 니가 그러니까 오코예 과장의 총애를 받는 거야. 자승자박이라 할 수 있지.”
“그래. 아주 악담을 해라.”
빅터는 그의 말에 건성으로 대꾸했다. 같은 경찰부 출신인 티모시 맥도넬만큼 빅터와 오코예 형사과장 사이의 유서 깊은 역사를 잘 아는 사람도 없었으므로, 그는 빅터의 속을 긁으려는 속셈이 분명했다. 그것은 티모시의 오랜 악취미였다.
“챔프. 내가 얘기했지. 우리는 어차피 부품이라고. 부품이면 부품답게, 생각은 적당히 하고 살아. 안 그러면 너, 제 명에 못 산다.”
“왜, 과장님이 너한테 날 암살하라고 하시던?”
“설마. 그보단 과로사를 원하시겠지.”
빅터는 피식 웃었다. 글쎄, 그건 이미 성취하신 거 같은데. 그는 슬슬 자리에서 몸을 일으켜 벽에 세워둔 큐를 집어 들었다. 그러자 좌중에서 휘파람 소리가 들렸다. 실력을 보여줘, 챔프. 빅터는 큐에 초크를 묻히며 웃었다.
“다들 집에 속옷 바람으로 돌아갈 각오나 해라.”
오코예 형사과장 | 면담 요청. 13:15. 치안국 아웃스커트 지부 형사과 회의실.
다음날 빅터는 새벽 댓바람부터 온 메시지 알람에 잠에서 깼다. 그는 숙취로 깨질듯한 머리를 부여잡으며 휴대폰 알람을 껐다.
‘빠르기도 하시지.’
그의 상사, 알렉산더 오코예 형사과장은 체류민 출신이라는 핸디캡에도 불구하고, 작년 겨울, 마흔둘의 나이로 형사과장의 자리에 무사히 안착했다. 누군가 그에게 오코예가 그 자리에 오를 자격이 있느냐고 묻는다면, 빅터는 망설임 없이 그렇다고 답할 것이다.
오코예는 흔히 요행과 연줄로 자리를 꿰차는 시원찮은 녀석들과는 달랐다. 형사로서 현장에서 뛰던 시절, 그는 십여 년간 치안국을 괴롭히던 마약 거래 조직을 궤멸시키는 기념비적인 업적을 세웠다. 그는 그 후 갱단에 손을 담갔던 소년들을 도와주는 교화 프로그램을 복지부에 제안하였고, 이 일로 주요 언론에 오르내리기도 했다. 그가 그 일련의 목표를 달성하는 동안, 빅터는 그의 수족이 되어 몸을 갈아 일했다.
오코예가 보인 일련의 행보는 단순 출세를 위한 정치쇼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는 나름의 계획과 포부, 그리고 신념이 있는 남자였다. 그 사실은 그를 줄곧 곁에서 지켜본 빅터가 제일 잘 알았다. 경찰대를 막 졸업한 햇병아리 시절, 빅터는 그를 진심으로 존경하기도 했다.
서른두 살의 빅터는 여전히 그 감정의 영향 아래 있었다. 이미 9년이라는 시간이 지나, 그의 입에서 이상보다 변명이 더 자주 오르내리게 됐지만, 빅터는 아직 그를 온전히 떠나지 못했다.
“특수부 네트워크에 자네의 활약에 관한 이야기로 가득하더군.”
오코예의 흑갈색 손가락이 회의실 테이블을 우아하게 두드렸다. 그의 왼손 약지에서 고급스러운 은빛 반지가 반짝였다. 빅터는 그의 버릇이 사실 섬세하게 의도된 것임을 알았다. 오코예는 자신이 프론티어 가문의 아가씨와 약혼했다는 사실을 매우 만족스러워했다.
“설마 칭찬을 해주시려고 부르신 건 아니죠?”
빅터는 반지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답했다. 오코예가 시선을 들어 그를 보았다.
“자네, 요새 너무 까칠해. 얼마 전에 잔소리 조금 했다고 아직도 삐친 건가?”
“저는 늘 이 모양이었잖습니까. 과장님이 멋대로 좋게 평가하신 거죠.”
