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의 연인에게

2022 신한 로그


안녕하세요, T. 

그간 격조했습니다. 잘 지냈나요? 부디 잘 지냈길 바랍니다. 드릴 말씀이 있어 부득이하게 펜을 들게 되었습니다. 모쪼록 끝까지 읽어주었으면 합니다. 

간밤에 뺨을 스치는 바람이 서늘했습니다. 별끝으로 밀려올라가는 바람에 이끌려 나도 모르게 밤하늘을 올려다보게 되더군요. 검푸른 하늘은 말갛게 반짝이고 총총 박힌 빛무리가 아름답게 빛났습니다. 이상하게도 그날 밤, 별이 내 위로 떨어져 내리는 꿈을 꾸었습니다. 꿈에서 깨어나니 가슴이 먹먹하고 눈물이 울컥, 북받치는 것이 잠에 들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당신 생각이 났나봅니다. 당신과 헤어지기 며칠 전에 몸이 안좋다 했는데 지금은 건강한지요. 아프다 했을 때 영 마음이 좋지 못했습니다. 늘 건강하길 바라니까요. 그 와중에 당신과 맞추었던 굿나잇키스만큼은 선연히 기억납니다. 제 뺨을 훑던 더운 온기도요. 덕분에 그 온기를 난로삼아 외로운 한풍을 며칠 견뎌낼 수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생각해보면 당신의 더운 온기는 피부에만 있지 않았습니다. 한없이 차가웠던 철창 사이로 가닿았던 말 한마디가 그랬습니다. T, 당신과의 대화는 느닷없었습니다. 적어도 내겐 그랬습니다. 세상에, 사람보고 태양이라니요. 무수히 쏟아지는 압정 속 작은 쇳조각 하나가 약간의 온기를 가졌다고, 저 뜨겁게 타오르는 항성과 같다니 아니 될 말이었습니다. 분명 헛웃음에 지나지 않았을 텐데 마법에 홀려있었던 걸까요? 나는 당신의 말에 쉽게 취했습니다. 아, 취했다기보다... 당신이 나를 그리 명명했기에 나는 태양이 되었습니다. 세상의 방문자가 들꽃과 너른 바람과 향기로운 흙내음의 이름들을 하나하나 아로새기듯, 당신이 내게 새긴 이름이 태양이었던 겁니다. 

사실 나는 제법 웃기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는 들풀이 바람에 휩쓸리는 것과 다르지 않기에. 유약한 풀이 무엇에 저항할 수 있겠습니까? 나는 다만 몸을 잠시 뉘어도 좋겠다고 여겼을 뿐입니다. 그런데 자꾸 당신은 나에게 이름을 새겼습니다. 햇살, 사랑, 동전... 나는 울고 싶었습니다. 당신이 주는 이름들이 뜨거워서요. 그 뜨거운 이름들이 내 뿌리를 들추는 것 같아 부끄러웠습니다. 들풀치고는 과분한 관심을 받아 발끝까지 타들어 갈 것 같습니다. 지나갈 바람이 아니었나요? 왜 나에게 이름을 주었는지 이 자리를 빌려 묻고 싶습니다. 덕분에 나는 필요하다면 나를 태울 만큼 하늘을 동경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가장 서러웠던 것을 잊지 않고자 합니다. 그것은 당신이 나에게 데일 것만 같은 이름을 새겨놓고 그 이름이 심장을 지지는 것은 모른 척 했다는 사실입니다. 가슴을 삼킨 그리움을 남겨놓고 떠난 당신과 뿌리까지 들춰내며 쫓아갈 용기가 없었던 내가 원망스럽습니다. 그래도 괜찮았습니다. 원래 첫 번째는 누구나 서투른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 정도면 잘한 거라 넘길 수 있었습니다. 다만 그다음의 아픔이 못견디게 사무칠 뿐입니다. 

T, 동경이 터져나와 흘려보낸 손짓에 당신은 다시 왔습니다. 우리는 서로의 기다림을 확인했고, 이름을 불렀으며, 손을 맞잡았습니다. 평생을 함께하자 약조 비슷한 것도 맺었지요. 고백하자면 나는 진실한 마음으로 그것들을 믿었습니다. 한 치의 의심 하나 없었습니다. 나는 늘 마음을 다하여 당신을 불렀습니다. 당신과 숨을 나누었습니다. 당신과 맞닿은 온기는 다시 피워올린 희망으로 미래를 빚도록, 기어코 삶을 다시 움켜쥐도록 했습니다. 상상했었습니다. 따스한 햇살 아래 부드러운 잔디를 밟고, 낮은 언덕에 작은 집을 짓는. 노을을 사이에 두고 당신 옆에 앉아있는 미래...

그러니 사랑은 어떤 식으로든 끝이 나며 파도처럼 변한다는 걸 간과한 것은 제 실책입니다. 다만 그때도 지금도, 당신과 나의 마음이 가벼웠던 건 아닐 겁니다. 

그저 같은 숨을 쉴 수 없었던 겁니다. 

T, 당신도 아시다시피 누구의 잘못이 아닙니다. (굳이 잘잘못을 따지자면 일찍이 단념하지 못한 내게 있겠습니다) 어쩌다 착각했을 따름이지요. 몇 번 실이 교차했다고 그만 단단히 엮인 매듭으로 착각해버리고 만 겁니다. 혹은 생각보다 외로워했는지도 모르고요. 그러니 실이 풀리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내가 받아들이는 것이 어려웠을 뿐이에요. 다만 멋도 모른 채 당신께 ...을 청한 점에 대해서는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불현듯 찾아온 그리움에 나와 당신 둘 다 말려든 꼴이 된 게 아닙니까. 삭힐 걸 그랬습니다.

