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우주의 실패

입증된 종말론은 대체 무엇을 불러오는가? 예전에 교육을 받을 때, 종말론에 대한 수업에서 들었던 생각이다. 사람들은 저렇게 예언이라는 근거없는 사유에 의한 종말론을 믿으면 제정신으로 못산다고들 하는데. 그렇다면 정말로, 이성과 논리에 의한 기술로 관측한 종말을 목도한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지.

답은 의외로 간단했다.

역사의 일부가 될, 똑같은 광증에 가까운 공포의 발현.

그것은 인류의 미래라 불러도 좋을 사람에게도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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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뜰의 일과는 간단했다. 아니, 바빴으나 이제는 간단해진 것에 가깝다. 어떻게 해도 저 빌어먹을 종말을 막을 방법이 없었다. 치열한 죽음과의 사투인 줄 알았더니, 애초에 사투도 뭣도 아닌 그냥 그렇게 될 것이라는 것을 깨닫자마자 맥이 탁 풀리는 느낌이 들어서. 허탈한 상실감과 분노가 뒤죽박죽으로 뒤덮는 잠뜰의 정신상태 탓에 잠만 퍼질러 자거나 다시 한번 연구원들을 달달 볶아서 몇번이고 계산을 하다가 또 자신만의 방에 들어가서 종이에다 여러가지를 또 써내리다 우뚝 멈춰서 이내 그것을 구겨버린다던가. 불규칙적으로 오락가락하는 것 같던 정신상태가 바뀌는 것은 일종의 규칙성을 가졌다. 마치 아직도 삶을 살고자 하는 사람처럼. 사람들이 거의 다 포기해버렸음에도 잠뜰은 살고 싶었다. 살아서 내일을 보고 싶었고, 사람들을 살려서 내일의 태양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래서 계속해서 아직 포기하지 않은 소수의 사람들을 이끌고 온갖 계산을 행했다.

내가 어떻게 여기서 죽어, 그건 잠뜰의 입버릇처럼. 그렇게나 달고 살던 말처럼 연구자들은 결국 그 결과를 맺었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었고, 그들에게는 어쩌면 희망이 있었다. 그러니까, 답이 없어서 내팽겨친 제 우주가 아닌 다른 평행우주의 가능성이 그러했다는 말이다.

“하, 하하, 진짜 장난치지 마.”

누구한테 하는 말인지, 어쩌면 혼잣말인지. 다만 침묵을 유지하는 관측실의 내부에서 홀로 말하고 있는 것은 분명 잠뜰이라서.

“왜 우리가 죽어야 하는데, 왜. 왜!”

자신들이 답이 없다는 것을 진작 알고 있기야 했다. 그래서 평행우주에 대해서 믿어보기로 한 것이 아니었나. 그렇지만 제가 아닌 다른 세상이 살아남을 수가 있단다. 관측하고 개입해서 억지로 만들어내야할 결과물이긴 하지만. 우리는 그럴 수조차도 없었는데. 이 세계의 잠뜰은 죽는다, 그리고 저 세계의 잠뜰이 아닌 잠뜰은 결국 생존해낸다. 마치 클론을 보는 것 같다. 저것이 제 자신이라는 것을 알아도 다른 육체에 다른 감각을 가지고 있는 남처럼 생각하듯 저건 남과도 같아서. 잠뜰은 살고 싶었다. 그렇지만 자신은 아마 살 수가 없다. 그래서 잠뜰은, 저 평행우주가 그렇게나 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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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지를 불태우고, 불씨가 꺼질 듯 하고, 이내 또 간신히 피워올린 불꽃은 이제 또 시들해지려고 한다. 살고 싶어서 악착같이 해왔던 일도 이제는 정말로, 진정으로 관성을 잃는다. 감정의 소비가 끝나고 완전한 고요만 남은 공간은 잠뜰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았다. 어쩌면 잠뜰이었기에 오히려 더 크게 타격을 받았을지도 모르고. 마음의 관성이 멈춰버린 채로 움직이는 몸의 관성은 대체 얼마나 오래 갈까? 그것은 제대로 시간의 경과를 확인한 것이 아니라서 아직도 잘 모른다. 다만 알고있는 것은 항상 그랬듯 계산을 하다가 집어치우고, 조종간의 여러 계기판으로 보다가 또 돌아서버린다거나. 더이상 묵묵히 하려던 일들이 잘 잡히지가 않았다. 딱히 생각이라도 드는 것이 아닌데 오죽할까. 생각이 너무 없어서 계기판이고 정보고 읽히지가 않아서. 이런 빌어먹을 일에 싫증까지 느끼고 조금 생각이란 것을 하며 자꾸만 주기적으로 인식되는 모스부호를 본다. 짧게 세 번, 길게 세 번, 그리고 또 짧은 것이 세 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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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호가 익다, 라기보다 잊어서는 안 되는 신호다. 띠띠띠. 띠-띠-띠. 띠띠띠. 모스부호. 그것도 SOS를 나타내는. 일반 사람들에게도 꼭꼭 알아놓으라는 그거 아닌가. 오랜만에 제대로 인식한 자극이 뇌를 깨운다. 고개를 흔들고, 양 손으로 제 두 뺨을 짝! 소리나게 때리고. 아릿한 통증에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자꾸만 잡히는 신호의 발신지를 확인한다. 상식적으로 이런 곳에서 SOS 구조신호를 보낼 수 있는 곳이 없을 텐데. 대피용 우주선이라면 뭐 다들 잔뜩 날아갈 때 같이 날아갔을 거고, 그렇다고 또 새로 발사된 우주선이나 인공위성은 없는데, 혹시 외계인은… 미쳤나. 그런건 본 적도 없다.

