뱃놈
우리 결국 어떻게든 뱃놈이 되어.
철썩, 쏴아아. 파도가 드세게도 방파제에 부딪치던 소리. 새파란 것이 새하얀 물거품과 함께 와 철썩, 부딪치고는 윤슬이 빛나던 광경. 그리고 그 모든 과정을 지켜보던 두 꼬맹이. 귀에 익은 소리가 돌아올 수 없는 과거를 불렀다. 소라고둥이 담은 옛 바다의 소리처럼, 여전한 소리가 담은 과거는 짠 내음과 함께 훅 밀려들어왔다. 그날 썰물과 함께 실려간 것은 너였고. 지금 돌아오는 것은 그렇게 갈려버린 우리의 결과라.
"오랜만이네." 그런 소리가 들렸다. 우융이 그토록 부정하고 싶었던, 최악의 밀물이었다.
~
파란 해적선, 현재 해군은 물론이고 세상에 널리 이름을 떨친 망할 해적선. 우융은 그 해적선의 위치정보와 함께 소탕하라는 명령이 떨어진 순간부터 올 것이 왔구나, 싶었다. 그 끄나풀은 물론이고 탑승한 이에 대한 정보라고는 알려진 것이 일절 존재하지 않는 미친 해적선이었다. 한낱 해적 따위의 입장으로서는 보기에도 힘든 파란 염료를 이용해 진하게 염색시킨 돛을 내걸고 있다는 것부터 수상하기 짝이 없는 새끼들인 것은 고사하고, 어떻게 한 번도 해군이나 다른 손에 잡히지 않고 살 수 있는지도 의문이다. 그 놈들은 뭐하는 놈들이야, 진짜 365일 내내 배에서 먹고잔다 해도 그만한 자원을 간간히 약탈해서 얻는 것으로 이용하는 것이 말이나 되나. 분명히 이것은 그 해적놈들을 후원하는 귀족과의 유착관계가 있을 것이다. 그런 의혹은 여전히 제기되는 중이고 저기 위대한 폐하께선 아직도 제대로 조사를 하지 못하는 상황이니 오죽하겠냐고, 아 씨-
"우융- "발! 깜짝이야.." 뭐해? 그리고 왜 냅다 욕이지?"
"아니 이건 놀랏, 아무튼 말 좀 하고 와라 진짜 하..."
나 이미 노크 몇 번이나 했는데. 하며 문을 닫곤 똑똑, 하고 문을 두드려 보이는 그는 이내 우융이 떨어트린 서류를 주워 정리해서 건넸다. 파란 해적선? 야 이거 우리꺼야? 아니, 대문짝만하게 적힌 파란 해적선이라는 이름을 보고 눈이 동그래져서 되물어버렸다. 얘네 분명 여기서 좀 멀지 않았나? 몰라 나도, 하필 거기 근처 해류가 좀 빠른 편이잖아. 아 시발새끼들... 사관학교에서 배워놓고 까먹었던 정보 환기도 시켜주고, 진짜 존나게 고맙네. 스트레스에 몰려오는 느낌에 우융은 앉아있던 의자에서 고개를 뒤로 젖혀야만 했다. 천장에 줄을 엮어 매어놓은 유등이 애처롭게 떨리고 있었다. 너만 떨리냐? 나도 떨려. 왜 물건한테 그래. 아니 근데 진짜로... 어떡하지 행크? 으아아- 하는 앓는소리가 얼굴을 감싼 손 틈 사이에서 흘렀다.
"좋게좋게 생각하자, 얘네 관련해서 소탕 명령 내려온거면 상부에서 나름 높게 쳐주고 있다는 거 아냐?"
"그걸 누가 모르냐, 문제는 그거지. 기대하겠다느니 어쩌니 해놓고 못하면 존나 깨지잖아. 나 벌써 소문으로 3번이나 들었어."
"이제 영광의 4번째가 되겠네."
"영광은 지랄."
