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죽어/소우신

[소우신] 네 홍차에 독을 탔어

포스타입 20220818 발행 / 냐죽님 생일축전

신은 문 너머에서 들리는 소리를 들었다. 주전자가 끓는 소리, 조르륵, 하고 물이 따라지는 소리, 휘파람 소리, 누군가의 발소리. 신은 조심스럽게 문 손잡이를 잡고 돌렸다. 잠기지 않은 문은 삐걱이는 소리 하나 없이 부드럽게 열렸다. 아래를 내려다보면, 익숙한 신발이 한 켤레 놓여있다. 히요리 군이구나, 짐작이 맞아서 다행이다, 생각하며 신은 그의 신발 옆에 제 것 역시 가지런히 놓아두었다.문을 잠그고 집 안으로 들어서니, 부엌에 히요리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식탁에는 이런저런 식기들을 잔뜩 올려둔 채였다. 눈이 마주치자, 히요리가 여느 때처럼 눈꼬리를 접으며 웃어왔다.

“아아, 신. 왔어?”

“으응… 히요리 군, 그건… 뭐야?”

“응? 아하하, 그렇구나. 신은 처음 보는구나아….”

 히요리는 그 후 잠시 입을 다물었다. 마치 신의 몸이 달을 때까지 기다리는 것만 같았다. 이럴 때면 신은 히요리가 자신에게 대답을 해주고 싶지 않은 것인지, 혹은 그저 대답을 고민하는 것인지- 그도 아니라면, 그냥 자신을 놀리고 싶은 것인지 알 수 없어 안절부절할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도 신은 그에게 다시 질문해야 할까, 한참이나 고민했다. 신이 겨우 마음을 정하고 입을 열려는 때에서야, 히요리가 신의 말을 끊듯이 답을 꺼냈다.

“홍차를 우리고 있었어. 부모님이… 응, 괜찮은 홍찻잎을 보내주셨거든.”

“히요리 군의, 부모님…이?”

“아하하, 재미있는 말을 하네, 신. 그럼 내 부모님이 아니면 누구겠어?”

“으응…”

 신은 그의 부모를 상상해보려 머리를 굴렸다. 히요리 군의 부모님이니 분명 멋지고 아름답겠지…. 그렇지만 어렴풋한 인상 외에는 무엇도 제대로 상상할 수 없었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면, ‘히요리’와 ‘부모’라는 단어를 제대로 연결짓는 것에서부터 이상한 위화감이 들었다. 그 역시 저와 같은 심장이 뛰고 호흡을 하는 인간임에도, 누군가의 뱃속에서 열 달간 품어졌다가 태어났다는 것이 전혀 상상이 가지 않았다.

“…ㄴ. ……신?”

“으, 으응?! ㅂ, 불렀어?”

 신은 코앞까지 다가와서 저를 빤히 바라보는 히요리를 뒤늦게 발견하고는 화들짝 놀랐다. 히요리는 예의 속내를 알기 어려운 눈으로 신을 빤히 주시하다가, 이내 평소와 같은 모습으로 싱긋 웃어보였다.

“안 되지, 신…. 대화하다가 갑자기 생각에 잠기고 말야. 상대방이 상처 입는다고?”

“…”

“그래서, 대답은?”

“으, 으응…”

“응, 좋네! 신은 착한 아이구나….”

 히요리는 반쯤 굽혔던 허리를 다시 폈다. 신에게 맞추어져 있던 눈높이가 어느새 한 뼘쯤 위로 올라갔다. 히요리는 원하는 대답을 들어서 미련이 없다는 듯이, 그에게서 금세 관심을 돌렸다. 신은 그런 히요리를 붙잡지도 못하고 가만히 바라보았다. 입 바깥으로 꺼내지 못한 말만이 목구멍 아래에 진득하게 고였다.

“자, 신. 나갔다 왔으니까 씻어야겠지. 정리하고, 돌아와. 처음으로 우린 홍차를 신한테 대접하고 싶거든.”

 신은 고개를 위아래로 주억거렸다. 급히 짐을 내려놓으려 발걸음을 옮기는 그의 뒤로 ‘서둘러줘, 홍차는 식으면 맛이 없거든,’ 말하는 히요리의 목소리가 들렸다.


