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도주로 만들어진 언덕
내 아들아, 가까이 와서 내게 입 맞추라
에이든 앵글로스, 바네사 해링.
두 사람의 결혼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리암, 네가 저택에 있을 줄은 몰랐는데.
넓은 복도에서 울리는 냉랭한 목소리는 결코 거짓이 아니었다. 오히려 예기치 못한 상대가 이곳에 있어 불편하다는 의미 만큼은 누구라도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노골적이었으나, 맞은 편의 남자는 할 말을 고르는 듯 그저 미미하게 고개를 뒤로 젖힌 채로 지팡이를 고쳐 쥘 뿐이었다. 어깨를 한참 넘는 가느다란 백금발이 옷감을 스치고 흘러내리는 소리가 유독 크게 느껴졌다. 찰나였지만, 엇비슷한 높이의 탁한 빛을 띤 눈동자가 피부에 닿았다 맥 없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순간 에이든은 더 이상 불쾌함을 참지 않고 인상을 구겼다. 그가 가장 피하고 싶은 상황은 늘 이보다 더 나쁘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한 순간에 찾아와 벼랑 끝에 선 이를 바닥까지 내몰곤 한다. 못 본 새에 키가 더 자란 건지 이제는 올려다봐야만 하는 동생에게서는 낯선 위압감이 느껴졌다.
어쩌면 이 빌어먹을 저택에 돌아온 순간부터, 아니 아버지의 서재에서 낯선 남자를 발견했을 때부터 예견된 불행이었을지도 모른다. 좋지 못한 소리가 튀어나올 것을 알면서도 고집스레 비켜서지 않는 상대방에게 에이든이 날 선 안부를 묻는 것은 사실상 불가항력이었다. 저택에는 웬일로? 그리고 나면 언제나 그래왔듯 한 박자 늦은 대답이 이어진다.
"…종종 들르곤 했거든. 당신이나 프린스턴은-"
"그거 참 미안하게 됐네."
이쯤에서 돌아서야 한다는 이성적인 사고가 채 이루어지기도 전에 반사적인 빈정거림이 치고 나왔다. 예의 무덤덤한 표정으로, 에이든이 뭐라고 하든 그것은 더 이상 저에게까지 닿지 못한다는 듯이, 여전히 제 방 안에 틀어박혀 있을 시절에 멈춰 있는 듯이 구는 리암을 올려다보고 있으면 속이 다 꼬이는 기분이었다. 그 무감한 얼굴을 깨부수고 싶은 오기는 늘 그렇듯 가장 최악의 방식을 골랐다. 이것이 그가 택할 수 있는 방법 중 가장 폭력적임을 알면서도.
"그래도… 오랜만에 집에 들르니 확실히 느끼는 건 있군.
이 낡아빠진 저택은 올 때마다 기분이 나빠."
"……."
"너를 포함해서."
특유의 느긋한 어조로 말꼬리를 늘려가며 힐끔 올려다본 천장에는 뿌연 먼지가 쌓여있었다. 기본적인 관리조차 안 돼 있다니...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리며 미간을 찌푸린 에이든이 다시 맞은편을 바라봤다. 따라 시선을 올릴 법도 한데, 리암은 그저 가라앉은 눈으로 죽은 듯이 제 앞에 있는 형제를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짧은 침묵도 잠시 상대가 입을 열었다.
"이곳이 싫으면… "
쿵- 하고 낮게 나무 바닥이 울렸다. 지팡이의 끝과 바닥이 닿아 생기는 마찰음이었다. 그와 동시에 석고상처럼 영원히 움직이지 않을 것 같던 남자가 무거운 몸을 이끌고 한 걸음 앞으로 다가왔다. 에이든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젖히고 뒤로 발을 물렀다. 건조한 시선이 선명하게 얼굴에서부터 목덜미를 지나 발끝까지 훑고 지나가는 순간 이유 모를 긴장감이 몰려왔다.
