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월

9211자

밀월

언젠가 배를 타고 좁은 해협을 건너 옛 왕국의 후계자가 남아있다는 소문이 돌았던 운석군 남쪽의 작은 섬에 찾아갔을 때 조각배를 태워주던 노인이 말했다. ‘모든 바다에는 얼굴이 있다’고. 

당시에는 바닷사람들의 지혜에 대한 단순한 은유인 줄로만 알았으나 오래 떠돌다보니 모든 은유에는 곡절이 있고 모든 설화에는 까닭이 있으며 모든 이야기에는 내력이 있어 그 어떤 것도 허투루 생겨난 것이 없다는 사실을 배워 그 또한 뜻하는 바가 있음을 알게 되었으므로 많은 나날이 지난 지금에 와서야 희고 푸른 포말을 앞에 두고 서서 노인이 들려주었던 이야기를 되짚어 떠올리게 되는 것이다. 

‘바다에는 얼굴이 있다.’ 

임레는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나기를 육지 사람으로 났고 제 발로 밟아 디딘 지반의 단단함만을 정히 알아 신뢰했기에 시시각각 그 모습을 바꾸고 예측할 수 없도록 변화무쌍한 바다와는 기질적으로 맞지 않는 사람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어김없이 겪는 뱃멀미가 그러한 기질의 원인일지 결과일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으나, 하여간에. 

그러나 지금은 사람들이 그 말에 새겨둔 빗살을 이해한다. 그것은 떠난 이들의 귀환을 기리는 제원(祭願)이었을 것이다. 돌아갈 곳을 지닌 이들은 그곳의 얼굴을 기억한다. 산야와 해협 가운데에서도 기어코 도드라지거나 패인 구석을 찾아 자신의 영혼을 그 가까운 곳에 꿰메어 두고선 평생을 그곳에 적을 두고 살아가는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그것이 삶의 의미가 되어주기도 한다. 그는 그것을 이토록 느리게 깨우쳤다. 배움이 늦은 까닭으로. 

그리하여 마침내 오래도록 내리던 눈이 그치던 날 흰 뜰에 나란한 발자국이 찍혔다. 그 날은 바람결도 잠잠하고 새로 찾아오는 객도 없어 사위가 꿈결처럼 고요하고 희었는데, 그 가운데 가만한 속삭임만이 눈 밟는 소리와 함께 도란도란 들려왔었던 것을 야산의 동고비는 기억할 것이다. 내용이야 하잘 것 없어, 여장의 점검이나 앞으로 밟을 길의 가늠과 같은 평이한 것이었는데도 어째서인지 그 속삭임은 정다운 밀어 같이 애틋했고, 야트막한 능선을 다 지날 때 까지 끊길 듯이 이어져 그치지 않았으므로 듣는 이가 있었다면 그들이 밀월 중인 연인들임을 어렵지 않게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언덕을 다 넘을 때 까지 아무도 그들과 마주치지 않았고, 곧 그들이 숲을 지나 완전히 모습을 감추었을 때 즈음에서야 사람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으니 여행의 시작은 오직 둘 만이 아는 역사로 남았을 것이며.

불이 떠난 숲 사이로 파도 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바람결에 나무 흔들리는 소리던가.

“임레.” 

반 걸음 뒤에서 호명이 들려오면 임레 삼사반은 어김없이 뒤를 돌았다. 머나먼 지표에서 물거품이 밀려왔다. 바람 부딪히는 듯한 소리와 함께.




먼젓번에 거리를 가늠한 바로는 낮은 산을 하나 넘어 마른 숲을 가로지른 다음 얕은 개울을 건너 들판에 다다를 때 즈음이면 해가 졌는데, 아무래도 여행길에 있어 하나와 둘은 발음 상의 차이 이상으로 다른 모양이라 개울을 건너기 전에 해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밤을 보낼 곳이 마땅치 않아도 홀로 가는 길이었더라면 눈서리나 찬바람 같은 것을 다소간 참아가며 야숙지를 물색했을 것이나 하나가 아닌 둘이었기에 사고와 판단은 예스러운 궤적과는 다르게 내려졌다. 

