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네트라 IN 엘리시온(2)
2022.04.28 조금은 특이한 여정에 대하여
잠시 후 페네트라는 로브의 앞에 서 있었다. 소통이든 대화이든 도움이든 뭔가를 저것은 하기를 원한다. 그렇다면 질질 끄는 대신 빨리 해치우고 떠나자는 결론을 내렸다. 표정을 풀거나 유순하게 굴지는 않았다. 제 속내를 숨기고 웃는 것을 할 줄 모르지 않았고 오히려 능숙했지만, 상대가 제 속을 빤히 알고 있다면 겉치레가 무슨 소용인가?
“그래, 오라클. 무슨 수작이지?”
“수작이라니. 내 선의를 곡해하지 말아줬으면 좋겠는데. 나는 순수한 의도로 너를 돕고 싶어.”
“이유는?”
“내가 선량해서?”
“선량하기는 무슨. 너는 떠들기를 좋아하지만 동시에 청자가 필요해. 더 나아가 상대에게 영향을 미쳤을 때 오는 성취감도 좋아하지. 참견이 많고 간섭도 많았어. 그런 네 성향 때문이겠지.”
“나보고는 네 정보를 읽지 말라면서?”
“너도 이미 읽었잖아?”
“더는 못 읽어. 아까 내가 연결을 끊어주었잖아?”
“그래, 연결이 끊겨서 네 속내를 못 읽는 건 나도 마찬가지야. 그러니까 딴소리하거나 빙빙 돌리지 말고 제대로 답 좀 하라고. 대체 무슨 수작이야?”
페네트라의 말투가 갈수록 뾰족해졌다. 오라클은 낄낄거렸다.
“그래, 제대로 말하지. 네가 읽은 그대로야, 그래서 나는 엘리시온에서 신입을 이끄는 안내자 역할을 하고 있지. 시간은 넘쳐나는데, 할 일은 없어서 내가 마련한 소일거리야. 제법 보람차기도 하고, 새로 들어온 사람들을 보는 것은 즐겁지.”
페네트라는 팔짱을 끼며 답했다.
“이번에는 내가 네 우월감을 표출할 대상이고?”
“무슨 말을 그렇게 하고 그래? 하지만 네가 그렇게 여기고 싶다면 그렇게 하도록 해.”
“다른 사람을 잡지 그래?”
“안타깝게도 근래에는 추가되는 사람이 아주 드물어서 말이야. 너는 5개월 만의 신입이야.”
“그렇다고 쳐 주지. 그래서 무슨 도움을 주고 싶어서 안달이 났는데?”
“무슨 도움을 받고 싶은지는 네가 요청해야 하는 거 아닌가?”
페네트라는 입을 다물고 그 로브를 노려보았다. 이 자를 신뢰할 수 있는가? 페네트라는 오가스를 저지하기 위해 십 년이 넘게 움직였다. 그런데 자신이 오가스에 있다니. 어떻게 의심하고 적대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누가 무슨 목적으로 오가스에 넣었는지도 모른다. 그 상황에서 자신에게 다가온 이 로브를 어떻게 여겨야 하는가? 호의? 적진에서 호의를 가장하는 녀석을 믿을 수 있겠는가? 엘리시온을 관장하는 빅브라더의 수족일 가능성은? 페네트라는 제 머리를 거세게 헤집으며 짜증스레 물었다.
“일단 엘리시온이라니. 이거 뭐 하는 공간이야?”
페네트라는 가장 무난하게 여겨지는 질문을 꺼내 들었다. 길을 잃은 사람이 가장 첫 번째로 할 질문이다. ‘죄송하지만 혹시 여기가 어디지요?’의 거친 버전.
“알지 않아?”
“설명해.”
“그 정보가 이미 네게 있잖아.”
“말로 설명하라고.”
“어렵네. 말로 설명해 본 적은 없는데.”
그러나 오라클은 유창하게 말했다.
“엘리시온은 그러니까, 과학자들이 사용할 테스트용 오가스야. 인류는 오가스의 가능성에 대해 궁금해하고 있어. 알아내려면 자유롭게 성장할 오가스가 필요하겠지. 하지만 당장 몇 개의 단지를 돌리고 있는 시스템으로 실험을 시도할 수는 없는 노릇이잖아? 잘못되면 그 단지들의 활동이 모조리 마비될 텐데. 그래서 만들어진 여분의 오가스 중 하나야. 그러니까, 슐레이만이 핵융합 발전소면 엘리시온은 입자 가속기인 셈이지. 전자는 그것이 역할을 일정하게 잘 수행해야 한다면 후자는 그래야 할 의무가 전혀 없어. 그저 우리가 마음 내키는 대로 살아가는 것이, 그리고 그런 우리를 지켜보는 것이 존재의 목적이지.”
