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망 위에 존재 위에 생각

이런 시시한 제목 말고 다음달과 오늘 정각에 세상이 멸망하는 거 어떻게 생각해?

“나 다음 달 1일에 생일이야.”

“1일이라니 잘됐네.”

혜사가 한 말에 정이가 대답했다. 그리고 다시 세명이 침묵한 채 눈을 문제집에 두고 있었고 두 명은 고개를 든 채 침묵했다. 침묵이라는 단어는 너무 무거웠다. 그러면 너무 중대한 사항을 두고 할 말을 찾지 못해 침묵한 거 같았다.

“그리고 나 사실은 세상을 한 순간에 멸망시킬 능력이 있어.”

“세상을 멸망시킬 능력이 있다네 잘됐네.”

혜사가 한 말에 정이가 대답했다. 그리고 다시 세 명이 침묵한 채 눈을 문제집에 두고 있었고 두 명은 고개를 든 채 침묵했다. 그래 침묵이라기 보다는 그냥 존재한다고 했다. 여기에 5명이 존재했다.

“그리고 나, 생일에 세상을 멸망시키는 걸 시작할 거야.”

“왜?”

5명이 존재했다. 근데 세상이 멸망한다는 건 문제를 쳐다보기만 하는 걸 그만둬도 된다는 거지?

“17번째 생일까지 세상이 더 이어져야 하는 이유를 못 찾았는 걸.”

“트위터에서 사람은 그저 존재하기에 존재할 뿐이라고 이유를 찾지말라고 무습 사법 스님이였던가 사람이 말했다는 걸 들었어.”

마가 존재하다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눈은 여전히 문제집에 가 있고 손은 문제집의 문제들을 톡톡 건드리다 답을 적었다. 마가 나보다 성적이 좋은 이유가 다 있다. 대신 문제는 이럴 때 대화에 끼어들면 꼭 트위터에서 들은 이야기를 말한다. 아무래도 좋지만.

“사법 스님이라는 스님은 없어! sns에서 들은 이야기를 그대로 말하는 것까지는 참을 수 있지만 대강대강 말하는 건 좀 그만 해.”

미가 마가 한 말에 태클을 걸었다. 비슷한 이름이지만 둘은 가족관계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날 세상이 멸망하면 5일에 개봉하는 영화를 못 봐! 내가 예전부터 기다리고 있었다고 말했는데.”

아마 그 말은 미가 보고싶다고 한 수백개의 작품 중 하나에 해당할 거다. 혜사가 기억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미안해. 그럼 6일에 세상을 멸망시킬 게.”

하지만 그래도 사과하는 게 혜사였다.

“좋아, 그럼 세상이 멸망한다니까 공부는 할 필요 없겠지. 오늘은 여기서 해산!”

“오늘은 좀 쉬고싶은 기분이었는데 잘됐네.”

그 외는 모두다 적당히 와 워 와 하며 대답했다. 해산할 때 의미있는 말을 하는 사람은 이 스터디에 존재하지 않았다. 사실 나도 제대로 듣지 않아서 와 워 와 말고 다른 울음소리를 냈는데 기억하지 못하는 걸지도 몰랐다.

그렇게 오늘의 스터디는 일찍 끝나게 되었고 세상은 다음달 6일에 멸망하게 되었다.

 

하지만 오늘의 스터디가 끝나도 내일의 스터디가 있기 마련이다. 스터디라 해봤자 그저 이 5인이 사정이 되면 정해진 장소에 와서 각자 공부하는 것 뿐이고 가끔 정이가 같은 과인 마에게 질문을 하는 것 뿐이었다. 하지만 공부를 아예 안하면 더 귀찮은 일이 벌어지니까, 그리고 같이 공부하는 사람이 있다는 게 기분이 괜찮으니 모인다. 그날 아예 공부를 안 하는 사람도 있지만, 뭐 그런 스터디가 아니니까.

