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 나쁜 첫사랑
질 나쁜 첫사랑
시원한 책 표지 위에 벌겋게 달아오른 볼을 꾹 눌러 엎드린다. 야, 김여주 자? 여주 건드리지 마. 오늘 스파게티 나오니까 종 울리자마자 튀어 알겠지! 내버려 둬 얘 오늘 상태 안 좋아. 김여주는 원래 상태 안 좋았어. 김도영 진짜 죽고 싶나 저게...
한국초 1학년 5반 반장 김여주와 1학년 6반 반장 정재현이 이 인연의 시작이었다. 반장 엄마들끼리의 소모임을 시작으로 매주 까투리에서 모임을 갖는 엄마들.
엄마들 옆으로 마카로니 손가락에 끼워 꼭꼭 씹어 먹는 초딩들. 애초 나와 녀석이 친하기보다 엄마들끼리 더 친했다는 말이 더 올바르다. 나는 그런 정재현과 누가 마카로니 입에 더 많이 넣나 내기를 했었고 정재현은 빈번히 나에게 패했다.
초등학교 고학년, 정신 차리고 보니 여자 화장실에서는 꼭 한 번씩 정재현 이야기를 들었고... 한국여자중학교로 진학하게 되어서도 수만중 얼짱 정재현 소식에 귀에 피딱지가 앉았었더랬지. 실눈을 뜨고 옆자리 정재현 뒤통수를 흘겨봤다.
태생이 자연 갈색 머리. 초, 중, 고 재학 내내 대기업 기획사 명함을 쓸어 담았으면서 어느 회사 들어갈 거냐는 질문에는 늘 '나 외교관 될 건데?' 하곤 보조개가 포옥하고 파이게 웃는 정재현. 늘 수학 1등 하면서 이과 안 간다는 정재현. 정재현. 정재현. 정재현! 재수 없어...!
외교관 될 거면 왜 그렇게 잘 생겼는데? 왜 내 고백 안 받아주는데? 가수 할 것도 아니면서... 정재현에게 대차게 차이고 난 이후로는 이렇게 쉬는 시간마다 책상에 엎드려 눈을 감았다. 뭐? 상태 안 좋아? 빡친 마음에 깊은 한숨을 작게 내쉬었다. 지 때문에 안 좋은 줄은 알고 있나 보네.
야... 김여주 언제까지 잘 건데
너 영어 숙제 했어? 작문한 거 봐줄게 일어나 봐 봐. 어? 이거 수행 높잖아
조심스럽게 톡톡 치는 정재현 손가락에 또 어쩔 수 없이 귀찮은 척 일어났다. 어차피 수행 높아도 중간 기말 말아먹어서 의미 없어... 그런 게 어딨어 다 하면서 느는 거지. 이번 기말 잘하면 되는 거 아냐. 너 내가 이렇게 나약하게 키웠어?
좋다 정재현 잔소리. 그냥 친구라도 하는 게 맞나. 알고 지낸 지 벌써 9년째. 여중으로 간 후 남녀공학 학교에서 다시 만나게 된 정재현.
같은 반이 되어 다시 친해진지 얼마 되지 않은 상태에서 김여주의 고백공격은 녀석에게 영향도 주지 않은 듯 하다. 하긴, 저 얼굴에 초, 중, 고 내내 남녀공학이었으니 얼마나 많은 고백을 받아봤겠어.
꽁알 꽁알 be 동사가 어쩌구, 부사가 어쩌구, 새벽 내내 열심히 번역기 돌려서 만든 영작문을 살펴보는 녀석 얼굴을 아무말 없이 바라봤다.
내년에도, 내 후년에도 같은반 안되면... 성인 되고선 아예 볼일도 없겠지? 다 차인 마당에... 녀석 잘생긴 눈썹을 한번 보다가, 빨간색 볼펜으로 수정해주는 곱쌍한 손가락을 다시 쳐다봤다.
얘도 참 고생인거네. 고백도 찼는데 옆자리가 어쩔 수 없이 나라서. 반장이라 또 반 분위기도 챙겨야해서. 이것저것 다 고려해봐도 정재현은 내가 못 넘을 산인데 자꾸 곁에 있으니까 욕심이 났다. 이렇게 너무 자상해서, 정재현의 잔소리가 너무 따듯해서. 사실 억지로 여지를 가진 건 나였다. 정재현은 모두에게 다정했는데.