“크렘린이 그런 걸 허락했다고?”
“연방이 오가스에 지대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시기이잖아? 돈과 허가와 지원이 한창 넘칠 때지.”
“아니, 당장 성과가 없어도 되는 자유 실험 부분을 이야기하는 거야.”
“블루 스카이 연구의 중요성을 모르나 본데? 중요한 과학적 기술적 발전은 순수한 호기심으로 시작된 기초연구에서 이루어지고는 했어.”
페네트라는 눈썹을 삐딱하게 올렸다.
“뭘 옹호하고 있어? 이게 블루 스카이건 뭐건 그래 봐야 생체 실험이지.”
“이상하네, 이곳은 자원자들로만 구성되었을 텐데.”
“이곳의 나를 제외한 모든 이들이 자원자라고 해도 나는 이곳에 처넣어졌어. 그건 절대 변하지 않아.”
“아닐걸? 잘 생각해 봐, 페네트라. 너는 분명 동의했을 거야. 엘리시온은 다른 곳과는 다르니까. 이곳에서 너는 무한히 자유로울 수 있다니까. 이론적으로는 완벽한 행복을 얻을 수도 있어. 코코아에 마시멜로를 넣고 벽난로 앞에 놓인 안락의자에 몇 년이고 앉아 있어도, 좀비 아포칼립스를 즐기고 있어도 아무도 제재하지 않을 거야. 연구진들은 자신들을 놀라게 해 줄 다양한 결과를 보고 싶으니 네가 어떤 일을 벌여도 간섭하지 않을 테고. 자원자를 새로 넣는 것을 제외하고는 기본적으로 닫힌계를 유지하고 싶어 하거든.”
오라클은 페네트라를 똑바로 보았다.
“방랑자 페네트라, 너는 행복을 원하지 않았나? 과거의 네가 이런 제안을 수락했으리라는 사실을 극도로 부정하고 싶어? 네가 저항을 그만두고 안주해버린 것 같아서 괴로워? 고귀한 삶의 가치를 스스로 포기한 것 같아서 자책감이 들어?”
페네트라는 오라클을 보며 눈을 깜빡거렸다. 그리고 허탈한 표정이 얼굴 위로 떠올랐다. 입이 벌어지며 웃음소리가 딱 세 번 내뱉어지고 뚝 그쳤다. 곧 언제 웃었냐는 듯 차게 정색했다.
“짜증 나게 굴고 있어. 내 기억을 잠깐 읽었다고 나를 전부 안 것 같아? 네가 나고 나는 네 자식이라고 말하고 싶어? 처음부터 끝까지 틀렸어. 반박하기도 귀찮네. 네 마음대로 생각하고 떠들어. 다만 나를 끌어들이면서 동의를 얻으려고 굴지 말고.”
“정말 아닐 것 같아?”
“입 닥쳐.”
“원한다면 다른 이야기를 하지. 또 궁금한 점이나 도움이 필요한 것 없어?”
“됐고, 하나 더 묻자. 네 말대로 이곳이 자유롭고 뭐든지 가능한 낙원이라면 이것도 가능하겠지.”
페네트라는 손가락을 하나 세워 하늘을 가리켰다. 정확히 맞는 방향을 가리켰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하늘 너머는 인류의 오랜 상징이었다.
“여기서 나가는 방법은?”
하늘은 이곳 아닌 다른 세계의 오랜 상징. 때로는 저승으로, 때로는 별천지로 갈 수 있다고 여겨진 길이다. 오라클은 체셔 캣처럼 웃었다.
“그건 네가 어디로 가고 싶은가에 달렸지.”
“오가스 밖으로.”
“이럴 때는 ‘어디든 상관은 없는데…….’ 라고 해야 하는 거 아니야?”
“내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놀이를 하는 줄 알아? 아니면 엘리시온 관람이나 할 정도로 한가한 줄 알아? 분명하게 말할게. 나는 이 오가스 밖으로 나갈 거야. 이제 용건 외에는 너와 할 이야기 없어.”
