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봄과 함께_로샤의 새해(2)
섣달 그믐날 밤.
로샤는 드디어 모든 일을 마치고 셀레인 섬으로 돌아왔다.
그가 집에 도착하는 시간이 늦은 밤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나는 잠을 자지 않고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로샤가 현관문을 열었을 때, 가장 먼저 보게된 모습은 두 팔을 벌리고 기다리고 있던 나와 그 발밑에 웅크리고 앉아 있다가 로샤를 발견하자마자 로샤에게로 뛰어가는 나비의 모습이었다.
그는 몸을 낮춰 나비를 안은 후 곧장 눈 앞까지 다가와 나를 일으켜 세웠다. 훗, 다가붙는 숨결에 웃음이 섞여있었다.
로샤: 조금 무거워졌나? 어디보자, 어느쪽이 더 무거워졌을까~?
소화가: 이봐요!
나비: 우냐!
나와 나비는 동시에 항의했다.
그 후 이틀간 우리는 평소와 다름 없이 집에서 시간을 보냈다. 새해맞이 축제 분위기는 지난 몇 년간 점점 사라지고 있는 것 같았다.
저녁을 먹고 잠자리에 들 준비를 마친 나와 로샤는 슈퍼에서 사온 과자를 먹으며 소파에 앉아 아무렇지도 않게 수다를 떨었다.
로샤: 이번에 실감했어. 이게 너와 함께 사는 감각이구나, 하고.
갑작스레 들려온 로샤의 말에, 가슴이 쿵쾅거렸다.
그 동요를 눈치채지 못하도록 시선을 바로 잡고, 그래도 기쁨은 지우지 못한 채 로샤를 바라보았다.
소화가: 어떤 부분에서 그렇게 생각했는데요?
물론 이 질문의 목적은 그가 좀 더 쉽게 말할 수 있게 이끌어내기 위함이었다.
로샤: 어느 방엘 가도 네 흔적이 남아있기 때문일까. 예를 들면 흩어진 옷이나, 양말, 그리고…….
소화가: 로샤!
나는 옆에 있던 쿠션을 집어던져 그의 말을 막았다.
로샤는 받아낸 쿠션을 가슴께에 두고 웃으며 이쪽을 바라보았다.
로샤: 정말 이상해. 2년 전만 해도 서로를 알지 못했는데 말이지.
로샤: 그런데 지금은 이렇게 가까이에 네가 있어줘서 고마워. 당연하다는 듯 자연스럽게 껴안고, 같은 시간을 보내고 있잖아.
로샤: 운명은 마치 거대한 미로 같지. 그 앞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 모르는 문을, 차례대로 열어보는 거야.
로샤: 나는 운명을 믿지 않았어. 어릴적부터 모든 게 내 선택이 이끌어내는 거라고 생각했지.
로샤: 하지만 지금은, 그렇게 생각할 수 없어. 다만 운명에 감사할 따름이야. 적어도 한 가지만은, 내 인생에 큰 도움을 주었으니까.
로샤: 너를 만날 수 있었던 건 그 운명이라는 녀석 덕분이야.
나는 그를 바라보며 작게 미소 지었다.
소화가: 그럼, 내가 당신을 좋아하게 된 것도 운명에 감사해야겠네요.
로샤는 잠시 생각하더니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로샤: 에이, 그건 내 매력 덕분이지.
로샤: 운명이랑은 상관 없이.
나도 모르게 탄성이 터져 나왔다. 이래야 로샤였다. 오늘도 그는 근거있는 자신감으로 가득 넘쳐 있었다. 이른 주말 아침, 창 밖을 통해 들어오는 햇살에 눈을 뜨는 것과 닮은, 따뜻하고도 패배의식 없는 그 감각과 비슷했다.
소화가: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소화가: 로샤가 로샤이기 때문에 나는 당신을 좋아하는 거니까요.
두 팔을 벌려주는 로샤의 품에, 자연스럽게 몸을 묻었다.
특별히 하고싶은 말이 없어도, 이렇게 서로에게 몸을 맞대고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굉장히 편안해졌다.
많은 사랑을 받고, 많은 사랑을 가진 로샤.
그 사랑을 아낌없이 베풀어주는 그가 내 곁에 있으면, 나의 나날도 언제까지나 반짝반짝 빛날 것이었다. 나도 어느새 조금은 욕심이 많아진 것 같았다.
로샤: 소화가, 너를 만나서 정말 다행이야. 마치 보물을 손에 넣은 기분이군.
로샤: 세상에 소리쳐 자랑하고 싶다가도, 나만 볼 수 있는 곳에 집어넣고 혼자만 보고싶기도 해.
로샤: 그런 이기적인 생각이 싹튼다는 게 나 스스로도 무서워.
나를 끌어안은 팔의 힘이 점점 강해졌다.
소화가: …저도, 비슷한 감정을 느낄 때가 있는 걸요.
목소리를 짜내듯 말하는 나의 말을, 로샤는 조용히 경청했다.