그 뒤 혜사는 며칠간 스터디에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같은 과라 가끔 스쳐지나가면 나를 보며 뭐라 말을 하고 싶어 했지만 내가 ‘응?’하면 ‘아무것도 아냐.’라고 돌아와서 나는 가던 길을 갔다. 그리고 얼마 안되서 정이도 다시 스터디에 합류했다.

아 그리고 그저께 나는 일본 포장마차풍의 오코노미야끼 가게에 가서 제일 비싼 메뉴를 시켰다. 모든 추가 재료를 다 넣은 호화스러운 메뉴였고, 같이 갔던 여러명의 친구 중에 한 명이 어쩌다가 그걸 시켰냐고 물었지만 세상이 멸망한다고 여기서 말하기도 뭣해서 ‘그냥, 지금 안 먹으면 영원히 못 먹을 거 같아서’ 라고 대답했다. 모두 잠시 나를 주목했고 내가 그런 말을 하다니 신기하다거나 맛은 어떠냐는 등등의 말을 했고 몇분 뒤 다시 자기들이 떠들던 화제로 돌아갔다. 나는 맞장구를 국악 무대의 징 치는 사람처럼 가끔 넣으며 가장 비싼 메뉴를 다 먹었다. 한 번쯤 시켜서 먹어보기에 나쁘지 않은 경험이었지만 두 번 다시 할 거 같지는 않았다.

그리고 5일날 정이가 다시 그 말을 꺼냈다.

“나 지금 세상을 멸망시킬 건데 혹시…이의있는 사람?”

혜사는 저번달에 당당하게 말을 꺼낸 것 치고는 작은 목소리로 느리다기 보다는 숨는 목소리로 말했다.

“뭐라고?”

문제집에 집중하고 있던 마가 다시 그렇게 되물었다.

“그, 나 내일 세상 멸망시켜서…혹시 너희들이 안 괜찮으면 안 하려고.”

“우리들은 신경쓰지 말고 그냥 하는 게 어때.”

70일만에 정이가 의미있는 말을 드디어 꺼냈다. 정이가 한 말에 혜사가 고개를 가만히 숙였다.

“너희들은…세상이 멸망한다 해도 아무렇지 않아?”

“아무렇지 않을 리가 없지.”

내가 말을 꺼내자 모두가 날 쳐다봤다.

“그야 죽는 건 무서운 걸.”

“그러면…혹시 안 믿는 거야? 그건 그럴 법 하지만…”

“딱히 믿지는 않았는데 혹시나 해서 안 시키던 메뉴를 시켜봤어.”

“나는 학교를 하루 빠지고 놀이공원에 혼자 놀러갔어.”

“나는…뭘 했더라.”

나>정이>마 순으로 각자 대략 한 달 동안 정이가 한 말을 듣고 했던 걸 말했다. 그 말에 정이는 우물쭈물하더니 고개를 조심스레 들었다.

“그럼 오늘 멸망시켜도 되는 거지?”

“어.”

“잠시만.”

마가 간단하게 수긍했지만 내가 이 스터디를 개최한 자로서 말을 안 할 수가 없었다.

“미가 존재하지 않아.”

“존재…하지 않아? 그건 무슨 말이야?”

정이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주위를 둘러보다가 미가 없다는 걸 깨닫고 나를 쳐다봤다.

“그 존재하지 않는다는 건…오늘 없다는 거야? 맞지? 혹시…큰 일이 있었다던가…”

“아 내가 단어 선택을 잘못했네. 오늘 없는 거 맞아. 6일까지 미루기로 한 것도 그 날 개봉하는 영화가 있기 때문이었잖아. 지금쯤 영화 끝났을 건데 메시지 넣어볼게.”

이 자리에 존재하지 않, 아니 없는 미에게 메시지를 넣었다.

[혜사가 오늘 세상을 멸망시킨다고 하는데 괜찮아?]

[이딴 세상 멸망시키라고 해.]

