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비와 난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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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비와 난초
思燕蘭林
화살이 구름을 가르고 날아들때 까지.
그 군사, 한바탕 청운의 꿈을 꾸었다.
“여장선 너 진짜 죽고싶냐! 썩 튀어나오지 못해!”
공주부 뒷뜰에 노성이 요란했다. 홍예교와 전각 사이 웃자란 꽃덤불 사이를 지나던 초명공주부 상복(尙服)* 홍조요는 그 벽력같은 고함소리를 듣고선 한숨을 쉬며 허리를 굽혔고, 머지않아 덤불 아래 스스로 파묻힌 여씨 삼공자와 눈이 마주쳤다. 쉿. 웃는 입술 앞에 세워보이는 손가락이 얄밉도록 희어서 홍조요는 눈을 흘겼다.
“이번엔 무슨 사고 쳤어?”
“난 억울해, 조요. 전하께서 설마 초도순시 나가시는데 좌교위 무복 차림으로다가 환복하고 가셨을 줄 누가 알았겠어?”
“……그럼 좌등량 지금 뭐 입고 있는데?”
“그야, 뭐.”
“여장선!”
때맞춰 들려오는 포효 소리에 여장선이 소리 죽여 웃었다. 관자놀이 몇 번 눌러 보이고선 홍조요가 한숨바람으로 힐난했다.
“네가 귀뜸해드린거 다 아는데 무슨 놈의 내숭이야. 포승 묶어다 바치기 전에 알아서 수습해.”
“박정하게 왜 그래. 적당히 남는 환관복이나 좀 던져줘. 곧 일몰이니 난 가야겠다.”
“가긴 어딜 가. 난 성난 좌교위 상대할 자신 없으니 네가 알아서 하렴. 공주부는 폐문이다.”
“어어, 공주부 상복이 법도도 모르고 여씨 삼공자를 불법으로 구류하려 드는구나?”
“좌등량 부를까?”
“참아.”
곧 성난 멧돼지 같은 기색이 뒷뜰을 벗어나 별채로 향하자 여장선이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털었다. 자락에 붙어 있던 이파리며 홀씨 따위가 훌훌 떨어져 내렸다. 손에 든 식반에 먼지라도 앉을세라 몸을 돌려 피하면서 홍조요가 물었다.
“그럼 전하께서는 좌교위 떼어놓고 가셨으면, 순방영 병사들이랑 나가신거야?”
“응. 좌교위네 애들이랑. 걔들은 어째 자기네들 대장보다 공주전하께 더 충성열심인 것 같아.”
“좌교위 대장 자리 빼앗기면 어떡하지?”
“뭘 어떡해, 밥벌이 하려거든 네 밑으로 들어가 내인부터 시작해야지.”
“여사연. 너 무슨 내인 자리는 아무한테나 주는 줄 아는구나?”
“설마요, 상복. 상직賞職 중의 상직이옵죠.”
상복과 공자가 마주보고 웃었다. 아무리 서로 힐난하고 떠넘긴대도 지란지교 굳건했기에.
홍조요가 허리를 펴고 시간을 가늠했다.
“너 서둘러야겠는데. 전하께서 돌아오시면 좌교위랑 나란히 불려갈 것 아니야. 드잡이질 어찌 피하려고.”
“이제 가야지. 전하께는 내일 식전에 찾아뵙는다고 말씀드려.”
“알았다.”
“응? 아선. 벌써 가려고?”
문득 들려온 청량한 목소리에 혀를 씹을 뻔 하면서, 여장선은 급하게 반보 물러난 채 어정쩡하게 절했다.
“……전하, 어찌 벌써 돌아오셨습니까?”
“아, 오늘은 합 좀 맞출 겸 해서 일곽 근처만 돌았단다. 순시 도중 재미있는 것을 보지 않았겠니. 너도 이리 좀 와보렴. 좌교위는 어디 있지? 옷 빌린 것 돌려줘야 하는데. 아, 조요. 식반 들고 따라오렴! 거기 나 마실 차도 있니?”
“아, 예……. 전하, 조심하세요. 걸음이 너무 빠르십니다.”
다급히 제 주인 뒤를 따르면서 홍조요가 여장선과 시선을 마주쳤다. ‘글렀다, 얘. 포기해라.’
“아휴.”
그날 밤 이경, 여장선을 쥐잡듯이 털어 부아를 삭인 교위 좌등량이 문단속을 하고 들어오면서 일렀다.