 그때로부터 시간이 제법 흘렀습니다. T, 나는 검은 고양이와 살가운 강아지와 살고 있습니다. 그곳에서 나와 책을 편집하며 지내고 있어요. 당신도 더이상 과거와 같지 않겠지요. (어색한 어투로 찾아뵌 것 또한 이 까닭입니다) 나와 당신이 무엇이라 이름 붙이기 민망한 것을 함께 꿈꾸었다는 사실만이 진실로 남았습니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난 오늘까지고 녹슨 그리움이 숨을 짓누르는 것을 감추기는 어렵군요. 사실, 가끔 당신은 다정한 목소리로 나를 부르곤 합니다. 산화된 옛 대화들이 따갑게 심장을 스치더군요. 몇 번이고 상처를 기워도 겉가죽은 말랑하네요. 익숙해지지 않나 봅니다. 그래서 펜을 들었습니다. 녹을 걷어내기 위해. 열렬했던 그리움을 끝맺기 위해. 나는 당신이 머물렀던 자리에 깎아낸 이름들을 내려놓으려 합니다. 


이별은 죽음이 아닐 겁니다. 우리는 운명이 아니었으니까요. 나와 당신은 무덤까지 함께할 일도, 지옥에 떨어질 일도, 입을 맞출, ...나와 당신은 더이상 아무것도 아닐 겁니다. (이미 아니기도 합니다) 이 사실을 좀 더 일찍 깨달았다면 편했을 텐데 아쉬울 따름입니다. 

어쩌면 당신도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종종 합니다. 한 때는 듣고 싶었지요. 그러나 분명 누군가는 페인트를 덧칠했을 겁니다. 너무 오래되지 않았습니까. 마지막 대화 이후로는 저도 지쳐 돌아볼 여유가 없습니다. 당신이 연락을 했었을까요?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제 행동이 당신의 마음을 굳히는 데에 기여했다면 기쁠 것 같습니다. 


마른 가지가 나부낍니다. 창문을 열어놓으면 앙상한 나뭇잎이 겨울냄새를 한두 장 몰고 들어오곤 해요. 가을에 헤어졌던 것 같은데, 언제 이렇게 시간이 흘렀는지 무서울 따름입니다. 문득 궁금해지는군요. 당신은 꽝꽝 얼어붙은 바다에 홀로 떠다닌 적이 있었을까요? 온전히 나와의 관계에서 말입니다. 

지금 돌이켜보니 떨어진 별이 내 마지막 정인듯 합니다. 깨어났을 때 울컥했던 걸로 미루어보아 꽤 넓은 바다를 떠돌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충분히 연모했으니 이제 놓아줘야 한다는 무의식의 청일지도 모르겠군요. 별이 무엇이든, 이젠 정말로 그리움이 다했다는 뜻으로 읽어도 되겠습니다. 


펜을 처음 들 때에는 할 말을 다 적을 수 있을까 싶었는데 다행히 그런대로 잘 한 것 같군요. 앞서 말했듯 오늘 펜을 든 이유는 당신에게 이별을 고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나 자신에게 작별하고자 함입니다. 나는 누군가의 마음이 더 무거운 만큼 그만큼의 피를 더 가지고 산다는 것을 압니다. 더 많은 피는 몸을 더 빨리 데우겠지만 한 번 난 상처에서는 그만큼의 피가 더 유실되겠지요. 당신과 함께했던 시간은 아름다웠지만 가슴을 파고드는 창과 같았습니다. 이제는 흉에서 흐른 피가 차올라 심장을 적시기 전에 창을 뽑으려 합니다. 다만 당신께 마지막 인사를 올리고 싶어 편지지를 끌어오게 되었습니다. 당신이 새긴 것들을 깎아내기 위해서. 과거의 당신과 나에게 작별하는 것 정도는 나도, 당신도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넘길 수 있지 않겠습니까. 


T, 나는 이제 당신의 이름을 잊으려 합니다. 당신이 나에게 새긴 이름들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간직하기엔 버겁습니다. 비워내는 게 마땅하겠지요. 이제 나의 심장은 다른 이들과 같은 무게를 지닐 것입니다. 죽은 핏덩이들을 뱉어낼 것이며, 혈관은 비워지고, 가슴팍에는 옹송그러든 흉이 남을 겁니다. 그러면, 그렇게 한다면. 나는 온전히 잊을 수 있을 겁니다. 그때가 되면 아무렇지 않게 당신과 웃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두렵진 않아요. 


당신이 행복했으면 합니다. 부디 편안한 안식처를 찾길, 그 어떤 역경이 닥쳐도 굳세기를. 끝끝내 다시 일어나,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하기를. 그리하여 모두가 아름다운 한 편의 이야기로 남길 바랍니다. 트란테, 날씨가 찹니다. 겨울바람이 다정한 당신에게 유독 모질지 않기를 바라요. 

모쪼록 이 편지가 당신께 닿지 않길 바랍니다. 



From. S

(@Hj_heasung님 커미션)

카테고리
#기타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