즉답으로 답이 돌아왔다. 뭔지 모르겠지만 동물귀가 있는 예쁘게 생긴 여자아이가 화내는 이모티콘을 보낸 걸 보니 영화가 어지간히 마음에 안 드는 걸 넘어 세상을 저주하는 상태까지 간 거 같았다.

“이딴 세상 멸망시키래.”

“아, 그래?…”

“미가 동의해줘서 잘됐네.”

정이의 말을 들으며 혜사는 다시 고개를 수그렸다. 그러지 않아도 될 건데. 아니 그래야 하는 걸까. 세상을 멸망시킨다는데.

“너무 긴장하지 않아도 괜찮아! 그야 큰일이지만, 기세만 있으면 뭐든 된다고 교수님도 그랬어.”

내가 오늘따라 더더욱 고개를 숙이려 하는 정아를 향해 적당한 위로와 응원을 건넸지만, 그 말에 정아가 눈을 크게 뜨며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 그런 거 아니야. 세상은 이미 멸망시켰어.”

“잠시만 우리는 아직 살아있는데?”

나는 그렇게 말하며 내 손으로 이마를 몇 번 쳐봤다. 감각은 여전했다. 그리고 그 외 기타등등도 여전했다. 나는 아직도 생각이란 걸 하고 있다.

“그, 미안. 설명이 부족했어. 12시가 되면 세상은 멸망할 거야.”

“우와, 지금 당장 멸망한다고 생각했을 때는 의외로 아무것도 안 느껴졌는데 지금은 조금 무섭다. 손에 땀 날 거 같아.”

“미안해.”

“안 사과해도 돼. 사과를 한다면 세상 멸망해도 되는지 안 물어본 사람들한테 해야지. 뭐, 그러러면 끝이 없겠지만.”

나는 그러고는 웃어주었다. 정이는 여전히 불안한 표정이지만 자기 나름대로 웃음을 지어주며 나를 쳐다봤다.

“오늘따라 말을 많이 하네. 그, 고마워.”

“그런가? 뭐 평소에는 그렇게 말을 안 하는 편이 아니야. 여기에서만 그런 거지.”

그래도 새삼 자세히 생각해보면 해산을 선언할 때 외에는 말을 한 적이 거의 없는 거 같았다. 여기서는 말을 할 필요가 없어서 가끔 들려오는 대화나 듣고 있었다.

그런데 세상이 멸망하는 구나.

응, 멸망하는 구나.

아니 진짜로 긴장하기 시작했다. 나라는 존재가 사라지는 걸까? 내가 지금까지 봐오고 배우고 즐겨오고 슬퍼하고 아무렇지 않아 했던 것들 전부가…

“그, 세상 멸망시키는 거 캔슬 가능해?”

“어, 그 미안해.”

“아~ 아냐. 이미 고개를 끄덕인 일이고, 네가 미안해 할 문제가 아니야.”

나는 손사래를 치며 정이의 사과를 무마하려 했다. 뭐든 사과는 부담된다. 감사도 부담된다. 아무렇지 않은 대화가 제일이다. 생각해보면 나쁜 것만은 아니다. 아니 오히려 무섭지만 나에게 좋은 일이 되는 것 같다.

“그럼 오늘은 여기서 해산하자.”

내가 한 말이 아니다. 마가 한 말이었다. 나는 기껏 비둘기가 짚는 빵조가리만큼 권위가 있는 대사를 빼앗겨 마를 쳐다봤다. 내가 살짝 입을 삐죽거리자 마가 눈을 살짝 내리깔며 말했다.

“오늘이 마지막날이라고 생각하니 안 해보던 걸 해보고 싶어서.”

그러고보니 마는 언제나 뭘 하든 집중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해산 선언은 아니어도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던가, 슬슬 마무리하자는 말은 미가 대체로 하는 편이고 혜사는 가끔, 정이는 가끔 상태가 안 좋아보이는 날에 말했다.

“그럼 나도 안 하는 걸 안 해보는 걸로 할게.”

