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봄과 함께_카이로스의 새해(1)
새해 전야. 올해 연말은 나 혼자 보낼 생각이었다.
사실 카이로스는 함께 고향 집으로 내려가자고 했었다. 솔직히, 그 말을 들었을 때는 많이 망설였었지만…….
카이로스: 괜찮으면 연말에 우리집 가지 않을래?
카이로스가 그 말을 한 것은 여느때와 다름없이 학생회실에서 시간을 보내던 어느 날 오후였다.
이제 곧 겨울방학이 시작될 무렵. 학생회는 올해의 마지막 업무에 쫒기고 있었다.
카이로스 역시 시험이 끝나마자마 서류 더미에 파묻혀 며칠째 정신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짐을 정리한 나는 그런 카이로스를 도우러 평소처럼 학생회실로 향했다.
호박빛깔의 겨울 햇살이 부드럽게 카이로스를 감싸고 있었다.
멍하니 그의 단아한 모습을 바라보고 있자, 문득 펜을 내려놓은 그가 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는 물은 것이다. 연말을 함께 보내자고.
당시 나는 아직 연말 계획을 세우지 않은 상태였다. 물론, 새해 계획도 없었다.
잠시 생각에 잠긴 듯 하던 카이로스가 뒷말을 덧붙였다.
카이로스: 올해는 가족들과 새해를 함께 맞이할건데, 어머니도 누나도 너를 꼭 데려오라고 하더라고…….
카이로스: 아버지도 너를 만나보고 싶어하셔. 늘 바쁜 분이라 명절에 잘 돌아오지 않으시는 편인데.
카이로스: 물론 설이라고 해도 우리집에선 그냥 가족들이 모이는 날, 정도로만 생각하니까 어렵게 받아들일 필요는 없어. 그러니까…… 부담스럽게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그가 무척 조심스럽게 말을 고르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어디까지나, 나만 괜찮다면 그러자고 제안하는 초대였다.
만약 내가 초대를 거절한다고 해도, 반대로 그의 집에 가겠다고 해도 우리 사이가 어색해질 일은 없을 것 같았다.
카이로스의 가정은 유복하고 자유롭고 행복으로 가득했다. 타인인 나에게도, 분명 최대한 진심과 선의로 대해주겠지.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망설여졌다. 지금의 나는 그런 완벽한 가족 사이에 녹아들 준비가 되어있지 않으니까.
소화가: 카이로스 선배, 저…….
나도 모르게 턱, 목소리가 막혔다.
카이로스는 그런 나의 갈등을 금세 알아차린 듯 했다.
카이로스: 괜찮아, 네가 무리할 필요는 없으니까.
정재한: 그럼, 난?
언제부터 있었을까?
서류의 산 위에 빼꼼 고개를 내민 재한 선배가 반짝이는 눈으로 카이로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카이로스: …글쎄, 어떨까.
정재한: 글쎄라면, 가도 된다는 뜻이지? 왜냐하면 우린 친한 친구고, 여신님도 한동안 못만났으니까……!
카이로스: 너, 지금 한가롭게 노닥거릴 시간이 있나?
갑작스러운 말을 하며 카이로스가 벽걸이 시계에 시선을 보냈다. 입가에는 은은한 미소가 띄워져 있었다.
카이로스: 내 기억에는, 너한테 아직 시험이 한 번 남았던 것 같은데. 그것도 15분 뒤에 시작하는.
정재한: 엥……? 그럴리가. 우린 같은 학부인데 너는 없고 나는 있는 시험이 있을리가…….
카이로스: 『법철학의 기본 원리』. 나는 작년에 학점 받았어. 남은 시간은 14분인가, 힘들겠는데….
정재한: 으아아아악, 가, 간다!!
정재한이 비명과 함께 물로켓처럼 뛰쳐나갔다.
…설마 치를 시험을 잊어버릴 줄이야. 내 안에서 재한 선배에 대한 평가가 다시 세워지는 순간이었다.