김여주 너 대학 갈거지? 엉... 가야지 세상에 대학이 이렇게 많은데 나 하나 받아줄 곳은 있을거야... 그래도 갈 거면 나랑 같이 한국대 가자. 미쳤냐? 나 죽었다 다시 태어나도 거기 못가. 왜 나랑 같이 대학 다니자. 나 재수학원 너가 끊어줄거야? 재수학원... 많이 비싼가? 재수없어, 님은 그런거 모르시겠죠. 엉 우리 모두 재수없어~ 그래서 여기서 조동사가...
좋다. 모든 게, 그냥 지나갈 지라도 일생에 찰나일지라도. 동영상으로 남겨 두고 싶을 만큼 정재현의 목소리가 듣기 좋았다. 가끔 저렇게 실없는 소리를 하니까 너가 고백을 받는거야. 대학까지 뭐하러 같이 가게. 그럴거면 고백은 왜 안받아줘. 참나. 재수없어. 재수없어 정재현.
!@#$!@#% 김여주...
갑자기 공간이 흐릿해지면서 까맣게 울렁 울렁. 왜 갑자기 환청이 들리지? 울렁 울렁. 정재현의 목소리도 더 이상 들리지 않는다.
김여주..
김여주..!!!
김여주...!!!!
모양, 진짜... 너 어제 일찍 안자고 뭐했엉 딱말해~ 진짜 으이구 일어나 이 사람아 돈 벌러 가야지이잉!
간드러지는 탁트인 목소리. 아우 대가리야... 찡하게 머리가 울렸다. 일어나자마자 보인 김정우 얼굴에 그제야 꿈인 걸 깨달았다. 통근버스 안. 조금씩 하차하는 사람들을 보며 입가에 침을 슬쩍 닦았다.
아 드렁 진짜! 시끄러... 조용히해. 아주 오랜만에 정재현 꿈을 꿨다. 아주, 오랜만에. 하여간 김여주~ 오늘도 여주사원이 여주사원 하셨어용. 옆에서 조잘거리는 김정우 입을 침 닦던 손으로 다시 막았다. 으ㅡ우웅응ㅍ!!! 진짜 더러워 하! 조용히 해 칵시 다른 사람들 주목 받게 하지마.
아침부터 기력도 좋게 동기 김정우와 아밀라아제 이야기를 하면서 출근 카드를 찍었다. 하여튼 너 오늘 s(서영호 팀장님을 뜻하는 은어)랑 외근이라며요 오오-. 뭐가 오오- 진짜 생각하고는 우우-. 하, 진짜 들어보셔용? 리슨? 오늘 너 외근 할때 s가 엉따 틀어주잖아? 그거 찐사랑. 야 너는 택시 탈때 엉따 틀어지면 프로포즈로 받을거야?
그게 뽀인트가 아니라 그럼 s가 너 회식때 나 포함 관악구 사는 사람만 3명 있는데 너만 집앞까지 데려다준게 사랑이 아니면 몬데 어? 그게 우정이야? 그게 매너야? 제발 정우야, 너 하트시그널 작작봐. s 얼굴을 봐 그 얼굴에 여친 없으면 이상해. 관상을 봐라. 김정우 망붕을 누가 견딜까...
대기업 이직 벌써 여섯달째, 끝없는 레벨업 끝에 복에 겨운 이직을 하게 되었으나 미선렌즈 제대로 장착한 동기녀석에게 붙잡혀 오늘도 씨알대기 없는 말로 아침을 시작한다.
오늘은 첫 외근하는 날이라 긴장이 배로 되어 벌써 배가 싸하게 아픈 것 같기도 하고... 머리가 울렁이는 것 같기도 하고... 지-잉- 때마침 알림이 뜬다.
김여주 님! 혹시 배가 아프지 않으신가요?
그날 예정일이 하루 남았어요!