처음부터 그리 중대한 일은 아니었지만 나의 넓은 마음을 처음으로 어필할 찬스라 느껴서 어필해보았다. 하지만 딱히 누구도 주목하지 않았고 신발을 신기 시작했다. 나도 따라서 신발을 신었다.

“그럼, 오늘은 한 번 다같이 교차로까지 가볼까.”

마지막으로 내가 문단속을 하는 순간, 정이가 의외의 말을 꺼냈다. 하지만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야 마지막 날이니까.

 

“그러고보니 원래는 세상을 멸망시키려고 한 건 너의 생일이었지.”

“어, 응.”

“굳이 생일로 정한 이유는 뭐야?”

정이가 한 말에 혜사가 침묵했다. 그리고 다시 두 명이 침묵한 채 걷고 있었다. 모두가 잠시 침묵했다. 침묵이라는 단어는 너무 무거웠다. 하지만 오늘은 너무 무거워도 별로 상관없을 거 같았다.

“그게, 생일을 나는 별로 안 좋아하니까. 안 좋은 일만 있는 거 같은데 태어난 이유를 모르겠고, 세상에도 괴로운 일만 늘어나니까. 물론 좋은 일도 있겠지만…사람이 고통스러워 하는데, 행복한 사람이 있다고 내버려 둘 수는 없잖아.”

“고통스러운 사람도 다 죽고 싶어 하지는 않을 거야.”

미가 조용한 발걸음과 함께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새삼 미가 시끄럽게 구는 걸 본 적이 없는 채 죽는 거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쉽다면 아쉬웠다.

“그렇지만, 아니야 그래 내 마음대로 한 게 맞아.”

“그렇지, 너 마음대로 하는 거지. 타인에게 들은 게 아니면 결국은 너 마음대로 인 거야. 결국 우리 5명에게만 물어본 거잖아?”

“미안해.”

“그러니까 우리에게 사과할 필요는 없다니까.”

정이의 말에 다시 사과하는 모습을 보고, 내가 적당히 토닥인다는 의미만 담아 혜사의 등에 손을 대고, 뗐다.

“나도 반대하지 않았으니 사과받을 이유는 없지. 딱히 세상이 멸망한다고 해서 아쉬울 게 없어. 잘 됬다고 말하기까지는 애매하지만. 뭐.”

“잘됐다, 라고 말하는 게 그냥 맞장구가 아니었구나.”

“대부분은 맞장구가 맞아.”

소리가 조용한 정이와 마끼리 이야기를 나누니까, 침묵보다는 가볍지만 너무 존재하는 거 같았다. 존재한다, 까지가 적당한데. 그래서 나는 일부러 정아에게 말했다.

“그래서? 생일날 세상을 멸망시키려는 이유 더 들려줘! 기왕이면 알고 죽자.”

“어, 그래서 별 거 아니고…”

“아 미다! 미! 잠시만 기다려!”

물어봐 놓고는 미안한 일이지만 편의점의 불빛 앞에 미가 보여서 혜사의 말을 끊고는 손을 필사적으로 흔들며 미에게 달려갔다.

“뭐야, 너희들이잖아. 또 날 지인으로 착각한 사람인가 싶어서 긴장했어.”

“지인이었습니다- 그래서 진작에 집에 간 줄 알았는데 왜 여기에 있어?”

“오늘의 영화가 내가 보는 마지막 작품이라고 생각하니 억울해서 술이나 좀 까려 왔어.”

아직 마시지도 않았는데 알코올 원액의 독한 냄새가 올라오는 거 같은 미의 말에 혜사는 또다시 반복했다.

“미안해.”

“캔슬 무리인가 보네. 뭐, 그래 인생이란 그런 법이지. 쓰레기같은 영화를 보고 침대에 비난을 곱씹으며 죽는 거면 무난하게 죽는 거야. 지잡대라 불리는 곳에 뭘 열심히 해도 지잡대 취급 받으며 죽도록 일하다 병에 시달리며 죽는 것보다야 낫지.”

