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네트라 IN 엘리시온(1)
2022.04.24 조금은 특이한 여정에 대하여
그것은 자신의 존재를 자각하는 것으로 시작하였다.
눈을 떠보니 낯선 광경이라는 말이라거나, 포근한 침대 위에 누워있었다거나, 어디선가 들려오는 외침에 정신을 차리게 되었다는 말로는 설명할 수 없다. 그 당시에 육체의 감각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시각도, 촉각도, 청각도 없었다.
다만 뇌만이 있었다. 뇌는 잃어버린 육신을 움직이려 시도했고, 제각기 신경 세포에 내린 지시는 송신만 되었을 뿐 반응이 없었다. 뇌가 오랜 기간 소유해온, 너무나 익숙한 육신과의 연계를 포기하기 전까지 많은 헛수고와 혼란을 지나야 했다. 간뇌, 중뇌, 소뇌, 척수, 연수 등의 대부분이 할 일이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란 쉽지 않았으니까. 어쨌든 뇌는 기이한 결핍을 느끼며 남은 육체, 즉, 뇌 자신에게, 그중에서도 대뇌에 집중했다.
뒤늦게 살피게 된 대뇌도 상태가 엉망인 건 마찬가지였다. 뇌에 손상이 생겨 기능을 잃었다는 말은 아니다. 뉴런과 시냅스는 끝없이 반짝이는 화학적 전기적 신호를 주고받고 있었다. 그러나 제 것이 아닌 뉴런이 끼어들어 있었다. 그들은 시냅스가 옮기는 여러 신호를 엿보고 때로는 날름 가져갔다. 자신 쪽에서 여러 신호를 전달하기도 했다. 보통 의식은 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스스로 알지 못하나 이번만큼은 알 수 있었다. 아주 많은 것들이 이곳을 침범하고 있다는 사실을.
침범을 깨닫자, 그것은 본능적으로 비명을 질렀다.
‘나가!’
언어로 표현한다면 대략 이런 신호였을 것이다. 사실 언어화되지 않은 전기 신호로 대략 강렬하고 필사적이고 격한 부정과 배척의 뜻을 담고 있었다. 그 전기 신호는 120m/s의 속도로 뇌의 전역에 다다랐고, 자신과 연결된 뉴런을 통해 바깥으로도 급속하게 번졌다.
메아리는 없었다. 한 번의 신호로 모든 반짝임이 달칵 꺼졌다. 암전이었다.
눈을 뜨니 노을이 지고 있는 평원이었다. 바람이 간간이 무릎 높이로 자란 풀을 헤적였다. 풀들은 조금씩 휘청이며 서로에게 맞닿으며 사그락거렸다. 얇은 잎이 노을을 받아 붉은빛을 머금었다가, 다른 풀들과 겹쳐지며 다시 검어지고는 했다.
시각과 청각. 드디어 육체와 연결되었다.
그것은 자신의 손을 쥐었다 펴보며 쓰러지듯 풀밭에 주저앉았다. 풀들은 그것의 충돌을 받아들이고 폭삭 앉았다. 바닥을 짚은 손 아래서 버스럭거리는 풀의 감촉이 느껴졌다. 촉각까지 있다. 페네트라는 풀을 뜯어내어 코끝에 가져갔다. 막 꺾인 풀의 비릿한 향은 느껴지지 않았다. 후각은 없다. 풀을 입에 넣어서 씹어보았다. 아무런 씁쓸함도 없다. 미각도 없다.
그렇게 감별해보고 그것은 결론을 내렸다. 비교적 정상으로 보였지만 이 역시 제대로 된 세계는 아니었다. 기이했지만 공포에 질리지는 않았다. 아까 겪은 충격이 너무 커서, 이 정도는 받아들일 만하다고 느끼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또한, 이곳의 정체를 알 것 같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비록 구현해두지 않은 것이 있지만, 충돌판정이나, 객체와의 상호작용을 보면 제법 섬세하게 잘 지어졌다. 뛰어난 가상현실이다. 그리고 현시대에서 이런 가상현실을 자아낼 방법은 단 두 가지이다.
‘왜 풀을 뜯어 먹고 있어?’
한 사람이 걸어왔다. 중세를 표방한 영화에 나올 것 같은 낡은 로브 같은 것을 걸친 모양이다. 노을이 지는 방향에서 해를 등지고 오기에 검은 윤곽만 보였다. 먼 곳에서 찾아온 선지자나 예언가와 같은 연출이었다.
물론 그것은 노을을 뒤로한 연출에 한 톨의 감명도 느끼지 않았다. 높은 확률로 누군가가 만들어낸 연출이다. 어쩌면, 적대적인 태도를 감추기 위해서. 그것은 품을 뒤져 권총을 손에 잡고선 긴장을 바짝 세웠다.
두 가지 가능성 중 하나는, 뛰어난 환상 환각 능력자, 혹은 정신 조작 계열의 이능력자에게 제대로 걸린 것. 방금 ‘아바타’를 주었다고 언급했다. 저 로브 입은 자가 그 원인인 초능력자일지도 모른다. 혹은 초능력자가 보낸 전령.
