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감정의 잔재

가능했던 미래

Last Fantasy by Lam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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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1 기념

§ ‘가능했던 미래’를 주제로 전력 60분


최근 특이한 꿈을 자주 꾼다. 아득하게 펼쳐진 암흑 속에 드리우는 빛 한 줌 없고, 한없이 고요한 그런 꿈. 영영 깨어나지 못할 것 같아 보여도 나가는 방법은 언제나 변함이 없다. 늘 그래왔듯 침착하게 눈을 천천히 감았다. 앞에 보이는 것이 모두 진실일거라 믿으면 더 오랜 시간을 헤매이게 된다는 걸 세 번째 꿈에서야 어렴풋이 깨달았다. 오른쪽 발부터 내딛으며 평소 걷던 방식대로 네 걸음을 걷고, 사선 방향으로 몸을 틀어 보폭이 넓은 두 걸음을 걷는다. 마지막으로 왼쪽으로 방향을 돌려 세 걸음을 움직인 후 눈꺼풀을 밀어올리면, 익숙하던 돌의 집에서의 풍경이 펼쳐졌다. 

이름답게 회색빛 석재로 촘촘하게 벽과 바닥을 짠 이 공간은 특유의 소박하면서도 따스한 정이 좋았다. 왁자지껄하게 떠들다가도 누군가가 돌아오면 너나 할 것 없이 인사를 건네었고, 정보를 교류하는 움직임에 활력이 넘쳤다. 눈짓으로 그들에게 마주 인사하며 그동안 일감으로 모은 보수를 바 테이블에 묵직한 소리를 내며 얹었다.

그러면 늘 보던 소속 멤버는 술을 좋아하지 않는 나에게 보리맥주 대신 벌꿀 두 스푼을 섞은 따뜻한 우유 한 잔을 가득 담아 내어주고는 했다. 양손에 가득히 컵을 들고 가장 가까운 테이블에 앉으면, 맞은 편에 있던 당신은 읽던 마도서를 내려놓고 특유의 회녹빛 눈을 명랑하게 빛냈다. 그리고 받은 잔의 내용물을 한 모금 비워야 만족스럽게 입꼬리를 올린 채 말했다. 

“어서 와. 일 때문에 바쁜 건 알지만 너무 오랜만에 얼굴 비추는 거 아니야?”

“다녀왔어요, 스승님. 일을 쉬기에는 식구들이 이렇게 늘었잖아요. 더 힘내야죠.”

벌써 애늙은이 같은 소리 하기는. 싱거운 핀잔을 주면서 그는 품 한 켠에 간직해두었던 작은 간식 주머니를 꺼내놓았다. 안에는 손가락으로 집어서 먹기 편한 먹거리가 들어있으리라. 바쁘게 돌아다니는 모습을 보고 끼니를 거를 것이 분명하니 가볍게 챙기라는 의미도 담겨 있었다. (참고로 이다나 다른 동료들에게는 이미 주었으니 나눠줄 필요없다며 꼭 덧붙였다.) 그런 소소한 배려를 받고 나면 기쁨을 감출 수 없어 나도 모르게 미소가 그려진다.
시덥지 않은 대화를 짧게 주고 받고 나서, 로즈는 적지근해진 우유를 절반 정도 남긴 채 지긋이 맞은 편을 응시했다. 컵의 손잡이를 만지작거리며 손장난을 치자 의문스러워하는 눈빛이 돌아왔다. 그럼에도 개의치 않은지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마치 지금의 순간을 모두 담아두겠다는 것처럼 어딘지 모르게 결연한 표정은 덤이었다. 

“더 안 먹어도 돼? 이제 급한 일도 없던 걸로 기억하는데. 잘 먹고 다녀야지.”

“괜찮아요. …이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서 이쪽이 더 중요하거든요.”

다음에 또 만나요. 소리없이 입술을 달싹여 한 글자씩 읊조렸다. 천천히 달콤한 찰나는 한 순간이며, 긴 여운조차 남기지 못한다. 그걸 잘 알고 있기에 작별을 고하는 손짓에도 미련을 담지 않으려 노력했다. 시간이 다 되었다는 걸 알리는 오래된 나무 특유의 소음이 귀를 간지럽혔다. 근원지를 파악하려 고개를 돌리면, 기다렸다는 듯 하얀 빛이 점멸하며 시야가 밝아져왔다. 지척으로 다가온 현실에 순응할 시간이었다.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보면 어둠이 내려앉은 집이 눈에 들어왔다. 깔끔하게 정리된 집안과 투박한 가죽소파, 자신이 머물고 있는 그리다니아의 풍경과 어울리는 집 분위기는 그대로였다. 자신이 돌보던 동생이 떠난 이후로도, 모든 전투를 끝마치고 돌아오고 나서도 특유의 소박함은 변하지 않았다.

“…부상 당해도 날 걱정할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건 알지만, 이런 식으로 자주 꿈에 나오는 건 곤란해요. 스승님.”

제 옆에 누군가를 두는 건 과분하잖아요. 단념에 가까운 어투를 내뱉고는 앉아있던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었다. 허벅지 위로는 붕대가 감겨있는 손목이 축 늘어뜨렸다. 일전의 부상이 낫지 않은 탓에 최근에도 간간히 시큰거렸다. 다른 손으로 조심스레 감싸쥐어 습관처럼 문질렀다.
그 사람이 있을 때, 보는 이의 심장을 오싹하게 하는 재주가 있으니 몸은 아껴쓰라고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듣고 지냈었다. 노력이 무색하게도 부재가 발생한 후로는 곱게 지내본 횟수가 손에 꼽았다. 대도시에 정착한 이후로 크게 교류를 하며 지내는 사람도, 하물며 ‘가족’이라 지칭하며 지낼 이조차도 없으니 신경쓸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목숨만 붙어있으면 아무래도 상관없지 않은가.

하지만 이런 꿈을 곧잘 꾸고 나면 뇌리에 한 가지 질문이 스쳐지나갔다. 지키고 싶은 대상도 없으면서, 부상을 당해가며 세계를 지켜낸 나에게는 과연 무엇이 남았는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타인과 인연을 맺기에 자신은 위험요소로만 가득한 사람이라는 걸 잘 알았다. 누군가에게 짐이 되는 것만큼은 끔찍하게 싫으니 차라리 혼자인 편이 나았다.

“…내 자리가 여기라는 걸 잊지 마. 돌아갈 곳은 없다는 것도.”

깊은 한숨을 내뱉고 양팔을 눈꺼풀 위로 가볍게 얹었다. 그와 동시에 도돌이표 같던 물음도 급하게 결론을 내렸다. 껄끄러운 무언가가 입 안을 멤돌다가 밤하늘로 흩어졌다. 해묵은 감정도 이처럼 언젠가는 포말이 되어 사라지겠지. 제 스승처럼, 함께 지낼 누군가가 나타나길 바라는 삿된 희망을 접으며, 서서히 밝아오는 새벽을 맞이했다.


Bgm : https://youtu.be/BPgCAbPtsZA?si=cCkJ8fjWxc2qWv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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