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회랑

새해 봄과 함께_아인의 새해(2)

아인의 새해(1)

결국 이젤의 다리를 하나 떼어내어 ‘밀대’의 대용품으로 사용하기로 했다.

아기자기한 만두를 수십 개 만들어 냄비에 집어넣을 무렵에는 이미 셀레인 섬의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눈발은 점점 굵어져 자잘한 소음을 전부 삼켜내고, 창밖으로 보이는 것은 점점이 켜진 도시의 불빛 뿐이었다. 섬 밖은 새해맞이 행사로 북적거릴텐데, 이 주변은 매우 조용해 꼭 다른 세상에 온 것만 같았다.

집 안은 기분 좋은 평화로움에 감싸였다.

뜰채로 동동 뜬 만두를 떠서 그릇에 옮겨 담고, 아인과 나는 자리에 마주보고 앉았다.

드문 일은 아니지만, 나비에게도 테이블 가장자리에 ‘연말 잔치’를 준비해주었다.

앞발을 테이블 위에 얹은 나비는 진지한 표정으로 밥그릇을 쳐다보고 있었다. ‘이제 먹어도 돼’ 하는 말이 들려오기를 이제나 저제나 기다리는 것이었다.

그런 나비를 발견한 아인이 조용히 나비의 그릇을 멀찍이 떨어트리면…….

나비는 ‘캬악’ 하는 울음소리와 함께 아인을 한 번 노려보고는, 곧바로 앞발로 내 손을 툭툭 친다. 마치 ‘쟤 좀 말려봐’ 하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소화가: 자꾸 장난치지 마요.

작은 한숨을 내쉰 나는 나비의 그릇을 제자리로 돌려놓고, 추가로 작은 고양이 통조림을 따 그릇에 부어주었다.

소화가: 자, 많이 먹어.

아인: 너무 오냐오냐 하는 거 아니야? 이제 새끼도 아닌데.

소화가: …나비한테 질투해요?

나비: 먀아~

나비가 밥을 먹다 말고 아인을 한심하게 쳐다봤다. 이 고양이는 바쁘게 식사를 하는 와중에도 아인을 놀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아인: 네가 나보다 소화가랑 긴 시간을 보낸다고 해서 그게 네 특권이라고 생각하지 마.

문득, 지금은 모두에게 잊혀진 ‘3년 전의 만남’이 떠올랐다.

나는 미소를 지으며 만두를 집어 아인의 입가에 가져다 댔다.

소화가: 지금은 이걸로 아인 입을 막으라는 것 같은데요.

평소보다 많은 시간을 들여 우리는 천천히 식사를 마쳤다. 다 먹고 뒷정리를 시작하는 아인의 모습을, 나는 부엌 문에 기대 그저 조용히 바라만 봤다.

소매를 걷어올리고 팔을 반쯤 드러낸 아인의 모습은 당장 피사체로 삼아도 좋을만큼 아름다웠다.

아인: 그래서, 내일 계획은 뭐야?

아인: 나는 명절에 보통 집에서 보내긴 하지만…….

아인: 특별히 하고싶은 거 있으면 말해.

소화가: 말하면 뭐든 다 들어줘요?

아인: 당연하지.

나는 진지한 표정으로 고민하다가, 수줍게 말했다.

소화가: 내일은 모르겠지만, 지금은 느긋하게 같이 TV 보고싶어요.

아인: 그거면 돼?

아인이 ‘그건 너무 평범하지 않나’ 하는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소화가: 저…… 사실 연말에 다같이 모여서 연말 특집 같은 거 보는 걸 동경했거든요. 행복해 보이잖아요.

그 말에 아인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아인: 소화가, 전에 그렇게 생각한 적이 있어. 우리가 더 일찍 만났다면 좋았을텐데, 하는.

아인: 그랬다면 더 많은 걸 함께할 수 있었겠지.

아인: 하지만 과거의 나를 생각해보면, 우리는 지금 만난 게 다행이라고 생각해.

3년 전, 홀로 고독하게 자신의 길로 향하는 그의 모습을 떠올리며, 나는 시선을 내리고 작게 웃었다. 음악관 개인실에서의 만남도 충분히 멋지다고 생각한다.

이보다 더 일찍 만났다면, 우리는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둘 다 마음을 닫은 상태였으니까.

TV 화면에 비치는 사회자의 목소리가 거실에 울려 퍼졌다.

그것을 들으며 나는 숨을 죽인 채 조용히 옆에 있는 아인을 바라보았다.

새해를 맞이하는 이 날,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만두를 빚고, 새해맞이 잔치를 즐기고…… 그리고 손잡고 함께 앉아 다른 집과 마찬가지로 특집 방송을 본다…….

그야말로 ‘평범’하다는 말이 어울리는 광경에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 나와 아인은 지금 평범한 행복에 싸여있었다.

분위기를 깨지 않기 위해 말을 고르고 숨을 조심스럽게 내쉬는…… 그럴 필요도 없었다.

소화가: 아인.

아인: 응?

소화가: 아인.

아인: 왜 불러.

소화가: 아인.

얽혀있던 손을 풀어낸 아인이 내 어깨를 붙들었다.

아인: 그만.

아인

그만 안두면요? [선택]

희미한 미소를 지은 아인이, 창 밖으로 펼쳐진 밤의 장막 아래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인: 그만두지 않으면…….

다음 순간, 입가에 아인의 뜨거운 숨결이 닿았다.

평소보다 가까운 거리감 사이, 마주친 그의 눈동자가 빨려 들어갈 것만 같은 깊은 빛을 띄었다.