연신 한숨만 푹푹 내쉬는 우융을 보면서 행크는 과연 이 말을 해야 할까, 파란 해적선의 선장에 관한 외양이 떠올랐으나 차마 전하지 못하고 목 아래로 밀어 넣었다. 행크는 우융이 왜 저렇게 이번 임무에 대해 부정적인지 잘 알고 있었다. 우융에게 필요한 목표, 그것은 옛날 살던 마을에서 친구를 납치해간 해적들을 소탕하고 친구를 되찾아오는 것.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해군에 들어온 우융은 제법 높은 귀족과의 연줄을 통해서 군의 규칙을 일부 무시하면서까지 그 목표에 진심이었다. 그렇지만 이렇게 명령이 내려와버린 이상 우융이 그것마저 무시할 수는 없다. 우융이 지니는 특수한 위치도 직통으로 내려와버린 명령을 거부할 수 있게 해주진 않는다. 그것이 우융이 품은 불만의 모든 것이었다. 이럴때는 참 애가 단순하단 말이야.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입 밖에 내뱉는 불상사를 저지르진 않았다. 내뱉어야 할 것은 따로 있으니까.
"아무튼 요기라도 해. 너 아직도 저녁 안먹었잖아."
그리고 어차피 3일 뒤면 싫어도 끌려나갈 텐데 뭘 지금부터 죽상이야? 장난스레 말한 행크는 제가 말하고 잠깐의 침묵 후에, 공문 내려오고 나서 3일 뒤에 출격? 이거 좀 미쳤네. 해서. 우융이 픽 웃었다. 뭐야, 지가 말해놓고. 바보를 보는 눈으로 행크를 보면 행크는 아무튼, 하며 방을 나선다. 탁, 하는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우융은 행크가 가져다 준 다 식은 빵을 집었다.
빵은 맛이 없었다.
묘한 감이 우율에게 신호를 계속 보내는 중이라서 더.
~
파도소리. 그 중에서도 배가 물살을 가르면서 들려오던 물소리. 이 빌어먹을 물소리가 익숙해진 것은 대체 언제부터더라. 사실 파도소리 자체가 익숙한 것은 태생이 바닷가에 있던 어민들의 마을이라 퍽 익숙할 수 밖에 없긴 했다. 눈 뜨면 들리던 것이 파도소리라 해도 좋을 정도로 파도가 가까운 곳에서 살았었고, 그만큼 익숙하면서도 기분좋게 들었던 것이 바다에서 나는 물소리니까. 파이브는 파도소리를 사랑했고, 잠시 미워했다가, 결국엔 그런 파도소리를 향한 미움까지도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 바다는 모든 것을 품는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어쩌면 그도 그런 바다를 닮아갔을지도 모르는 일이고. 그렇지만 왜인지 그 파도소리가 요즘따라 거슬리기 시작한 것은 어째서인지. 멀리한 것 같았던 감정은 대체 왜 또 밀려오고 있는지. 그런 생각을 하다 입 밖으로 흘러버린 것은 웃음이었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하는. 스스로에게 하는 말처럼.
가장 처음 파도소리를 사랑하게 된 그 시절을 기억하고 있다. 방파제에 물이 부딪쳐 뒤어오르는 물방울마저 아름답다고 생각한 시절에는 같이 꿈을 꾸던 한 살 많은 친구도 있었는데. 그때엔 배에 오르는 것이 꿈이었고, 항해를 하는 것이 꿈이었고, 군에 대한 환상이 뇌를 가득 채우던 시절이라. 파이브는 기왕이면 해군의 항해사가 되고 싶었다.
"...꼴값도 이런 꼴값이 없지."
갑자기 불편한 기억이 떠올라서였는지 옛 추억을 회상하는 것을 멈출 때가 되었다. 파이브의 꿈은 이제 물살에 쓸려나간 지 오래였다. 철썩 치고 돌아가는 물에 놓치듯 떨어진 꿈을 다시 주워담을 방법은 이제 더 이상 없다. 그러니까 파이브가 해야 할 것은 하나였다. 제가 타고 있는 이 해류가 이어지는 물길의 과정에 있을 해군을 또 유유히 따돌리는 것. 그리고 또 닿을 땅에서 살아남기 위한 물자를 채우고 오는 것. 이제 파이브의 꿈은 살아남는 것이었다. 파이브가 파도같은 것들에게 잡혀서 우악스레 떠밀려진 날부터 쭉.
