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들이 잠드는 새벽
창가에 햇살이 드리울 때까지 조용히 잠들기를.
§ 안젤티온 & 로즈
https://youtu.be/hXorF2lKG7Q?si=94wnWFlJenw3UZN2
" 그거 알아? 누군가가 너를 진심으로 걱정하고 생각해주면 그 사람이 네 꿈에 나타난데.
만약 꿈에서 주변 사람을 만난다면 그 사람이 너를 진심으로 아껴주고 있다는 뜻일거야. "
"...임무는...더 없네."
부대집의 입구 앞에 우두커니 서서 카타로스는 가장 먼저 손에 쥐어진 수첩을 한 장씩 넘겼다. 끝이 약간 빛이 바랜 종이에는 그녀의 행적들이 모두 기록되어있었다. 어지간히도 바빴던건지 그녀의 글씨체는 수첩에서 곧 화살이 튀어나올 것처럼 날카롭게 휘갈겨져서 겨우 형체만 알아볼 글씨들이 가득했다. 그리다니아 상인의 호위임무
푸른 색 눈 너머로 수첩에 적힌 마지막 임무에 곧게 그려진 빨간 줄이 보이고 나서야 그간의 피로를 모두 털어내 듯이 카타로스는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속까지 깊게 들어온 숨이 서서히 빠져나가면서 동시에 온몸을 바짝 곤두세우던 긴장까지 함께 풀리게하며 나른한 감에 녹아들었다. 어찌나 나른한 지 순간 다리 힘이 풀려 휘청거리더니 문에 쿵,소리를 내며 이마와 문이 서로 맞대기까지 했다. 빨개진 이마를 문질거리며 고개를 돌려 정원을 살폈다. 다행히 주변에는 그녀 이외의 사람은 없으니 망정이지, 누군가가 봤다면 놀리며 웃거나 또 무리를 할 만큼 일에 빠진 것이냐며 잔소리를 필시 했으리라.
서서 자는 것보다는 소파가 낫겠지. 나무문을 가볍게 밀며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평소에는 사람들로 북적거리던 부대집이 작은 발걸음 소리조차 없이 조용하다. 이 시간이면 다들 어딘가에 간 것일까? 생각해보니 오늘은 모든 부대원들이 각자의 임무로 인해 바쁠 것이라는 얘기를 얼핏 들은 기억이 났다. 그러니 코빼기도 안보이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카타로스는 현관에서 가볍게 신발을 털고 들어와서는 거실에 위치한 소파에 털썩 앉아 몸을 비스듬하게 뉘였다. 아, 피곤하다. 뻑뻑한 눈꺼풀을 느릿하게 깜빡이고, 활을 쏘느라 건조하게 튼 손으로 여느 미코테들처럼 마른세수를 하며 조금이나마 잠에서 깨려 했지만 오히려 요정의 속삭임에 홀린 듯 정신이 더 멍해질 뿐이었다.
그녀에게 임무란 들어오는 것은 있어도 좀처럼 취소되거나 나가는 것은 없었다. 정착을 하기 위해 가리는 것 없이 모든 일들을 처리한 탓에 굳어진 고질적인 습관인지 이번 피로도 그것이 화근이었다.
하나라도 하지말 걸 그랬나. 괜한 생각은 그만 접어두기로 마음먹었다. 덕분에 보수도 넉넉히 받고 좋지 않은가? 원래 일에는 대가가 따르는 법이라고, 단지 자신의 체력을 약간 가불해왔을 뿐이라고 스스로에게 자기 최면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생각을 두어번 되새김질 할 쯤에 서서히 카타로스는 소파에 몸을 맞기고 있었다.
머리는 2층에 있는 침대에서 자는 것이 어떻겠냐고 권했지만, 피로한 몸과 배려가 정중한 거절을 표했다. 난 여기서 자도 충분히 괜찮아, 아주 잠깐 잘거니까. 감겨오는 눈꺼풀과의 다툼에서 이기지 못한 채 서서히 어둠이 드리워왔다. 늘 안고 자던 인형 대신 제 무릎을 끌어모아서 양팔 가득 안고 가벼운 쪽잠을 청했다. 정적만이 감돌던 거실에 그녀의 얕은 숨소리가 작은 바람소리처럼 들려오기 시작했다.
…누가 왔나? 그런데 못 움직이겠어. ……너무 졸려. 누군가가 카타로스의 목과 무릎 아래에 손을 넣어 번쩍 들어 올린다. 상대에게서 적의가 느껴지지 않는 걸 보면 분명 낯선 이는 아니다. 그도 그럴게 들어올리는 손길은 조심스러우면서도 느릿한 움직임이었다. 혹여나 깰 것을 염려한 탓인지 상냥한 품은 그녀를 꼭 안고 2층의 계단을 천천히 올라가고 있었다. 옮겨주고 있는 이의 얼굴을 확인하고 싶었지만 카타로스는 정신만 조금 깨어 있을 뿐 물먹은 솜처럼 기운이 없어서 눈을 뜨기에도 어려웠다. 다만 면식을 확인하지 않아도 이것만큼은 확신할 수 있었다. 이미 익숙해진 체향과 그리다니아 시냇가에 옹기종기 피어있는 풀꽃들이 희미하게 섞인 향이 나는 이가 저를 들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아, 그 사람이구나. 그렇다면 더더욱 민폐를 끼치기 싫었기에 흐릿한 눈을 반쯤 떠서 상대를 마주보려 애썼다. "더 자도 돼. 로즈. 괜찮아. " 그 따스한 말이 자신의 귓가를 스치고 지나가기 전까지 말이다.
