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회랑

새해 봄과 함께_로샤의 새해(1)

브금(한 곡 반복 설정을 하시면 좋습니다)

8살이 되던 해 섣달 그믐날. 로샤는 할머니에게서 작은 금고를 하나 받았다.

가족들과 모두 모여 게임을 하고 있던 와중, 할머니가 보여주고 싶은 것이 있다며 불러 주신 것이었다.

물론 그는 어릴적부터 매달 용돈을 받아왔지만, 금고가 필요할 정도의 금액은 아니었다. 그래서 어린 로샤는 할머니에게 꼬옥 붙어 부끄러운 듯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작은 로샤: 할머니, 나는 이런 대단한 거 못 써요.

할머니는 부드럽게 그의 머리를 어루만지며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허리를 굽혀 어린 로샤와 시선을 맞추고는,

로렌하이트 부인: 네게 이 금고를 주는 이유는 소중한 걸 보관할 장소를 만들어주고 싶기 때문이란다.

하고 말했다.

로샤는 잠시 생각한 뒤, 주머니에 넣어둔 물건 하나를 조심스레 꺼내 할머니에게 보여주었다.

작은 로샤: 그럼, 이런 것도 넣어도 되나요?

그의 손에 들린 것은 사진 한 장이었다. 새해를 맞이하여 온 가족이 모여 다함께 찍은 단체 사진.

사진 안에서는 모두가 편안한 미소를 짓고 있어 행복해보였다. 평소에는 엄격한 아버지마저도 예외 없이.

부모님 사이에 서 있는 로샤는 자신감 넘치는 표정으로 사진에 담겨있었다.

로렌하이트 부인: 물론이지. 잃어버리고 싶지 않은 소중한 것이라면 무엇이든 넣어도 돼. 돌멩이든, 나뭇잎이든, 그 어떤 것이 되더라도 그게 네 보물이라는 건 변함없을테니까.

로렌하이트 부인: 물건이라는 건 시간이 지나면 너무 쉽게 사라져버리곤 한단다. 하지만 이 안에 넣어두면 언제까지나 네 삶을 빛나게 만들어줄거야.

로렌하이트 부인: 바라보기만 해도 삶이 풍요로워질테지. 돈의 가치나 네 지위 같은 것에 좌우되지 않을 그런 것들을 이곳에 넣어두렴.

로샤는 이해하기 어렵다는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할머니의 말은 아직 어린 그에게는 조금 어려운 말이었다.

작은 로샤: 넣지 않으면 우리집의 돈도 사라질 수 있다는 뜻인가요?

로샤의 질문에, 할머니는 진지한 표정으로 잠시 생각하고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로렌하이트 부인: 네가 살아있는동안 그럴 가능성은 없을 것 같구나.

로샤는 안심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이내 또다른 의문이 생겨났다.

작은 로샤: 금고에 넣을 수 없는 것들은 언젠가 잃어버리게 되나요?

작은 로샤: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도?

로샤는 떠나고 싶지 않다고 말할만큼 할머니의 목에 팔을 감고 단단히 매달렸다.

작은 로샤: 그럼 저는 아주아주 큰 금고를 만들 거예요. 그래서 우리 모두 그 안에서 살아요.

노부인은 속상한 마음을 웃음으로 감추며 로샤의 부드러운 금빛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로렌하이트 부인: 그건 불가능하단다. 사람은 물건이 아니니까.

로렌하이트 부인: 자, 이만 갈까. 슬슬 돌아가지 않으면 모두가 걱정할거야.

로샤가 할머니의 손에 이끌려 긴 복도를 지나 계단을 내려가면, 두 사람을 기다리던 다른 가족들의 모습이 보였다.

로렌하이트가는 매번 이런식으로 새해를 나곤 했다.

금고 안에는 할머니가 로샤를 위해 직접 짠 머플러와 모자, 장갑이 담겨 있었다. 이것만 있으면 그는 눈이 내리는 추운 겨울에도 바깥으로 달려 나갈수가 있었다.

그밖에도, 계속 소중히 간직해온 사자 인형이라든지, 두툼하게 뭉쳐진 비행기 티켓 발권증서, 럭키 코인, 처음으로 직접 만든 점토 인형 등.

ㅡㅡ정사각형의 금고는 마치 동화 속의 작은 성을 연상케했다.

한편 로샤는, 이미 오래전에 그 동화나라에서 많은 사람이 붐비는 현실 세계로 발을 내딛었다. 그에 상응하는 책임과 중압감을 등에 짊어진 채.

이제 그는 가족과의 게임에서 이기는 것만으로 모두에게 칭받 받을 수 있던 8살의 어린아이가 아니었다.

현실 세계라는 게임의 규칙은 잔인하고 엄격했다.

브금

새해가 한 달 남짓 남은 시점.

로샤는 그날도 어김없이 그룹 본사에 콕 박혀있었다. 신년 계획서를 작성하기 위해 벌써 며칠째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다.

