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좋은 일
혼자일 운명으로 타고난 사람도 있을까. 이명이 귀를 찌르는 순간에도 그런 생각을 했었던 것 같다. 망막에 맺히는 어느 장면도 실감이 나질 않아서 그만 웃어버리고 싶어졌다며 자조해 보지만, 막상 목구멍에서 나오는 건 비명과도 같은 울음소리다. 들고 있던 쇳덩어리에 가해지는 중력이 배가되고 눈물이 이끄는 곳으로 눈을 돌리면 똑같은 옷을 입고 똑같은 쇳덩어리를 들고 있는, 한때 사랑했던 제 친구가 검붉은 웅덩이에 자빠져 누워있는 모습이 보인다. 아일랜드의 피를 가지고 있다던 그는 눈을 감기 직전까지도 위스키에 관한 농담을 노래했다.
혼자일 운명으로 타고난 사람이 있다고, 그 순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자리에 주저앉아버린 것은 쇳덩어리가 너무나 무거워져버린 탓이다. 눈물이 떨어지는 것은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을 제 얼굴도 중력을 견디지 못한 탓이다. 또다시 사랑하는 이를 잃는 것은 제가 혼자일 운명으로 타고난 탓이다. 삶의 한 마디를 채우기 위해 타인을 갈구하게 되는 것은 사랑이, 사람이 고픈 탓일까.
수많은 폭격을 온몸으로 받으며 잠에서 깨어나면 베개와 시트는 축축하게 젖어있고, 어스름한 새벽빛이 커튼 사이로 스미고 있으며, 걱정스럽게 내려다보고 있는 그녀의 얼굴이 보인다.
“진짜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을 거야?”
리치는 오믈렛을 입안으로 밀어 넣으며 눈썹을 들어 올렸다. 영문을 모르는 척이라도 해 볼 생각이었지만 일라리아는 평소처럼 가볍게 넘어가 주지 않았다.
“당신이 종종 악몽을 꾸는 건 알고 있어. 비명소리가 들릴 때마다 집주인의 잠긴 방문을 따고 들어가야 하는 침입자의 기분도 생각해 주지 그래?”
“…문을 열고 자면 될까? 침입자 대신 상냥한 룸메이트가 되겠네.”
부러 유쾌하게 대답해 보려 했으나 일라리아는 잔뜩 토라졌는지 의자를 밀고 일어났다. 리치를 한 번 쏘아보고는 출근한다며 그대로 현관으로 나가는 발소리는 날카로웠다. 그녀는 이런 점이 사랑스럽고도 성가셨다. 타인에게 애정과 관심을 퍼주며 자신에게도 돌아오는 몫이 있을 거라고 믿었다. 마음에 대한 보답이 기대치에 미치지 못하면 숨길 줄을 모르고 티를 내곤 했다. 단순한 ‘룸메이트’로 지내자던 담백한 선언은 그녀의 기억에서 사라진 지 오래였다. 리치는 웃음 섞인 한숨을 쉬었다. 어쨌거나 악몽을 꾸는 자신을 흔들어 깨우고 아침까지 차려준 일라리아의 기분을 상하게 한 채로 보낼 수는 없었고, 당근주스를 마시던 컵을 내려놓고 그녀를 따라나섰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는 나가지 않고 문 앞에서 리치가 배웅하러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잘 다녀와. 저녁 전에 오지? 이번에 두 블록 건너 새 식당이 생겼다는데 가볼래?”
“내가 이번에 일하기로 한 데가 그 식당이야, 바보야. 내 퇴근시간 맞춰서 봐.”
그제야 일라리아는 이를 드러내며 웃었고, 문이 닫히고 발소리가 멀어질 때까지 리치는 벽에 기대고 서 있었다. 그녀의 흔적이 전부 사라지고 나서야 다시, 지긋지긋한 하루가 시작된다.
아버지는 복무 중에 돌아가셨어. 어머니는 정신병원에 가셨고. 내가 군대에 들어갔던 이유는 생각이 나질 않네. 그냥 아버지처럼 죽어버릴 요량이었나? 위스키를 좋아하던 그 친구는 온갖 미래를 노래하며 슬픔을 잊는 방법을 알려줬던 것 같은데. 그의 노래를 듣고 있자면 불바다 한가운데에서도 모든 게 괜찮아질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지. 결국 그도 날 두고 떠났지만. 고작 복부에 뚫린 구멍 두 개 때문에 말이야.