“무슨 소리. 막 내 밑에 들어왔을 시절 자네는 정말 기특하고 귀여웠지. 어떤 일이든 시키면 척척 해내고, 말대꾸 없이 고분고분하고, 날 존경한다고 편지까지 쓰지 않았나.”
“그땐 정말 뭐가 씌긴 했었죠.”
“지금처럼 내 허락 없이 목소리를 내지도 않고 말이야.”
마지막 말을 입에 담는 오코예의 목소리에 미묘한 균열이 생겨났다. 빅터는 그것이 자신이 여기에 불려온 이유임을 짐작하고 있었다. 전날 승전 파티가 있기 전, 빅터는 치안국장에게 올리는 업무보고서에 다음과 같은 내용을 적었다.
코뿔소형 괴수는 그 위험성이 괴수 등급 A를 상회하는 것으로 추정됨. 최근 이와 유사한 위험성을 가진 괴수들이 도시유적 안쪽에 자주 출몰하고 있으므로, 치안국 차원의 대책을 요청함. 에스퍼의 증원, 혹은 불가능하다면 일반 군대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방안이 필요해 보임.
빅터는 정치질을 싫어했지만, 바보는 아니었다. 자신이 그런 행동을 했을 때 오코예가 싫어하리란 것은 충분히 예상하고 있었다. 이렇게 그를 따로 불러 불만을 표시하리란 점도.
“자네도 알다시피, 특수부에 자네를 추천한 사람은 바로 나였지. 우리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건 이미 공공연한 사실이고. 그간 좋은 성과를 내서 내 체면을 세워준 점은 고맙게 생각하고 있네. 하지만 이건 다시 말하면 자네의 말과 행동이 결국 우리 형사과의 뜻이자 내 뜻으로 해석될 수 있다는 소리도 된다네.”
“과장님이 생각하시기에 형사과는 안전한 업무 진행에 반대하는 단체입니까?”
“그런 뜻이 아니지 않나. 제안이란 내용도 중요하지만 언제, 어떻게, 누구에게 하느냐가 더 중요하다고 볼 수 있지. 그런 의미에서 자네가 택한 방법은 최악이야. 모두에게 공개된 채널에서, 자네의 전문분야도 아닌 문제에 대해, 반드시 시정하라고 요구하는 행위가 얼마나 많은 부서 간 문제를 일으키는지 모르나?”
빅터는 그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오코예 역시 대답이 듣고 싶어 물어보진 않았을 것이다. 그들 사이에 9년의 세월이 있다는 것은, 말하지 않아도 서로의 의중을 읽어낼 수 있다는 뜻이었다. 그런데도 기어코 질문을 입 밖에 냈다는 것은 일종의 경고인 셈이다.
“뭐, 괜찮지 않습니까? 말씀하신 대로 과장님이 이런 멍청한 행보에 동조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걸요. 그냥 내 사냥개가 아무 때나 짖는 거 보니 은퇴할 때가 됐나보다―하고 입 터시고 미래의 부인께서 마련하신 일등석에 앉아 제가 물어뜯기는 걸 지켜보시면 됩니다.”
“내가 지금 내 자리를 보전하자고 이러는 거 같나?”
“그야, 저는 모르죠.”
“섭섭하군. 난 자네가 걱정이란 말이네.”
그 말에 빅터는 고개를 들었다. 그는 그 방에 들어온 이후 처음으로 오코예 눈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
자네가 걱정이야―빅터는 오코예가 하는 말의 진의를 대부분 짐작할 수 있었지만, 그 말만큼은 늘 수수께끼처럼 느껴졌다. 그 말을 할 때 오코예의 눈빛, 목소리, 표정 모두 조금의 거짓도 없어 보였지만, 그래서 도리어 믿기 어려웠다. 그들 사이에서 반복되던 실망과 충돌에도 불구하고, 그 한마디가 그들을 과거의 한때로 되돌려 놓는다는 점이.
“빅터.”
오코예는 곧 짧은 침묵을 깼다.
“뭔가 오해를 하고 있나 본데, 나는 네가 반골 기질 보이는 거, 싫어하지 않아. 아니 오히려 좋아하지. 어릴 적 나를 보는 거 같기도 하고.”