미가 그렇게 말하며 맥주캔을 따자 가벼운 탄산의 소리가 말끝을 장식했다. 솨아- 음향효과가 좋았다. 오타쿠같은 걸 좋아하면서 동시에 영화도 좋아하니 그런 소리도 자연스럽게 어우러지게 만드는 걸까.

정말 이런 마지막 날은 괜찮은 거 같은 기분이 들었다.

“병에 걸리든 건강하든 마지막까지 누구든 행복하기 위해서 복지학이 있는 건데.”

복지학을 복수 전공 중인 혜사는 그런 음향효과를 못 느끼는 건지 어깨를 조금 내려트리며 말했다.

“내가 죽기까지 가능할 거 같아?”

“아니. 죽고 나서도 안 될 거 같아.”

정이는 그렇게 말하며 어둠에 대부분을 잡아먹힌 채, 몇 몇 부분만 가로등의 밝은 빛을 받는 대학을 쳐다보았다.

“그렇게 생각하면 이렇게 된 건 잘됐네.”

제법 먼 눈을 하고 있었다. 복지학은 정확히 뭘 공부하는 걸까. 복지가 앞으로 발전하지 않을 거라는 것? 그건 아닐테지만 정이에게는 그럴지도 모르겠다.

“그래 네가 언제나 말하는 거처럼 잘된 거야 잘 된 거. …아, 잠시만 기다려봐.”

맥주캔을 딴 미는 마시려고 입을 캔 끝에 가까이 대다가 거품이 캔 밖으로 나가기 전에 멈추었다. 그리고 몸을 일으키더니 한 치의 망설임도 편의점 안으로 들어갔다. 우리들은 그동안 3시간 21분 남은 존재함을 딱히 즐기지 않으며 존재했다. 참고로 3시간 21분이란 건 내가 대충 예측한 거였다. 진짜는 얼마나 남았는지 모른다.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미가 무언가 봉지를 껴안은 채 편의점의 유리문을 몸통으로 세게 밀어재꼈고, 그 덕에 어느새 미의 팔뚝에 끼워져 있던 열린 맥주캔이 날라갔다.

“아.”

미의 그 말을 끝으로 맥주캔은 도로에 가벼운 금속음에 그보다는 무거운 액체를 얹으며 내다가 도로를 자기가 가진 모든 맥주로 적셨다.

“아…맥주가.”

“생각해보면 오늘 12시가 넘은 다음에 영향이 가는 잘못한 일은 잘못한 일을 한 게 아닌 게 되는 거네.”

“갑자기 뭔 뚱딴지 같은 소리야? 맥주 잃은 사람의 마음은 생각 안 해?”

마의 나도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에 미가 노려보았다. 마는 도로에 어떤 움직이는 빛도 없는 걸 확인하고 맥주캔을 주웠다.

“오늘의 음식의 낭비는 적어도 오늘의 세상에는 악영향을 주는 게 아니니까. 그러면 잘못한 게 아닌 게 되니까.”

그렇게 말하고 마는 정이의 어깨를 툭툭 건드렸다.

“뭐 해. 너의 트레이드 마크를 말해야지.”

“그거 맞장구라도 정말 아무 의미 없이 말하는 거 아닌데.”

“그런 거였구나 미안해.”

“근데 트레이드 마크처럼 사용해도 문제는 없는 정도야. 그래 잘됐네.”

정이와 마의 그런 대화를 지켜보며 미는 혀를 찼다.

“너희 둘이 친구 먹은 거 마냥 이야기하는 걸 들어야 하는 것도 다 내가 언제나 서툰 잘못이다.”

그리고 품에 이제는 불편하지 않게 껴안고 있던 봉지를 열었다. 거기에는 조각케이크가 몇 개 들어가 있었다.

“그, 우리에게 주는 거야?”