모태신앙 따위 잊은 지 오래지만 원망할 상대가 적당하지 않을 때면 꼭 신을 찾곤 했지. 어째서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전부 앗아가는지. 사랑하는 것을 만들지 않으면, 사랑을 하지 않으면 되나? 가족과 연인과 친구 따위 남들의 일이라고 고개를 돌려 버리면 편해지나? 하늘에 누군가 있다면, 답을 달라고 울부짖으면서.
그러니까, 소파에 몸을 깊숙이 묻고 안정을 취하려던 리치가 옥죄이는 정적을 견디지 못하고 약속보다 집 밖을 일찍 나가게 된 것은 운명의 장난이라 할 수 있겠다. 쉴 새 없이 째깍이며 그나마 소음을 일으키던 벽시계가 어느 순간 멈춰있었다. 건전지를 갈아 끼워 보아도 움직일 생각이 없어 보이는 초침을 가만 지켜보던 리치는 무슨 생각에서였는지 시계를 몽땅 해체해 보기 시작했다. 리치는 망가진 것처럼 보이는 부품 몇 개를 손에 넣었다. 망가진 시계 덕에 정확한 시간을 알 수 없었으나, 창밖을 보니 해가 서쪽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지금쯤 나가면 이를지언정 늦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이 리치의 생각이었다. 시간이 남았다 싶으면 철물점을 들릴 수도 있겠다. 그런 생각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분명 그 사람도 나를 사랑하고 있어! 나를 원하고 있다고! 내가 장담해. 내가 외로움을 많이 타는 성격인 거 알잖아. 같은 조각을 가진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든 서로의 눈에 띄기 마련이지. 내가 집에 들어갈 때 그 사람이 웃는 걸 너희가 보면 이해할 거야. 그 사람이 날 어떻게 대하는지 보면 너희도 다 알게 될 거라고. 그게 사랑이 아니라면 대체 뭐가 사랑이겠어? 기다려, 퇴근할 때 여기로 오기로 했으니까. 오늘 내 마음을 전해버릴까 싶어. 원래는 더 기다려주려고 했는데, 겁이 많은 사람이라 망설이고 있는 것 같더라고. 그 사람도 더 이상 외면하지 못하게 해야지.”
그러니 리치가 동료들과 수다를 떨고 있는 그녀의 말을 듣게 된 것은 전부 운명의 탓으로 돌려버리자. 리치는 손안에 망가진 톱니바퀴를 굴려본다. 마모된 톱니는 결국 제 기능을 잃고 작동을 멈춰버리기 마련이다. 그렇게 맞물려있던 반대쪽 톱니는 갈 곳을 잃게 되고, 그렇게 시계는 시간을 잃어버리게 된다. 그렇게 그들의 세계는 시간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리치는 벽 뒤에 서서 시선은 바닥에 둔 채로 일라리아가 다시 일하러 들어갈 때까지 그녀가 내는 모든 소리를 듣고만 있었다. 그녀가 남들에게 제 얘기를 한 점을 타박할 생각할 생각은 없었다. 그저 모르는 척 있다가 그녀가 계획한 말을 내뱉게 할 생각도 없었다. 다만 뱃속 어딘가에 어수선하던 응어리들이 훅 꺼지며 발밑으로 빠져나가는 기분에, 리치는 약속을 잊고 그 자리에서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관계라는 건, 이름을 붙이는 순간 변질되게 되어있어. 어떠한 약속이 되어버리지. 서로를 서로의 무엇이라 부르자. 삶에 들여놓고 일부를 잠식하고 잠식당하며 섞이도록 하자. 우습지도 않아. 어떻게 사람들은 그 모든 과정을 감내하고 살아가는 거지? 어떻게 타인을 감당하겠다 자신할 수 있는 거지? 너도 내가 단지 겁을 먹어버린 것뿐이라고 조롱할 생각이야?
맞아, 타인 없이 살 수 있는 사람은 없어. 그만큼 중독성이 강한 것도 없고. 그러니 우리는 항상 사람이 남기고 가는 후유증에 괴로워하게 되는 거야. 시선에 목말라하는 것도 관심에 집착을 보이는 것도 일종의 금단현상이지. 봐, 난 이미 외로워서 미쳐버릴 것만 같아. 나를 떠난 사람들은 그대로 나의 빈 공간이 되어버리고 말았어. 아, 중독이란 이런 거구나. 이렇게 나를 소모하다가 결국 텅 비어버리게 되겠구나. 누구도 채워주지는 못하면서 타인을 욕망할 줄 밖에 모르는 껍데기만 남아버리겠구나…….