그는 하필 그들이 처음 만났던 시절 사용하던 격의 없는 말투로 그런 소릴 했다.
“꾸밈없는 성격인 거, 좋다 이거야. 진정성은 네 자산이지. 하지만 난 네가 더 잘 됐으면 좋겠다. 여기서 고꾸라지면, 우리가 목표했던 정의에서 점점 더 멀어질 테니까. 나 혼자서는 도달할 수 없다는 거 잘 알잖아. 네 도움이 없으면.”
오코예는 빅터의 어깨에 제 손을 올려놓았다. 올가미처럼 제 감정을 쥐어오는 손길이 연출이라기엔 너무 진짜 같고, 진짜라기엔 너무 연출 같았다.
그때까지 빅터는 그럭저럭 표정 관리를 잘하고 있었다. 이 망할 상사와 이런 관계가 된 지도 제법 오래되었으니까. 그러나 그는 결국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터뜨렸다. 정말이지, 이번에도 과소평가한 모양이다. 알렉산더 오코예는 그의 목줄을 잡고 흔드는 데 도가 튼 사람이라는 것을.
옥상에서 내려다본 아웃스커트는 그곳에 켜켜이 쌓인 진부한 불행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높고 견고한 성채 주위로 난개발된 건물들이 득실거렸고, 그 사이로 가느다란 도로들이 실핏줄처럼 무질서하게 뻗어 있었다. 그런 광경을 보고 있으면, 그 속에서 바쁘게 살 때 잊고 지내던 한 가지 사실을 다시 한번 실감하게 된다. 이곳에 모인 사람들의 목표는 오직 살아남는 것뿐이라는 것을.
오랫동안 아웃스커트에서 살아남는다는 것은 오시리스 구역 안으로 들어간다는 것을 의미했다. 아웃스커트에서의 생활은 삶을 유예하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을 수 없었다. 미디어에서 연일 보여주는 아름답고 정돈된 풍경이 그런 생각을 공고히 했다. 오시리스 구역엔 가난도, 범죄도, 굶주림도 없고, 거리에는 오줌과 담배 냄새 대신 라일락 꽃향기가 났다. 유행을 따라 생겨나고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세련된 가게들. 초당 수십만의 자본을 태우며 불야성을 이루는 네온사인. 삶이란 분명 그런 모습을 띠어야 했다. 이런 초라한 생활이 아니라.
빅터는 자라면서 그런 말을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었다. 체류민들에게 체념 섞인 한탄은 달리 할 말이 없을 때 주고받는 한담 같은 것이었다. 주말에 비가 안 왔으면 좋겠다, 이번 주에는 일이 적었으면 좋겠다 같은, 누구나 공감할 수 있기에 적당히 주고받는 말.
빅터 역시 종종 그런 불평불만을 늘어놓았지만 그다지 진심이었던 적은 없었다. 오랫동안 그는 별다른 의문 없이 주어진 처지를 받아들였다. 애초에 그는 다른 아웃스커트 출신 소년들과 비교하면 운이 좋은 편이었다.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고 지인의 집에서 맡겨졌던 그는, 큰 덩치와 온순치 않은 인상 때문에 불건전한 길로 빠질 뻔했으나, 결국 이렇다 할 탈선을 한 적은 없었다. 그의 보호자가 제법 상식적인 어른이었기 때문이었을 수도 있고, 그의 천성 자체가 일탈 같은 걸 하기엔 너무 고지식했기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어쨌든 그는 불행인지 다행인지 딱 남들만큼 평범하게 살아왔다.
알렉산더 오코예를 알게 되기 전까지는.
그들의 첫 만남이 정확히 어땠는지 이제 잘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도 빅터가 처음 배정되었던 강력계 3팀이 모인 술자리에서 적당히 대화를 나눈 것이 처음이었을 것이다. 당시 오코예는 막 팀장의 자리에 오른 신임 팀장이었고, 빅터는 말하자면 그의 첫 부하였다. 빅터는 그냥 늘 그래왔던 것처럼, 혹은 남들이 다 그러는 것처럼, 말버릇이나 다름없는 불만을 늘어놓았다. 상대 역시 그러리라 생각하면서. 그러나 돌아온 것은 예상 밖의 침묵이었다.