혜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미가 거칠게 고개를 끄덕이자 모두 한 조각씩 집으려 했지만 갑자기 봉지는 뒤로 물러섰다. 우리들의 손길이 허공만 잡으며 미를 의아하게 쳐다보자 미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내가 늦춰버렸지만 생일 축하는 해야지.”

그러고는 바닥에 조각 케이크 뚜껑을 하나씩 따며 조심스럽게 늘어놓았다.

“혜사는 생일 축하 안 좋아한다던데.”

내가 미리 그렇게 말하자 미가 조금 찌푸린 표정으로 혜사를 쳐다보았다. 혜사는 몸을 움츠려트리며 다시 “미안해.” 라고 말했다.

“생일날 세상을 멸망시킨다는 건 그만큼 그 날에 그걸 하는 게 의미가 있어서 하는 거 아니야?”

“그건 맞는데.”

“그러면 축하하자.”

정이가 먼저 길바닥에 앉아 케이크를 짚자 혜사가 조심스레 케이크 앞에 앉았다. 그걸 보고 마가 바닥에 문제집을 깔고 앉았고 미는 그냥 털썩 주저앉았다.

“오늘 영화가 감독을 찾아가서 각본으로 때리고 싶을 정도인 걸 알았다면 세상 멸망시킨다 할 때 아무 말도 하지 말 껄.”

“뭐 지나간 건 어쩔 수 없지. 생각하지 말도록 하자.”

나도 케이크 앞에 발끝과 무릎만 길바닥에 닿도록 불편하게 앉으며 불가능한 말을 했다.

“그럼, 혜사, 아까 나한테 왜 생일 날에 세상을 멸망한 이유 말해봐봐. 건배사라고 해야하나 케이크사 대신 하자.”

혜사가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나를 쳐다봤다.

“그거, 잊은 줄 알았는데.”

“미를 부른다고 잠시 캔슬해두었지.”

“멸망은 캔슬이 안 되는데 그건 캔슬이 되는구나.”

마가 밤하늘을 쳐다보며 중얼거리지만 모두에게 말하듯 그런 소리를 냈다.

“세상은 언제나 부조리하네.”

“…”

마 그냥 조용한 애인 줄 알았는데. 뭐, 우리는 만나서 제대로 된 대화를 별로 안 해 봤으니 오늘따라 모르는 면모가 늘어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마는 그렇게 잠시 하늘을 쳐다보다가 혜사를 쳐다보았다.

“뭐 해?”

“어, 그게.”

“케이크사 해야지.”

마의 조용한 표정에 정아는 잠시 케이크와 마의 얼굴을 번갈아 보더니 케이크를 들고 조용히 일어섰다. 바람이 불었다. 케이크를 든 정아의 얼굴에는 지금까지 못 보던 그 어떤 침묵, 존재, 대화, 나, 정이, 마, 미 보다 조용한 얼굴이 급하게 휘갈긴 듯 그려져 있었다. 마지막을 그렇게 장식할 수 있다니 그 마음가짐을 약간 부럽다고 생각했다.

“저는 지금까지 아무도 진심으로 축하해주지 않으면서 생일을 축하해주는 게 너무 싫었습니다.”

새삼스럽게 인식하지만 여기는 길바닥이었다. 그러니 우리를 피해 지나가는 사람도 종종 나타났다. 하지만 뭐 내일 멸망하고 그 원인이 앞에 있는데 어쩌겠는가. 무엇보다 혜사가 케이크사를 하고 있으니까.

“특별하게 너무 불행한 게 아닌데도 태어났다는 사실이 너무 무거워서 싫었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아무런 의미 없는 축하를 건네는 게 너무 싫었습니다. 그래서, 세상을 멸망시키자면 생일날 멸망시키자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니 적어도 지금 이 순간을 축하하자. 다시는 안 돌아올 순간이니까.

“비록 생일은 지나가버렸지만…멸망 축하해!”

