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터 모렐리

Champ's Secret

빅터 모렐리

다이너 <챔프스 구디즈>의 유일한 종업원, 애너벨 로젠버그는 벌써 5년째 이곳의 서빙을 맡고 있다. 예쁘장한 얼굴과 붙임성 좋은 성격 덕분인지, 거창한 에이전시들이 그녀를 스카우트하기 위해 앞다투어 감언이설을 퍼부었지만, 그녀는 요지부동이었다. 이런 재미없는 일을 하기엔 너무 아까운 인재인데. 우리랑 같이 일해볼 생각 없어? 목돈 필요하지? 커미션의 반은 선금으로 줄게. 인기가 생기면 시민권도 만들어줄 수 있어. 사장님이 오시리스 구역에 커넥션이 많거든. 스타가 될 수 있을 거야.

그들의 레퍼토리는 몇 년이 지나도록 변하는 것이 없었다. 애너벨의 대답도 마찬가지였다.

“싫어요.”

“그렇게 단호할 거 없잖아.”

“싫으니까요.”

“왜지? 이 허름한 가게가 뭐가 좋다고.”

“식사 세끼 잘 챙겨주거든요.”

그쯤 되면 사람들은 얼이 빠진 얼굴을 했다. 물론 애너벨이 의도한 대로였다.

“월급이 쥐꼬리만 하긴 해도 체불은 절대 안 하고요, 오버타임도 챙겨주죠. 일하다가 다치면 치료비는 대주신다고 계약서도 썼고요. 뭐 그래 봐야 튀김 기름에 손이 데는 거 정도일 테니 선심 쓰시는 척하는 거겠지만요. 오시리스에서만 사신 분들에겐 어떨지 모르겠지만, 아웃스커트에서 이 정도면 아주 준수한 편이랍니다. 사기꾼한테 삶을 저당 잡히는 거보다야 장밋빛 미래 아니겠어요?”

그 정도 되면 치근덕거리던 사람들의 90%는 질린 얼굴로 물러났다. 아무리 천사 같은 얼굴을 가졌더라도 성격이 저렇게 뻣뻣해서는 엔터 비즈니스에서 살아남기 힘들다는 판단이었을 것이다. 갑자기 노조라도 결성하겠다고 하면 큰일일 테니.

그러나 10%의 끈질긴 인간… 아니, 놈들도 있었는데 웬만하면 욕은 삼가는 애너벨이 그들을 놈이라고밖에 표현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다.

“아니 그러지 말고, 아가씨. 일단 우리 사장님 한 번 만나보면 마음이 변할 거라니까?”

지금 애너벨의 눈앞에 있는 이 못생긴 뼈다귀도 의심할 여지 없이 그 ‘놈’들 중 한 명이었다. 뼈다귀는 팬케이크가 담긴 접시를 내려놓고 돌아서려는 애너벨의 손목을 제 쪽으로 잡아끌었다. 애너벨은 마지막 남은 서비스 정신을 끌어올려 웃었다.

“손님, 손은 놔주세요.”

실랑이가 벌어지는 동안, 다이너의 주방장 겸 주인인 빅터 모렐리가 기름때 낀 천을 젖히며 부엌에서 나왔다. 그는 여러모로 단정치 못한 중년 남자였다. 덩치는 제법 컸지만 자세는 약간 구부정했고, 턱과 인중에는 거뭇한 수염이 나 있었으며, 밀가루가 덕지덕지 묻은 민소매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그는 소란이 일어난 곳을 슬쩍 훑어보더니 다시 에스프레소 머신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냥 단념하지 그래? 계속 그래 봐야 쉽게 물러날 것 같지도 않은데.”

얼마 후 그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뼈다귀가 씩 웃었다.

“하, 네 고용주는 말이 통하는군. 봐. 이렇게 계속 고집부려봐야 네 손해야.”

그러자 그는 옅게 혀를 찼다.

“이런. 말귀를 못 알아먹는 군. 나는 당신한테 하는 말인데?”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뼈다귀는 고통에 찬 괴성을 내질렀다. 애너벨이 뼈다귀의 손목을 비틀어 방심한 틈을 타 바닥으로 메친 것이다. 그녀는 돌바닥에 부딪힌 머리를 두 손으로 움켜쥔 상대를 단숨에 제압하며 여전히 명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손님~ 저희집 팬케이크가 정말 맛있거든요. 식으면 아까우니까 이만 드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아웃스커트 최고의 팬케이크라고 자부할 수 있답니다.”