시나브로 사위가 어두워지자 임레는 오던 길을 되돌아가자고 고저 없는 목소리로 주장했다. 문 바깥에 장작을 쌓아두었다는 말을 할 때와 그렇게 다르지도 않은 얼굴이었다. 그 잠잠한 낯을 보면서 레녹스는 생각했다. 하루 꼬박 걸은 길을 아무렇지도 않게 되돌리자는 말을 할 수 있는 것은 그가 본디 태워 없애는 불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덥혀 살리는 불이기 때문일까. 

“정말 괜찮다니까?”

“안돼.”

“임레, 네가 잊었나본데 나도 네가 없는 십 년 동안 줄곧 방랑 생활을 했어. 지금 다시 산을 넘는 건 너무 위험해. 해가 지면 더 기온이 떨어질테니 차라리 빨리 불을 피우는 편이─”

“안돼.” 

“지금 어떻게 돌아간다고 그래……. 차라리 그냥 조금만 더 가보자. 그 사이에 네가 모르는 마을이 생겼을지도 모르고.”  

“레니.” 

임레가 단호하게 이름을 부르며 몸을 돌렸다. 그 표정이 어쩐지 깎아지른 듯이 날카롭고 어두워서, 재차 설득하기 위해 입을 열려던 레녹스는 부지불식간에 숨을 들이켰다. 제 앞에서는 한 번도 보인 적 없는 표정이다. 약학원에서도. 사막에서도. 눈 쌓인 마을에서 고요히 여행길을 준비하면서도. 그러니 그가 제게 나쁘게 굴 리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어쩐지 모르는 사람처럼 낯설었다. 

그것은 아마도 어스름의 마법일 것이다. 개도 늑대로 보이게 하고, 늑대도 개로 보이게 하는 시기의 마법. 홀로 발 닿는 곳의 초목이란 초목은 모조리 불태우고 다녔을 적의 너는 꼭 그런 얼굴을 하고 있었을까. 내가 모르고, 알 도리도 없는 시기의 너는. 

바람이 불어왔다. 문득 할 말을 잃고 잠시 공백 가운데에 머무르자니, 어디선가 문득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기 누구예요?” 

두 사람은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등불을 든 소녀가 이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정말 이런 곳에 마을이 있어?”

“몇 번을 말하게 하는거야. 속고만 살았어요? 그렇다니까요!”  

자신의 이름을 카야라고 밝힌 소녀는 등불을 높이 들어올린 채로 두 사람을 안내했다. 작은 마을이지만 설마 두 사람 몸 뉘일 곳도 마련해주지 못하겠느냐며, 자신을 따라오는 것이 이 추위에 바람 막을 곳도 없는 벌판에서 밤을 지새는 것보다야 백배 나을테니 따라오라는 호언장담을 듣고 두 사람은 서로를 한 번 마주 본 다음 소녀를 따라나섰다. 

임레는 따라 나서는 내내 소녀를 의심했다. 기억하기로는 분명히 몇 개월 전 까지만 해도 없었던 마을이었다. 약속을 지키기 위해 약학원 터로 향하는 여로를 밟을 때 까지만 해도 황량한 빈터였으므로 그의 의심은 일견 지당했으나, 다소 과민한 감이 없지 않았다.  

“없었는데.”

“새로 생겼어요.”

“어떻게?”

“잘 알고 있잖아요? 아무것도 없는 빈터라도 조건만 갖추어지면 마을이 들어설 수 있다는 거. 저승불이니까.” 

날선 의심에 돌아오는 것이 그 말이어서야 맞받아칠 말이 마를 수 밖에 없어서 임레는 잠시 침묵했다. 저승불이라는 이름이 나오자 곁에서 레녹스가 제 얼굴을 살피는 기색이 느껴졌다. 임레는 평이하게 대답했다. 

“나를 알아?”

“네. 당신을 아는 사람이 있거든요, 마을에. 걱정 말아요, 해코지 할 요량은 아니니까. 그럴 셈이었으면 그냥 그 자리에서 얼어죽게 내버려두고 왔지.” 

