흩어진 글의 행방

잔상

공허 by 하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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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가워, 우리 초면인가? 이런 식으로 이야기 하는 것도 처음이고. 그치? 하지만 글자 하나하나를 낭비하지 않기 위해 공들여 작성하고 있으니 불편한 문제가 있다면 알아서 해결하길 바래. 우선 너에게 연락을 하게 된 경위부터 말해볼까?

글이 사라졌어.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야... 라고 생각하고 있니? 지금 잘만 보고 있는 건 글이 아닌가, 라고 생각하게 될테니까. 만약 정말 문제가 없었다면 내가 너에게 귀찮게 연락을 남기는 일은 없었을 거야. 나는 글이 소실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노력하고 있어. 조금 구식이어도 잉크를 적셔 작성하는 편이 감성 넘치고 소실을 늦출 수 있거든.

혹시 반말이 불편한 편인가? 괜찮아. 익숙해지면 쉬이 넘길 수 있어. 어차피 글로 접근하는 입장에서는 내가 누구인지, 몇 살인지, 외형이 어떤지는 묘사하지 않는 한 절대 모르잖아. 네가 내게 여성이라고 하면 여성이 되는 거고, 남성이라고 하면 남성이 되는 거야. 노인인가 어린 아이인가, 그 평균에 위치한 나이인가 막 성인이 된 존재인가- 를 굳이 지금 알 필요는 없지.

지금 중요한 포인트는 ' 글이 사라졌다 '이므로.

세상에는 온갖 이야기와 상상이 다른 존재를 통해 오가고 흡수되고, 배출된다. 나와 우리는 그 온갖 것들에게서 추측과 즐거움을 얻는 너를 위해 항상 노력하고 있지. 마치 마법과도 같아. 왜, 말 버릇 하나 존재하잖아. 고도로 발전된 지식과 기술, 과학은 마법과 다를 바가 없다고. 그런데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마법은 과학보다 환상에 속한단다. 일단 존재하고 있는 현상과 밝혀진 것으로 이루어진 과학과 달리 너의 꿈과 생각을 유연하게 굴려야 하는 환상을 연료로 삼고 있어.

우리는 연료 삼아 사용하는 마법에 ' 반드시 타인의 마음을 이끌어낼 것 '이라는 조건을 달고 있다. 이끌어내지 못하면 마법은 실패하고... 그대로 사라져 버려. 존재 했다는 흔적만 남긴 채 서서히 시간에 의해 부식될 거야. 마법과 사라진 글이 무슨 연관이 있다고 줄줄 늘어 놓냐고? 아까부터 말하고 있었잖아. 이건 일종의 주술이고 마법이야.

이미 사라져 버린 것을 언급하기는 어렵잖아. 그래서 글이라고 표현했어. 언제 어디서, 우리가 무얼 잃어버려도 금방 눈치챌 수 있도록 글자로 남기자. 이 상흔이 눈에 익어 도망치지 못하도록. 너무 어렵게 생각할 필요 없고... 그래. 네가 생각하는 기준의 '글' 을 대입하면 편하게 감을 잡을 수 있으려나.

저런, 슬픈 소식이 하나 있어. 곧 있으면 소실 방지 잉크가 떨어질 거야. 으, 악센트를 주지 말았어야 했나 봐. 혹시라도 네가 더 나은 환경에 놓여 있다면 좋겠다. 글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것이 찾아오지 않을테니까! 씁쓸하게도 그럴 일은 없겠지.

마침 때가 좋았네. 우리 쪽에서 말하기를, 사라진 글을 찾는 방법이 하나 있다고 해. 근데 이걸 위해서는 아무래도 네가 의미 없는 나의 연락을 열심히 살폈어야 하나 봐. 아아, 알았어. 본론으로 들어갈게. 잉크 없다면서 계속 사족을 단다고 꼬집지 마. 사라진 글을 찾는 방법은 어렵지 않아. 이 글들 아래로 백지 하나를 첨부할 거야. 말 그대로, 순수한 흰색. 하나도 적혀있지 않은 종이 그대로야.

세상에는, 세상과 세상 사이에는 더 큰 세상이 존재한다. 더 큰 세상은 당연하기도 그 상위의 세계를 요구하고, 또 세계는 세계 사이에 커다란 세계로 속해있다. 그러니 누군가는 거대한 세상 속에 살면서 사라진 글을 읽을 수 있을 것이고, 기억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글을 수용한다. 읽을 수 있는 존재 또한 수용한다. 그들이 드나드는 통로를 잡기 위해 공허가 존재한다. 이것은 공허의 가장 중요한 역할이다. 이름은 다양하지만 우리는 버려진 것들의 수용소, 색이 없으니 색을 채워나갈 수 있는 도화지, 어디도 속하지 못한 불쌍한 것들의 정거장이라 부른다. 여기 공허에서는 자신을 잃어버린 것들이 자신을 정의하기 위해 이야기를 찾아 헤맨다. 이들이 말하는 이야기는 주로 창작된 것, 기억, 추억, 그 어떤 것에 국한되지 않는다. 누군가가 보고 읊을 수 있다면 이야기라고 부르는 모양이다.

마구잡이로 흘러나오는 이야기는 정제되지 않아 문장을 이해할 수 없다. 혹은 너무 저급한 어휘만 사용해서, 문장과 이야기의 구성이 열약하고 조악하여 이야기라고 불러주고 싶지 않은 글. 그것은 단속되어 사라져야 한다. 단속을 하는 것은 작성자의 의지이거나 읽어주는 당신의 의지로 평가 내려 냉혹하게 사라지길 바라는 호소문이거나. 우리는 이 모든 것을 포함하여 규제하고 없앤다. 완전한 죽음은 존재하지 않으니, 흘러 사라지는 것에 소멸을 선고내릴 수 없다. 그럼에도 무질서함을 정리하기 위해 이렇게 정렬된 글을 적는다.

혹시 이 모든 것을 읽고 흰 바탕에 푸른 잔상이 남았다면 신고하길 바란다. 우리는 그 현상을 두고 ' 글의 소실 ' 이라고 부른다. 소실된 것은 이미 적혀진 글의 부스러기에 불과하다. 당신이 행방불명된 글을 읽으려고 애써봤자 이미 머리에 남은 글 그대로 비춰질 뿐이다. 찾을 수 없는 글을 찾는 짓은 그만 두어라. 공허의 괴물에게 먹이를 주지 마라. 그는 자신이 적은 것을 기억하지 못한다. 크기도 제각각인 글로 나타나고, 색상도... 아, 흩어진다.

···글은 정말 사라졌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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