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캐 연성

페네트라 IN 엘리시온(3)

2022.05.02 조금은 특이한 여정에 대하여

그런 종류의 제안을 넙죽 수락하는 자는 부주의한 자들이다. 그들은 방금 만났을 뿐이고 상호 간의 신뢰는 아직 형성되지 않았다. 오라클도 그 정도는 알았다.

 

다만 그는 한가지 실수를 했다. 너무 끈질기게도 많이 말하며 밀어붙였다. 도움을 강요하며 즐거움을 얻었던 오라클은 이제 자신이 했던 말을 책임져야 하는 때가 되었다. 방어적으로 나오던 페네트라가 그걸 잡고 훅 끌어 당겨버릴지 누가 알았겠는가? 물론 문서화 된 계약이 아니니 아무 일도 없었던 체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건 그가 스스로 설정해둔 안내자 ‘오라클’의 방식에 맞지 않는다. 그렇다고 저 수상할 분명할 제안을 받아들이는가?

 

“내가 도와줄 수 있는 선에서는.”

 

오라클은 예의 바른 체 조금 물러났다. 페네트라가 무언가를 요구할 때 이제 그것은 불가피한 사정으로 도와줄 수 없는 일로 변모할 것이다. 인간에는 한계가 있는 법이다. 인간의 전지전능하지 못함에 축복 있어라. 인간의 불완전함은 무수한 사람들의 도주로이자 구세주였던 변명의 원천이다. 기억력의 저하로 수많은 잊고 있었던 약속, 또는 항상 좋을 수 없고 갑자기 악화하고는 하는 몸 상태를 찬양하라.

 

“걱정하지 마. 아까 정보 확인했어. 너는 일정이라고는 이곳을 떠도는 그것밖에 없고 네게는 이 일을 해낼 능력이 있더군.”

 

그러나 이곳은 오가스였다. 전산화된 기억이 저하될 일 없고 악화할 몸이 존재하지 않는 오가스. 게다가 오가스는 모든 정보가 공개된다는 것이 가장 치명적인 단점이다. 엘리시온에 능숙하던 안내자와 어설프던 신입은 위치가 변했다. 작전이 전부 까발려진 사령부와 미지의 적이 되었다. 연결이 끊어지기 전에 상대의 정보를 얻어간 건 서로 마찬가지이지만, 이 엘리시온 내부에 오라클의 흔적은 방대했고 갓 들어온 페네트라의 정보는 몇 없었다.

 

불청객이라고 불리곤 했던 페네트라는 오랜만에 그 호칭에 어울리는, 잔인함이 깃든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까 내게 보여준 건 이 시설 내부의 CCTV였어. 너 방금 알코노스트 보안을 뚫었지?”

 

오라클은 잠시 침묵했지만, 부정하지는 않았다. 모두가 정보 공유하는 엘리시온에서 거짓말은 사장된 무기이다. 대신 그곳에서는 우회적인 반박들이 성행했다.

 

“내가 보여준 영상 때문에 오해가 생긴 모양이야. 오가스에서 해킹이란 외부에서 숨을 쉬는 행위만큼이나 자연스러워. 우리는 전산화된 서로에게 끊임없이 접속하니까.”

“그래, 너희는 대다수가 컴퓨터 전문가이자 뛰어난 해커야. 물이 가득한 곳에 사는 사람들이 수영에 능한 것처럼, 너희는 컴퓨터 시스템 속에 살고 있으니까. 너도 그들 중 하나야. 너는 방금 네게 접속해서 내 아바타를 만들어주었고 내 설정의 기본값을 바꾸어주었지. 게다가 방금은 알코노스트의 보안을 뚫어서 CCTV에 접속했고, 엘리시온 실험실 내부를 내게 보여주었고. 맞지?”

 

오라클은 페네트라를 침착하게 주시했다.

 

“해커를 찾는 사람들의 목적은 비슷비슷하지. 그들은 해커를 21세기의 괴도로 알거든. 기밀을 빼주기를 원하거나, 사이트에 테러를 벌여주기를 원하거나, 서버를 다운시켜주는 등의 분탕을 쳐주기를 바라지. 너도 내게 그런 걸 부탁하고 싶어? 반기업주의자이자 반정부주의자인 페네트라?”