“너도 그렇게 말하는구나. 나는 말이야, 성채 안에서 살아야만 구원받는 것마냥 떠드는 게 싫어. 아웃스커트를 좀 먹는 건 다른 게 아니라 그 뿌리 깊은 패배주의라고 생각해.”
“뭐, 그래도 오시리스 구역이 더 살기 좋은 건 사실이지 않나요.”
“하지만 우리 중 대부분은 평생 아웃스커트에서 살아야 하잖아. 아웃스커트를 살만한 곳으로 만드는데 급선무가 아닐까? 도박이나 다름없는 꿈을 좇는 거보다는.”
그렇게 말하며 검은 눈동자를 반짝이는 오코예는 빅터가 만난 그 어떤 사람보다 영민하고 똑똑해 보였다. 울림이 좋은 목소리와 명료한 말투는 그가 하는 말에 신뢰감을 더했다. 빅터는 자신이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그에게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나는 무언가에 대해 환상을 품는 것은 결국 마음에 독을 푸는 일이라고 봐. 환상은, 우리가 살아가는 이 순간을 더 나은 방향으로 바꾸기 위한 노력을 무의미해 보이게 만들거든.”
빅터의 인생에서 미래에 대해 진심을 담아 이야기한 사람은 오코예가 처음이었다. 선선한 충격 때문인지, 취기로 몽롱했던 정신이 점점 또렷해졌다.
“팀장님에게는 있으신가 보죠? 아웃스커트를 지금보다 나은 곳으로 만들기 위한 계획이요.”
“많은 걸 할 순 없겠지. 내가 정치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하지만 내 자리에서 할 수 있는 걸 할 생각이야.”
경찰부의 아웃스커트에 대한 지원은 굉장히 한정적이었고, 특히 강력계 사건은 적극적인 수사가 이루어지는 일이 드물었다. 그러나 그날 주고받은 각오가 진심이라는 것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오코예는 제 주위에 적체된 체념과 무기력을 하나씩 걷어냈다. 제대로 된 수사 없이 대충 결론을 내리려는 상부로부터 시간을 벌어온다든지, 공소시효가 얼마 남지 않은 미제사건을 처리한다든지 하는, 인기 없는 일을 골라서 하는 그를 지켜보며 사람들은 일제히 혀를 찼다. 저게 되겠냐. 쓸데없는 에너지 낭비지. 그런 소리를 매일같이 들었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기어코 자신이 목표한 바를 이루어 냈다.
실적이 쌓이자 오코예에 대한 평가는 노골적으로 달라졌다. 그가 이끄는 강력계 3팀은 주위에서 에이스 취급을 받았고, 치안국 간부들도 그를 주목하기 시작했다. 그에게 충성하는 부하들도 늘어났다. 그의 뛰어난 수완과 지금까지의 노력을 생각했을 때 당연한 귀결이었다. 그러나 오코예는 그런 얘기를 할 때마다 고개를 저었다.
“글쎄. 네가 없었으면 여기까지 못 왔을걸.”
오코예는 모두가 자신을 의심할 때 무작정 믿고 따라와 준 것을 고맙게 느낀다고 했다. 빅터의 견고한 믿음이 없었다면 자신의 무모한 계획은 시작도 하기 전에 좌초했을 것이라고.
물론, 이제는 씁쓸하기만 한 이야기였다. 빅터는 답답한 기분에 주머니에 찔러넣은 담뱃갑을 꺼냈다.
‘왜 이렇게 된 걸까.’
그런 하나 마나 한 생각을 하며 담배를 반 토막 정도 태웠을 때, 옥상 문이 덜컹거리며 열렸다.
“또 여기서 궁상떨고 있구만?”
철문 사이로 티모시가 대가리를 들이밀었다. 빅터는 미간을 찌푸리며 그를 흘겨보았다.
“혹시 나한테 추적장치라도 달아놨냐?”
“우리가 얼굴 본지도 이제 5년 아냐. 니가 어디서 무슨 생각 하고 있는지야 뻔하지.”
빅터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티모시는 그러든 말든 제멋대로 떠들었다.
“어제 올린 보고서, 벌써 내렸더라? 그래, 이번에도 반항은 여기까지냐?”