‘사람인 줄 알았는데, 염소였나? 내가 아바타를 잘못 주었나 보네.’
저 로브는 키득거렸고 그것은 아직도 씹고 있던 풀을 뱉어냈다. 침도 섞이지 않고 짓이겨지지도 않은 말끔한 풀 쪼가리가 나왔다. 이런 구현까지는 공들여서 하지 않는다. 그것은 풀 조각을 보다가 바람에 대충 날려 보내고 눈앞의 사람을 쳐다보며 물었다.
‘너는 뭔데 참견이야?’
‘이미 알지 않아?’
로브 입은 자는 익살스럽게 답했다.
‘여기는 오가스이니까.’
다른 하나의 가능성은, 이곳이 오가스라는 것.
로브 입은 자가 선언한 직후 3초. 그동안 그것은 로브에 대해 모든 것을 알게 되었다, 이곳에서 불러주기를 바라는 호칭은 오라클. 생전 이름은 로건 피에르. 괜찮은 대학 강사로 여러 교단에 섰으나 교통사고로 38세에 사망. 치료제를 빠르게 맞은 부류로 이능력은 사소한 염력. 그러나 동전이나 차 키 줍기 이상으로 쓸 일이 없었다. 그리고 부모 재산의 상속 문제로 재판을 3년 이상 끌었으며 회사원인 연인과 교제 중이었다는 것까지.
그것은 이마를 찡그렸다. 자신이 알고 싶어서 직접 찾거나 읽기도 전에 정보가 들어오는 기분은 불쾌했다. 조금 전에도 느꼈다. 그리고 강렬히 거부했다.
‘......그래, 피에르.’
‘오라클.’
‘그래 오라클. 이곳이 오가스인가?’
‘너도 알잖아?’
다시 정보가 흘러들어온다. 이곳은 오가스, 명칭은 엘리시온. 이곳에 들어온 자는 672명. 그러나 이곳에서 인구수를 세는 행위는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입술을 깨물었다. 젠장. 내가 알고 싶으면 알아서 찾아볼 거야. 난 이런 거 싫다. 조금 전 제 머릿속에 개입해 정보를 채가고 넣어두던 연결이 떠올랐다. 끔찍하게도 불쾌했던 그 감각. 이것을 어떻게 해야 막을 수 있지?
오라클이 경쾌하게 웃었다.
‘해결해줘?’
이야기하지 않은 요청이었다. 그것은 오라클을 노려보았다. 오라클은 불쾌해하는 시선에도 개의치 않고 낄낄 웃으며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시야가 한번 일그러졌다가 돌아왔다.
그리고 머리가 고요해졌다. 이제 정보가 막무가내로 들어오지 않는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뇌가 무수한 연결망에 연결되어 정보가 쉼 없이 들락날락했지만, 이제 모든 외부자가 빠졌다. 그리고 온전한 자기 자신이 남았다. 그것은 단절 속에서 자기 자신에 대해 떠올릴 수 있었다.
자신은 페네트라 파비우스였다. 이름을 떠올린 것이 아니다. 페네트라 파비우스라는 이름을 가진 어느 존재가 자신의 정체성임을 깨달았다.
그것은 페네트라 파비우스가 되어 입을 열었다.
“아…….”
낮지도 높지도 않은 소리가 흘러나왔다. 페네트라의 목소리였다. 가상현실에서 외형특징이 의미가 있겠냐마는 페네트라 파비우스의 육체로 살았던 자에게는 안정을 되찾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오라클이 보면서 웃음기 띈 어조로 말했다.
“신입들은 적응 기간이 필요하지. 어때, 한결 낫지?”
“......내게 무엇을 한 거지?”
페네트라는 오라클에게 차갑게 말했다. 오라클은 어깨를 으쓱였다.
“경계심 많은 신입이군. 혹시 고맙다는 말도 할 줄 몰라?”
“할 줄은 아는데 그 전에, 당신이 네게 한 일에 대해 명확히 알아야지. 선물을 받은 건지 폭탄을 받은 건지 모르는데 어떻게 고맙다고 할 수 있겠어?”
혹은 병을 주고 약을 준 것일 수도 있고. 페네트라는 적대적인 시선을 거두지 않았으나 사실 그간의 정보가 명료하게 결론을 내려놓았다. 이곳은 오가스가 맞아. 인간의 뇌를 연결하는 거대한 인공지능. 네 혼란은 그 연결로 인해 비롯된 것이야. 저 자는 연결을 제한해 주었어. 너도 알잖아? 그런 주장이 추측이나 가설이 아닌 명확한 사실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그렇기에 페네트라는 경계를 유지했다. 이 가상현실이 일방적으로 심어준 기억에 세뇌되고 싶지 않다.
오라클은 투덜거리는 척하다가 가볍게 말했다.