“네가 언급한 내 성향에 대해서 반박하고 싶어지는군. 일단은 넘어가고, 그럴 목적은 없었는데 네가 말하니 흥미가 당기기는 하네.”

“미리 말해두지만 불가능해. 해킹은 뭐든 가능한 마법이 아니야. 그리고 이곳에서는 더더욱. 이 시설은 외부 네트워크와 연결되어 있지 않지. 오가스를 다루는 곳은 전부 그래. 외부에서 이곳으로 분탕 치려는 짓을 막으려는 것이 목적이었겠지만 내부에서 외부에 나가는 것도 동시에 막아버리지.”

 

페네트라는 손가락을 튕기고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내가 말하려는 게 그거야. 내부에서 내부를 조작하는 건 가능하다는 이야기잖아? 방금 네가 CCTV를 보여주었던 것처럼.”

 

오라클의 표정이 드디어 굳었다.

 

“뭘 원하는 거야?”

“처음부터 말했잖아. 나는 오가스 밖으로 나가고 싶다고.”

“나야말로 말했잖아. 너는 죽었다고. 네 육체는 화학약품에 녹아 지금쯤 폐수처리 시스템을 돌고 있을걸? 아니면 소각되었거나. 네 머리에 있었을 알라티라니움 말고 다른 부분은 필요 없거든. 오가스 밖의 세상으로 나가려면 거기서 활동할 육체가 필요한데 이미 그건 없어졌다고.”

 

그 악의적인 가정에 페네트라는 입안을 깨물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 넘기려고 해도 육체를 잃었다는 사실이 충격이 되지 않을 수는 없었다. 페네트라는 자신이 인간의 순수함을 유지해야 한다면서 강박적으로 기계 신체를 거부하는 부류는 아닌 것을 안다. 하지만 자기 자신의 일부를 영원히 잃었다. 그게 어떻게 충격적이지 않을까? 기계를 이용한 생명과학이 발달한 이 시대에서는 어리석을 관점일 수 있다. 인간은 정신만이 오롯이 자신이고, 육체는 그에 딸린 부산물이라는 생각이 널리 퍼져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페네트라에게 육체란 대략 삼십 년 넘게 함께하던 동반자이자 자기 자신이었다. 어느 풀이 가득한 대지서부터 나무로 뒤덮인 숲, 쓰레기가 뒤덮은 콘크리트나 매캐한 타르 냄새가 올라오는 아스팔트를 딛고 달리며 열심히 상호작용했다. 때로는 생사를 함께했다. 총에 맞았을 때 영혼과 함께 비명을 질렀다. 고통에 호흡이 멈추며 심장 소리를 느꼈다. 언젠가 시린 눈밭에서는 신체 말단이 마비되어가면서 의식이 흐려지며 죽음을 예감했고 동시에 어떻게든 살고자 발버둥 쳤었다. 그럴수록 육체는 정신과 강하게 연결되었다. 페네트라는 사후세계를 믿지 않는다. 육체의 죽음은 곧 죽음이다. 어찌 육체의 죽음을 아무것도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그러나 제 소중한 동반자가 죽었어도 정신이 죽지 않았다면, 페네트라는 다른 방법을 취해서라도 마저 살아야 했다.

 

“내 육체 말고.”

 

페네트라는 웃었으나 얼굴이 괴로움에 일그러지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내가 원래 쓰던 육체 말고. 꼭 그 몸이어야 할 필요는 없어. 지금은 인공적으로 육신을 만들어내는 시대잖아? 그리고 이곳은 한때 안드로이드로 정점을 달리던 알코노스트이지.”

 

빌어먹을 알코노스트. 그러나 안드로이드를 만들어낸 곳, 그것을 담보로 잡고 세상을 휘둘렀던 곳. 나와 내 친구를 되살릴 기술을 가진 곳, 그렇게 살아난 인생을 저당 잡은 곳. 것이 명확히 알코노스트만의 기술이 아니었다고 저항해보는 건 의미없다. 죽도록 증오하더라도 그곳은 어쨌거나 우리의 많은 것이 그곳에서 비롯되었다. 페네트라는 다시 그곳이 필요하게 되었다.

 

“알코노스트의 양산형 안드로이드 하나를 빼돌려서, 그곳에 내 의식을 올려줘. 그렇게 하면 나갈 수 있겠지?”