“…험한 말 듣기 싫으면 그냥 가라.”
그러나 그는 오히려 더 가까이 다가와 자기도 한 개비 달라는 듯 기웃거렸다. 빅터가 한껏 짜증을 내며 그의 얼굴을 향해 담뱃갑을 던졌다. 그는 그것을 재빠르게 잡아채며 키득거렸다.
티모시는 경박스러운 사람이었지만, 의외로 넘지 말아야 할 선은 아슬아슬하게 지키는 편이었다. 옥상에는 한동안 담배 연기만 조용히 오갔다. 얼마 후, 담뱃불을 끄고 일어나려는 빅터를 향해 티모시가 넌지시 운을 뗐다.
“너는 말이야, 예전부터 과장님을 지나치게 우상화해 온 경향이 있어. 그 양반도 그냥 평범한 사람이야. 모순된 행동을 하기도 하고, 상황에 따라 변하기도 하는.”
그때 그의 목소리는 드물게 진지했다.
“나는 그 양반이 이해가 돼. 그 자리에 올라가면 우리에겐 안 보이는 온갖 난관들이 보이겠지. 예전에는 맨땅에 부딪혀서 해결했던 일도 조금만 타협하면 쉽게 처리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됐을 거고. 그게 아니라도, 그냥 지쳤을 수도 있지. 그 양반도 이제 마흔이 넘었으니 그냥 평범하게 살고 싶을 수도 있는 거지. 그런 생각을 한다고 뭐 엄청난 변절자나 위선자가 되는 건 아니야. 지금도 머리에 특권의식만 들어차 있는 다른 간부들보다야 훨씬 합리적이고 말이야.”
물론 그런 것쯤은 이미 알고 있었다. 빅터가 아직 오코예를 떠나지 못한 것도 같은 이유였기 때문이다. 어차피 제멋대로 기대한 것뿐이다. 세상에 완벽한 인간이 어디 있겠는가? 젊은 시절 이상을 좇던 자가 나이가 들면서 현실주의자가 되어 손가락질받는 것은 세상사에서 수없이 반복되어온 진부한 이야기이다.
문제가 되는 것은 오히려 빅터 자신이었다.
오코예의 방향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면 떠나면 될 일이다. 당신의 방식은 틀렸다고, 이제 체스 말 노릇은 그만두겠다고 선언하면 그만이었다. 그 간단한 해결책을 눈앞에 두고도 그는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 자신의 우유부단함이 언젠가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 것을 알고 있음에도.
띠링, 띠링, 띠리링.
옥상을 나가려는데 시끄러운 메시지 알림이 연달아 울렸다. 빅터와 티모시는 거의 동시에 휴대전화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그들은 자리에 멈추어 메시지를 확인했다.
긴급 재난 메시지 | S급 괴수가 아웃스커트 거주구로 돌진 중인 것이 확인. 15분 후 대량의 인명피해 발생 예상. 해당 좌표 지역에 계신 분들은 지금 바로 대피하시기 바랍니다.]
긴급 지원 요청 | 사건번호 #■■■■■ 1차 토벌팀 전원 전투불능상태. 15분 후 해당 좌표의 거주구에 출몰할 것으로 예상. 메시지를 받은 모든 에스퍼들은 긴급 지원 바람.
빅터는 그 이후에도 계속해서 밀려드는 메시지를 심각한 표정으로 읽어 내려갔다.
“갈 거냐?”
그는 티모시를 돌아보았다. 티모시는 휴대폰을 주머니에 찔러넣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부르심을 받았으니 가야지. 선택권이 있나.”
“조심해. 이번 토벌전, 반드시 누군가는 죽는다. 평소처럼 깝치면 그게 너가 될지도 몰라.”
티모시는 잠시 표정이 없다가, 곧 감동한 척 눈을 반짝였다.
“어머, 자기. 지금 날 걱정해 주는 거야?”
“넌 이런 순간에조차 그 지랄이 떨고 싶냐?”
“모르는 소리. 나 같이 매사에 진지하지 못한 놈이 오히려 생존율이 높은 편이라고. 위험하면 알아서 비겁하게 잘 도망치니까.”