“당신 참 지독하다.”
조용히 현관문을 열고 들어온 일라리아의 말이었다. 벽시계는 고쳐지지 못한 채로 식탁 위에 올라가 있었고, 리치는 식탁 앞에 앉아 망가진 부품들을 늘어놓고 있었다. 일라리아는 외출복을 입고 있는 리치를 보고 상황 파악을 했다. 입을 다물고 있는 리치의 모습은 도저히 긍정적으로 볼 수 없었다.
“내가 한 말 들은 거잖아, 그렇지? 차라리 화를 내! 아니, 그러고 싶지도 않지? 난 알고 있어. 당신도 날 사랑하고 있다는걸! 제발, 무슨 말이라도 해 봐! 날 사랑하잖아, 그냥 나를 사랑한다고 말하라고.”
리치는 입을 열었으나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전부터 하고 싶었던 말이었는지, 그저 나오는 대로 내뱉어버리는 것들인지 모르지만 느리게 말을 이어나갈 뿐이었다. 두 사람 모두 조용해지자 리치는 고개를 들어 일라리아를 한 번 보았다가, 다시 바닥으로 시선을 내렸다.
“일라리아, 넌 좋은 사람이야. 너도 알지?”
분에 겨워하던 그녀의 표정은 시간이 지나며 천천히 변했다. 리치는 자신이 한 말 중 무언가가 그녀를 설득시켰다고 생각했다. 그 말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아무렴 어떤가.
“리치, 나는, 당신이 원하는 대로, 앞으로 더 좋은 사람을 만날 거야. 당신보다 훨씬 나은 사람들을.”
그럴 자격이 있다고, 리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당신은, 분명 죽을 때까지 외로울 거야. 홀로 비참하게 죽어버릴 거라고. 아무도 없는, 이 낡은 방 안에서!”
그것은 저주가 아니었다. 객관적인 판단이었으며 동시에 진심 어린 걱정이었다. 리치는 다시 한번 도망치고 싶은 욕구를 강렬하게 느꼈다. 땀으로 축축하게 젖은 손끝은 목뒤에서 미끄러지며 붉은 선을 남긴다.
“그럼, 그렇게 되면 당신은… 어떡해?”
이제는 더 이상 해줄 수 있는 말이 없었다. 그녀도 그 사실을 깨달았는지 땅만 바라보고 있는 리치를 지나쳐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리치에겐 다행히도 그녀는 강했고, 리치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잃고도 스스로를 다시 채울 줄 아는 사람이기에, 리치가 원했던 것처럼, 일라리아가 말했던 것처럼 새롭게 사랑을 하게 될 것이다.
그녀는 작별 인사도 없이 챙긴 짐을 들고 떠났다. 리치는 그녀가 나간 현관문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해가 완전히 지고 달이 뜨고 다시 지고, 해가 다시 뜰 때까지 자리를 지키며 문득 현관문에 대고 네가 옳아 일라리아. 네가 한 말 중 틀린 건 아무것도 없어…… 라거나, 전부 맞는 말이야…… 라고 고백할 뿐이었다.
그렇게 리치는 하루를 꼬박 그 자리에 앉아있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손안의 태엽들이 아주 망가져 손쓸 수 없게 되어있었다. 고개를 돌려 하루 사이 온기가 식어버린 빈 방을 눈에 담는다. 룸메이트를 새로 구해봐야겠다. 위스키를 좋아하는 사람도 괜찮을 것이고, 아침을 차려주는 이라면 운이 좋다고 여길 수 있겠다. 집에 머무는 시간이 적거나 농담을 좋아하는 사람이어도 좋다. 간단히 하루 안부를 묻고 때때로 식사를 함께할 수 있는 정도라면, 빈자리를 채우진 못해도 가려놓고 지낼 수는 있을 것이다. 부지런히 방을 치우고 시계를 고치면 금방 살 만한 공간처럼 보일 것이고, 곧장 룸메이트를 구하면 된다. 그러면 될 것이다.
리치는 언젠가 들었던 노래를 흥얼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리치의 친구가 불렀다던 노래는 아일랜드 민요인 ‘humours of whiskey’입니다. 중요한 건 아니고, 분위기를 잡느라(글쟁이 컨셉질을 해보느라) 이런저런 노래를 많이 찾아듣게 되더라고요.
ㄴ이건 작가의 말에 썼던 주저리 갖고 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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