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회랑

새해 봄과 함께_카이로스의 새해(2)

카이로스의 새해(1)

브금(한곡 반복 설정을 하시면 좋습니다)

밖을 보니 밤의 어둠 속에 하얀 눈이 여럿 떠다니고 있었다. 방 안은 따뜻한 색조의 조명이 실내를 비추며 안온함을 연출하고 있었다.

나비는 누구보다도 좋아하는 카이로스가 와서 매우 기쁜 것 같았다. 마치 신난 강아지처럼, 그의 발 밑에서 빙글빙글 돌고 있다.

카이로스는 허리를 굽혀 나비를 안아 올렸다. 편안한 자세를 찾은 듯, 나비가 그릉그릉 목울음 소리를 냈다.

마치 오랫동안 함께 지내고 있었던 듯한 자연스러운 광경. 그것을 보는 내 마음이 쉬폰 케이크의 크림처럼 부드럽게 녹아들었다.

카이로스: 서프라이즈는 별로 자신이 없지만…… 사실 이것도 ‘플랜 D’의 일환이었어.

그럼 카이로스는 처음부터 이곳으로 돌아올 생각이었던 걸까……?

소화가: 깜짝 놀랐어요. 그치만 이렇게 보니까 좋네요. 고마워요.

소화가: 그런데 가족분들은 괜찮았나요……?

카이로스: 그 부분은 걱정하지 않아도 돼. 오히려 가족들에게 네 곁에 있어주라는 부탁을 받았거든.

그렇게 말하며 카이로스는 가지고온 캐리어를 풀어냈다. 그 안에는 다양한 선물이 담겨 있었다.

카이로스: 전부 네게 주는 선물이야. 꼭 전해달라고 하던 걸.

귀여운 치마, 세련된 장식품, 음식에, 방한 용품, 거기에 재미있어 보이는 서적들과 보드게임까지…….

그런 것들이 가방 한가득 담겨있었다. 마치 따뜻한 작은 세상을 그대로 전달해준 것만 같았다.

소화가: 감사합니다…….

‘고맙다’는 말 외에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모르겠다. 너무 따뜻한 친절을 받으니, 되려 당혹스러움을 감출 수가 없었다.

카이로스: 미안해. 갑자기 이런 것들을 들이밀면 당황스러운 게 당연하지. 솔직히 말하자면, 네가 이런 반응일 것도 예상은 했어.

카이로스: 하지만…… 나는 마음을 전하는 것도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는 일부라고 생각하거든. 그래서 가지고 왔어.

카이로스는 거기까지 말하고는 입을 다물었다. 나는 숨을 살짝 들이마시고, 그를 향해 작게 미소 지었다.

소화가: 고마워요. 가족들에게도 전해주세요. 제가 선물을 받고 무척 기뻐했다고.

그제서야 카이로스도 웃음을 터뜨렸다.

카이로스: 물론이지. 그보다, 우선 저녁부터 먹자. 아직 먹지 않았지? 배고프진 않아?

그 말에 나는 곧바로 수긍했다.

카이로스의 요리 방식은 굉장히 정형된 편이었다.

우선 요리하고픈 레시피를 준비한다. 그리고 그 레시피를 바탕으로 정확히 요리를 재현한다. 마치 프로그래밍된 ai 로봇처럼. 결과물 역시 레시피의 이미지 사진과 거의 똑같았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예기치 못한 상황이 전혀 일어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부재료가 될 채소를 다듬고 고개를 들자, 소금을 든 채 멍하니 레시피를 바라보고 있는 카이로스가 눈에 들어왔다. 그의 시선이 향한 곳을 같이 들여다보면…… 그곳에는 ‘소금 약간’이라고 적혀 있었다.

소화가: …….

나는 카이로스의 손을 잡고 소금을 조금 떠서 수프에 집어넣었다. 그의 시스템에 오류가 발생하면 강제로 제거할 필요가 있었다.

카이로스: …….

카이로스는 미묘하게 납득할 수 없다는 얼굴로 나를 보았다. 그에게 있어서, 눈대중이라는 것은 고통스러울 수 밖에 없는 것이었다.

소화가: 이런 게 손맛이라는 거예요. 요리 중에는 어떤 요리가 완성될지 예측할 수 없는 경우도 있어요.

카이로스: …….

역시 납득할 수 없다는 얼굴이었지만, 그는 아무런 반박도 하지 않고 묵묵히 요리를 계속했다.

그렇게 우리의 요리가 완성되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요리들이 식탁 위를 가득 채우고, 부엌에는 맛있는 냄새가 가득했다.

카이로스가 숟가락을 들고, 아까 그를 고장나게 만들었던 수프를 먼저 맛 보았다.

소화가: 어때요? 눈대중으로도 맛있게 만들어졌죠?

카이로스: …그렇네.

그의 대답에 나도 맛을 보려 숟가락을 들었다. 그러자 카이로스가 그런 내 움직임을 제지했다.