리암이 뱉는 대부분의 말에는 어떠한 의미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가장 잘 아는 것은 에이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동시에 그의 기분을 상하게 만드는 대단한 재주가 있었다. -비록 리암이 곁에서 숨만 쉬어도 눈에 거슬렸을 위인이지만- 이 예민한 성정은 가끔 느끼고는 했던 것이다. 말하는 이조차 눈치채지 못 할 정도로 몸을 웅크린 채 무의식에 잠겨있는 어리고 연약한 악의를. 눈가에 열이 오르는 게 느껴졌다. 분명히 오는 길에 비를 너무 오래도록 맞았기 때문이리라. 그는 어릴 적부터 무리한 날에는 반드시 며칠간 앓아눕곤 했다. 그러나 왜인지 마음 한 구석에서 불쑥 불온한 생각이 드는 것이다. 짙은 보랏빛의 공허한 빈 눈을 바라보다 보면 끝끝내 외면해오던 어떠한 사실을 알게 될 것 같은 불확실한 공포. 이것이 그가 리암과 마주하기를 꺼리는 이유였다. 결국 에이든이 먼저 시선을 내리깔았다. 기이할 정도로 고요한 저택에서는 서로의 인기척이 지나칠 정도로 선명하다.
그와 동시에 에이든이 어렴풋이 알아챈 것이 있었다. 맞은편에 서 있는 이 남자는 이제 완전한 타인이었다. 그의 기억 속에 흐릿하게 남아있던 두 살 어린 남동생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어진.
"돌아오지 않으면 돼, 에이든. "
-
바네사 해링이란 여자는 연애에도 적극적이더니 결혼식마저 날짜를 앞당기려 안달이었다. 덕분에 어떻게든 고향에 돌아가는 것을 피하기 위해 마련해둔 변명거리가 똑 떨어져 버린 에이든은 몇 주 째 학회를 핑계로 어영부영 날짜를 미뤘고, 끝끝내 화가 잔뜩 난 그녀가 결혼이 하기 싫은 거냐고 소리 높여 따져 물었을 때, 울며 겨자 먹기로 기차표를 예약하겠다고 대답할 수 밖에 없던 것이다. 결혼과 같은 일생의 중대사만 아니었다면, 아니 애초에 이 콧대 높은 제멋대로 아가씨만 아니었더라면 이듬해 봄에 예정된 결혼 소식을 적당히 편지로 전하고 끝낼 수도 있었을 텐데. 덜컹거리는 기차 안에서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지는 책망을 이기지 못하고 에이든은 그만 눈을 감아버렸다. 더 생각할 것도 없이 끝내는 자신의 탓이 될 문제였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반사적으로 떠오르는 길고 검은 머리의 약혼녀의 모습은 더할 나위 없이 사랑스러웠기 때문이다.
그가 붉은 벽돌을 쌓아 만든 오래된 기차역에 발을 내딛자마자 비가 내리기 시작한 것은 그저 불운의 전조에 불과했다. 마차를 잡아도 저택의 숲 안 쪽까지 가는 이가 없었으며, 에이든이 물기로 번들거리는 정장과 진흙이 잔뜩 엉겨붙은 구두를 신고 한 시간 정도를 걸어 저택에 도착했을 땐, 녹이 슨 청동 조각이 입을 벌리고 있는 거대한 대문 앞에 주차된 낯선 캐딜락 한 대를 발견할 수 있었다. -사실 그는 이때에 드디어 낡아빠진 저택이 팔리는 줄 알고 조금 기뻐했다.- 뒤늦게 사정을 알기로는 마침 그곳엔 같은 날, 조금 더 이른 시각에 도착한 그의 형제가 있었다는 것. 반가운 형제와의 몇 년만의 재회를 끝내주게 망친 다음으로는 몇 시간이고 차가운 비를 맞은 탓에 정신없이 며칠을 꼬박 앓아누운 것. 그리고 이때부터 쭉 내리기 시작한 비가 여전히 그치지 않은 덕분에 강물이 불어나 꼼짝없이 저택에 머물게 된 지 나흘 정도 됐을 때, 그는 누구든 붙잡고 원망이라도 하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가장 불편한 것은 이 예상치 못한 '손님'에 있었다. 메릴슨에게 듣기로 아버지인 토마스는 몇 년 전부터 하루의 대부분을 서재에서 보내며, 식사 또한 그곳에서 해결하고 있었는데, -어쩌면 동시에 방문한 두 아들의 꼴이 보기가 싫어 밖으로 나오지 않는 걸지도 모르지만.- 덕분에 끼니때가 되면 매번 리암과 단 둘이서만 얼굴을 마주해야 했던 것이다. 두 형제 사이에선 ‘그 날’ 이후로 한마디 이상의 대화조차 오가지 않았지만, 에이든이 닷새 째가 되던 날 저녁 식사 도중 리암에게 나이프를 던진 이후로부터는 사용인들 마저 이 시간을 피했다.