“그것도 그렇네.”

제 대답에 살피던 기색이 묘하게 변하는 것을 느꼈으나 임레는 짐짓 모른 척 곁에서 흔들리는 손을 잡아 쥐었다. ‘괜찮아.’ 눈이 마주치면 입모양으로만 속삭였다. 그제서야 얽힌 손마디가 마주 잡혔다. 멀지 않게 불빛이 흔들렸다.

의심이 무색하게, 소녀를 따라간 곳에는 정말로 마을이 있었다. 본디 사막을 제한 모든 곳이 푸르렀을 적에는 덩굴에 뒤덮인 유적으로만 남아 있었던 곳이다. 사람의 접근을 막는 초목이 추위에 바스라지자 사람들이 찾아든 모양으로, 어느덧 어엿한 마을의 모양을 이룬 지는 약 반 년여가 지났다고 한다. 동쪽으로는 개울이 흘렀고 멀지 않은 곳에 숲이 있었으며 허물어졌단들 토대가 되어줄 유적 터가 남아있었으니 생활을 꾸리기에 안성맞춤인 곳이라고, 임시로 마을의 장을 맡고 있는 청년이 설명했다. 

임레가 거화라는 것이 알려지자 이야기는 생각 외로 순조롭게 풀렸다. 지필 기름과 땔 나무가 귀한 시대. 태울 것 없이도 타오르는 흰 불을 나누어주고 다닌다는 남자의 이야기는 너른땅 곳곳에 알려졌으니 긴 겨울을 지샐 불을 나누어 주고 하룻밤 묵을 곳을 비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청년은 즐거운 기색으로 어느 곁채가 비어있으니 하루 이틀 정도라면 그곳에 묵어도 좋다고 말하며 길을 안내했다. 물자를 구하러 마을을 떠난 이가 쓰던 임시 거처니 지내기엔 불편하지 않을 것이라면서. 두 사람 모두 오랜 떠돎으로 인해 빌린 잠에는 익숙했고 작은 곁방이나마 머리 뉘일 곳이 있으면 족했으니 별 저어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춥지만 않으면 돼.”

“네가 추위를 타는 줄은 몰랐는데.”

“나야 그렇지 않지.”

레녹스는 그러면 나 때문이느냐고 되묻지 않았다. 묻지 않아도 확연한 일이었고, 그간 몇 번이고 확인한 사실이다. 그가 혼자였으면 하지 않았을 모든 것들을 레녹스는 가만히 헤아렸다. 이윽고 낮은 등불이 하얗게 찰랑였다.

곁채의 문이 닫히고 불이 든지 머지않아 넓지 않은 침상에서 속삭임이 사각거렸다. 작은 창으로 드는 바람은 체온으로 쉽게 무마되었고 날은 그리 춥지 않았으니 잠자리가 거칠어 고생하는 일은 없었고, 남은 것은 고된 몸을 뉘이고 품 안으로 온기를 밀어넣는 일 뿐이었다. 두 사람은 익숙하게 몸을 얽고 누웠다. 한 쪽이 다른 한 쪽을 품 안에 넣고 끌어안는 식으로 자세를 잡으면 좁다란 침상도 충분했다. 천이 바삭거리기를 한참, 곧 떠올랐던 먼지들이 가라앉을 즈음의 시간이 흐르면 그 사이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묵을 곳을 찾아서 다행이지.” 

“정확히는 묵을 곳이 우리를 찾아낸 쪽에 가깝지만 말이야.”

“그래서 널 안다는 사람은 누구였을까?”

“글쎄. 별로 알고싶진 않은걸.”

“그리운 사람일 수도 있잖아.”

“아닐 확률이 훨씬 높아.” 

가장 그리워하던 사람은 바로 곁에 있는 걸. 임레는 손을 뻗어 마주 보고 누운 레녹스를 제 품 안으로 바투 끌어당겼다. 레녹스 역시 이제는 익숙하게 편한 자세를 찾아 몸을 몇 번 뒤척이다가 곧 가만해진다. 일련의 움직임이나 뒤척이는 소리 같은 것들이 내심 좋아서 임레는 말없이 품 안의 진동을 가늠하다가 눈을 감았다. 그러고 나면 곧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오고. 