카이로스: …너는 먹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

어? …설마 실패?!

반신반의하며 그래도 맛을 봐보려던 그 순간이었다.

온 집안의 형광등이 일제히 꺼져버렸다.

브금

카이로스: 소화가!

어둠 속에서 카이로스의 손이 내 손에 닿았다. 그리고 그곳에 있다는 것을 확인하듯, 강하게 움켜쥐었다.

카이로스: 괜찮아, 그냥 정전일 뿐이야.

소화가: 응, 나는 괜찮아요.

테이블 건너편에 앉아있던 그가 몸을 일으켜 내 곁으로 다가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카이로스는, 의자에 앉아있는 내 뺨에 가볍게 손을 가져다댔다.

카이로스: 순간 무서웠어.

갑작스레 찾아온 어둠은 모든 것을 고요하게 만들어, 서로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선명하게 들려왔다.

소화가: 카이로스 선배도 두려워하는 일이 있었군요.

카이로스: 어두워지는 순간, 만약 지금 네가 사라졌다면 어떻게 해야할까 생각하자니 무서웠지.

카이로스: 물론 그런 일이 쉽게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건 알아. 이건 분명 단순한 정전이지. 그래도 최악의 상황을 생각하지 않기란 힘든 일이니까.

카이로스: 네가 어둠에 혼자 남겨진다면……. 문득 그런 상상이 떠올랐어.

창 밖을 내다보면 어느새 별이 쏟아지는 밤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희미하게 빛나는 별빛이 카이로스의 뒤에서 흘러내려 그 실루엣이 평소보다 더 아름답게 보인다.

그가 무엇을 걱정하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결코 과장된 표현이 아니라는 것도. 그만큼 내 주변에는 불확실한 요소가 많았으니까.

그는 평생 나 같은 인생과는 정반대의 길을 걸어왔을 것이다.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은 자연스레 우리 둘의 거리를 좁혀 주었다. 나는 카이로스에게 조용히 몸을 기댔다. 그리고 손을 들어 손끝으로 그의 머리칼을 만지작거리며 속삭였다.

소화가: 가끔 생각해요. 카이로스 선배를 내 사정에 휘말리게 만드는 게 정말 옳은 일일지.

카이로스: 네 탓이 아니야. 내가 원해서 그렇게 한거지.

작게 웃는 나를 보며 카이로스가 따라 살짝 미소 지었다.

그의 손은 따뜻하고, 그의 눈동자는 어둠 속에서 별보다 밝게 빛나 보인다.

소화가: 카이로스, 나중에 밖에 나가볼래요? 오늘 불꽃놀이를 한다고 하던데.

카이로스: 아, 그것도 좋지만…….

소화가: ……? 무슨 일이에요?

카이로스: 네 숨이…… 지금 조금 뜨거운 것 같은데.

카이로스가 내 이마 위로 부드럽게 손을 얹었다.

이마에서 약간의 열감이 느껴졌다. 하지만 이건 설렘으로 인한 게 아니었다…….

한쪽의 낭만도 없이…… 정말로 감기에 걸린 것이다.

체온계로 열을 재보니, 미열이 있었다. 우리는 아로마 향초를 켜고, 흔들리는 오렌지빛 아래에서 저녁 식사를 마저 즐겼다.

식사 중에 스마트폰으로 긴급 알람 메시지가 도착했다. 셀레인 섬 전체에 일시적인 정전이 발생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런 날, 굳이 이런 일로 화를 내는 사람은 없었다. 섬 사람들은 모두 각자 그 사실을 받아들이고 새해를 맞이하는 축하 행사를 진행했다.

섬 전역의 집집마다 바깥으로 나와 바닷가에 모이기 시작했다. 모래사장에서 모닥불과 불꽃놀이를 즐기는 사람들의 모습도 보였다.

카이로스: 바닷가는 바람이 많이 불 거야.

카이로스가 좀 전에 해열제를 먹은 나를 바라보았다.

소화가: 그럼 바다에 나가는 건…… 안될까요?

그가 내 몸을 걱정하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카이로스: 어쩔 수 없네. 대신, 옷은 제대로 입어야 해. 그리고 바다에 너무 가까이 다가가지는 말 것.

카이로스: 약속할래?

소화가: 네!

우리는 이제 서로 조금씩 타협하는 방법을 알아가고 있었다.

집을 나서기 전. 카이로스는 내 복장을 철처히 체크했다. 그리고는 마지막으로 폭신폭신한 곰돌이 귀가 붙은 하얀 털 모자를 머리에 씌워주었다.

그의 가족들이 건네준 선물 중 하나였다. 모자를 확실히 내게 씌운 다음, 그는 다시 내 얼굴을 관찰하듯 살펴보았다.

카이로스: 다행이다, 잘 어울리네.

소화가: 고마……

내가 미처 말을 다 마치기도 전, 그가 말을 이었다.

카이로스: 꼭 작은 북극 곰 같아.