그는 비상계단 아래로 내려가며 그런 실없는 소리를 했다. 그러다 무언가 생각난 듯 뒤를 돌아 빅터와 눈을 맞추었다.
“너야말로 무리하지 마. 이번에도 혼자 짊어지려 하면 큰일 난다 너.”
제법 진실한 걱정이 담긴 눈빛이었다. 빅터는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큰일 나면 나는 거지. 이미 내가 분수보다 오래 살아서 이런 꼴을 보나 싶다.”
“안 돼. 네가 죽으면 우리 과장님 히스테리 누가 감당하는데.”
그 뒤로는 가벼운 말다툼이 이어졌다. 출전 전 악담을 주고받는 것은 징크스를 쫓는 의식과 같았다. 빅터는 그 의식을 성실하게 수행하며 예정된 불행이 비껴가기를 빌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요행은 일어나지 않았다. 사건 현장에 도착한 빅터는 시작도 하기 전 패배를 확신했다.
빅터는 모집 2년 차부터 에스퍼 활동을 시작한 초기 발현자 중 한 명이었고, 고난도로 분류된 임무에 수없이 참가해왔다. 생사의 갈림길을 오가는 것은 이미 익숙했다. 그런데도 그런 압도적인 절망감은 처음 느껴 보았다.
‘이건…. 이길 수 없어. 절대로.’
온전히 형체가 남은 건물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초토화된 마을에는 짓이겨진 생물의 피와 살점이 곳곳에 널려 있었다. 그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은 명백한 학살이었다. 희생자 중 어디까지가 민간이고 어디까지가 전투 인력인지, 작전의 지휘자는 누구인지 도무지 분간할 수 없었다.
본능적으로 도망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발걸음이 뗄 수가 없었다. 단언하건대, 그 순간 그의 발목을 붙잡은 것은 정의감도 책임감도 아닌 그저 공포였다. 그가 조금 더 용기가 있었더라면, 그는 불명예를 감수하고서라도 그곳에서 달아났을 것이다.
그러나 같이 온 동료의 두개골이 괴수의 습격으로 으스러진 순간, 그는 퍼뜩 정신이 들었다. 분수처럼 피를 쏟으며 고깃덩이가 되어 쓰러지는 동료를 목격하자, 오장육부에서부터 강렬한 오기가 역류하듯 치밀었다.
그래 오기. 그것은 분명 오기였다.
‘젠장. 죽을 때 죽더라도, 개죽음당할 순 없어.’
에스프리 기어의 출력을 최대로 올리자 신경계를 자극하는 극도의 흥분이 이성을 완전히 마비시켰다. 그는 고함을 지르며 난동을 피우고 있는 괴수에게로 달려들었다. 그다음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옆구리를 꿰뚫는 격통과 뜨거운 피, 날카로운 비명과 구역질 날 정도로 역겨운 냄새. 정신이 완전히 끊길 때까지, 그런 선명하고 예리한 감각들이 어지럽게 뒤엉켰다. 그리고 암전이 찾아왔다.
그는 고요 속에서 깨어났다.
은은하게 퍼지는 소독약 냄새와 머리맡에서 들리는 규칙적인 신호음, 그리고 시야에 들어오는 하얀 천장이 그가 아직 숨이 붙어있음을 알려주었다. 그러나 정말 그뿐이었고, 몸에 힘이 전혀 들어가지 않았다. 손끝을 겨우 까닥였을 때 병상의 커튼 뒤에서 말소리가 들렸다. 수술은 성공적이었어요. 바이탈도 이 정도면 기대 이상이고. 다만 부상이 워낙 심해서 회복은 오래 걸릴 거예요. 의사가 누군가에게 그런 이야기를 전달하고 있었다.
통증을 줄이기 위해 온갖 약물을 투입했는지 머릿속이 뿌연 막에 뒤덮인 것처럼 몽롱했다. 빅터는 그 후로도 정신이 몇 번이고 점멸하는 것을 느꼈다. 완전히 눈을 뜬 것은 그 뒤로도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였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뉴스 소리가 들려왔다.