“전하, 바로 보셨네요. 상승국 마장*은 텅 비었습니다. 짐말들로 채워 구색을 갖추었으나 소장 눈은 못 속이지요. 군마들은 죄 차출되었을겁니다.”
“보렴. 내가 맞지.”
초명이 호기롭게 웃었다. 홍조요가 물었다.
“상승국이 군마를 사적으로 융통하고 있다는 건가요?”
“글쎄, 상승국 독단인지 혹은 배후에 누가 있는지는 봐야 알겠지만. 어찌 생각하니, 사연?”
생각에 잠겨있던 여장선이 고개를 들었다.
“지금 상승국 승지로 누가 있지요?”
“주영조.”
“진왕비의 친정 인사로군요. 변장한 군마들이 어디로 가는지 보셨습니까?”
“남문 통해 나가던걸.”
“그럼 오전 중에는 멀리 가봤자 관문 역참 전후일 겁니다. 사람을 부려 잡겠습니다.”
“그래. 진왕부 만용이 아주 대단하구나? 감히 군마를 빼돌려 어디에 쓰려고.”
“좌교위를 보내지요.”
좌등량이 곁에서 눈을 부라렸지만 여장선의 뜻이 곧 초명의 뜻임을 알았기에 말 없이 수긍했다.
“궁성문 열리자마자 다녀오겠습니다.”
“응. 수고 좀 해. 나랑 사연은 내일 조례 시각 맞추어 입궁해야겠다. 사연, 오늘은 자고 가렴.”
“여군사. 자냐?”
“아니, ……왜?”
“안 자기는. 꿈까지 꾼 얼굴인데.”
“귀신같네, 좌장군.”
“무슨 꿈 꿨는데?”
뭐라고 대답해야 좋을지 잠시 반추하던 여장선이 산더미처럼 쌓인 죽간 더미 사이에서 입을 열었다.
“예전에 상승국 군마 일이 있었잖아.”
“그랬지. 그건 갑자기 왜?”
“그때 진왕을 그렇게 사지로 몰아붙이지 않았으면 전쟁은 피했으려나 싶어서.”
“이게 무슨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야.”
기가 차다는 듯한 표정으로 막사 안으로 걸어들어온 좌등량이 맞은편에 털썩 주저앉아 죽간뭉치를 한쪽으로 호방하게 밀어냈다. 나름대로의 분류를 갖추고 있던 죽간모듬이 아무렇게나 뒤섞이는 것을 보면서 여장선은 속으로만 웃었다. 다시 하지, 뭐.
“그때 그러지 않았으면 궁지에 처하는 건 전하셨을거다. 알면서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전쟁은 피하는 편이 좋았을테지.”
“이기고 있잖아.”
“좌장군. 병가지사에서 제일상책이 뭔지 알아?”
“부전이승(不戰而勝).”
“잘 아는 사람이.”
좌등량은 어이가 없었다.
5년 전 상승국 사건으로 인해 실각할 위기에 처한 진왕이 이판사판으로 군사를 일으켜 공주부를 습격했을 때, 미리 예측한 여장선의 지계가 아니었더라면 공주부 사람들은 꼼짝없이 역적되어 성밖에 목이 내걸렸을 것이다. 전날 공주부를 빠져나가 영주성에 진을 친 공주일파를 조력하기 위해 북경에서 내려온 여가 당주 충영공이 초명공주기를 내걸고 성문 안으로 개진했을 때 이미 전쟁은 시작된 것이나 다름 없었으니 전쟁은 여장선이 피하련다고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을텐데도, 그는 마치 자신에게 그럴 능력이 있었다는 것처럼 면전免戰을 논했다. 그것도 승전을 거의 눈 앞에 두고서. 마치 다른 길이 있기라도 했다는 것처럼.
그 오만함에 혀를 차면서 좌등량은 궤상 위에 놓인 나무말을 만지작거렸다. 네겐 세상이 곧 기국碁局이로군. 마치 대국을 복기하듯이 선택을 돌이키고 경로를 헤아리는 모양새다. 좌등량은 미간을 모았다. 전장에서 잡생각이 너무 많으면 자신이 죽거나 혹은 남을 죽게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그러면 곤란하지.
“쓸데없는 생각 말고 전황에 집중해.”
어쩔까 고민하던 그는 가벼운 일침으로 국면을 갈무리했다. 고개를 든 여장선이 웃었다. 그렇게 말할 줄 알았다는 듯이. 표정 정도야 능숙히 감출 수 있으면서 부러 보여주는 것이 밉살스럽지, 아주. 문득 속을 읽힌 것이 민망해진 좌등량이 인상을 쓰며 한 마디를 더했다.