철썩, 하는 파도소리가 났다. 파이브가 사랑한 고향에서 나던 것과 닮은 파도소리가. 파이브는 이번 파도의 끝에서 어떤 일이 일어날 것임을 알았다. 해적으로서의 경험이 말하는 예측이 아니라. 바다 위에 올라 배에서 벌어먹고 사는 것들이 가지는 특유의 직감. 이번에는 위험한 생길지도 모른다, 아니, 아마 분명히 생기겠지. 뱃놈의 감은 무시할 것이 못 됐다. 그러니 아마 무슨 일이 생길 것이고. 파이브는 그 찾아올 무언가를 맞이할 준비를 해야 했다.
철썩, 쏴아-
파도소리가 들렸다. 갑판에 묶여 붙잡힌 제 몸의 감각과 익숙한 마을의 풍경이 보이는 그곳은 파이브의 고향이라. 밤인데도 마을이 환했다. 그건 아마 저 멀리서 매캐한 연기와 함께 타오르기 시작하는 마을의 집들이 있기에. 쏴아, 하는, 귀에 익은 파도소리가 들렸다. 파이브가 사랑했고 파이브가 미워한. 이렇게나 철썩거리는데 저기 저 불들에게는 결코 닿지 않는. 이건 악몽인가?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니, 아마 분명 악몽이겠지. 갑자기 사람이 과거로 돌아올 수 있을 리가 없으니 이것은 제가 해적이 되던 날의 꿈이다. 마을을 습격한 해적단에게 끌려가면서 강제적으로 해군을 꿈꿀 수 없게 된 그날의.
그때, 그 불길 속에서 떨어져 나온 작은 불씨 몇 개가 이리로 오고 있는 것은 파이브의 시선을 그리로 가게 해서. 작은 불씨가 해적선 방향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작은 불씨는 횃불이었고, 굳이 그걸 또 들고 여기까지 달려오는 것은 그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이라서. 횃불이 밝힌 그 새하얀 얼굴은, 그 위에 달린 새카만 머리카락은.
"우융."
너야? 파이브가 중얼거렸다. 그 목소리가 전해질 리가 없을 텐데, 그런 중얼거림 후에 뜀박질은 더 빨라져서. 마을로 향한 해적들 탓에 거의 비다시피 한 해적선은 출발할 기미가 안 보였고 우융이 다가오는 거리는 순식간에 줄어들어 갔다. 우융은 계속해서 달려서, 횃불을 든 손으로 해적선을 향해 던지기 무섭게 도약해 배 위로 올라서. 파이브! 하는 다급한 외침이 들렸다. 파이브가 고개를 돌리려고 할 때에는 이미 그가 제 몸을 묶은 줄을 다 다르고 난 뒤였으나, 어째서인지 파이브는 쉽사리 이 발걸음을 뗄 수가 없었다.
"씨발! 파이브 뭐해!"
기이할 정도로 다급한 외침. 파이브의 기억에 따르면 일어날 수가 없는 지금의 현상. 그리고 그렇게나 애타고 심란해보이는 우융의 모습. 이건 어쩌면 파이브의 소망같은 것이었다. 우융이 횃불을 들고 나오던 그 때에, 조금만 더 빨리 달려서 자신을 구해주었더라면. 하는 그런 소망. 그래, 이건 전부 꿈이지. 파이브는 중얼거렸고. 씨발 빨리 가자고! 답답해진 건지 제 팔목을 잡고 나가려고 하는 우융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왜 늦었어?"
"...뭐?"
"왜 그때는 늦었어."
파이브는, 제가 묶여서 마을을 보던 그때를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다. 우융의 출발 자체가 이렇게 빠르지 않았다. 우융은 대충 화재의 진압이 완료되고, 해적선의 선원들이 다 복귀했을 때 쯤에 겨우 이리로 달려왔던 것 같아서. 물론 지금 그렇게 내뱉을 말은 아니었다. 사실 우융을 원망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꿈일지라도 이렇게 구해줄 수 있었는데,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어서. 어차피 이 모든 것은 꿈이니까, 그런 확신 하에 내뱉어지는 물음은 꿈 속의 어린 우융에게는 잔인한 물음이었을지도 모른다.