낮동안 틈틈히 잡힌 회의 일정도 소화해야 했다. 다음 회의가 벌써 10분도 남지 않아 쉴시간 조차 없는 어처구니 없는 상황.

그 틈 사이에 걸려온 소화가의 전화에, 로샤는 재빠르게 통화버튼부터 눌렀다.

소화가: 겨 울 방 학 이 다 !

통화 너머로 들려오는 소녀의 목소리에 기쁨이 넘쳐났다.

아직 추운 겨울이건만 소녀는 목소리만으로 생동감 넘치는 봄의 생명력을 뽐냈다. 이 목소리를 들은 식물이 새싹을 틔워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로샤: 정말 부럽네. 겨울 방학이 어떤건지 나는 이제 기억도 나지 않아.

소화가: 로샤, 언제쯤 돌아올 수 있을 것 같아요?

소화가의 목소리를 듣고있으면 기쁨이 마음을 가득 채워 피로가 눈 녹듯 사라지는 것만 같았다.

로샤: 미안, 아직 할 일이 남아있어. 지금 바로 그쪽으로 가는 건 어려울 거 같아.

소화가: 그럼 로샤의 집에서 기다려도 될까요?

로샤: 물론이지. 말했잖아, 일일이 확인할 필요는 없다고. 열쇠 있지? 언제든 편히 사용해.

소화가: 응, 사실 이미 가는 중이에요.

소화가: 그럼 왜 굳이 확인을 했을까요? 그건 바로~!

소화가: …로샤의 목소리를 듣고싶어서!

소녀의 담담한 목소리에 로샤는 저도 모르게 미소 지었다.

너무 크게 웃는 바람에 누가 들으면 대규모 계약이라도 성사시켰나 싶을 정도였다. 휴게실을 지나가던 직원들이 슬쩍 서로의 얼굴을 확인했다.

로샤: 그것 참 불평할 여지가 없는 이유로군.

로샤: 로샤를 그리워하는 꼬마 화가님께, 좋은 걸 하나 알려주도록 할까? 집에 가보면, 침실의 책상 서랍에 누구에게도 보여준 적 없는 내 비장의 사진이 들어있어.

1시간 후, 회의 중인 로샤에게 ‘집에 누군가 침입했습니다. 예정에 없는 방문일 경우, 관리 회사에 연락해주세요.’ 하는 시큐리티 알람이 도착했다.

작게 웃음을 터뜨린 로샤는 그 메시지를 그대로 찍어 소화가에게 전송했다.

소화가는 곧바로 답장해왔다. ‘비장의 사진이라는 게 100일 목욕 사진이에요? 확인했어요!’

아무래도 그는 꽤나 기대에 부풀어 서랍을 열었던 모양이었다.

분명 집에 들어서자마자 침실로 향했을 것이다.

로샤: 그럼 무슨 사진이라고 생각한거야? 아니, 어떤 사진을 기대하고 있었지?

잠시 후 다시 답장이 왔다.

‘이 앨범에 있는 사진, 전부 로샤의 가족이에요? 웃는 게 로샤랑 닮았어요. 보기만 해도 알 수 있어요.’

로샤는 그대로 스마트폰을 내려놓았다.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다.

…그를 만나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다. 지금 당장 그 곁으로 달려가, 끌어안고 싶었다.

타인의 가족 단체 사진을 보고, 그가 외로움을 느끼고 있지는 않을까.

회의가 끝나자 로샤는 비서를 불러 세웠다.

로샤: 오늘 밤 셀레인 섬으로 가는 티켓을 예매해주시겠습니까?

비서: 하지만 사장님, 내일도 오전 8시부터 회의가 있습니다만…… 이른 아침 비행기를 타고 돌아오셔야 할텐데, 괜찮으시겠습니까?

로샤: 아, 괜찮습니다.

그날 늦은 밤, 로샤는 셀레인 섬으로 돌아갔다.

찬바람을 맞으며 조용히 현관문을 연다. 계단을 오르기 전, 코트를 벗어두었다.

객실의 전등은 꺼져 있었고, 대신 로샤의 방에서 은은한 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침실의 문을 열자마자, 로샤는 침대 위에 있는 소화가를 발견했다.

스탠드 조명이 은은하게 어둠을 밝혔다. 커다란 앨범이 손에서 흘러내리고 있었다.

펼쳐진 페이지에는 게임에서 승리한 어린 로샤의 모습이 있었다. 어머니가 만든 종이 왕관을 쓰고 엄격한 아버지와 즐겁게 웃고있는 사진.

보는 이의 표정이 절로 풀리게 만드는 듯한 사진이었다.

로샤는 소녀에게 다가가 허리를 굽혀 이마에 입을 맞췄다.

소녀가 설핏 눈을 뜨는가 싶더니 로샤를 보고 부드럽게 웃었다. 그리고는 그대로 양 팔을 로샤의 목에 감고, 애교 부리듯 얼굴을 가까이 가져다 댔다.