카이로스는 방금의 소란이 언제 있었냐는 양 다시 나를 보고 이야기를 이어갔다.
카이로스: 방금 그 제안은 ‘플랜 A’였어. 다음으로는 ‘플랜 B’.
미소를 지은 카이로스가 온화하게 말했다. 조금 전 제안을 거절한 내가 미안해할까봐 먼저 짓는 웃음이었다.
그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덧붙였다.
카이로스: 우리집은 방금 나간 정재한한테 가라고 하고, 우리는 셀레인 섬에서 연말을 보낸다는 선택지는 어때?
책상에 팔꿈치를 대고 상체를 기울인 카이로스가 진지한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카이로스: 참고로, 전자는 농담이지만 후자는 진심이야.
솔직히 그의 걱정은 무척 감동적이었다. 하지만 나를 위해 그의 시간을 희생시키는 건 원치 않았다.
카이로스는 가족이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의 아버지가 돌아온다면 더욱 더.
이전에 대화 도중에 카이로스의 아버지 이야기가 나온 적이 있었다. 매우 바쁜 사람이고, 계속 외국에 나가있기 때문에 가족 모두가 모이는 일은 거의 드물다고 했었다.
소화가: 가족을 소중히 여겨야죠.
카이로스: 나한테는 너도 중요해.
간신히 대답하자마자, 조금의 텀도 없이 카이로스가 받아쳤다. 그러더니, 그대로 다시 고민하기 시작했다.
아마 신년을 홀로 보낼 나를 걱정하고 있을 것이다. 말로하진 않았지만, 가족이 없는 나를 걱정하는 그의 다정함이 전해져왔다. 그는 나를 외로움으로부터 보호하고 싶어하는 것이었다.
카이로스: ‘플랜 B’도 기각인가……. 그럼 둘이서 여행을 가는 ‘플랜 C’도 싫어?
나는 바로 고개를 저었다.
카이로스: 예상 못한 건 아니야. 물론 ‘플랜 D’도 준비되어 있지.
작게 한숨을 내쉰 카이로스가 서랍을 열어 종이 한뭉치를 꺼냈다.
카이로스: 이 ‘플랜 D’라면 너도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은데. 다른 계획이 전멸할 경우를 대비해서 준비해둔 거거든. 하지만…….
그는 꺼낸 종이뭉치를 내게 건넸다. 종이뭉치의 가장 첫면 표지에는 『소화가 신년 계획』이라고 적혀 있었다.
카이로스: ‘플랜 D’는 너 혼자 연말을 보낼 경우를 상정한거야.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네가 앞의 플랜 세 가지 중에 골라주었으면 해. 무슨 일이 생겼을 때 아직 어린 나비가 너를 지켜줄 수는 없으니까.
…나비가 다 크더라도 그건 고양이의 역할이 아닌 것 같은데. 카이로스는 대체 나비에게 무슨 역할을 기대하고 있는 걸까?
카이로스: 참고로, 이 계획서를 만든 이유는 네가 이것도 모를 정도로 어리다고 생각해서 그런 게 아니야. 조금이라도 네가 편히 보냈으면 싶어서 도움이 되려고 만든거지.
그가 건넨 계획서를 펼쳐보았다. 목차는 크고 보기 쉽게 몇 가지 항목으로 나뉘어 있었다. 건강, 식단, 안전대책, 응급조치…….
각 항목에는 수십개의 하위 분류가 있었으며, 100페이지에 가까운 분량이었다. 내가 도중에 읽다가 지루하지 않도록 그림이나 사진을 넣는 등 세심하게 신경써서 만든 것 같았다.
도대체 얼마의 시간을 들여 이걸 만든 걸까?
소화가: 고마워요, 카이로스 선배. 그런데 어쩐지 재난 대책 매뉴얼 같네요.
카이로스: …그래?