애너벨은 상대의 몸에서 힘이 완전히 빠진 것을 확인한 후, 그를 놓아주었다. 뼈다귀는 풀려나자마자 욕할 새도 없이 곧장 소지품을 챙겨 가게 밖으로 뛰쳐나갔다. 애너벨은 가게 입구의 차임벨이 달랑거리는 것을 지켜보다가 손님이 앉았던 자리에 다리를 꼬고 주저앉았다. 그녀는 포크로 팬케이크를 툭툭 건드리며 말했다.

“정말 맛있는데. 뭐, 그 사람 손해지. 비코, 저 이거 먹어도 되죠? 진상을 상대했더니 배가 고프네.”

“음식값도 네가 내고?”

“어머, 정말 너무한 거 아니에요? 난 피해잔데.”

“나도 피해자야 임마. 도대체 저놈들은 몇 년째 지치지도 않고 내 식당에서 이 난린지.”

그는 투덜거리면서도 방금 내린 커피를 그녀의 앞에 놓았다. 애너벨의 평소 취향대로 설탕 두 스푼과 크림 한 스푼을 넣은 밀크커피였다.

“그럼 그걸로 저녁 대신하고 오늘은 이만 퇴근해라. 오늘 저녁 타임엔 닫을 거라서.”

“이번에도 동료분들이 오세요?”

“네가 알 거 없고.”

다소 매정한 말을 남기며 부엌으로 되돌아가는 그를 애너벨은 빤히 쳐다보았다.

빅, 비코 등으로 불리는 이 평범한 다이너 주인은 까칠한 말투와 다르게 오지랖이 넓은 사람이었다. 열아홉 살, 아직 세상의 악의를 충분히 겪지 못해 거절하는 법도 깨우치지 못했던 애너벨에게 빅터는 제법 현실적인 대처법을 알려주었다.

그때 애너벨은 이 다이너 모서리 자리에 주저앉아, 지금 생각하면 보잘것없는 남자에게 차였다는 이유로 자신의 인생이 완전히 어그러졌다고 착각하고 있었다. 빅터는 그런 그녀에게 딸기를 잔뜩 얹은 팬케이크를 내오면서, 주방에 유통기한이 얼마 안 남은 딸기가 너무 많아 처리해야 한다는 군소리를 덧붙였다. 애너벨은 그를 이상한 사람이라 여기면서도, 따뜻한 팬케이크를 한 입 베어 무는 순간, 앉은 자리에서 단숨에 비워버렸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계속 눈물이 났다.

두 번째로 만났을 때는 상황이 더 좋지 않았다. 전 애인은 자기가 먼저 바람을 피운 주제에, 다짜고짜 다이너까지 쫓아와 집에 돌아오라고 협박했다. 그때 빅터는 에스프레소 머신 앞에서 필터나 갈아 끼우고 있을 뿐, 싸움을 말리거나 애너벨을 도와주려 하지 않았다. 코너에 몰린 그녀가 끌려가듯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을 때, 빅터는 갑자기 테이블 위에 요란한 소리를 내며 머그잔을 내려놓았다.

“주문하신 커피입니다.”

테이블에는 갑자기 정적이 감돌았다. 애너벨은 커피를 주문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 커피 한잔이 만들어낸 잠깐의 균열 덕분에 그녀는 불현듯 정신을 차렸다.

“정말, 내 말이 말 같지가 않아요? 싫다고 했잖아요! 다시 한번 내 눈앞에 나타나면 거길 차버릴 줄 알아!”

그녀는 다이너가 떠나가라 소리쳤고, 식사를 하던 사람들이 일제히 그들을 돌아보았다. 갑작스럽게 쏟아지는 시선에 놀랐는지, 남자는 쭈뼛거리다가 이내 슬금슬금 다이너 바깥으로 사라졌다.

애너벨은 긴장이 풀려 자리에 주저앉은 뒤, 무심결에 커피를 한 모금 삼켰다. 그리고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설탕 두 스푼, 크림 한 스푼 넣어주시겠어요?"

그날의 일이 인연이 되어, 애너벨은 <챔프스 구디즈>의 종업원이 되었다. 나중에 단골손님들을 통해 알게 된 사실이지만, 빅터는 창업한 지 6년이 지나도록 한 번도 종업원을 구한 적이 없었다. 아마도 당분간 네가 혼자 지내면 위험할까 봐 일부러 자리를 만든 것 같다. 자립할 돈도 좀 모을 수 있게 도와주고. 애너벨은 빅터의 깊은 뜻을 깨닫고 꽤 감동했지만, 빅터는 그저 심드렁했다.