소화가: 커다란 금고를 하나 가지고 싶어요. 식량과 식수를 잔뜩 준비하고, 비밀번호도 정하는 거죠. 그리고 그 안에 로샤를 넣고 어딜 가든 당신을 데리고 다니고 싶어요.
로샤는 고개를 숙이고, 비극적인 연기를 하는 것처럼 표정을 굳혔다.
로샤: 우리 아가씨는…… 무서운 생각을 하는구나.
소화가: 응. 그러니까 정말 무서우면 도망치는 게 좋을 걸요. 3초 줄게요.
소화가: 3ㅡㅡ
소화가: 2ㅡㅡ
마지막 ‘1’을 말하기 전, 내 입은 깊고 진한 키스로 막히고 말았다.
그 순간, 내 안의 이기심도,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독점욕도 전부 안전한 성 안에 갇힌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나의 가장 약한 부분도 두려움 없이 보여줄 수 있는 건, 우리 사이에 흔들리지 않는 애정과 신뢰가 있다는 증거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아주 오랫동안 그러고 있었던 것 같다.
천천히 입술이 떨어졌을 때, 로샤의 눈동자는 촉촉하게 젖어있었다.
마치 폭우가 지나간 뒤의 물웅덩이처럼 선명하게 나의 모습이 비춰졌다.
로샤: 소화가…… 네 어떤 모습이라도, 내 눈에 비친 너는 귀여워.
로샤: 하지만 나 말고 다른 사람한테는 아까처럼 말하지 말아 줘. 너무 귀여워서 그대로 데려가버릴 것 같으니까.
그렇게 말하며 윙크하는 로샤를 보고, 나는 뺨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끼며 웃었다.
소화가: 당연히 농담이죠. 그냥 상상일 뿐이에요. …나는 로샤를 사랑해요. 자유로운 당신이 좋아요. 그러니까, 당신이 항상 자유롭기를 바라요.
로샤: 물론, 알고있지.
로샤: 하지만 네 상상 속에서라면, 나는 언제든 영웅이 될 준비가 되어있어.
우리는 둘이서 하나이면서도, 동시에 각자가 독립적인 개인이기도 했다. 나는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는 로샤를 좋아한다.
그와 함께 있을 때에는 무언가에 휩쓸리거나, 삼켜지거나, 빠져들지는 않을까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그와 함께라면 아무것도 신경쓰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나로 있을 수 있다.
그때, 종소리가 12번 울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새해가 되는 순간, 나는 준비하고 있던 말을 내뱉었다.
소화가: 새해 복 많이 받아요, 로샤!
소화가: 올해도 많이 좋아해줘요.
로샤는 눈썹을 치켜들고 소파에 기대어 앉았다.
목욕을 마치고 나온 그의 금발 머리는 평소의 깔끔한 스타일과 달리, 편안하게 내려앉아 있었다.
그 차분한 모습이 낯설어 조금 쑥스러웠다.
로샤: 소화가, 그거 새해 소원이야? 아니면 나에게 하는 부탁인가?
소화가: 두 개가 다른 거예요?
로샤: 어느쪽이든 너무 쉬운 소원이라. 조금 더 욕심부려도 돼.
소화가: 그럼 욕심 많은 소원은 어떤건지 로샤가 먼저 모범을 보여봐요. 프레스톤 그룹의 사장님이라면 나보다 아는 게 많을테니까, 이럴 때에 어울리는 대답도 알고 있겠죠?
로샤는 진지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는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로샤: 소화가, 백 년 뒤에도 나를 좋아해 줘.
나는 마음껏 웃음을 터뜨렸다.
듣고있는 것만으로, 나까지 행복해지고 마는 소원이었다.
행복하다고 생각되는 일이라면 분명 실현하는 것도 간단할 것이었다.
소화가: 그런 거라면 맡겨주세요.
단 1초만에 한 해가 새로이 시작되었다.
눈에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변한 게 없고, 시간은 멈추지 않고 계속 흐르고 있었다.
창밖으로 보이는 건 점점이 켜진 불빛 뿐이었다.
하지만 그 하나하나가 전부 어딘가의 가족이 밝힌 등불이라고 생각하면, 자연스레 가슴이 따뜻해졌다.
소화가: 어쩐지 새해라고 해도 평소와 다른 게 없는 것 같네요…….
로샤: 음? 뭔가 평소와는 다른 걸 하고 싶어? 미리 말해두자면, 내일 내 가족을 만나러 갈 예정인 거 잊지 마.
소화가: …!!!
나는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겨울 방학이 시작하기 전, 로샤가 말해주었던 것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와 함께 보내는 시간이 너무 편안한 나머지…….
소화가: 로샤랑 함께 있느라 바빠서 완전히 잊어버렸어요. 조금만 더 빨리 상기시켜주지…….
소화가: 저기, 나 눈 밑에 다크서클 생기지 않았어요? 요즘 피부도 별로 좋지 않은데…….
