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스

너른 봄을 향하여

밍님의 글을 트글내글한 글입니다. 차이 다수.

우란 봄을 기다리는 게 아니라 봄을 향해 가는 것이라.

너른 봄을 향하여.

꼼꼼히 감싼 이불의 사이에도 틈이 있다. 그걸 모르지 않아서 조금 여러 겹 겹쳐놓은 이불이건만 자꾸만 찔러 들어오는 한기가 조금 강해서. 이불 밖으로 빼꼼 내민 손이 방황하다 손 끝에 걸리는 감각으로 휙 채 온 것은 휴대폰이라. 머리 끝까지 덮어 쓴 이불 안에서 확인한 시간은 정오를 당당하게 나타내는 12시였다. 조금 많이 이불에 박혀 있었나 생각하는 것도 잠시, 일단 자꾸만 스미는 이 한기를 어떻게 하기 위해서라도 보일러를 켜야는 일념이 이불을 제쳤다.

너무 오래 굼뜨던 몸이라 그런가, 기지개를 켜며 찹찹한 바닥의 한기에 발을 달싹이던 도중 하나의 이질감이 그를 잡아서. 커튼까지 친 거실이 이렇게나 밝았나 하는 작은 의문이 보일러를 키러 가던 제 발걸음을 돌렸다. 한 발짝, 그리고 또 한 발짝. 걸음걸이마다 느껴지는 한기는 점점 불어나 제가 지금 집을 걷고 있는 건지도 모르게. 마침내 열어낸 창문 밖은 대체 무엇인지 모를 연유의 빛이 쏟아졌다. 눈살을 찌푸릴 정도의 빛. 눈을 잠깐 가렸다 다시 마주한 바깥은 제가 지금의 계절을 잊어버릴 정도로 순간 강렬해서. 지구온난화의 결과인가 싶은 터무니없는 생각을 했다.

빤히 바라보는, 창밖의 하얗게 새어버린 세상은 고요하기 짝이 없었다. 또 새하얬고, 차가워서. 무심코 보다가 같이 새어버릴 것 같아서. 아, 선하! 하고, 생각이 났다. 찬 공기지만 벚꽃을 닮은 색감이 전신에 한가득 몰려 있는, 그리고 또 그런 봄을 닮은 사람. 만나서 같이 있으면 이런 한기를 조금은 녹일 수 있을 테다. 그러고 보니 너는 괜찮을까?

상념을 깨는 것은 전화벨 소리. 그리고 그 폰 위에 찍힌 이름은 선하. 아, 선하도 이런 세상에 있었구나! 당연하다면 당연한 사실. 거기다 이런 고요 속에서는 다소 어색한 벨 소리지만. 그는 저 소리가 진짜 선하의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냉큼 받자마자 혜비야! 하고 들리는 맑은 목소리가 선하임을 증명해온다. 그것이 어딘가 다행스럽기도 하고 기뻐서, 전화를 받자 마자 쿡쿡 웃음만. 그런데 돌연 뚝. 하고 끊어지는 휴대폰이. 배터리는 충전을 좀 못하긴 했지만 이렇게 전화를 받은지 얼마 안 되어 끊어질 정도로 부족하진 않았다. 몇 번 더 전원버튼을 누르고 충전기에 꽂고 잠깐 기다리거나 해도 도저히 돌아오지 않는 전원. 빛이 들어오지 않는 새카만 화면엔 제 얼굴만 실컷 비쳐서. 홧김에 휴대폰을 홱 집어던진 곳은 침대였다. …혹시 바닥에 던져서 부서지면 나중에 날이 풀렸을 때—지금으로서는 그때가 올 지도 의문이지만—못 쓰니까.

아무튼 지금은 이런 시덥잖은 생각을 할 게 아니었다. 선하와 연락은 닿았으니 일단 아마 집일 것이라는 추측과 함께, 할 수 있는만큼 얇은 옷들을 층층이 껴입고 고이 모셔둔 롱패딩까지 입은 뒤에 집의 문을 열면 맞이하는 것은 차마 다 느끼지 못한 한기라. 개중에서도 제대로 감싸지 못한 발이 더 그래서. 혜비가 발을 빠르게 놀렸다. 푹푹 밟히는 눈이 상대적으로 취약한 발을 저리게끔 하는 한기로 감싸면 그를 떨쳐내기 위해 더 힘차게 달리고, 그러다 잘못하면 더 깊이 파고들기도 하는 악순환의 랜덤. 그런데 이상하지, 제가 찾으러 가는 사람이 이 새하얀 눈밭 위에 모습을 보인다는 게. 순백 위를 달리는 벚꽃색의 분홍은 익숙하기 짝이 없는 색이라서. 선하—! 하고 외치면 저를 향해 달려오는 그것은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어서.

“혜비~!! 괜찮아? 얼굴 빨개진것봐…”

“선하도 얼굴 엄청 빨개졌어, 신발도 제대로 안 신고 나온거 같은데 얼른 가자.”

선하는 혜비를 의지하고, 혜비는 선하를 의지하고. 서로의 몸을 지지대 삼아서 눈밭에서 빠져나가는 것은 분명 혼자 걸을 때보다 힘이 더 들 텐데. 걸음 몇 번에 말 몇 마디씩. 집에 들어가지 못한 채 바깥의 눈밭은 여전히 추웠고, 손이 아플 지경으로 언 데다 발도 축축하다못해 찌르는 것 같지만. 서로의 말 몇 마디를 나누며 나아가는 지금은 딱히 그것은 아무래도 좋아서. 길을 잘못 든 건지 계속해서 걸어가는 발걸음은 길었고 서로는 그것이면 족했다. 대체 얼마나 걸은 건지도 모르겠고, 분명 사람의 신체가 버틸 수 있는 한계점에 임박해 오고 있긴 하지만. 그럼에도.

그런 시간이 멈춤을 알리는 것은 우뚝 몸이 멈춰버렸을 때. 그리고서 서로 시선을 마주하면 벚꽂색과 하얀색이 서로를 보고 있다. 봄에 피는 봄꽃과 봄과 여름에 걸쳐 산란하는 새. 서로는 서로를 그렇게 불렀으니, 우리는 지금 봄이 아닐까. 그런 말을.

그들은 봄에 있었다.

4월의 겨울은 그렇게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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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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