…무겁지 않아? 그 질문은 굳게 닫힌 입술에 막혀 나오지 않았고, 깊게 생각할 틈도 없이 온 감각이 잠을 재촉하였다. 자신이 서서 잠들때에도, 소파의 구석에서 웅크리며 잠들어도 꿋꿋하게 늘 옆에서 지키며 그저 편안하게만 해주던 사람이라면 안심하고 잘 수 있으니까. 푹신한 침대에 몸이 감기는 느낌이 닿으니 정신이 더 아득해져만 갔다. 멀어져 가는 의식 속에서 드문드문 기억하는 것은 타닥타닥, 불과 얽혀서 타들어가는 땔깜의 소리. 제 온몸을 포근하게 감싸 안아주던 솜이불의 감각. 그리고 편안한 기분으로 잠들 수 있도록, 오랜만에 좋은 꿈을 꾸도록 품에 안겨준 베개에서 나던 체향. 확실한 것은 그녀를 쉬게 하기에 더할나위 없이 아늑한 잠자리라는 것이었다.
늘 보던 장소가 내 눈앞에 펼쳐졌다. 그리고 나는 그 길의 대답을 알고 있었다. 그리다니아의 서쪽 입구에서부터 세 걸음 직진. 그리고 오른쪽으로 돌아서 또 열 걸음. 고개를 곧게 들어 하늘을 보고 있는 느티나무가 나온다면 그것의 청푸른 드레스 자락을 아주 조금만 빌려오자. 손바닥 크기 정도면 정령들도 용서할거야. 한 손에 드레스 조각을 조심스럽게 잡고, 이번에는 왼쪽으로 몸을 돌려서 15걸음을 큰 보폭으로 걷기. 천천히 걸을수록 산들바람이 뺨에 가벼운 입맞춤을 하고 스쳐간다. 수많은 인사치레에 뺨이 서늘하게 시릴쯤에 시냇물이 나온다.
그리고 그 물길이 흘러가듯 길을 따라 아래로 흘러가다 보면 나오는 가장 큰 바위. 그 곳에 익숙하게 풀피리를 불고 있는 작은 음악회장이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로즈, 여기야!”
아이보다도 해맑은 미소로 제 옆자리를 가볍게 두들기며 음악회 감상을 권하는 익숙한 풍경. 카타로스는 언제나 그 자리에서 풀피리와 시냇물의 협주곡을 듣곤 했다. 협주곡이 끝나면 언제나 그 날 하루치의 대화를 나누며, 큰 이유가 없어도 그에게 칭찬도 아낌없이 받는 일이 기분을 꽤나 좋아했던 그녀이기에.
…그런데 어째서 내가 이 시간을 갖고 있는거지? 이 약속은 정해진 날이 있는걸. 호기심이 가득한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면서 곰곰히 떠올리다가 이내 안젤티온의 부드러운 미소가 저에게 향할때……
눈이 퍼뜩 떠지면서 카타로스는 잠에서 깨어났다. 여기가 어디지? 이내 자신의 위치는 금방 알 수 있었다. 어둠에 짙게 내려앉은 2층 서고에는 방금까지도 누가 손을 본 흔적이 묻어났다. 새 장작이 잿가루 위에 쌓인 채 불에 타고 있었다. 널부러져 있던 책은 깔끔하게 제 자리에 들어가 있었으며, 고요한 부대집은 새벽 공기의 차분함에 녹아들어 있었다.
카타로스는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상체를 일으키고 다리도 이불에서 스르륵 빼려고 했다. 하지만 순간 제 다리위에서 느껴지는 약간의 묵직함에 그대로 얼음이 되어 움직임이 정지되었다. 그 무게감의 정체는 안젤티온의 팔이었다. 그는 눈만 감은채로 침대 가장자리에 엎드린 채 조용히 눈을 감고 있었다. 새벽인데 방금까지도 그녀를 보살피다가 잠시 쉬는 것인지 귀와 꼬리가 간간히 움직이며 주변에 신경을 기울이는 모습이 엎드린 지 얼마 되어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침대 근처 작은 키의 원형테이블 위에 금방 만든 차가 안개처럼 하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내가 자주 마시던 꽃차네. 항상 목소리를 높여 노래하는 카타로스가 안쓰럽다며 늘 안젤티온이 끓여주던 차였다. 국화꽃 2송이, 피로를 풀어주기 위한 벌꿀 한 티스푼. 달콤한 향이 찻물에 짙게 베어 있었다. 일어나면 먹이려던 것인지 머그컵 위로 일렁거리는 열기가 따스했다. 그녀는 손을 뻗어서 차를 세 모금 정도 마시며 대부분을 비워내더니 잔을 내려놓고 자리를 잡아 누웠다. 잠에서 금방 깨서 인지 몇 번 뒤척이다가 안젤티온이 쥐어주었던 베개를 다시끔 품에 소중하게 안았다. 이렇게까지 편안하게 숙면을 취한 날이 얼마나 되었는지 회상하였다. 새로운 환경에 정착하기 위해 일에 치여 사는 건 익숙했다. 피로에 절어있던 그녀가 자신을 돌보기 시작하고, 누군가에게 보살핌 받는 것에 편안해져 갔다. 유독 살뜰하게 챙겨주던 그의 모습이 생생하게 눈앞에 아른거린다.
“……본인도 편하게 자면 좋을텐데.”
옆으로 돌아누운채 건조한 공기에 마른 입술을 움직여 작게 웅얼거리고는 제 다리에 얹어져있던 그 손을 끌어올려 마주 잡았다. 손으로도, 마음으로도 느껴지는 온기에 입가에 가벼운 호선을 띄우며 그녀는 다시 잠에 빠져들어갔다. 푹 잠들고 나면, 그를 본다면 활짝 웃으며 고마움을 표현하리라 생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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