로샤는 빠르게 소녀의 몸을 떼어내려고 했다. 좀 전까지 바깥에 있던 그의 뺨은 차갑게 얼어붙어 있었으므로.

하지만 소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평온한 표정으로 그의 품에서 다시 숨을 내쉬기 시작했다.

그를 깨우지 않도록 로샤는 침대 위에서 움직임 없이 가만히 앉아있었다. 품을 내리누르는 무게감이 놀랍도록 평안을 가져다주었다.

침대 가장자리에서 잠을 청하고 있던 나비가 어느새 눈을 뜨고 동그란 눈으로 로샤를 바라보았다.

로샤: 여, 오랜만이다.

눈 앞에 있는 것이 로샤라는 것을 깨달은 나비가 천천히 다가와 꼬리로 그의 손등을 부볐다. 그리고 그대로 두 사람 곁에 몸을 둥글게 말고 누웠다.

소화가: 로샤…….

품에 안겨있던 소녀가 잠꼬대처럼 작은 목소리로 웅얼거리며 눈을 떴다.

로샤: 응?

소화가: 저, 오래전에 당신을 만난 적이 있어요.

로샤: 그래? 어디서?

로샤는 소녀의 말 하나하나에 재촉하듯 대답했다. 이대로 그와의 시간이 계속된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았다.

소화가: 그거는…….

그러나 소녀의 말은 이내 고요한 잠꼬대와 함께 사라졌다.

그와의 시간이 실체가 있는 무언가로 바뀐다면 참 좋을텐데. 로샤는, 평소에도 이런 생각을 자주했다.

그렇게만 된다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포장지로 그것을 잘 감싸서, 그대로 금고에 넣어 단단히 잠가둘텐데.

다음 날, 로샤가 사무실에 들어서는 순간 소화가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소화가: 믿지기 않을수도 있지만, 어제 꿈에 로샤가 나왔어요.

로샤: 그래? 어떤 꿈이었길래?

창가로 다가서면 따스한 햇살이 쏟아져 들어왔다. 비행으로 인한 피로도 쉽게 풀릴 것만 같은 안온함이었다.

소화가: …그건 비밀이에요. 어쨌거나, 로샤가 꿈에 나왔다고요.

로샤: 내가 꿈에 나온 것만으로 그렇게 기뻤어?

소화가: 그야 계속 보지 못했으니까요.

로샤는 창 밖의 먼 곳을 바라보았다. 셀레인 섬이 있는 방향이었다.

시간이 허락한다면 오늘 밤에도 다시 얼굴을 보러 가야겠다.

동화 속 기사처럼 공주님의 꿈 속으로 들어가 악몽으로부터 공주를 지켜주는 것이다. 그리고 해가 뜨면 조용히 떠난다.

이럴 때 로샤는 본인이 어른이라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지금의 나이기 때문에 언제든 그를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비바람으로부터 그를 보호할 수 있는 안전한 성을 마련할 수 있다.

ㅡㅡ띠리리리.

로샤의 집으로 온 다음 날. 갑작스레 인터폰이 울렸다.

소화가: 로샤는 아직 한창 일하는 중일텐데…… 누구지?

현관문을 열어보면, 잘 차려입은 남자가 서 있었다.

소화가: 죄송하지만 지금 집에 아무도 없어서요…….

남자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낯선 남자: 이곳에 사는 사람이 아니어도 상관 없습니다. 간단한 설문조사에 협조해주실 분을 찾고 있어서요. 오래 걸리지 않을텐데 응답을 부탁드려도 될까요?

나는 평소에 시내에서 이런 설문조사에 붙잡히면 곧잘 응하고는 했다. 물론 이번에도 협력할 수 있다면 협력할 생각이었다.

그러니까…… 설문 내용이…….

소화가: ‘당신에게 이상적인 가정이란?’, ‘가족과 함께하는 새 집을 어떤식으로 꾸미고 싶은가요?’, ‘좋아하는 색상이나 테마를 알려주세요’……?

직원: 저희 회사는 여러분의 가정이 언제까지나 행복할 수 있도록 도와드리는 회사입니다.

소화가: 정말 멋진 일을 하고 계시네요. 힘내세요.

3페이지에 걸쳐 빼곡히 채워진 설문지를 모두 답하고, 나는 그것을 남자에게 돌려주었다.

직원: 실은 지금, 새해 맞이 캠페인을 하고 있거든요. 설문조사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선물을 드립니다. 아무쪼록 잘 사용해주세요. 그럼,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길.

작은 종이 봉투를 건네준 남자가 인사를 마치고 돌아갔다. 봉투 안에는 여성용 손목시계가 들어 있었다. 재질도 디자인도 무척 고가의 것으로 보였다.

보통 이런 설문조사 답례품이 이렇게 고가일 수가 있나……?

아니, 역시 싸구려겠지?

로샤가 돌아오면 한 번 물어봐야겠다.

하루가 다르게 새해가 다가오고 있었다.

로샤의 새해(2) 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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