"우리 같이-"
파이브는 꿈을 믿었다. 믿는다고 해도 뭐 그렇게 거창한 것은 아니고, 마지막 제 발언에 대해 보여주던 얼굴이 마음에 걸렸다는 뜻이다. 그건 정말로 꿈이긴 했으나 아마 다른 무언가의 역할도 했을지도 모른다고. 자기 전에 들었던 예감이 꿈에 섞여서 그렇게 느껴진 것이라면야 그런 것이겠지만 느낌이나 꿈을 차마 무시하고 싶진 않았다. 우리는 어쩌면 오늘 만나게 될 것이다. 그런 확신과도 같은 감이 있었다.
어느덧 배는 육지가 좀 보이는 거리까지 가까워졌다. 인간의 시야범위 내로 배가 보이면 대체 무슨 기관을 달아놨는지 빠르게 추진해오는 해군의 배가 저를 잡으러 올 것이 뻔하지만 파이브에게는 어떤 자신감이 있었다. 혹시나 만약에 꿈이 암시한 만남이 군에 들어간 이와의 만남이라면 그것을 더 조심해야 하지만 결국 제가 따돌릴 수 있다 믿는 자신감. 그런 믿음에 박차를 가하듯 파이브의 등 뒤에서 세찬 순풍이 일었고.
"해군이 온다, 모두 준비."
파이브가 조타를 잡았다. 저기 멀리서 배가 다가오고 있었다.
~
—우리 같이 해군 하기로 했잖아.
그런 파이브의 목소리와 함께 잠에서 깼다. 우융은 식은땀으로 축축해진 제 몸을 한 번 만지고선 나지막이 욕설을 내뱉었다. 씨발, 뭔 꿈이... 중얼거리며 제 방에 있는 수건을 하나 잡아 식은땀을 닦았다. 우리 같이 해군 하기로 했잖아. 그 말을 곱씹자니 힘이 쭉 빠지는 느낌이었다. 파이브. 너는 살아 있는게 맞을까? 혹시 죽어서 내 꿈에 나타난 게 아닐까. 우융은 미신같은 것을 믿는 편은 아니었지만 바닷마을에 살았던, 그리고 배를 타는 놈으로서 미신을 무시할 것이 못 되기에 가끔 그런 생각이 들고야 말아서.
애써 우융의 몸을 움직이는 것은 바깥의 소란스런 분위기 때문이었다. 무슨 일이 일어나버리고야 말았다. 그리고 그건 아마 높은 확률로 빌어먹을 해적선 때문일 것이다.
조금만 더 기다려 봐, 그렇게 뇌까리는 것은 대체 누구한테 하는 말인지. 우융이 채비를 완료하고서 밖으로 나가자 혼란의 도가니 속에서 두리번거리는 행크가 보여서.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자 행크는 다짜고짜 우융의 팔을 잡아 끌었다. 야야야 행크 시발 뭐야? 지금 시간이없어 우융! 우리 빨리 배 타야해. 뭔, 뭔소리야 미친 우리 출격명령까지 아직 시간 남았어 이틀이야. 통신병이 파란 해적선 봤대. 그새끼들은 왜 보이고지랄- 아니, 미치겠네. 다급한 상황인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 급할 줄은 몰랐는데. 쯧, 하고 혀를 차며 거의 뛰다시피 군함에 오르자 보이는 것은 방금 막 정렬한 것 같은 군인들의 모습이었다.
"경례 생략! 뭐하고 있어 새끼들아! 지금이 오와 열 맞춰서 정렬할때냐?"