“임레.” 

“응.”  

“혼자 여행할 적에도 이렇게 했어?” 

“이렇게라니?”

“야숙할 곳을 공들여 고르거나, 사람을 의심하거나, 덧창 틈으로 바람이 들어오진 않는지 확인하거나 하는 것들 말이야.”

질문은 추궁하는 조도, 나무라는 조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대답은 잠시간의 틈을 두고 나왔다. 벽난로에서 불티 튀는 소리만 둥근 침묵 사이를 메웠다.

“아니.” 

틈 후의 대답은 아주 간명하게 주어졌다. 임레는 품 안의 연인을 고쳐 안았다. 

“그 땐 그러지 않았지.”

대답은 곧바로 돌아오지 않았다. 대신 소리없는 미소와 함께 ‘그래, 그럴 것 같았어.’ 잠기운이 묻어나는 웅얼거림이 품 안에서 희미하게 들려왔을 뿐이다. 머지않아 고른 숨소리와 함께 등어깨가 오르내렸다. 어느새 품 안의 그는 여로가 고단했는지 뒤척이지도 않고 잠들어 있었다.  그 어깨를 느리게 감싸쥐면서 임레는 생각했다. 

‘변했구나.’ 

정말로 그 때는 그러지 않았다. 이를테면 위험을 의심하는 일. 이전에는 중히 여기는 것이 달랐기 때문이다. 위험한지 위험하지 않은지를 가늠하기에 앞서 닥칠 위험이 감당할 만한 것인지를 먼저 생각했다. 죽는 것이 무섭지 않았나? 아니. 죽는 것 뿐만 아니라 그 때에는 무서운 것이 별로 없었다. 목숨이, 삶이, 그 외에 다른 모든 것이 제가 가진 것이 아니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것은 수여받은 것이고, 머지 않아 다시 돌려줄 것이라고. 그러니 잃는 것이 두렵지 않았다. ‘명심해, 임레. 사람은 죽는단다.’ 신기한 일이지. 그 모든 일을 지나왔는데도 가르침이 이토록 선명하다. 

그러나 이제는 사정이 달랐다. 그가 삶에 남은 재를 그러모아 사랑에게 떠밀어 안겼기 때문이다.

기실 나눈 시간보다 나누지 않은 시간이 더 길었다. 서로의 인생에 간섭한 부분보다 그러지 않은 부분이 더 많았고 서로에 대해 아는 것보다 앞으로 알아가야 할 것들이 더 많았다. 수백년이 지난단들 우리의 이야기가 설화나 신화 속의 애틋한 연인들처럼 극적인 첫만남이나 애간장 끊어지는 연애사로 회자되지도 않을 것이니(우리는 사랑 때문에 누군가를 죽이지도 않았고 죽지도 않았다. 아무튼 그런 류의 사랑 이야기에는 반드시 죽음이 잇따라야 했고.) 경솔한 이는 그런 종류의 사랑을 어떻게 확신하느냐고 물을 것이다. 시로도 노래로도 이야기로도 만들어지지 못할 사랑은 세상에 무엇을 남기는가?

이제는 안다. 그것은 죽음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는 길에 서슴없이 걸음을 옮기지 않는 것. 그리하여 그가 사랑하는 자신을 이 세상에 조금이라도 더 많이 남겨두기 위해 애쓰는 것. 모두 태우는 대신 남은 재를 물려주는 것. 더 이상 위험할지도 모르는 길에 망설임 없이 걸음을 옮기지 않는 것, 손을 잡을 때 장갑을 끼지 않는 것. 그리고 또…….

어떤 사랑은 오랜 기다림과 짧은 머무름으로 이루어져 있는 법이다. 흘러넘치는 마음은 기다림과 만남 사이에 고여 쌓였다. 그렇게 쌓인 것들 사이에 정말로 귀중한 것이 있었다. 계곡에서 사금을 캐듯, 바다에서 진주를 얻듯 그들은 사랑을 건졌다. 




