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봄과 함께_예신의 새해(1)
소화가를 만나기 전까지 제국에서 지내던 예신은 교통수단이라는 개념을 알지 못했다.
목적지 같은 것은 단지 좌표에 불과하다. 정확한 위치만 알면 순식간에 도착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시간이 흘러 지구에 오게 된 그는 소녀와 함께 버스나 기차, 배, 비행기에도 타게 되었다…… 전부 시간만 낭비하는 저성능의 탈것들이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놀이기구 같은 탈것에서 보내는 쓸데없는 시간동안 소화가는 즐거워 보였다.
예신: 소화가. 만일 목적지까지 더 빠르게 갈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너는 그 방식을 선택할래?
소녀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소화가: 아뇨. 이동 시간이 짧아지면, 예신과 이야기할 시간도 줄어들잖아요.
예신은 ‘이야기 정도는 언제든지 할 수 있지 않느냐’고 말하고 싶었지만, 소녀의 순진무구한 눈빛을 보고 있자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소녀가 소중히 여기는 것은, 그때 그때 느껴지는 감정을 있는 그대로 이야기하는 자유롭고 편안한 대화였다.
소화가에게 있어서, 그런 시간은 귀중했다.
평소에는 할 수 없는 이야기도 부담 없이 들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예를들면 예신의 과거라거나, 취향 같은 것들.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등등.
이것이 바로 사람과 사람 사이의 정을 돈독히 만들어주는 최고의 방법이었다. 이런 시간을 통해서야 비로소 예신의 내면을 알 수 있고, 두 사람의 마음이 더욱 가까워질 거라고…… 소녀는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예신이 교통수단을 이용하는 쓸데없는 시간을 싫어하는 이유 역시 바로 그것에 있었다.
소화가의 질문에 대답한다는 것은, 다르게 말하자면 그에게 끊임없이 거짓말을 한다는 뜻이었으니까.
처음에야 어떻게든 평소처럼 대응할 수 있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씩 고민하는 시간이 길어졌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내용을 잊은 것은 아니었다. 소녀에게 내뱉은 ‘거짓말’은 전부 잘 기억하고 있었다.
…그래서 더욱, 소녀의 입에서 튀어나오는 질문들에 점점 더 대답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소녀가 생각하는 ‘예신’의 모습을 채우기 위해 거짓을 거듭하는 일은, 예신에게도 쉽지 않은 선택이었다.
소화가: 예신은 고등학생 때 어땠어요? 친한 친구는 있었나요?
소화가가 고등학교 졸업을 앞둔 새해.
두 사람은 겨울의 추위를 피해 일년 내내 따뜻한 작은 섬으로 향했다.
비행기의 창가 자리에 앉은 소녀는 들뜬 얼굴로 창 아래 펼쳐지는 운해를 바라보며 연신 예신에게 질문을 던졌다.
예신: 같은 반 친구와는 별 다른 교류를 하지 않았어. 그래서 졸업한 이후에는 딱히 연락도 하지 않지.
그는 가능한 한 ‘안전한 범위’ 내에서 진실을 말하려고 노력했다.
소화가: 그렇구나…… 그럼 친구의 결혼식에 참석해 본 적은요? 청첩장 같은 거 받아본 적 없어요?
뜻밖의 질문에 예신은 약간 놀랐지만, 이내 소녀가 던진 말의 진의를 깨달았다. …그는 결혼식에 가보고 싶은 것이다.
예신: 전혀 없지는 않지. 결혼한 동급생도 있고.
뒤돌아본 소녀가 반짝반짝한 눈을 빛내며 예신을 바라보았다.
소화가: 정말요?! 그럼, 또 청첩장을 받을 일이 있을까요? 만약 받게된다면 다음에는 저도 데려가줄 수 있나요?
예신: 그래, 그때는 함께 가자.
생각지도 못한 무모한 거짓말을 해버린 예신은 금세 후회했다. 말해버린 이상, 결혼을 앞둔 누군가와 친해질 필요가 있었다.