여드레 째 되던 날, 사건은 이렇게 시작됐다. 식사 시간을 제외하면 마주치는 일이 도통 없던 형제가 늦은 오후 즈음에서야 응접실에서 맞닥뜨리고 만 것이다. 사용인들은 저마다 황급히 할 일을 찾아 정원이며, 별관으로 향했고 폭풍 전야와 같은 고요 속에서 리암이 한 마디를 꺼냈다. 결혼을 한다던데. 말이 끝나기 무섭게 소리가 날 정도로 찻잔을 내려놓은 것은 고의였다. 한쪽 눈썹을 치켜 뜬 에이든이 고개를 돌렸다. 무슨 말을 하고 싶냐는 듯한 얼굴이었으나, 리암은 그저 물끄러미 바라만 볼 뿐 더 이상 아무런 대화도 이어 나가지 않았다.
"해야 할 일이니까."
끝내 참다못한 에이든이 먼저 입을 열었다. 자신이 생각해도 꽤 웃기는 대답이었다. 마치 누군가에게 떠밀려 결혼이라도 하는 것처럼. 그가 바네사를 사랑하는 것은 한치의 흠 없는 진실이었는데도, 뱉어낸 말이 가시처럼 목에 걸린 듯했다. 색이 옅은 눈동자가 한 곳을 향한다.
"…그래."
"…너도 이제 슬슬 예술품 놀이는 집어치우고 제대로 된 일을 하는 게 좋을 테지."
방금까지 읽고 있던 부분을 찾아내려 손 끝으로 종이를 쓸어내리던 에이든이 한 마디를 더 얹었다 그래, 이를테면 교수 같은 거 말이야. 무심코 잘 어울릴 거라는 말을 덧붙이려다 말고 그는 그저 입술을 잘게 씹었다.
" 에이든."
"왜? 이런 구석 하나만큼은 변함이 없이 똑같군. 낡아빠진 것들이 뭐가 좋다고 그렇게 매달려서는..."
"……."
"결혼을 생각할 나이잖아."
피곤하다는 듯, 리암이 길게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 그럴 필요성을 못 느낄 뿐이야."
" 하, 그렇게 말할 줄 알았지."
더 이상은 들을 가치도 없다는 듯 읽던 책을 도로 덮고 일어나던 에이든이 돌연 쏘아붙이기 시작했다.
"너는 모든 일을 딱 그 정도로만 여기니까. 아버지도 너를 한심하게 생각할 거다. "
리암의 방식은 에이든에게 있어선 '용납할 수 없는 것들'에 해당됐다. 한껏 예민해진 기분은 공격적인 말이라도 뱉어내야 속이 풀릴 듯싶었다. 여전히 창밖엔 흐릿한 먹구름이 감돌고 벽을 가볍게 두들기는 빗소리가 신경에 거슬렸다. 창백한 전등 아래에 마주 서자 같은 자리를 맴도는 시간 속에 갇힌 것 같은 착각마저 들었다. 조금이나마 풀렸던 분위기가 또 언제 그랬냐는 듯 날이 바짝 서, 당장이라도 베일 것만 같았다.
"…언제 당신은 자랑스럽다 하시던가?"
" 아, 그렇지. 아버지도 너랑 똑 닮은 모자란 인간이었다는 걸 깜빡 하고 있었군. 핏줄이라는 건 정말이지...”
숨을 고르는 찰나의 정적이 사이를 스치고 지나갔다.
“징그러울 정도야."
상대가 느리게 지팡이를 고쳐 잡는 동안 에이든은 자리를 피하기 보단 손등에 힘줄이 불거질 정도로 주먹을 꾹 쥔 채, 뻣뻣한 입꼬리를 당겨 웃는 쪽을 택했다. 마침내 낮은 음성이 귓가를 강타했다.
"그렇군. 아마 잘 찾아보면 당신에게도 나를 닮은 구석이 있겠지."
난 그게 좋아. 그것은 마치 도화선이었다. 정확히 그의 역린을 찌르는.
순식간에, 한 줄기의 이성이 그를 말릴 새도 없이 주먹이 나가고, 튕겨 나간 지팡이에 맞아 찻잔이 바닥을 뒹구는 소리가 그들 뿐인 응접실 안을 메웠다.
이윽고 에이든이 정신을 차렸을 때에는 손에 두꺼운 화병을 쥔 채로 그의 형제 위에 올라탄 채였다. 리암은 얼굴을 몇 대 얻어 맞은 듯 뺨 언저리가 붉었으나 평온하게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리암이 미미하게 웃으며 속삭였다. 그대로 내려쳐. 뿌리치기 어려운 달콤한 유혹이었다.