페네트라는 단호하게 쏘아붙였다. 일직선과 같은 단 하나의 선명한 목표를 내세운다. 맹목적이고 막무가내인 태도로, 그 무엇으로도 꺾지 않겠다는 기세로. 오라클이 뜸을 들이며 난처한 어조로 말했다.
“슬프게도, 그건 불가능해.”
“무슨 소리야? 나보고 여기 평생 갇혀있으라는 거야?”
그리고 이 이야기를 꺼내면 상대방이 많은 것을 설명해야 한다는 것을 안다.
“너는 이미 죽었거든.”
페네트라의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그리고 세게 다물렸다. 예상하지 못한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생각이 맞아 떨어졌다는 희열일까, 예상했음에도 다스리지 못한 충격인가? 다른 이들이 생각을 채가더라도 간단하게 답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페네트라는 정의하기 이전에 자신의 문제는 눌러두고 상황에 반응하여 재깍 몸을 움직였다.
“무슨 헛소리를 지껄이는 거야? 웃기지 마. 내가 죽었다니 그럴 리 없잖아?”
폐네트라는 바로 로브의 멱살을 잡았다. 부정하고 분노했다. 그렇게 보이려고 했다. 오라클을 유머를 잃은 목소리로 말했다.
“알잖아. 오가스에 넣으려면 알라티라니움 뇌를 직접 넣어야 해.”
“나는 죽은 기억이 없거든? 사람 목숨을 두고 장난치니까 재미있어?”
“그, 네가 더미 데이터가 아닌 건 알아. 그러면 기억이 일부 누락 되어서 그랬을지도 몰라. 하지만 네가 정말로 죽지 않았는지 확신할 수 있어?”
“철학적인 논제인 척 말 돌리지 마. 그럼 내가 죽었다고 확신하겠어?”
“잘 생각해 봐. 불치병에 걸리거나 사형선고를 받아서 죽음을 기다리느니 프로젝트 엘리시온에 들어오겠냐는 제안을 받은 적이 없는지. ”
“그런 적 없어!”
“있을 것 같은 삶이던데.”
“그쪽은 사기 치고 다녔을 것 같은 주제에!”
페네트라는 로브를 거세게 밀쳤다. 씩씩거리며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 분노를 가장하는 것은 손쉬웠다. 아주 오래전부터 페네트라의 심장 속에는 화가 깃들어 있었다. 한 톨의 공포도 내비치지 않으며 살벌하게 말했다.
“내가 납득할 수 있는 증거를 보기 전에는 그 무엇도 믿지 않아.”
오라클은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았다. 그저 조금 미안해하는 기색으로 손을 휘저었다. 그러자 창이 하나 떠올랐다. 처음에는 사진인가 했는데 CCTV 영상이었다. 구석에 날짜와 시간이 실시간으로 흐르고 있었고, 방호복을 입은 사람이 화면 안쪽을 걸어서 지나갔다. 하나의 장소를 다각도로 찍고 있었는데 인공조명이 가득한 실내였고, 넓었다. 바닥에는 유리가 깔려있었고 투명하게 아래를 내려다볼 수 있었다. 박물관이나 스카이워크에서 종종 보았던 디자인이다. 그리고 사각형으로 구역이 나누어져 있었다. 구역마다 수백 개의 푸른 광물이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전부 뇌의 모양으로 정교하게 가공되어 있었다.
광적인 갑부 수집가의 개인 박물관 같았다. 유감스럽게도 그런 광경이 아니라는 것을 모두가 안다.
“저게 전부 진짜 알라티라니움이야?”
“합성이 아니냐고 따지고 싶어? 그러나 진실이야. 아직도 믿기지 않아? 기증자 명단이 필요해? 그 안에서 네 이름을 찾아줄까? 단기간에 만들 수 없는 방대한 엘리시온 실험 데이터를 보여줄까?”
오라클이 시설의 다른 CCTV 영상을 띄워주며 물었다. 직원, 연구원들, 기술자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가지고 온다, 라.”
페네트라는 잠시 미소를 머금었다. 회광반조와 같은 번쩍임이 스쳤다. 얼굴은 화면에서 나온 푸른 빛으로 잔뜩 물들어 있었다. 그건 화를 내다 미쳐버려서 이내 웃어버리는 표정이 아니었다. 분노와는 다른 계열이었다. 좀 더 차분하고 매끄럽게 돌아갔다.
“오라클. 너는 분명 내게 도움을 주겠다고 했어. 그렇지?”
엘리시온의 안내자를 자칭하는 이에게 페네트라가 물었다. 그때까지도 미소가 함께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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