교통수단을 타면 대부분 이런 일이 발생하곤 했다.
소녀가 여행 중의 이동 시간을 즐기는 동안, 예신은 언제 제 무덤을 파게될지 모를 대화에 늘 괴로워했다.
그래도 눈 앞에 있는 행복한 소녀의 모습을 보고 있자면 예신은 따뜻하고 평온한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어느 날 시간의 수레바퀴를 이동수단으로 변화시키던 예신은 본인이 어째서 외로움을 느끼는 것인지 문득 이해하게 되었다.
섣달 그믐날 이른 아침.
우편함에 크루즈 티켓 한 장이 들어 있었다.
출항 시간은 오후 3시. 티켓 뒷면에는 이렇게 적혀있었다.
‘이번 신년 여행은 나비도 함께 데려가자. 나비에게도 잘 부탁한다고 전해 줘.’
서둘러 짐을 정리한 나는 승선권을 나비의 눈 앞에 흔들며 동물 캐리어를 열었다.
평소에는 외출을 싫어하는 나비도, 말을 잘 알아들었는지 이때만큼은 재빠르게 안으로 들어가 얌전히 몸을 웅크렸다.
소화가: 오늘은 병원 가는 게 아닌 걸 아는구나?
나비: 먀아!
꼬리를 살랑살랑 흔드는 나비는, 곧 예신을 만날 수 있다는 사실에 흥분한 것처럼 보였다.
그 모습에 나도 모르게 웃으며 동물 캐리어를 짊어진 나는 그대로 여행 가방을 들고 항구로 향했다.
유람선은 곧 목적지에 도착할 것이다.
나는 기다리기 힘든 마음에 항구라도 확인하기 위해 갑판으로 나갔다.
바깥에선 언제부터인가 눈이 내리고 있었다.
항구에는 마중 나온 사람들로 넘쳐났다.
그런 혼잡한 인파 사이에서도, 나는 그의 모습을 놓치지 않았다.
아무리 거리가 멀어도, 사람이 많아도 그만은 언제나 선명하게 보였으니까.
눈에 비치는 세상을 거대한 캔버스에 비유한다면, 예신은 가장 짙은 색채의 물감으로 그려진 것이 틀림 없었다.
이윽고 배가 항구에 도착했음을 알리는 기적 소리가 울렸다.
배에서 내리자, 예신은 사람들 틈에서 반갑게 나를 맞이했다.
나는 부드럽게 안아주는 예신의 향기에 취해 마음껏 그의 체취를 들이마셨다. 그것은 태양의 온기와 눈의 차가움을 동시에 느끼는 듯한, 그런 특별한 향이었다.
예신: 바다가 춥지는 않았니?
몇 겹이나 옷을 껴입었음에도 나는 팔을 끌어안고 덜덜 떠는 시늉을 했다.
소화가: 너무 추웠어요!
예신이 무언가 말을 잇기도 전에 나는 내 손을 그의 겉옷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예신의 체온으로 차가운 손끝을 따뜻하게 데우고 싶었다.
다음 순간, 주머니 안에 따뜻하고 커다란 손이 들어오더니 그대로 손가락을 얽어왔다.
내가 그 손의 주인을 올려다보니, 그는 태연하게 앞을 보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의 입가에 미묘한 미소가 떠오르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소화가: 우리 이제부터 어디로 가요?
이번 여행의 목적지를 나는 아직 몰랐다.
예신이니까 알아서 준비해주겠거니, 했을 뿐. 그랬기에 오는 도중에는 특별히 물어보지도 않았고.
내 호기심을 눈치 챈 그는 맞잡은 손에 살짝 힘을 주었다.
예신: 올해는 조금 색다른 시도를 해보기로 했어.
예신과의 여행도 이제는 익숙해졌다고 생각하던 나는, 주차장에 정차하고 있는 하얀 캠핑카를 확인하고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소화가: 예신, 이건…….
예신: 이번 여행은 이 캠핑카를 타고 이동할거야.