아인: 이런 짓을 당하지.

굳어진 채 움직이지 못하는 내 옆으로, TV에서는 특집 방송의 즐거운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깜빡깜빡, TV화면이 끊임없이 바뀌는 가운데, 나는 채 소리가 되지 못한 입모양으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아인…….

그 순간, 서툴지만 따뜻한 품이 나를 감싸 안았다. 귓가에 나직한 아인의 목소리가 울렸다.

아인: 소화가, 나는 절대 네 곁을 떠나지 않을거야.

아인: 그러니까 불안해할 필요도, 무서워할 필요도 없어.

아인: 앞으로는 매년 이렇게 둘이서 보내자. 약속할게.

그동안 필사적으로 숨겨왔던 내 마음을, 아인은 완전히 꿰뚫어보고 있었다.

이런식으로 말하면, 그를 끌어안고 그 목에 얼굴을 묻지 않을수가 없었다.

아인: TV는 이제 그만?

웃음기 서린 그의 목소리에는 놀리는 듯한 기색이 섞여 있었다.

소화가: 그럼 놔주든가요.

나는 삐친 것처럼 아인의 품에서 벗어나려고 했지만, 아인은 그것을 두고 보지 않았다.

아인: 아냐, 지금은 그대로 있어.

아인: 너한테 하고싶은 말이 있어.

아인이 이런식으로 서두를 꺼내는 것은 정말로 진지한 이야기를 하고 싶을 때였다.

그래서 그의 말대로 가만히 그에게 몸을 맡겼다. 가까운 곳에서 두근두근, 느릿한 그의 심장박동이 들려왔다.

아인: 아까 나비랑 셋이서 식사할 때, 아버지가 떠올랐어.

아인: 사실 새해에 너를 집으로 데려가고 싶었거든. 하지만 그러려면 먼저 아버지와 담판을 지어야하지.

아인: 너를 불안하게 만들려는 건 아니야. 하지만 말하지 않으면 오해하게 되니까, 먼저 이야기해둘게.

소화가: 응.

아인: 묻고싶은 건 없어?

소화가: 없어요. 때가 되면 아인이 다 알려줄 거잖아요.

잠시 조용하던 아인은 손을 들어 손끝으로 내 머리칼을 빗었다.

아인: 그건, 당연하지.

TV에서는 여전한 사회자가 수많은 사람들과 카운트다운을 시작했다.

사회자: 5… 4… 3… 2… 1!

데엥, 데엥ㅡ

12시 정각, 제야의 종이 울리는 순간.

아인이 깊고 진한 키스를 했다.

아인: 새해 복 많이 받아, 내 소중한 사람.

아인: 내년에도, 내후년에도…… 계속 내 곁에 있어 줘.

사랑하는 사람의 목소리가 이 작은 방 안 가득 차오른다.

무정한 시간의 흐름이 가져다주는 불안감이,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지는 것이 느껴졌다.

비가 오고 눈이 오는 밤이라고 할지라도, 그는 언제나 내 앞에 나타났다. 그런 아인과 함께라면, 앞으로 얼마나 오랜 세월이 지나든 변함 없이 함께할 수 있을 것이다.

새해 복 많이 받아요, 아인.

당신의 소원이라면, 무엇이든 이룰 수 있을 거예요.

그거 알아요? 당신의 이름을 부른다는 건 ‘사랑한다’는 뜻이라는 거.

ㅡㅡ하지만 이건, 알려주지 않을 거예요. 나만의 비밀이거든요.


그날, 아인의 아버지는 예정보다 일찍 귀가했다.

새해를 코앞에 두고, 왠지 모를 예감이 들었다. 조금씩이지만 무언가 달라질 것 같은 그런 예감이.

타고난 예민한 감각이, 그 기회를 놓쳐서는 안된다고 일러주고 있었다. 기회는 사소한 것에서 물거품이 되기 마련이니까. 그래서 그는 사전에 스케쥴을 미리 조정해두었다.

아인 아버지: 그 아이는 지금 어디에 있지?

아폴로: …도련님은 이미 쉬고 계십니다.

아인 아버지: 얼굴이라도 보러 갈까.

계단을 오르던 아인의 아버지는 미묘한 불안감을 느꼈다.

아들의 방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아무래도 아인은 정말 자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은 아직 아들과 무슨 이야기를 해야할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 때, 마침 스마트폰이 울렸다.

무심코 벨소리부터 끄고 문을 한 번 확인한 그는 그대로 계단을 내려갔다.

잠들어있는 누군가를 깨우지 않도록 조심스러운, 신중한 발걸음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내 발걸음을 멈췄다.

스마트폰 화면에 표시된 이름은 아인이었다.

그는 바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 아인: 여보세요, 저예요. ]

[ 아인: 시간 있으면 잠깐 만날 수 있을까요? 그, 새해이고……. ]

[ 아인: 소화가를 그쪽으로 데려가고 싶어서요. ]

아인 아버지: 알았다.

아인 아버지: 시간 비워두마.

아인 아버지: 그 아가씨에게 전해 줘. 만남을 고대하겠다고.

아인 아버지: 다만, 그 전에 묻고싶은 게 있다.

[ 아인: 뭡니까? ]

계단에 서 있는 집주인: 네가 집에 없다면 지금 네 방 침대에서 자고 있는 건 누구지?

다니엘: (접니다…… 다니엘입니다…….)

[ 아인: …남은 이야기는 집에 가서 하는 걸로 하죠. ]

[ 아인: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아버지. 이만 끊을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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