 

오라클의 입이 천천히 벌어졌다.

 

“대단한 탈주극이네. 그게 가능할 거라고 봐?”

“적어도 다른 방법으로 탈출하는 방법은 안 떠오르는데, 너는 다른 방법이 있어? 있다면 말해봐.”

“있을 것 같아? 게다가 나는 가능하겠냐고 물었잖아!”

“불가능에 가까워도 난 부딪혀 봐야 해.”

 

선언하는 자 특유의 단호한 어투는 아니었다. 페네트라는 피로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나는 이곳에 있을 수 없어. 내가 싫어하는 장소에 머무를 수 없어. 나는 나를 알아. 아무리 아름다운 낙원이어도 그곳이 나를 구속한다면 나는 나가서 황야를 떠돌 사람이야. 평생을 그래왔어.”

 

오라클은 이해할 것이다. 그는 페네트라의 내부를 들여다보았다. 그러나 그는 페네트라가 아니었다. 조바심을 내다가 미간을 잡고 말했다.

 

“이봐, 신입. 나는 말리고 싶어. 네 계획에 위험성이 전혀 없으리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여기에 있을 생각은 전혀 없는 거야?”

“위험성은 알아. 나는 생사를 장난으로 여기지 않아. 그래도 나가겠다는 거야. 머물 생각 전혀 없어.”

“거주자로서 이곳이 지옥이 아니라고, 네가 좋아할 거라고 장담하지. 안주하고 평화롭게 있는 게 뭐가 나빠?”

“좋아하지 않으려고 나가는 거야. 나는 이 엘리시온에 들어온 사람을 욕할 생각도 없어. 그러나 내가 도무지 그러고 싶지 않다고.”

“너는 항상 불만에 차서 무엇에도 만족하지 못하고 고집을 부리는 성향이 있었어. 너는 이곳이 싫은 게 아니라 세상 모든 게 싫어서 투덜거리는 습관이 든 거겠지!”

 

오라클은 기어코 목소리를 높였다. 페네트라는 그를 담담히 보았다. 뜻밖에도 페네트라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래, 내가 그런 사람일지도 모르지. 그러나 지금 상황에서 나를 기어코 처넣은 작자와 나가겠다고 하는 나. 이 둘 중에서 내가 고집쟁이가 되는 건 내가 이미 당했기 때문인가? 그래서 입 다물고 있어야 하는 건가?”

 

목소리는 무미건조했다. 반발하는 기색도 없었다. 페네트라 자신을 자극하기에는 너무 오래된 질문이었기 때문이다. 여러 설득과 상대의 상태를 비난하여 스스로를 의심하게 만드는 방법도 막혔다. 오라클은 머리를 빠르게 굴렸다.

 

“그, 네 말대로 이곳에 온 것이 네 자의가 아니었다고 치자. 그러면 네가 이곳에 있는 건 네 의지도, 네 책임도, 네 선택도 아니야. 그러면 너는 여전히 농간에 휘말린 억울한 희생양이고, 불만도 합당하지. 그래, 너는 그럴 수 있어. 그런 너를 긍정하며 그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어. 알코노스트를 향한 욕설로 광장을 채워봐. 문자로 사방을 뒤덮어봐. 가끔은 과부하도 일으켜봐. 어쩌든 마음껏 반항을 펼쳐. 다만 그렇게라도 이곳에 존재해달라고 부탁하면 안 될까? 이곳 아닌 곳으로 나가려다가 너는 그 의식마저 잃게 될 거야.”

“충고 고마워. 내가 영영 나갈 수 없게 되면 그 말을 떠올릴게.”

“‘나갈 수 없게 되면’이 아니라 나갈 수 없는 거라니까? 너는 죽었다고! 시대가 이렇게 되었지만 그래도 죽음은 여전히 대부분 일방통행이고 절대적인 사건이야. 죽음에 당했으니 돌아갈 수 없는 건 당연하잖아.”

 

페네트라는 조용히 그를 보았다. 가장한 분노도, 회심의 미소도, 괴로움에 일그러진 얼굴도 전부 사라진 무표정이었다.

 

“그걸 죽음이라고 인정한다면 나는 살해당한 것이네. 내가 살해당했으면 나에겐 보복할 권리가 있지 않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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