주머니에서 손을 꺼낸 예신이 차 문을 열고 어서 들어가 보라고 내게 눈짓으로 신호를 보냈다.
캠핑카의 내부는 바깥에서 본 것보다 훨씬 넓었다.
‘착시현상’이라든지 무언가 특별한 방법을 써 안을 더 크게 보이게 만든 건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잠을 잘 수 있는 침대, TV와 소파, 주방은 물론 이젤, 미술 재료 등이 진열되어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공간도 마련되어 있었다…….
예신: 필요한 건 전부 갖추었다고 생각하는데, 어때? 마음에 드니?
너무 마음에 들어요! [선택]
갑자기 웬 캠핑카예요?
나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신과 캠핑카로 여행을 다니는 건 내 오랜 로망이었다.
기차나 버스에 탈 때처럼 시간과 주위를 신경쓸 필요가 없었다. 언제든 원하는 시간에 휴식을 취하고, 이야기를 나누며 경치를 즐길 수 있었다.
이상적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을 매번 예신이 조금씩 현실로 만들어주었다.
기쁜 마음에 예신의 품에 뛰어들자 그는 내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예신: 마음에 드는 모양이네.
소화가: 정말, 정말로 마음에 들어요!
나는 지금 확실히 예신에게 어리광이 심한 편이었다. 하지만 그런 것을 신경쓸 필요가 없었다.
눈 앞에 있는 사람은,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주는 사람이니까. 그는 언제까지나 상냥하게 나를 대해줄 것이었다.
캠핑카 안이 예신의 냄새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일까? 나비도 이 새로운 집을 크게 경계하지 않는 것 같았다.
재빠르게 본인이 있을 자리를 찾아낸 나비가 몸을 둥글게 말고 그대로 잠에 들었다. 예신이 미리 준비해둔 푹신한 담요 위였다.
캠핑카의 창문으로 바깥을 보면, 신혼을 앞둔 남녀가 촬영 스탭들과 걷고 있는 것이 언뜻 보였다.
눈 내리는 날의 웨딩 사진을 찍으려는 모양이었다.
그 기쁨에 찬 표정을 바라보고 있던 나는, 문득 재미있는 질문을 떠올렸다.
소화가: 있잖아요, 예신. 예전에 결혼했다던 동급생은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어요?
과거를 진지하게 되돌아본 예신은 기억 속에서 방금 내가 말한 이야기를 떠올리고는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예신: 궁금하면, 연락해볼까?
예신: 결혼식 이후에 연락이 끊겼으니까.
예신의 말에 나는 미소 지었다. 그때 내가 얼마나 예신을 곤란하게 만들고 있었는지, 지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소화가: 정말? 주소록에 연락처가 남아있어요?
예신: 물론이지. 그는 ‘소화가를 위해 만든 15번째 친구’라고 따로 적혀있기도 해.
소화가: 네……? 그게 뭐예요? 몇 번까지 있는 건데요……?
예신: 아마 184번이던가.
예신: 가장 최근에 등록된 건 캠핑카 디자이너였어.
차분한 얼굴로 대답하는 예신을 보며, 나는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예신: 그럼 저녁을 만들었으니 함께 먹을까. 먼저 손을 씻고ㅡ
이어지던 예신의 말이 그대로 끊겼다. 내가 발끝으로 서서 그의 뺨에 입을 맞춰버렸기 때문이었다.
소화가: 예신은 정말 나를 좋아하는군요.
나는 일부러 고개를 갸웃하며 장난스러운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수년 간 늘 곁에 있어준 그는 굳은 표정이었지만, 금세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마치 눈이 녹는 듯한 따뜻한 표정이었다.
예신: 그래. 난 너를 좋아해.
내 눈은 그를 시야 중앙에 담은 풍경을 많이 보아왔다.
하지만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예신은 변하지 않았다. 내가 처음 그를 의식했던 그때처럼, 이렇게 가슴이 벅차오르게 만들어줬다.
그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크지도 작지도 않은 기적 중 하나가 틀림 없었다.
예신의 새해(2) 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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