소화가: …….

카이로스의 독특한 미감은 평생 이해할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

뭐, 아무래도 좋은가…….

나비는 우리가 나갈 준비를 하는 것을 보며 함께 나가고 싶어졌는지, 카이로스의 발밑에 딱 붙어 있었다.

그러나 카이로스는 추운 와중에 나비를 바깥으로 내보는 것에 반대했다. 그래서 나비에게 작은 역할 하나를 맡기기로 했다.

카이로스: 나비, 우리가 집을 비우는 동안 이 집을 지키는 건 너야.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사람을 부르는 거야. 알겠지?

나비는 말을 알아들은 건지 일순간 꼬리를 흔들며 기분이 나빠 보이는 울음소리를 냈다.

카이로스는 그런 나비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카이로스: 좋아, 착하네.

브금

집에서 나선 우리는 모래사장이 있는 방향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가는 와중에도 꽃등이나 촛불의 흔들리는 불빛, 활기찬 사람들의 물결이 끊이지 않았다.

뛰어다니는 아이들, 웃는 가족, 좋은 분위기의 커플…….

아름다운 풍경과 그 활기찬 분위기에 취해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멈출 수가 없었다. 기쁨과 즐거움은 어디까지 사람을 전염시킬 수 있을까…… 명절의 의의란, 이런 것일지도 모른다.

바람이 잔잔하게 부는 좁은 골목길에서 우리는 발걸음을 멈췄다. 여기서부터는 바닷바람이 거세질 것 같았다.

카이로스가 조금 차가워진 손으로 내 이마를 짚었다.

카이로스: 열이 더 오른 것 같지는 않네.

그가 말을 마치는 순간, 바로 근처에서 불꽃놀이가 쏟아졌다.

화려한 소음과 함께 해변의 밤하늘에 아름다운 꽃이 피어났다. 모닥불이 보이는 근처에서는 맛있는 냄새가 풍겨왔다.

카이로스: 조금 더 가까이 가볼까? 손 잡고 있으면 다시 열이 오르더라도 금방 알아차릴 수 있을거야.

카이로스의 제안에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런 일로 너무 걱정을 끼치고 싶지는 않았다.

소화가: 여기서도 충분히 볼 수 있어요.

카이로스: 하지만…….

그는 무언가 말하려다 말고, 잠시 생각한 후에 나에게 또 다른 제안을 했다.

카이로스: 그럼 이곳에서 폭죽을 터뜨리는 건 어때?

그 말에, 나는 얼마전에 보았던 3년 전 그 밤을 떠올렸다.

이런 게 운명이라는 걸까?

물론 우리가 그 날 같은 장소에 있었던 걸 카이로스는 모를 것이다.

나는 그의 얼굴을 보고 웃으면서 제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소화가: 좋아요, 그렇게 해요!

카이로스: 3분, 여기서 기다려.

…3분을 다 세어갈 무렵.

불꽃놀이 막대를 손에 쥔 카이로스가 모래사장에서 돌아오는 것이 보였다.

모래사장에 있는 사람들은 밀려오는 파도처럼 활기찬 별빛과 모닥불의 불빛에 비추어지고 있었다.

그 혼잡한 인파 속, 그의 모습은 여기서도 선명하게 눈에 들었다.

바닷바람이 카이로스의 겉옷을 흔들고, 흐트러진 머리카락 사이로 그의 푸른 눈동자와 눈이 마주친다.

불현듯 운명이 나를 부르는 듯한 감각이 느껴졌다.

내 눈앞으로 돌아온 카이로스는, 불꽃놀이 막대를 하나 내게 건넸다.

그리고 그는 본인이 들고있는 폭죽에 불을 붙인 뒤 그 불을 내 폭죽으로 옮기려고 했다.

‘츳’ 하는 소리와 함께 또 하나의 불꽃이 은은하게 어둠을 밝혔다.

그때, 해변에 있던 사람들이 카운트다운을 시작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곧 새해였다.

고개를 들면 작은 빛과 어둠이 교차하는 세계에서, 카이로스와 눈이 마주쳤다.

그 두 눈에는 조그맣게 내가 비치고 있었다.

3년 전 운명의 교차로에서도, 작년 세인트 세실에서 처음 만났을 무렵에도, 나는 지금처럼 카이로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언가에 이끌리듯.

그리고 나는 조심스럽게, 발끝에 힘을 줬다.

소화가: 카이로스, 키스해 줄래요?

그는 빙긋 웃었다.

카이로스: 알았어.

불꽃이 다 타버렸을 즈음, 멀리서 제야의 종소리가 울려퍼졌다. 그와 동시에 그의 입술이 내 입술에 부드럽게 겹쳐졌다.

맞닿은 입술처럼, 시공간은 어딘가에서 겹쳐진다. 운명은 아직 단단하지도, 정해지지도 않았지만 변하지 않는 사실도 있다.

바로 카이로스는 항상 내 곁에 있어줄 거라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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