이튿날 날이 밝자 마을 초입에서 새가 울었다. 곧 징조처럼 눈이 뜨였다. 이른 아침인데도 바깥이 소란스럽고 사람 목소리가 여럿 들려오는 것을 보아하니 마을에 누군가 찾아온 모양이었다. 혹은 돌아왔거나. 임레는 창 밖을 한번 내다보고, 조용히 속삭였다.

“레니.”

“.......”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 깨지 않는다는 사실은 익히 알아둔 바 있었으니 호명은 잠의 깊이를 측정하는 용도로 쓰였다.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임레는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빠져나와 겉옷을 걸쳤다. 품 안의 온기를 두고 나서는 것은 다소 마음에 걸렸으나 간밤이 평안했으니 잠시간은 괜찮을 것이라고 가늠하면서. 숨소리는 아직 가지런했다. 손을 뻗어 흰 이마를 가볍게 매만지고 있자면 그대로 시간이 멈춘 듯이 모든 것이 정온했다. 임레는 잠시간 곁에 앉아 잠든 낯을 살피다가 몸을 일으켰다. 

곧 조용하게 문이 여닫히는 소리가 났다. 

소란의 원인은 마을을 떠나 물자를 구해온다던 청년의 귀환에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청년이 짊어지고 온 것들을 한참 나누고, 헤아리고, 청년에게 마을 바깥의 사정이나 이야기, 모험담 따위를 묻다가 곧 임레를 눈치채지 못한 채 곧 저 편으로 함께 몰려갔다. 분주해 보이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임레는 자세를 고쳐 섰다. 돌아왔다는 청년이 무리에서 빠져나와 자신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보네요, 저승불.” 

“안 죽고 살아있었네.” 

 “당신, 날 보자마자 한다는 말이 고작 그거예요? 이제는 다른 이름으로 불린다길래 사람이 좀 변한 줄 알았더니 하나도 안변했네.” 

그 말에 임레가 입매만 올려 웃자 여자가 놀랐다. 

“방금 한 말은 취소. 변하긴 변했구나.” 

“날 안다는 사람이 당신이었나봐.”

“네. 그래요. 철천지원수면 어쩌나 하고 걱정했죠?”

“그다지 다른 것도 아닌 것 같은데. 평생 용서하지 않을 거라면서?”

“용서했다고 한 적 없는데요.” 

여자가 팔짱을 끼고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런 것 치고는 제법 말끔하고 가벼운 낯이어서, 임레는 영문을 가늠하려 고개를 기울였다. 여자는 오래 전 임레가 사막 경계 근처 절벽에서 실족해 사경을 헤매다가 마침내 눈을 떴을 때 그랬던 것처럼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그 웃음 한 번으로 많은 것들이 떠올랐다. 불타는 숲, 떠나던 사람들, 아우성, 고함소리, 그리고 원망하는 눈빛 같은 것들이. 

하지만 그저 그 뿐이었다. 여자가 말을 이었다. 

“용서하진 않았지만 인정하기로 했거든요. 당신은 언제나 죽인 만큼 살렸다는 것을요.” 

“무슨 일이 있었어?”

여자는 비스듬하게 웃은 다음, 흙바닥을 신발코로 두어번 두드리고선 입을 열었다.

임레가 떠나고 보름이 채 지나지 않았을 무렵, 마을이 불타고 사람들이 빈터로 이주한 직후 인근의 월귤목 군락의 뿌리를 제때 잘라주지 않아 수재(樹災)가 시작되었다. 눈먼 녹음은 근처의 촌락 세 개를 다 잡아먹고 나서도 멈추지 않고 동쪽으로, 동쪽으로 밀물처럼 들이닥쳤다. 사막의 경계, 가시나무 덤불이 자라는 곳에 다다라서야 멈춘 재해의 물결은 꼭 일부러 비낀 것처럼 몇 지점만을 남겨두고 터전을 모조리 휩쓸었는데, 하나같이 저승불이 불을 놓은지 얼마 되지 않은 곳들이었다고 한다. 