카이로스가 손끝으로 안경을 치켜올렸다. 잠시 생각하는가 싶던 그가 다시 말을 이었다.
카이로스: 사실 이거랑 별개로 너를 위한 재난 대책 매뉴얼을 만들고 있어. 아직 완성되지 않아서 보여주기는 힘들지만.
소화가: 아하하, 그것도 기대할게요.
그는 내 손에 들린 연말 계획서를 보고는 웃음을 지으며 이야기를 돌렸다.
카이로스: 시간날 때 한 번씩 읽어두면 좋을거야. 그 계획서를 꼼꼼히 챙기면 귀찮은 일은 없을테니까. 하지만, 만약 그럼에도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나는 계획서에서 눈을 떼고 카이로스에게 시선을 옮겼다.
소화가: 바로…… 다음은요?
카이로스: 나한테 전화해.
그렇게 말하며 그는 다시 한 번 미소를 지었다. 온후한 오후 햇빛의 호박빛이 그 눈동자에 녹아들어 있었다.
섣달 그믐날 밤.
하늘은 조금씩 어두워지고, 창밖으로 가로등 불빛이 바다를 따라 길게 늘어선 모습이 언뜻 보였다.
나비를 위해 고급 고양이 통조림을 열어준 나는, 나에게도 호화로운 밥상을 준비하기 위해 부엌으로 향했다.
냉장고 안은 음식으로 가득했다. 대부분은 카이로스가 준비한 계획서를 따라 사둔 것이었다.
축하하는 분위기 속에서 딱히 외로움을 느끼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카이로스가 그리워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때, 갑자기 스마트폰 벨소리가 울렸다. 누구한테 온 전화인지도 짐작가지 않았다. 나는 서둘러 거실로 돌아와 전화를 받았다.
[ 카이로스: 소화가, 지금 뭐해? ]
선배 생각해요. [선택]
밥 준비하고 있었죠.
소화가: 선배 생각하고 있었어요. 보고싶다고.
[ 카이로스: 나도 보고싶어. ]
[ 카이로스: 너를 혼자 섬에 남겨두고 와서 정말 미안하게 생각해. ]
소화가: 선배가 사과하면 어떡해요. 남겠다고 한 건 나였고, 내 곁에는 나비도 있는 걸요.
[ 카이로스: 나비는 어떻게 지내? ]
밥 먹는 중이에요. [선택]
나비도 선배 보고싶어해요.
소화가: 밥 먹는 중이에요. 오늘도 열심히 먹고 있네요. 그런데…… 선배가 없어서 외로운지 조금 기운 없어보여요.
[ 카이로스: …소화가. 만약 내가 지금 당장 새해 소원을 빌라고 하면, 무슨 소원을 빌고 싶어? ]
소화가: 지금은, 그러니까…… 빨리 선배를 만났으면, 아니, 이건 좀 비겁하네요. 미안해요, 곤란하게 할 생각은 없었어요.
[ 카이로스: 확실히 반칙이긴 하지만, 곤란하지는 않아. ]
[ 카이로스: 3초 세고나서 문 열어볼래? ]
…스마트폰을 내려놓는 내 마음 속에서 설렘이 격렬하게 부풀어올랐다. 진정하기 위해 심호흡을 하고 차분하게 3초를 세어본다. 그리고 바로 현관으로 가 카이로스를 위해 문을 열었다.
이런 추운 겨울날에도 내 연인은, 눈을 뒤집어쓴 채로 나를 만나러 왔다.
양 팔을 벌린 카이로스가 나를 부드럽게 끌어 안았다. 나도 그의 허리에 손을 두르고, 그 품에 얼굴을 묻었다.
저 멀리서 날아온 북극의 차가운 공기가 지금도 그의 어깨에 내려앉아 있었다. 그리고 따뜻하고 부드러운 그의 입술이 내 귓가로 다가왔다.
카이로스: 다녀왔어, 소화가.
카이로스의 새해(2) 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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