그러면 답은 하나밖에 없는데.

머리를 스치는 답에 얼굴이 살짝 굳는다. 깊은 곳에서 차오르는 숨을 천천히 뱉어내다 겨우 입술을 깨물고 평행우주를 관측한 아주 잘나신 첨단 기술의 정수를 만지작거리면. 우주선 하나의 좌푯값을 산출하고 만다. 덤으로 홀로그램의 형태로 보여주는 추측되는 상황이라는 것도 함께. 저기 저 평행우주에서 신호를 보내면, 그걸 관측하는 우리 또한 신호를 받는다. 누군가 도와줄 사람은 없지만 그럼에도 SOS의 모스부호 보내기를 멈추지 않는다. 아마 의미없는 일이라는 것을 모르지는 않을 테다. 그렇지만 살기 위해서, 이 치열한 불길을 꺼트리지 않기 위해서 억지로라도 희망을 품고, 살기 위해 악착같이 움직이고 움직여서 불안감을 없애는 것. 오히려 그렇게 머리를 차분히 하려는 것. 잠뜰이 잘 아는 방식이다. 오히려 당연한 것이다. 잠뜰이니까. 저기에 있는건 자신이니까. 잠뜰, 잠뜰, 평행우주의 잠뜰, 평행우주의 나. 반복적으로 뇌까리는 이름에는 아직도 조금 먼 거리감이 남아 있다.

그렇지만, 이제서야 저것이 잠뜰이라고 마주할 수 있게 되었다.

너는 잠뜰이구나, 나도 잠뜰이고. 당연하다면 당연한 사실이지만. 그 간단한 게 잠뜰은 좀 안 되었었다. 자신이 살아남을 가능성보다 저쪽이 더 있으니까. 사람은 이기적이고 기왕 살 수 있는 우주가 있다면 우리였다면 하고 바란 적이 수없이 많지만. 그렇기에 아직도, 저 우주를 질투하고 있는 것 또한 맞지만. 저렇게 필사적으로 살고자 했던 잠뜰을 안다. 어떻게든 발악해봤던 여자를 안다. 그래서 잠뜰은, 그 멍청한 치열함을 다시 꺼트리고 싶지 않아서.

“전 연구원들 주목!”

저 평행우주를 돕자는 생각을 했다.

“저기 저 평행우주의 우리를 살려 보자. 우리는 여기서 죽게 될지언정 저곳에서도 우리는 있잖아. 미안하지만 우린 실패다. 그렇지만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가 될 수 있어. 실패해도 계속계속 나아가서 여기에 우리가 있듯이. 이 우주의 실패가 쌓여서 저 유복한 우리를 성공으로 만들면 돼!”

좋은 연설이냐 물으면 모르겠다. 사실 이걸로 동기부여가 되진 않을 것이라고도 생각한다. 사람은 수차례 꺾이면 일어서고 싶어하지 않으니까. 다시 한 번 더 꺾이느니 안락하게 기는 것을 선택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잠뜰은 움직여야 한다. 언제나 무너져 있는 사람은 없다. 결국 일어서야 할 때가 있고, 살아남기 위해 움직여야 할 때가 있으니. 우리의 하찮은 도덕심을 위해서, 인간의 구차한 생존욕을 위해서. 그래서 우리들은 움직여야만 해서.

침묵 이내 연구원들은 움직인다. 그들 중에는 분명 불안한 사람도 있고, 어쩌면 분위기상 억지로 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럼에도 행동하고 사고한다는 것은, 아마 인간이란 원래 그럴 테니까. 우리는 결국 꿋꿋이 살아남아 왔고, 그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니까.

잠뜰은 살고 싶다.

그건 지금 관측하고 있는 잠뜰과도 크게 다르지 않다.

너는 잠뜰이고, 나도 잠뜰이니까. 잠뜰은 살고싶으니까.

그러니 내가, 너를 돕는게 맞겠지.

그렇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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