치안국이 아웃스커트 거주구에 등장한 S급 괴수의 토벌에 성공했다고 발표하였습니다. S급 괴수가 거주구에 등장한 것은 알키마드 설립 이래 처음 있는 일로, 각계각층에서 이번 사건에 관한 우려 섞인 예측을 내놓았는데요. 다행이 특수부의 체계적인 대처 덕분에 처음 예상했던 것보다는 적은 규모의 피해가 발생한 것이 확인되었습니다. 다만 현장의 총지휘자였던 휴버트 덴버 치안국장이 사망하여, 당분간은 이에 따른 혼란이 지속될 것으로 보이며….
빅터는 뉴스 화면을 확인하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가, 곧 앓는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확실히, 몸이 어딘가 심각하게 잘못되긴 한 모양이었다. 팔다리가 온전히 붙어있는 걸 감사하게 여겨야 하나. 그런 생각을 하며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고 있는데, 의자가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오코예는 흠잡을 데 없이 곧은 자세로 보호자석에 앉아 있었다. 그의 약혼자가 들려 보냈는지, 테이블 위에는 우아한 조화 바구니가 놓여 있었다. 빅터는 다시 잠든 척하려 했으나, 그의 예리한 시선을 피하지 못했다.
“빅터! 정신이 드나? 하…. 정말, 정말 다행이네.”
그는 침상으로 성큼 다가왔다가 마른세수를 하며 다시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의 표정과 목소리에서 깊은 안도감이 느껴졌다.
“자네, 또 무모하게 달려들었다면서? 에스프리 기어도 무리해서 사용하고 말이야. 의사가 살아있는 게 기적이라고 했네.”
“누가 됐든 살아있는 게 기적 아닌가요, 그 상황에서는.”
빅터는 처참했던 당시의 상황을 떠올렸다. 동료들의 절망 섞인 비명이 생생하다. 그들 중 몇이나 살아남았을까. 그런 질문이 떠올랐지만, 대답을 들을 자신은 없었다.
“하긴 그렇다더군. 자네가 시간을 번 덕에 공격을 재개할 수 있었다는 얘기를 들었네. 자네가 살신성인하지 않았다면 피해가 얼마나 더 커졌을지 모르는 일이지.”
빅터는 갑자기 말문이 막혔다. 평소라면 그냥 넘겼을 그 말이 어쩐지 우습게 느껴졌다. 희생이라. 자신이 한 행동을 희생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천만에. 그것은 밟혀 죽지 않겠다는 발버둥에 불과했다.
빅터는 그동안 이 남자에게 느껴왔던 거리감의 실체를 마주한 기분이었다. 그는 마침내 인정했다. 그들 사이에 생겨난 균열을 되돌릴 수 있는 날은 평생 오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이해나 노력으로 좁힐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사실 그런 것쯤은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지막까지 진실에서 눈을 돌렸던 이유는 겁이 났기 때문이다. 자신이 필사적으로 붙들고 있던 동아줄의 끝에, 그 어떤 정의도 남아 있지 않음을 마주 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단지, 겁쟁이였을 뿐이다.
뉴스 진행자의 목소리가 다시 정적을 파고들었다. 앵커는 절체절명의 위기에도 불구하고 성채가 무사히 지켜졌음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 있었다. 일어나지 않은 가상의 피해를 부풀릴수록, 당장 입은 피해는 어쩔 수 없는 일이 되었다. 이 정도로 끝난 것이 다행이다. 이 정도는 극복될 수 있는 비극이니까. 개인의 죽음은 불가역적이지만, 한데 모으면 가역적인 비극이 된다. 인류는 또다시 이 비극을 극복할 것이며, 영웅들의 위대한 희생은 살아남은 이들의 마음속에 영원할 것이다.
“그래…. 그래도 이 정도로 끝나서 다행이지.”
오코예는 앵커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빅터는 정교하게 정제된 영상에 시선을 빼앗긴 그의 뒤통수를 가만히 응시했다.
―나는 무언가에 대해 환상을 품는 것은 결국 마음에 독을 푸는 일이라고 봐. 환상은, 우리가 살아가는 이 순간을 더 나은 방향으로 바꾸기 위한 노력을 무의미해 보이게 만들거든.
문득 자신의 인생을 뒤바꿔 놓았던 오코예의 한마디가 떠올랐다. 빅터는 그 빛바랜 이정표의 의미를 온전히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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