“아닌데? 그냥 슬슬 손님이 너무 많아져서 감당이 안 돼서 그런 건데?”

“아니 진짜, 좀 빈말이라도 그렇다고 하면 어디 덧나요? 내 감동 돌려줘요.”

“그런 쓸데없는 소리로 내 시간 뺏지 말고 빨리 마감 준비나 해라.”

“하긴~ 덩치도 크면서 위험해 빠진 여자를 두고 막아서지도 않은 사장님한테 내가 뭘 바라겠어.”

애너벨은 괜히 김이 샌 기분이 들어 애꿎은 대걸레를 바닥에 철썩철썩 치댔다. 빅터는 그녀를 가만히 쳐다보다가 조금 진지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그래도 한 가지는 알아둬라. 대가 없이 쉽게 도와주려 하는 사람을 믿지마. 대개는 사기꾼이니까. 그리고 설령 정말 괜찮은 사람을 만났다 해도 그 사람에게 의지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상황은 만들지 않는 게 좋아. 이 바닥에선 말이야, 남이 널 구하지 않아도 너 스스로 너를 구할 줄 알아야 해.”

그런 조언을 하는 빅터는, 낯부끄러운 표현인지는 모르겠지만, 조금 멋있어 보였다. 꼰대같은 조언이긴 해도, 애너벨은 그 말이 싫지 않았다. 왠지 그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말 같았기 때문이다.

나이가 사십이 넘었으면 당연히 산전수전 다 겪었겠지. 처음엔 그렇게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하지만 얼굴 본 시간 길어질수록, 어쩔 수 없이 보이게 되는 것이 있었다. 그는 벽에 걸린 텔레비전을 멍하니 보다가도 에스퍼나 치안국 관련된 이야기가 나오면 채널을 돌려버렸고, 주말 포커 게임 중에 손님이 정치 얘기를 시작하면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주방으로 자리를 피했다. 가끔 생뚱맞은 시간에 갑자기 가게를 닫는다거나, 치안국 제복을 입은 수상한 사람들이 찾아오기도 했다.

‘그러고 보면 사장님, 너무 비밀이 많단 말이야.’

애너벨은 문득 그런 실없는 생각을 했다.

‘사장님 혹시, 정치범인 건 아니겠지?’

요즘 정치범 중에는 흉악한 사람들만 있는 게 아니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도리어 선하고 성실해 보이는 사람 중에 많이 섞여 있다고 말이다. 그러나 애너벨은 곧 고개를 저었다. 그게 사실이라면 빅터가 지금까지 무사할 리 없었다. 치안국은 정치범을 잡는 데 꽤 열심이라고 했으니까. 게다가 제복을 입은 손님들은 딱히 그에게 적대적인 것 같지 않았다. 오히려 아주 오래된, 복잡한 사연이 있는 관계처럼 보였다.

 

어쩌면 오늘이 날인지도 몰라.

무슨 연유인지는 몰라도, 애너벨은 갑자기 오늘이야말로 케케묵은 호기심을 해결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설거지를 끝내고 퇴근하는 척 가게를 나간 뒤, 건물 뒤쪽 창고에서 몸을 숨기고 기다렸다. 쏟아지는 졸음을 겨우 쫓아냈을 무렵, 예상한 대로 치안국 제복을 입은 사람이 나타났다. 그는 ‘닫힘’이라고 적힌 팻말을 무시하고 가게 문을 열어젖혔다.

애너벨은 발소리를 최대한 죽이고 미리 열어둔 창문 앞으로 살금살금 다가갔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사람들의 대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렸다.

“…그리고 경찰부장님의 생각은 지금도 변함없어. 네가 돌아오기만을 바라고 계시지. 자리 정돈 언제든 만들어줄 수 있다면서.”

“그 양반 10년째 이러는 거, 일종의 집착이야. 개인적인 사이였으면 스토커라고 볼 수 있지.”

"하하…. 너는 정말 하나도 변하지 않았군. 하지만 무리도 아니지 않아? 자기가 갖고 있던 가장 믿음직한 패가 빠졌는데."

“그 말로 구워삶으라고 하시던?”

“아니, 이건 내 감상이야. 하지만 나만 그렇게 느끼는 게 아닐 걸. 네가 괜히 당시 에스퍼들 사이에서 챔프라고 불렸겠어?”

두 사람 사이에는 완전히 뜻밖의 대화가 오가고 있었다. 경찰과 에스퍼라니. 경찰에 잡히는 쪽이면 몰라도 상상조차 해본 적 없었다. 게다가 분위기상 높으신 분에게 러브콜을 받는 모양이었다. 물론 빅터의 요리는 먹을 만하지만, 생활력도 총명함도 없어 보이는 그에게 다른 탁월한 재능이 있다니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징그러운 소리 좀 그만해라. 그게 대체 언제 적 얘기야.”