그들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우융의 호통이었고 행크 또한 올라오기 무섭게 각각의 위치에 배치된 인원들을 슥슥 파악하고선 명령을 내리기 시작했다. 군함의 함장이라고 할 수 있는것은 우융이었으나 부함장이라고 할 수 있는 행크가 함장의 역할을 대행하는 것은 우융이 항해사와 조타수의 역할을 동시에 하는 것과 더불어 우융의 뒷배가 이런 규율을 무시할 수 있게 해 준 결과라서. 출항명령을 내리는 행크의 목소리를 따라 함선에 달린 추진체가 배를 밀었다. 저 빌어먹을 해적선이 타고 있는 해류를 따라 타서 바람만 잘 받으면 빠르게 접촉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저 파란 해적선이 가장 가장 가까이 다가온 것도 어쩌면 지금이 최초이리라.
항해란 바람의 방향과 물길을 보고 적절하게 배를 움직이는 행위다. 그리고 항해는 우융이 가장 빠삭하게 이해하고 있는 분야였다. 고향에선 파이브 탓에 알고싶지도 않은 항해 행위를 이용한 게임을 하면서—우융이 생각하기에 그것은 아마 귀족층을 대상으로 한 학습용의 보드게임이었을 것이다—우융은 그때부터 항해를 간접적인 형태로서 익혀오다 후원자를 통해 사관학교로 들어가면서부터 그것을 다시 복습하고 인지하며 동기들 중에는 제가 제일 뛰어남을 알았다.
그런데 이상하지, 잡힐듯 말듯 한 애매한 거리감이 해적선과 우융의 함선 사이에 있었다는 것이, 마치 저를 약올리는 것마냥. 더 앞질러서 포격을 가하기에도 애매하고 그렇다고 제법 근접하게 붙어서 아예 배를 넘어서 싸울 수도 없는. 정말로 막연한 두 배의 거리감에서 우융은 불현듯 기시감을 느꼈다. 파이브 때문에 반 강제로 하게 되었던 놀이에서도 분명 이런 경우가 허다했던 것 같은데. 갑작스레 떠오르는 기억에 우융은 머리를 털었다. 걔가 여기에 있을 리가 없었다. 눈으로 보이는 저 조타수도 파란 머리가 아니지 않은가. 물론 거적떼기로 둘렀다곤 하지만, 아무튼.
"행크! 우리 추진체 연료 다 사용했었나?"
"아마 아닐걸? 조금 남아있을거야. 보고 올게."
파이브에 대한 생각을 버리고 우융이 떠올린 것은 군함에만 달려있는 추진체. 저 해적 새끼들이 약탈을 해봤자 이건 약탈 못하겠지 싶은, 군의 함선에만 달려있는 신형 부위. 행크가 금방 확인해보고 온다 했으니 남은 양만 있다면 순식간에 새파란 해적선의 앞으로 추월해서 포를 쏘아버리면 되는 일일 테다. 우융! 아직 남아 있어! 행크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제 사용명령을 내리고 추월해서 포를 쏴버리면 되는데, 왜 이렇게 그러면 안될 것 같지? 묘한 불안감이 쿡, 쿡, 하고 우융을 찔렀다.
"우융?"
"어, 어?"
"추진체 사용하는거 아니었어?"
사용, 사용해야지.. 어. 그렇게 떨어지는 허락을 행크가 전하면 배에 달린 추진체가 열을 토해서. 빠르게 나아가는 배가 해적선과 나란한 평행을 유지했고, 역풍이 불어옴과 동시에 우융은 제가 방금 전까지 주시하던 조타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어?"
머리를 감싼 거적떼기가 하늘로 날아오르며 감싸던 군청의 색상을 드러냈다. 눈동자도 머리카락도 모두 바다를 닮은 주제에 머리카락은 그 바다를 몇번이나 더 겹쳐버린 그런 진한 푸름이. 그것은 분명 제가 아는 모습과는 많이 달라졌지만 저것은 제가 아는 걔라고. 파이브. 그 이름이 나오자 제 옆에 있던 행크가 입술을 꾹 씹었다. 그 반응에서 우융은 알았을 테다, 행크는 파이브의 존재를 이미 알고 있었음을. 그런데 굳이 우융이 아는 것을 원하지 않았음을. 행크, 너-
"오랜만이야."