방 한가운데서 빙빙 돌며 걱정하는 나를 보고 로샤가 웃음을 터뜨렸다.
로샤: 무서운 것 없는 우리 꼬마 화가님이 왜 이렇게 긴장한 걸까?
나는 코를 훌쩍였다.
소화가: 왜냐하면 로샤의 소중한 사람들을 만나러 가는 거니까요…….
로샤: 그렇다면 한 가지 비밀을 알려줄까? 사실 가족들도 굉장히 긴장하고 있는 모양이야. …어때, 조금은 진정이 돼?
소화가: 왜 긴장하고 계세요?
로샤: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 알고 있으니까. 혹시라도 네게 무례한 짓을 했다가 네가 나를 싫어하게 될까봐 걱정하는거지. 네가 기분 나쁘지 않았으면, 하고 신경이 쓰이는 거야.
로샤: 만약 그런 일이 생긴다면 나도 기분이 나빠질테고. 그렇게 되면 큰일이잖아.
그의 말에 이번에는 내가 웃음을 터뜨렸다.
로샤: 비밀인데, 다들 너를 만나기 위해 열흘 이상 전부터 준비를 하고있나봐. 사소한 문제도 발생하지 않도록 여러 조사를 했다고, 어머니가 말씀하셨어.
소화가: 그렇게까지 과장하지 않아도 된다고 어머니께 전해주세요……. 더 긴장하게 되잖아요…….
어라……? 잠시만, 지금 로샤가 뭐라고 말했지?
소화가: 로샤, 여러 조사를 했다면 설마…….
문득 그 이상한 설문조사가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눈길을 끄는 질문이 많았지만, 개중 기억나는 건 몇 개 뿐이었다.
만약 그게 로샤의 가족이 나를 조사하기 위해 만든 거라면…….
분명 별 표시가 붙어있는 질문이 몇 있었던 것 같다. ‘가장 좋아하는 게임은 무엇인가요?’ ㅡ같은.
선택지는 이랬다. 인생게임, 론도, 카드게임, 댄스게임, 가위바위보…….
그때 나는, 보드게임은 별로 못하니까 ‘댄스게임’을 선택했었던 것 같다.
즉, 그 말은…….
식사 후 로샤 가족들이랑 댄스 게임을 하게될지도 모른다는 뜻이야?!
밤은 더욱 깊어져가고, 셀레인 섬은 겨울 밤의 차가운 공기에 완전히 감싸였다.
최근 몇 달간, 아틀리에와 책상 앞에만 앉아있던 내 몸은 강철처럼 굳어버렸다. 나는 뻣뻣해진 몸을 풀어가며, 지금 이곳에서 유일하게 가장 의지할 수 있는 눈 앞의 사람을 바라보았다.
소화가: 저기, 로샤. 지금부터 스트레칭을 해도 늦지 않을까요? 조금이라도 몸이 유연해질 수 있을까요?
가족간의 유대를 돈독히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인 게임 시간에, 끔찍한 결과를 남기고 싶지는 않았다!
모두가 화기애애하게 보내는 장면을 떠올리면, 갑자기 기대감이 높아지고 의욕이 샘솟았다.
로샤는 나를 보고 몇 번 눈을 깜박였다. 벽난로에서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흔들리는 불꽃이 그 눈동자를 비추고 있었다.
로샤: 몸이 유연해졌으면 좋겠어?
로샤: 좋아, 그렇다면 함께 방법을 찾아볼까.
로샤의 눈동자에서는 사랑이 넘쳐나고 있었다.
그것은 사랑에 둘러싸인 가정에서 자란 아이에게서만 있을 수 있는 것이었다.
많은 것을 가지고 있기에 나에게도 어렵지 않게, 자연스레 사랑을 주게되는 것이다.
그런 그이기에, 나도 부담없이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그의 곁에 있을 수 있었다. 그에게 맞춰 나를 변화시킬 필요도 없었다.
물론, 사소한 실수로 그가 어딘가로 떠나버릴까 두려워할 필요도 없었다.
그러다보니, 나는 로샤 앞에서 아무것도 꾸미지 않고 본래의 내 모습을 드러낼 수 있게 되었다. 잠에서 깨어나 헝클어진 머리도, 흐트러진 잠옷 차림도 신경쓰이지 않았다…….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때, 나는 로샤가 나의 모든 것을 받아들여주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는 이 세상에서 가장 견고한 나의 요새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고 그 안에 있을 수 있다.
오랜 세월동안 생긴 상처도, 애정에 대한 불안과 아픔도ㅡㅡ
로샤를 만난 덕분에 조금씩 치유 되어갔다.
오히려 내 안에 시들지 않는 작은 꽃이 피기 시작하는 것을 느낀다.
로샤는 결코 서두르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천천히 시간을 들여 그 꽃을 키울 수 있다.
그리고 그 꽃으로, 세계에서 단 하나뿐인 화동을 만들어, 그에게 선물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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