 신은 평소보다 몇 분이나 일찍 정리를 마쳤다. 시계를 보니, 어림잡아도 십 분이 채 걸리지 않은 듯해 보였다. 서두른 보람이 있는 것 같네…. 속으로 중얼거리며 문을 열고 나서니, 차의 향기가 가득 풍겨왔다. 식탁에는 히요리가 먼저 앉아 있었다. 그의 앞과 그 맞은편에 김이 피어오르는 찻잔이 각각 하나씩 놓여있었고, 그 사이에는 뚜껑이 닫힌 용기가 하나 놓여있었다. 신은 찻잔이 놓인 빈 자리의 의자를 빼어 앉았다. 고개를 드니 히요리의 얼굴이 보였다. 컴퓨터로 시야가 가려지지 않은 상태에서 히요리와 마주 보는 것은 색다른 느낌이었다. 무언가 간질간질한 기분이 들어 그의 얼굴을 제대로 쳐다볼 수 없었다. 신은 고개를 내려 홍차를 바라보았다. 홍차에 대한 전문지식은 없지만, 맑은 색을 내고 있는 홍차의 색이나 향기에서 무언가 고급진 느낌이 나는 것도 같았다.

“신은 홍차는 즐기는 편?”

“…아, 아니… 사실, 이렇게 직접 우린 건 마셔본 적… 없어. 고작해야 티백으로 된 것 정도, 일까….”

“흐응, 그렇구나…. 신의 처음을 내가 장식할 수 있다니 기쁘네!”

“으응…”

‘역시 그런 뉘앙스로 말하는 건, 자제해 줬으면 하는데… 괜히 기분이 이상해지는 것 같고….’

 히요리의 말을 두어 번 더 곱씹으니 괜히 귀 끝이 달아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이러면 곤란한데…. 얼른 생각을 바꾸려, 홍차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한 손으로는 컵의 손잡이를 잡고, 반대쪽 손으로는 가볍게 컵의 표면을 쥐었다. 손을 타고 전해져오는 온기가 몸을 덥혔다. 히요리의 말이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있지, 신?”

“…응?”

“네 홍차에 독을 탔어.”

 신의 손이 움찔, 떨렸다. 컵 받침과 컵이 부딪치며 듣기 싫은 소음을 만들어냈다. 컵을 들고 있었다면 분명히 떨어뜨려서, 산산조각이 났을 테다. 아, 분명 히요리도 그 사실을 알고 있을 터였다. 그러니 지금, 얘기한 것일 테지. 그런 식으로 빠져나가는 것은 용납하지 않아- 라는 것처럼.

 애써 표정을 갈무리했다. 등 뒤에 붙어오던 손가락질을 모르는 척할 때처럼, 들려오는 뒷담화를 듣지 못한 척할 때처럼 웃어보이려고, 입꼬리를 당기고 눈꼬리를 내려 무해한 표정을 만들어보였다. 다만 히요리의 표정을 볼 엄두는 조금도 나지 않아서, 살짝 들린 시선은 어중간하게 상대의 어깨즈음에서 맴돌았다.

“자, 장난이 지나쳐, 히요리 군… 히요리 군이 모처럼 타 준 홍차, 못 마시게 될 뻔했잖아….”

“…장난이라고 생각해?”

 손바닥 안쪽이 땀으로 축축하게 물드는 것이 느껴졌다. 컵을 잡고 있다가는 손을 형편없이 떨고 있는 것이 전부 보일 것만 같아서, 손을 책상 밑으로 내렸다. 손가락 하나하나가 돌이라도 된 것처럼 펴지지도 접히지도 않아 애매하게 손잡이를 쥐고 있던 모양이다. 목도리로 덮인 목 뒤로, 소름 끼치도록 천천히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누군가가-가령, 그의 앞에 앉아있는 그의 친구가-손가락으로 목덜미를 훑어내리는 것 같이 온몸의 신경이 곤두섰다. 몇 시간 같은 몇 초가 지나고, 히요리가 다시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직접 마셔보면 되겠네, 그렇지?”