우융이 뭐라 말하기 전에 말을 자르고 들어오는 목소리에 우융이 굳었다. 오랜만이다, 라고 태연하게 대꾸할 수 없는 것은 아마 파이브가 해적선에 있고, 우융은 해군이라는 위치이기 때문에. 사실 우융은 여기서부터 이해가 잘 안 됐다. 니가 왜 해적을 하고 있어? 그렇게 따지고 물을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여기서 말을 잘못하면 인생이 나락을 갈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것이 너랑 오랜만에 대화를 나누는 것보다 중요할까?
"우융."
행크가 눈짓하며 내뱉는 제 이름에는 대화하지 말아달라는 그런 의미가 있을 것이다. 아마 여기까지 같이 올라온 친구를 잃고싶지 않다는 마음, 그런 것이지 않을까. 제 팔까지 잡으면서 눈을 정면으로 직시해오는 그 시선은 우융으로선 분명 거부하기 힘든 종류일 테다. 그렇지만.
"미안하다 행크, 근데 넌 쟤가 아니잖아."
"우융!"
행크는 파이브가 아니었다. 우융이 애써 군에 들어간 이유도 아니었고, 단지 학교에서 만난 동기에 불과했다. 고작 그것이 다냐고 하면 또 그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지금은, 우융에게 지금은. 감히 말하길 행크는 지금 불필요했다.
"파이브."
너를 보고 제대로 네 이름을 불러보는 것이 대체 얼마만인지. 그런 생각을 하며 주먹을 꽉 쥐었다. 오랜만이라고 하던 네 목소리는 가라앉아 있었고 지금도 저와 마주하는 눈에는 은은한 호의가 있는데, 사실 대답하면서도 파이브가 어느 입장인지 우융은 확신하지 못했다. 부디 네가 내 생각처럼 평화로운 방법으로 이 만남을 끝내기를. 그렇게 빌었으나 그게 속 편한 생각임을 알았다.
"왜 이제야 왔어."
우융은 대답할 수 없었다.
"해군이 된 거야? 멋있네, 진짜."
축하해. 그 감탄이 전혀 좋지 않은 의미인 것은 자명해서, 우융은 그 비꼼에 아무 말도 못하고 맞아야 했다. "나는 이런 해적 꼴인데." 하는 말도. "그러고 보니 항해사 겸 조타수인거 같던데." 하는 말도. "우리 약속은 기억하면서." 하는 말도. 파이브의 말에 점점 열이 붙었다. 조금 더 감정이 실리고, 조금 더 빨라지고. 그리고 마침내.
"배신자."
터트린다.
파이브의 눈이 뜨거웠으나 물을 흘리지는 않았고, 목소리에는 이젠 세찬 분노가 서린 채로. 구해준다고 했잖아. 제가 왜 이렇게 화를 내고 있는지 파이브도 잘 이해하지 못했다. 굳이 이유랄 것이 있다면 제 앞에서 당당하게 군함에 서있는 우융의 모습 때문에. 우리 같이 군이 될 지도 모르는 일이었잖아. 꿈에서도 북받치듯 내질러 낸 비난의 말이 다시금 우융을 쿡 찔렀다.
쿵, 그리고 이내 함선이 흔들리는 것은 암초 하나에 박았다는 뜻이라서. 그제야 행크와 우융은 파이브에게 너무 많은 집중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파이브는 한번도 조타에서 손을 뗀 적이 없다는 사실도.
"안녕, 우융."
쏴아, 파도가 암초에 부딪쳐 갈라지는 소리가 났다. 그 소리 속에서 파이브는 유유히 나아가면서도 우융을 보고 있었고. 우융은 그저, 마치 옛날의 그때처럼. 제가 파이브가 탄 배를 가만 보고있던 그때처럼 파이브가 탄 배만을 봐서. 행크가 우융을 불렀던가? 그것은 기억이 잘 나질 않았다. 다만 기억하는 것은 단지. 단지.
쏴아. 파이브를 싣고 가던 썰물과 닮은 그 소리랑.
철썩. 아무도 없는 해변을 때리던 밀물과 닮은 그 소리였다.
제 4차 파란 해적선 소탕작전은 실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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