그때까지 여자는 땅을 태워 사람을 살린다는 저승불의 취지를 도무지 이해하지 못했다. 무작정 내쫓고 불부터 지르고 보는 것이 어찌 구완책이란 말인가. 그러나 일단 불이 비워둔 땅을 보고, 그리고 그곳에 찾아든 사람들의 살아남음을 보고 나서, 여자는 생각했다. 

어쩌면 눈먼 숲으로부터 사람들을 구하려거든 눈먼 불을 푸는 수 밖에 없었을지도 모른다. 때로는 사람의 이해나 도덕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어떤 삶의 수행이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사람의 악의라기보다 내리는 비, 혹은 불어오는 바람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법정에 세울 수 없는, 저울에 매달 수 없는 살인이 있을지도 모른다…… 너른땅은 기이하다. 사람은 이해하지 않고서도 깨달을 수 있다. 

“─아무튼간에 결과가 좋았으니까 말이죠.” 

혹은 그렇게 간단하게 일축되기도 하는 이야기다. 임레는 눈매만 접었다.

“살아남아서 다행이네.”

“그래요. 살아야 당신처럼 속죄도 하고, 복수도 하고, 불도 지르고, 또 변하기도 하는 거겠죠.” 

“아픈데…….”

“엄살부리지 말아요. 그러니 이제 당신이 말해봐요. 당신에게는 무슨 일이 있었죠?”

‘무엇이 당신을 변하게 한 거예요?’ 여자가 물었고, 임레가 입을 열었다. 

이윽고 이어진 것은 시로도 동화로도 노래로도 남지 않을 말들. 저 멀리서 들려오는 아이들의 웃음소리라던가, 이따금 불어오는 바람결이 나뭇잎을 뒤흔드는 소리라던가, 산새 우는 소리라던가, 그런 하잘것 없는 소리에 쉽게 파묻히는 고저없는 억양의 목소리. 단순하고 짧은 문장들로 이루어진. 그런데도 여자는 가만히 서서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사람은 이해하지 않고서도 깨달을 수 있다. 그러한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에. 

그리고 그가 말을 마칠 때 즈음 등 뒤에서 삐걱이는 경첩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임레?”

말을 하던 도중이었는데도 목소리가 들려오면 그는 어김없이 몸을 돌렸다. 그 모습을 보고 여자가 물었다.

“저 사람인가요?”

“그래.”

여자가 미소지었다.



이튿날 두 사람은 마을을 떠났다. 적어도 몇 달 정도는 새로 땔감을 구하지 않아도 될 만큼의 불을 나누어주고 떠났으니 마을 사람들의 기쁨이야 말할 것도 없었다. 그들이 챙겨 넣어준 건량 따위로 인해 떠나올 적과 비슷하게 묵직해진 여장을 짊어지면서 임레는 다소 생경한 기분으로 걸어야 할 길을 가늠했다. 돌아오는 길에 또 들르라는 소녀의 배웅 인사를 뒤로 하고 두 사람은 서리 낀 풀밭을 향해 천천히 나아갔다. 그리고 한참 걸어 마을이 아주 멀어졌을 때 즈음, 레녹스가 물었다. 

“그 사람은 어떻게 알게 된 거야?” 

“알고 싶어?”

“응. 네가 싫지 않다면 말해줘. 아, 그리고 아침에 둘이 무슨 얘기 했어? 내 이름이 들리는 것 같기도 했는데…….”

임레는 잠시 웃었다. 레녹스가 고개를 기울였다. 뭐야, 왜 웃어? 가벼운 투덜거림이 들려오면 곧 임레는 달래듯이 입을 열고 이야기를 시작한다. 내가 너를 만나기 전, 완전히 변해버리기 전, 내가 가진 모든 것들이 내 것이 아니어서 내가 하는 모든 일조차 내가 하는 일이 아니었을 적, 

“내가 예전에 혼자 너른 땅을 돌아다닐 적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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