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M's] 해군해적AU

2021 엠엔엠즈 해군해적AU

 폭풍우가 몰아쳤다.

잿빛 바람이 나부끼며 거센 빗줄기가 주룩주룩 쏟아지는 날이었다. 관저는 습기로 가득해 눅눅했고, 찰방찰방 빗줄기는 아스팔트 위를 강처럼 휩쓸었다. 올해도 폭풍은 마지막 날까지 그냥 지나가는 법이 없었다. 

그러나 이 폭풍도 내일이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파아란 하늘과 선선한 바람을 틔워낼 것이었다. 해가 지면 달이 뜨듯 당연했다. 변덕스러운 날씨에 이골이 난 뱃사람들도 연례행사처럼 폭풍을 견디며 종전기념제를 준비했다. 

폭풍이 끝나갈수록 기념제를 기다리는 활기가 도시에 은근히 맴돌았다. 이 도시의 가장 큰 축제를 기다리는 활기는 해군 총관저도 다르지 않아서, 비공식적으로 폭풍의 마지막 날은 오후근무가 없었다. 

그리고 메이지는 항상 오늘 코트를 챙겼다. 부관이 넌지시 물었다. 외출하십니까? 그래. 이노센트는 항상 종이에 싼 흰 백합 한 송이를 챙겼고, 차 키를 챙겨 들었다.  



"오늘은 유독 심한 것 같습니다."

이노센트가 앞으로 고개를 내밀며 핸들을 좌측으로 돌렸다. 끼익, 물웅덩이를 헤치며 튀어 오른 물보라가 아스팔트를 휩쓸었다. 

"태풍은 이미 지나갔는데 말이야."

"바닷가 날씨가 오락가락하는 게 하루 이틀입니까." 

 그래도 이왕이면 얌전한 게 좋지. 메이지는 몸에 힘을 빼며 눈을 감았다. 톡, 톡, 톡, 톡, 빗소리가 차창에 우수수 쏟아졌다. 그러나 그 울림에는 규칙이 있었다. 마구잡이로 뒤엉켜 내리는 것이 뭐가 균일하냐고 묻는다면 할 말은 없겠지만, 메이지에게는 정말 그렇게 들렸다. 불청객이 어지른 물품들을 정리하는 습관이 든 이후로부터는 이따금 빗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렸다. 언제부터였지? 메이지는 비스듬히 눈뜨며 시점을 가늠했다. 검지가 톡, 톡, 빗소리에 맞추어 팔걸이를 두드렸다. 여전히 빗소리는 균일했다.

"오셨어요?"

"네,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덕분에요. 우산은요?" 

"챙겼습니다." 

"올라가보세요, 깔끔하게 정리 해놨어요."


너는 자리를 잡아도 하필 이딴 곳에 눕냐. 메이지는 후들거리는 무릎을 부여잡으며 마지막 턱을 디뎠다. 이노센트는 저 아래서 관리인을 배웅하고 올라올 터였다. 아, 자리 잡은 거 나였지, 미친. 메이지는 앓는 소리를 내며 이제 막 행군이 끝난 군인마냥 벌러덩 누웠다. 비에 젖은 풀잎이 코트에 달라붙고, 구두 뒤꿈치에 진흙이 엉겨도 상관없었다. 다만 얼굴을 때리는 빗방울이 아까보다 시원하고 덜 따가워 좋았다. 

"누가 보면 오해하십니다." 

올라온 이노센트가 메이지의 얼굴 위로 우산을 기울였다. 

"오해는 무슨. 감히 나한테 그러겠어?"

"대신 보고 비웃을 분은 있지요."

"비웃든 말든."

"하긴, 이제 와서 새로울 건 없겠네요."

피식 웃은 메이지는 내민 손을 잡고 일어섰다. 허리를 핀 그는 잠시 한 바퀴 주변을 둘러봤다. 무엇 하나 변하지 않은 곳이었다. 문득 그의 시선에 먼 수평선이 걸렸다. 빼곡하게 들어선 도시 너머, 아득하도록 짙푸른 바다 한 편에 먹구름을 뚫은 햇빛이 폭풍우를 걷어내듯 내리쬐었다. 

메이지는 숨을 들이켰다. 올라오자마자 축축한 물냄새와 풀냄새부터 맡긴 했어도, 이 곳의 경치는 후회할 여유조차 주지 않는다. 햇빛 너머의 하늘은 유난히 파랬다. 올해의 폭풍이 끝나고 있다는 표시였다. 그는 이곳이 일 년 중에서도 오늘, 폭풍의 끝자락에서 봤을 때 가장 아름답다고 여겼다. 

메이지는 단정하게 정리된 길을 걸었다. 길이라고 하기엔 두 명이 같이 걸을 수 있는, 풀들을 깎아내어 만든 오솔길이었다. 이 길의 끝에 있고, 산의 가장 탁 트인 중턱 공터로 가면 그 곳에는 이름만 새긴 비(碑)가 하나 있었다. 공터라고 해봤자 가로세로 10m 남짓한 공간은 작고 초라했다. 

작고 초라한 공터 가운데에는 오석으로 세워진 비가 있었다. 비에는 이름이 음각되어 있었는데, 

유 진하

Michalea Delahaye Aroka

이 뿐이었다. 이름마저도 마지막 이름은 땅속에 묻혀 보이지 않을 이름이었다. 메이지는 비석 윗부분을 찬찬히 쓸었다. 털어낸 물기와 맞닿는 서늘한 감촉마저 과거의 기억과 같아 메이지는 눈을 감았다. 날개없이 추락하는 갈매기처럼 아찔했던 감각이 다시금 심장을 찔렀다. 

오늘은 쿠데타가 끝난 날, 개혁파가 승리하고 총관저를 차지한 날. 너의 기일이었다.


*

덜커덩, 촤악! 질퍽한 흙길위를 나아가는 차는 줄곧 흔들렸다. 아마 사용인들이 말끔하게 닦은 바퀴에는 낙엽과 진흙 등이 홈 사이로 엉겨 붙었을 것이다. 그리고 다시 바퀴가 움푹 파인 웅덩이를 밟고, 밀려난 파도는 진흙들을 녹여버리겠지. 메이지는 창밖으로 눈을 돌렸다. 쉼 없이 나부끼는 나무들이 밀봉된 숨을 참으며 액자처럼 걸려있었다. 참지 못한 숨도 총알도 들어오지 못하는 단단한 유리창, 그 안의 메이지는 오늘 같은 날이면 유리 너머의 것들을 한없이 응시하곤 했다. 주저 없이 밖으로 박차고 나가던 누군가를 덧그리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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