그리고 우리는 다 같이 혜사를 따라 멸망 축하해! 라고 소리쳤다. 안 익숙하고 앞으로도 안 익숙해질 단어 조합에 혜사는 얼굴을 붉히며 주저 앉아 허겁지겁 케이크를 먹었지만, 나는 이 안 익숙한 느낌이 나쁘지 않았다.

불편하지만 나쁘지 않은 생일파티였다. 적어도 내가 중학생 이후로 지금까지 의자 하나를 차지한 생일 파티 중에서는 유일하게 즐겁다는 느낌이 들었다.

 

생일 파티 후, 모두 각자 헤어져서 집으로 돌아갔다. 길이 마와 겹쳤지만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다. 다만 버스 정류소에서 멈춰선 마가

“안 무서워?”

라고 물어봤길래.

“무섭지만 참아야지 뭐.”

라고 대답했다.

“그래 이정도는 감수해야지.”

마는 그렇게 말하고는 어색하게 손을 흔들고 고개를 돌렸다. 그게 나와 마의 마지막인 거 같았다. 나는 그대로 걷고 걷다가 집으로 돌아갔다. 어르신들이 죽는다면 집에서 죽고 싶다고 하는 걸 들었는데 나는 아직은 잘 모르겠다. 지금이라도 고급 호텔에 방을 잡을까 싶었지만 그래봤자 예약하고 가면 12시가 다 될 거고, 세상이 멸망하지 않는다 해도 갑작스러운 큰 지출을 감당할 용기가 나에게 없었다. 그리고 내 침대도 밖에 오래 있다가 누우면 편하다. 양치질도 하지 않은 채 나는 옷만 벗고 침대에 들어갔다. 이대로 잠이 들 거 같은 예감에 나는 휴대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10시 57분. 그리고 마지막의 10시 57분 밑에 [고마워]라는 메시지가 떴다.

[별 말씀을]

그러자 바로 읽음 표시가 뜨며 상대방이 메시지를 쓰고 있다는 표시가 떴다.

[혹시나 말하지만 스터디에 나를 초대해줬던 일에 대해 고맙다는 말이야]

[그렇구나 나는 별 생각없이 비슷비슷한 사람을 모았던 것 뿐인데]

그리고 채팅방에 침묵이 존재했다. 익숙한 존재감이었다. 핸드폰을 끌까 생각하던 차에 메시지가 다시 왔다.

[세상을 멸망시키는 건 분명 이 역사를 통틀어서 누구보다 큰 잘못일 거야]

[그럴지도]

[멸망시키는 사람도 멸망에 동조한 사람도 다 학살자들보다 더 끔찍한 사람일 거야]

상대방이 하고싶은 말이 뭔지 잘은 모르겠다. 하지만 아무래도 지금 멸망하기 전까지 1시간 1분이 남은 지금 이 사람이 상당히 죄책감을 안고 있다는 건 알겠다.

[음 글쎄다.]

[세상이 사라진다는 건 지구, 혹은 외계에 존재하는 모든 생물의 목숨이 끊어진다는 거야.]

나는 죽기 전에 그런 거창한 고민을 딱히 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메시지를 보내는 상대방도 마음의 짐을 좀 덜기 바랬다. 얼마나 끔찍한 사람이든지. 어차피 세상은 멸망할 테니까.

[음 나는 멸망에 동조라고 해야하나? 딱히 멈추지는 않았던 사람으로서 말하기는 뭣하지만 세상을 멸망시켜줘서 조금 고마운 걸.]

[왜 고마운데?]

[그야 취직 걱정도 노후 걱정도 인간관계 걱정도 안 해도 되니까.]