“너도 은근 좋아한 거 아니야? 그게 아니면 왜 가게 이름을….”

빅터는 그 말을 무시하기로 한 모양인지, 대답 대신 어딘가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의 발소리가 어디로 향하는지 깨달았을 때, 애너벨은 화들짝 엉덩방아를 찧었다.

“엄마.”

창문이 드르륵 열렸고, 애너벨은 황당하다는 듯 그녀를 째려보는 빅터와 눈이 마주쳤다.

“누군가 했더니, 여기 스토커가 한 명 더 있었네.”

애너벨은 어떻게든 타개책을 생각해 보았지만 그럴듯한 변명이 떠오르지 않아 정에 호소하기로 마음먹었다.

“설마 저 잘리는 건 아니죠? 당장 월세 내기도 힘든 데다가 갈 곳도 없거든요. 카드값도 갚아야 하고….”

그녀는 없던 연기력을 끌어내어 한껏 불쌍해 보이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빅터는 더욱 황당하다는 반응이었다.

“누가 뭐래? 원래는 내일 출근하면 말할까 했더니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지. 일단 들어와.”

“뭐야, 이렇게 아리따운 종업원이 있었으면서 여태 자랑 한마디 안 한 거야? 이름이 어떻게 되죠? 나는 티모시라고 하는데….”

그새 뒤따라 나온 동료 남자가 빅터의 어깨 위로 얼굴을 빼꼼 내밀었다.

“너는 좀 꺼져.”

빅터는 커다란 손으로 동료의 얼굴을 창문 안쪽으로 구겨 넣었다.

애너벨은 자리에 얌전히 앉아 빅터가 무슨 이야기를 꺼낼지 숨죽인 채 기다렸다. 사실 해고 통보만 아니면 뭐든 별 상관없었다. 아니, 역시 임금 삭감도 곤란한데. 애너벨은 별별 불길한 상상을 하다가 한숨을 쉬었다. 호기심이 고양이를 죽인다고 하더니, 하필 전직 경찰을 건드릴 게 뭐람.

하지만 빅터가 꺼낸 이야기는 그런 얘기들과는 거리가 멀었다. 굳이 따지자면, 정반대의 이야기였다.

“네가 여기서 일한 지도 벌써 5년이지.”

“그렇죠.”

“커피 제대로 내리는 법, 기억하고 있겠지?”

“아마도요.”

“음식도 메뉴에 나와 있는 건 대충 할 줄 알고.”

“그렇긴 하죠?”

“그래 좋아. 내일부터 너는 이 다이너의 매니저이자 사장 대리다. 내가 자리를 비우면 네가 대신 조리도 하고, 커피도 내리고, 계산도 하고, 가게 정리도 해야 해. 대신 그동안 벌어들인 매출의 반은 네가 가져도 돼. 손님이 없으면 일찍 닫아도 되는데, 대신 오픈은 꼭 제때하고…. 아 그리고 혹시 내가 죽었다고 연락이 오면 이 가게는 네 명의로 가도록 해놨으니 알고 있어라. 또 뭐가 있지.”

빅터의 말을 멍하니 듣고 있던 애너벨은 그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네에?! 갑자기 무슨 소리에요?”

황당한 소리를 늘어놓는 것 치고 빅터는 너무 담담한 얼굴이었다.

“아니 그게, 저기 치안국의 높으신 분이 나한테 그 인면괴수인지 뭔지 하는 걸 잡으라고 시켜서 말이야. 나도 이러고 싶진 않은데 선택권이 없거든.”

복잡한 이야기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 애너벨이었지만, 인면괴수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다. 벌써 일주일 가까이 어디를 가든 그 이야기뿐이었기 때문이다. 아웃스커트의 어느 동네가 인간의 모습을 한 괴수에게 점령당했다는 소문은 사람들을 삽시간에 공포로 몰아넣었다. 그 공포가 조금 진정된 것은 토벌을 전담할 정예 인원을 모은다는 소식이 들릴 무렵부터였다. 정예 에스퍼라면 괜찮겠지. 전에 S급 괴수도 물리쳤잖아. 물론 사상자는 많이 났지만, 그래도 어쨌든 해결되긴 했으니까. 에스퍼는 정말 대단해. 한 손으로 가로등을 뽑고 지붕 위를 뛰어다닌다던데! 우리 아들도 까딱 죽을 뻔한 걸 에스퍼가 구해준 적이 있지. 괴수든 에스퍼든 직접 본 적이 없는 애너벨은 하루아침에 뒤바뀌는 여론을 보며 그런가 보다 했다. 그때만 해도 일이 이런 식으로 엮일 줄은 꿈에도 몰랐으니.