“…”

“물론 나는 거짓말 같은 건 하지 않았지만 말이야. 아하하…”

 신이 나를 얼마나 믿고 있는지 궁금한걸. 믿는다, 라니. 무엇을 해야 믿을 수 있는 거야? 네가 독을 타지 않을 거라고 믿고 마셔야 해? 아니면 독을 탔다는 네 말을 믿고 이 차를 버려야 하는 걸까? 

 뿌연 적색의 물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일렁이는 수면 위에 제 얼굴이 아른거렸다.

“뭐해, 신. 어서 마셔.”

심장박동이 빨라진다. 호흡이 가빠지고, 눈꺼풀이 멋대로 열렸다 닫힌다. 상대의 움직임에 맞추어 약간씩 흔들리는 목도리 끝이 보였다가, 사라진다. 다시 나타난다. 귀에서는 웅웅, 하고 소리가 울린다. 수백 명의 사람이 귀에 대고 속삭이는 것만 같다. 누군가가 의자를 붙들고 흔든다. 불규칙한 진동에 빈 속이 울렁인다. 위산이 역류한다. 다른 것에 중화되지 않은 날것의 산이 식도를 태운다. 욕지기가 불쑥 머리를 치켜든다. 목이 메여온다. 손이 책상 위를 더듬는다. 홍차가 가득 담긴 컵의 손잡이를 움켜쥔다. 흰 책상 위로 붉은 액체가 점점이 흔적을 남긴다. 히요리가 침묵으로 속삭인다. 마셔. 입술에 차갑게 식은 컵의 표면이 닿는다. 고개를 뒤로 기울인다. 온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액체가 혀를 적신다. 목을 타고 액체가 흐를 때에는, 모든 것이 괜찮아졌다. 타버릴 듯 고통을 호소하던 목도, 터질 것처럼 요동치던 심장도. 신은 입을 열었다.

 역시 장난이었던 거지?

 목소리는 나오지 않는다. 대신 새어나오는 것은 말이라고는 할 수 없는, 새된 숨소리뿐이다. 목 뒤에 고여있는 것을 뱉어내면, 선홍색의 피가 턱 밑으로 후두둑 떨어져내린다. 고통은 그 이후에야 고개를 들었다. 차를 머금었던 입 안의 살점이 떨어져 나갈 것만 같았고, 쇠비린내가 혀 끝을 맴돌았다. 목덜미가 부풀어올라 저도 모르게 목을 부여잡았다. 흐려지는 시선 너머로 그가 보인다. 볼에 붉게 홍조를 띄운 채, 환히 웃는 그의 미소가 신이 마지막으로 볼 수 있었던 것이었다. 눈 앞이 검게 암전되어, 무엇도 볼 수 없었다. 절대적인 암흑 속에서, 신은 아기새처럼 제가 마지막으로 본 것을 끊임없이 되뇌었다. 히요리 군, 히요리 군…


 히요리는 신을 내려다보았다. 책상을 짚은, 덜덜 떨리는 손은 신의 몸을 지탱하기에 너무도 연약해 보였다. 내디딘 발이 삐끗해 신의 몸이 바닥을 굴렀다. 하으, 하며 샌 비명의 위를 피가 뒤덮는다. 꺽꺽이는 소리 사이로, 몇십 번이고 들어왔던 단어가 들려왔다.

“아… ㅎ, 이, 요이, 흐… 허윽,”

 히요리는 몸을 움직여 바닥에 엎어진 신의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빛을 잃은 눈동자는 초점을 잡지 못하고 그의 주변만을 시야에 담았다. 

“ㅅ, 살, 려… ㅈ, …나, 는… ……ㅈ, ㅔ, 발…”

아아, 가여운 신! 너를 죽이려 했던 상대에게 목숨을 구걸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니, 얼마나 비참할까! 구역질이 나겠지, 진흙탕에서 구른 것처럼 끔찍한 기분이겠지… 그렇지?

“좋아, 신. 살려줄게.”

 그러니 부디 다시 눈을 떴을 때는, 네가 가진 최고의 증오심을 담아서 나를 바라봐 주길 바라…. 눈을 깜박일 때마다, 숨을 들이쉬고 내쉴 때마다 그 행동 하나하나를 이을 수 있게 해준 게 누군지, 그 모든 것을 빼앗았던 것이 누구였는지 똑똑히 기억해 주었으면 해. 그렇게, 너는 내가 있기 때문에 살아가는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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