조금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생각을 더 이상 안 해도 되니까. 하지만 최대한 좋게 들리기 위해서 그런 식으로 메시지를 적어 보냈다. 그리고 다시 채팅방에 침묵이 존재했다. 이번 침묵은 길었다. 너무 길어서 주위를 잠시 둘러보았다. 저기 있는 온갖 종이들도, 가방도, 옷도, 서랍장에 어지럽혀진 여러 잡다한 것들도, 이 핸드폰도, 교과서도 뜯긴 채 내버려진 초콜릿도 생각하기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세상이 멸망하면 전부 사라져서 이것들이 전부 사라져 나도 사라지게 될 것이다. 가볍다는 무게조차 사라지는 가벼움은 무엇일까? 짐작도 가지 않는다. 미지에 대한 공포가 편안한 마음 위에서 기어다니기 시작했다. 이럴 때는 자는 게 최고다. 나는 핸드폰을 끄고 눈을 감았다. 수마가 의식을 덮는 와중에도 생각했다. 적어도 세상을 향해 사과는 하는 게 좋을까. 뭐 내가 상대방이었다면 뭐 이딴 놈이 다 있나라고 생각했을 거니까…그냥 자자. 마지막 잠이다. 그런데 보통 사람이 죽었을 때 영면한다고 하니까… 기왕 깨어있는 게 좋은 걸까…세상에서 제일 끔찍한 사람으로서 잠에 든다는 것도 둘도 없는 경험이다… 오늘은 재밌는 걸… 많이… 경험했다.… 나는……………그러고 나서……………사라진다는 게……………너무…

 

세상이 곧 멸망한다는 사실에 문득 어떻게 멸망하는 걸까 궁금해졌다. 그래서 뛰어오르니 나는 우주로 날라갔고 지구는 폭발하기 시작했다. 반쪽으로 갈라져가는 지구 위에 사는 사람들은 반대편의 쪼개진 지구와 전쟁을 하기 시작했다. 지구가 조각조각 부서졌다. 곧 있으면 완전히 먼지덩어리가 되어버릴 거 같다. 그 때 문득, 오늘 메시지로 대화를 나눴던 상대가 누구인지 확인을 전혀 안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송전탑이 남아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나는 핸드폰을 켰


안녕하세요. 펜슬에 처음으로 창작 단편을 올려보는, 그리고 태어나서 처음으로 쓴 창작 단편 소설을 인터넷에 올려보는 에리나라고 합니다. 지금까지는 포스타입에 2차 창작을 올리고 살았지만 앞으로는 펜슬에서 활동하고자 하고 이 단편으로 스타트를 끊었습니다. 포스타입에서도 새벽에 쓰던 2차 창작을 냅다 올린 걸로 활동을 시작했는데 여기도 비슷하게 시작하게 되었네요.

새벽에 현실로 우울하던 차에 [밥은 나를 배신하지 않는다]라는 만화를 감명깊게(고통받으며) 보고 창작 의욕이 오랜만에 생기고, 또 쓰고있던 장편소설을 질질끌고 있던 나에게 무언가 짧은 거라도 소설을 완성한다는 게 나에게 좋은 자극이 될까 생각해 새벽 3시에(…)글을 쓰기 시작했고 한 3시간 정도로 하나를 완성시켰네요. 원래 구상은 좀 더 길었습니다만 지금의 기분을 사라지기 전에 담고 싶어서 이정도의 짧은 분량으로 마무리를 지었습니다. 지금 졸린 상태고 퇴고도 졸려서 계속 틀린 이름 고치기를 한 것 외에는 거의 없어서 매우 조잡한 소설일 거라 생각하지만 나중에 고칠 생각도 없어서 그냥 지금 올립니다.

고칠 생각이 없는 이유는 지금의 우울하고 힘든 나 자신의 사라지고 싶다는 욕망과 지금까지의 나 자신을 담아 쓴 소설이라 일기나 다름없지 않아서 입니다. 아마도요. 졸리니까 머리가 잘 안 돌아가네요.

읽어줘서 감사합니다. 세상이 멸망할 예정은 없으나 오늘도 저는 학교를 빠집니다. 그런 저는 제가 더 싫어지겠죠. 언젠가는 우울이 잠들어 다시 제대로 일상생활을 힘내가며 보낼 수 있도록 마음속으로라도 응원해주신다면 더 감사하겠습니다.

그럼 좋은 하루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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