“그러니까, 사장님이 왕년에 에스퍼였다고요? 그것도 정예만 뽑는다는 작전에 추천될 정도로 대단한 에스퍼?”

“그렇다기보다는 나한테 억하심정이 남은 능구렁이 노친네가 내 골수까지 빼먹으려는 수작이겠지만.”

빅터는 심드렁하게 눈을 흘겼다. 그러자 티모시라고 불린 그의 동료는 빅터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고개를 모로 저었다.

“설마 몰랐던 거예요? 전성기의 이 녀석은 대단했죠. 거대한 코뿔소형 괴수도 한 손으로 막아낸 적이 있다니까? 그 때문에 우리는 이 녀석을 챔프라고 불렀죠. 녀석, 그만두지 않았다면 지금쯤 특수부장도 노려볼 수 있었을 텐데….”

물꼬가 트인 남자는 빅터의 무용담을 마치 제 것처럼 늘어놓았다. 빅터는 질색을 하며 몸을 떨었다. 그가 다섯 문장 정도 뱉었을 때, 그 더는 못 참겠다는 얼굴로 남자를 가게 바깥쪽으로 밀어냈다.

“니가 시간이 아주 남아도는구나? 근무 시간 그만 까먹고 순찰이나 하러 가지? 니 상사한테 일러바치기 전에.”

빅터는 자신의 휴대폰을 꺼내 다이얼을 누르는 시늉을 했다. 그러자 남자는 알겠다는 듯 손사래를 치며 가게를 나갔다.

"하여간 성질은. 또 봐요, 이름 모를 아가씨."

그는 애너벨을 향해 윙크하고 사라졌다. 애너벨은 그가 나간 문을 가만히 쳐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좀 싫은 사람이네요."

"오 웬일이냐? 너랑 내가 의견일치도 보고."

빅터는 킥킥 웃었다. 그리고 곧 침묵이 찾아왔다.

애너벨은 다이너 테이블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았다. 지금까지 쏟아진 정보를 머리에 입력할 시간이 필요했다. 빅터는 앞으로 꺼낼 이야기를 머릿속에서 정리하고 있는 듯 보였다.

“굳이 비밀로 할 필요 없지 않아요? 에스퍼인 거. 모두가 부러워하고 동경하잖아요.”

더 중요한 얘기들이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그런 말부터 튀어나왔다. 빅터는 애너벨을 마주 보다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서 싫은 거야. 내가 한 가지 말해 두는데, 영웅 이야기를 믿지 마. 보통 누군가를 희생했거나 어떤 목적이 있어서 만들어진 이야기거든.”

이 역시 그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말일 것이다. 지금까지 그가 떠들어온 많은 조언이 그랬듯이. 애너벨은 기분이 갑자기 싱숭생숭해졌다. 5년이라는 짧지 않은 세월을 매일 같이 보았지만, 아직 그녀는 빅터 모렐리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그러나 한 가지는 확실했다. 그는 자신의 인생을 너무 쉽게 남일처럼 말하는 사람이었다.

“다 알겠는데, 죽지는 말아요.”

애너벨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숨기는 것도 많고 사사건건 잔소리만 하는 사장님이지만 당연히 살아있기를 원했다. 죽은 자에게서 상속받은 가게라니, 그런 가련한 여주인공 포지션은 절대 사절이다. 게다가 애너벨은 매일매일 매출에 대해 걱정할 바에야 따박따박 월급이 들어오는 게 편한 천상 월급쟁이 타입이었다. 사장 같은 건 한 번도 원해본 적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빅터의 팬케이크를 아직 충분히 못 먹었다고!

애너벨의 이질적인 태도에 빅터는 당황한 듯 헛기침을 했다. 그는 한참을 말을 골랐다. 애너벨은 그가 무슨 대단한 말이라도 하려나 싶어 조용히 지켜보았다.

“흠흠. 뭐, 얼마 전에 이 가게의 담보대출은 전부 갚았으니까, 혹시라도 빚쟁이가 될까 봐 걱정이라면 안심해도 좋아.”

“와. 아저씨 정말 싫다.”

기대한 내가 바보지. 애너벨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질색하는 얼굴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빅터는 그녀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다가, 자신이 내린 커피를 홀짝이며 피식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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