과하게 분비된 아드레날린의 영향으로 심장이 빠르게 뛰고, 머릿속에서 수많은 생각들이 엉겨 붙어 마구잡이로 눈앞에 드리웠다. 얼핏 창밖에 수많은 사람의 그림자가 비치는 듯했다. 사용인들 마저 자리를 피한 텅 빈 저택에서 열광하는 관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들은 하나 같이 입을 모아 말한다. 내려쳐! 순간 에이든은 걷잡을 수 없는 공포를 느꼈다. 검고 어두운 저택은 아주 오랜만에 돌아온 그리운 이를 놓치지 않으려는 것 같았다. 누군가 그의 머릿속을 파고들어 광증에 가까운 생각들을 풀어놓고 의식을 잔뜩 헤집어 놓았다.
그제서야 에이든은 깨달은 것이다. 벗어난 줄 알았으나 아무리 도망쳐도 보이지 않는 지붕의 밑이었고, 그의 몸 안에서 뜨겁게 돌고 있는 것은 바커스의 저주였다. 허리를 숙이자 상대의 얼굴 위로 쏟아지는 머리카락이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얼핏 리암의 눈동자에 비친 그의 모습은 끔찍할 정도로 제 형제와 닮아 있었다. 떨리는 손으로 내팽개치듯 화병을 내려놓자 밑에서 작은 칭찬이 들려왔다. 마치 방금 전의 속삭임은 꿈이었던 것처럼. 그러나 턱 끝까지 차오른 숨은 도저히 진정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차가운 물 속에 들어갔다 나온 사람 같이 온 몸이 떨리고 사고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누군가 어깨를 쥐고 다정한 목소리로 달래는 듯했지만 아득해진 정신으로는 어떠한 소리도 들을 수 없었다. 비틀거리며 일어나 벽에 기댄 채로 한참을 힘겹게 숨만 몰아쉬던 그가 쥐어짜듯 중얼거렸다.
"....이게... 바로 우리가 닮지 않았다는 증거야."
헐떡거림에 가까운 그것이 제대로 된 문장의 형태를 띄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단지 그게 에이든이 할 수 있는 최선이었기 때문에. 리암은 문득 벗어날 수 없는 것에서 달아나려 하는 그가 불쌍하다고 생각했다.
다음날 거짓말처럼 비가 그쳤다. 길게 자란 침엽수림이 우거진 숲속에서 희끄무레하게 밝아오는 먼동을 바라보며 에이든은 도망치듯 기숙학교로 떠나던 그때를 떠올렸다. 남은 가족들에게 전해질, 그가 집을 떠났다는 소식은 언제나처럼 가장 먼저 텅 빈 방의 흔적을 발견할 메릴슨일 것이다. 차가운 새벽 공기를 들이키자 조금은 머리가 맑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두 번 다시 이 저택에 돌아올 일은 없을 것이다. 이제 그에게 남은 여정이라고는 사랑하는 약혼녀에게 돌아가는 것 뿐이니. 얼마나 간단한 일인가.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면 저 멀리 아찔할 정도로 높게 치솟은 첨탑이 보였다. 그러나 막 떠오르는 태양의 정반대 편, 햇빛 한 줌 들지 않는 그늘 속에 가려진 음울한 형태의 저택은 지난 세월의 위용을 지킨 채로 굳건히 그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가슴 한 켠에서 속삭임 같은 불안이 올라왔다. 확신할 수 있었다. 이 오래되고 거대한 바커스 저택은 언제든 그가 돌아올 날을 기다리고 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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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쓰기엔 다소 넓어 보이는 주택 안은 사람이 지내온 흔적이 극히 적었다. 대부분의 가구들은 하얀 천으로 덮여 있었으나 그나마 사용감이 보이는 서재의 책상 위에는 채 정리해두지 못한 우편물이 무더기로 널려 있었다. 그중에 단 하나, 뜯어본 흔적이 남은 짧은 편지를 든 채로 고민하던 남자는 이내 그것을 휴지통에 던져 넣더니 가벼운 가죽 가방 하나만을 들고 집을 나섰다. 그가 사라진 공간에는 두 사람이 찍은 커다란 결혼사진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사랑하는 아들들아, 계단 아래 너희를 위한 유산을 남겨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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