옳거니, 역시나 호르몬에 지배되어 아픈거로구나. 탕비실에 비상약이 있었던 것 같은데... 이상하게도 이번에는 타이레놀 2개쯤은 먹어야 나을 것 같은 통증이라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곧장 자리가 아닌 탕비실로 향했다. 대한민국 직장인이란... 그런것이지.
여주씨 좋은...? 어디 아파요?
앗, 팀장님! 하하 안녕하세요, 그냥 머리가 좀 아파서요!
오늘 외근 괜찮겠어요? 공장 두군데는 돌아야할텐데... 괜찮으면 외근은 다음ㅇ..
아 끄떡 없습니다! 괜찮습니다! 하하.
정말로 괜찮다, 시작한다면 이보다 더한 고통이 계속 될텐데. 이까짓 통증으로 내 귀한 조퇴를 쓸 수는 없지. 그도 그럴 것이 이제 막 정직원이 된 조빱 중고 신입이다.
선반에서 약을 꺼내곤 삐질삐질 땀을 닦았다. 오늘 따라 왜 이러지? 정신차려 김여주 너가 초짜야? 정신차려 이 각박한 세상에서. 엇... 어라? 순식간에 시야가 까맣게 변하면서 몸이 기울었다.
여주씨..! 여주씨!!!
어라. 내가 정말 왜 이러지...?
흐아... 뜨거워. 더워. 어지럽다. 몸살인가? 온 몸이 불덩이가 된 것 처럼 공기의 찬 기운이 느껴진다.
나 실려왔나? 나 조퇴 쓴건가? 서영호 팀장님이 데려다 주셨나? 근데 왜 이렇게 허전한 느낌이야? 뭐지? 눈도 떠지지 않아 아파... 끙끙 거리며 혼잣말을 했다.
누구 없어요? 아파 죽을 것 같아요... 간호사님... 간호사님... 의사 선생님... 엄마...
정신들어 김여주? 오랜만이다. 나 기억하지.
나 지금 이거 세번째 말하는데
정신 좀 차려봐 어?
(내가 너 진짜 좋아했는데 이렇게 만나자마자...)
가까스로 눈을 뜨자마자 보이는 게... 반라의 정재현? 미쳤구나 내가. 제정신이 아니야. 와 근데 이번에는 진짜 같다. 오늘 아침에 꾼 꿈은 내 흑역사였는데 이건 좀 재밌네...
어쩐지 더 날렵해지고 선이 굵어진 얼굴. 정말로 녀석 같았다. 정재현은 한국대에 붙었다는 소식을 끝으로 졸업식에 얼굴도 비추지 않았다. 졸업을 하고 난 후에도 한국고에 전래동화처럼 그런 선배가 있었답니다. 하는 전설로 남겨졌더랬지.
여러번 페이스북 메세지를 보냈으나 동창 그 누구도 정재현의 소식을 아는 사람은 없는 걸 깨달은 후에는 나도 녀석을 점차 잊었는데... 오늘 무슨 날인가? 정재현 꿈을 계속 꾸네... 정재현의 갈라진 굴곡을 빤히 들여다봤다. 우와. 진짜 리얼하다.
근데 걔는 진짜 이렇게 클 것 같아. 몽롱하다. 어지럽고, 뜨거워. 방싯거리는 녀석 볼을 꾸욱 눌러... 눌러? 어? 뭐야 이거 왜 이리 리얼해? 뭐야? 느낌 왜 이래?
지금 그렇게 만지면 내가 좀 민망한데.
(좀 부족했나? 그럴리가 없는데 다들 좋아했는데)
엉?
김여주 말해봐.
(부족했나봐 하긴 발현되자마자 실려왔으니까)
부족했어?
(나야 땡큐지)
어엉??
눈을 감고 다가오는 반라의 정재현. 이건 정말 꿈일거야. 꿈일꺼야. 김여주 너가 정말 욕구 불만이구나. 그래 어디 한번 즐겨보자. 하고 끙끙 거리며 녀석의 목에 팔을 감았다.
끈적이는 몸, 콧가로 느껴지는 밭은 숨, 야릇하고 이상한 일렁임. 나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아 씨발. 이거 꿈 아니다.
이새끼 이거 진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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