“깐깐하네. 알았어. 이야기해보지. 나는 네 접근 제어자 기본 설정을 public에서 private으로 바꾸었어.”
“공적과 사적?”
“단어의 뜻을 직역하면 그렇기는 해. 컴퓨터 프로그래밍 문법에서도 비슷한 의미로 쓰이고.”
“컴퓨터 프로그래밍?”
“오가스는 거대한 연산장치, 즉 컴퓨터이거든. 설령 아니라고 하더라도 컴퓨터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세상에서는 컴퓨터의 규칙으로 새로운 연산장치를 재정의하게 되지.”
“그래서 내게 무엇을 한 것이지?”
“이거 하나하나 설명하려니까 귀찮은걸? 만약 연결을 유지했으면 내가 답해주지 않아도 저절로 알게 되었을 텐데.”
오라클은 그렇게 말하는 것 치고는 성가셔하는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말하는 것을 유쾌하게 여겼다. 생전에 강사였다더니, 떠드는 것을 좋아해서 그랬나?
“다시 말해서 네 정보에 다른 이들이 접근할 수 없도록 했어. 그러나 그들이 접근할 수 없어서 네가 그들과 소통하려면 접근자를 이용한 아주 고전적인 방법을 사용해야 해. 즉, 입을 열어서 말을 해야지.”
“지금 하는 행위 아닌가?”
“조금 전에는 말하지 않아도 소통할 수 있었지. 기억 안 나?”
페네트라는 입을 다물었다. 확실히 그랬다. 오라클이 조작을 가하기 전까지 그들은 입을 거치지 않고 머리에서 머리로 소통했다. 아주 자연스럽게, 당연하다는 듯. 이 가상세계는 자꾸 자신에게 조작을 가하고 있다. 페네트라는 인상을 왈칵 찡그렸다.
“말이라는 게 고전적인 방법인가? 꽤 세련되고 문명적인 방법이며, 지금도 널리 사용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밖에서는 그럴지도 모르지. 그러나 엘리시온 안에서는 한참 뒤처진 방법이야. 오해도 많이 생기고, 자기 생각을 언어화하는 과정이 복잡하고 답변을 기다리는 데에 시간이 너무 많이 걸려. 그렇잖아?”
“그 정도가 번거로워? 번거로워서 삶은 어떻게 살아?”
“구닥다리 신입이군.”
“시끄러워. 어쨌든 나는 싫어.”
“정확히는 비효율적인 방법을 고수하는 고집불통이면서 동시에 사람들 사이에 섞이고 싶지 않아 하며 겉돌고 소외되기를 자청하는 아웃사이더이군. ”
“너 방금 뭐랬냐?”
“사납고 예의도 없고. 고립되어 악만 부리고 성격도 괴팍해지고.”
페네트라는 이를 갈았다.
“내 정보 가져가지 마. 남의 머릿속을 함부로 뒤져서 이리저리 떠들어대는 건 예의 바른 짓이냐?”
오라클은 어깨를 으쓱였다.
“이미 읽었는데 어쩌겠어? 게다가 엘리시온에서는 딱히 그게 실례도 아니라니까? 그리고 이제 다 알려준 것 같은데 고맙다는 말 안 해?”
페네트라는 벌떡 일어나 그것을 노려보았다.
“고맙다는 인사를 원해? 하, 그래, 고마워. 되었지? 해줬으니 받고 떨어져. 아니, 내가 떠나지.”
페네트라는 신경질적으로 말하고 빠르게 반대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한참 걸었다 싶을 때 오라클이 중얼거렸다.
“하여간 까다롭기 그지없는 신입이라니까. 정말 내 도움이 안 필요해?”
그의 말투에서는 말 빠른 코미디언 같은 활발함이 가시지 않은 상태였다. 그리고 페네트라는 멈춰서 뒤를 돌아보았다. 도움이 필요하냐는 말에 반응한 것은 아니다.
“너, 다시 한번 말해봐.”
“내 도움이 필요하지 않겠냐고 말했어.”
오라클은 능글맞게 말했다. 외치는 어조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바로 앞에서 듣는 것 만큼 선명했다. 그들 사이의 거리는 이미 50m가량 떨어져 있었는데도. 페네트라는 이 공간이 가상현실임을 다시 깨달았다.
가상현실에서는 물리적인 거리가 현실 세계와 같은 의미를 가질 필요가 없다. 즉, 걸음을 놀려서 저 로브 녀석에게서 멀어진다고 벗어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최소한 소통이 어렵게 만들 수도 없다.
“너는 내 도움이 필요할걸?”
오라클은 윙크라도 할 것처럼 속삭였다. 귓가에 대고 속삭이는 기분에 페네트라는 짜증이 확 치밀었다. 그는 자신만만하고 여유로웠는데, 이곳에서 어디로 가더라도 그 자신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으니 그러는 것이리라. 이 가상현실, 엘리시온의 법칙을 저 녀석은 이미 알고 있었고 페네트라는 이제야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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