“……일전이 눈앞인데 군사좨주*가 되어가지고 미련 넘치게 등 뒤나 돌아보고 있으면 되겠어!”
“아무렴, 좌장군께서 옳으십니다.”
“이게 그냥…….”
“그래서 왜 왔는데?”
화제가 자연스럽게 넘어갔다. 좌등량은 가까스로 안도했다.
“홍조요가 좀 들여다보래서 왔지. 너 잠은 제대로 자고 있는거냐. 맥없이 비슬거리는게 영 볼썽사납다.”
“아직은 버틸만 해.”
“괜찮다는 소리는 안하는군.”
병불염사라, 전장에서는 아군을 속이고 적군을 속이는 간사함도 마다치 않았으나 오랜 벗 앞에서는 가끔 신이한 책략도 경지 높은 계교도 부질없었다. 자신의 에두름을 단번에 지적하는 좌등량에게 감탄하면서, 여장선이 웃었다.
“걱정마. 우리는 반드시 이길테니까.”
“사연. 사연?”
“예?”
“세 번 불렀다.”
“죄송합니다, 전하. 소신 홀로 생각이 깊었습니다.”
조아리는 여장선에게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손을 흔들어 보이고선 초명공주는 손을 뻗어 말발굽 흙먼지가 자욱하게 일어난 구릉을 가리켰다. 개진하는 철기병이 다가오고 있었다.
“저길 보렴.”
여장선은 명령대로 고개를 들었고, 곧 미간을 모았다. 수가 너무 많았다.
“심상치 않군요.”
“좌우군만으로 돌파할 수 있겠니?”
“어려울 것 같습니다.”
“내 생각도 같다. 신속히 중군 일으켜 세워라. 서두르지 않으면 이긴대도 크게 잃게 생겼다. 진왕 녀석, 지난 전투에서 크게 깨져 저만한 기세가 나올 리가 없는데 대체 어디서 충병했는지, 불가사의하구나.”
여장선은 몰려오는 군세를 관찰했다. 전황은 언제나 날씨와도 같아서 예측을 빗나가는 변화무쌍함을 보였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번 싸워도 위태로움이 없으며, 적을 알지 못하고 나를 알면 한 번 이기고 한 번 지며, 적을 모르고 나를 모르면 싸움마다 반드시 위태롭다 하였는데 이처럼 내력 가늠할 틈도 없이 상황이 닥쳐오면 방비할 방도가 없었다. 이런 국면에서 기지를 발휘하는 것이 군사좨주 여장선의 몫이었으나, 그 군사. 이치와 명리에 무관하게 심장이 뛰었다. 철기병 두른 것 단지 용맹함인가? 말발굽 사이로 이는 번쩍임 단지 뙤약볕 눈부심인가? 남서 지방 군신국 경에서 난 정도正道를 보우하는 신성 있다지 않았는가…….
아니, 그럴 리가 없다. 그는 불길한 예감을 애써 떨쳤다.
“중군 역시 사전에 예비해두었으니 출병에는 문제가 없사오나 전하, 선봉은 뉘에게 맡기시렵니까?”
“네 생각은 어떠니?”
공주가 군사를 돌아보았다. 눈이 마주쳤다. 함께해 온 세월이 길어 말 없이도 의중을 알았으니, 자연히 마음이 다급해져 불가하다는 말부터 나왔다.
“전하, 안됩니다.”
“그럼 네가 가려고?”
“…….”
그럴 수만 있었으면 당연히 그랬을거라는 표정으로 시위하는 모양새가 우스워 초명이 웃었다. 하여튼 어렸을 적부터 머리 굴리는 재주만큼은 비상했는데 무위는 영 형편없었던 까닭에 원통하기도 원통했겠지. 핏줄 내력이라는게 있는데 무가 삼공자가 어찌 그러는지. 뭐, 칼 드는 재주는 없어도 제 몫이야 차고 넘치게 하고 있음을 만인이 알았지만.
그 틈에 여장선이 재차 일렀다.
“전하, 못미더우실지 몰라도 손장군께 맡기심이. 기세와 진형으로 보아 중군 가는 곳 필히 격전지가 될 것입니다.”
“그러니 내가 가야지.”
“어찌 사지로 몸소…….”
“군사, 무슨 소리를 하는거야?”
공주가 찬란히 웃었다.
“사지 앞에서 솔선하지 않고서야 어찌 군주를 자칭할 수 있겠어?”
상복(尙服) : 종5품 내명부(內命婦)의 궁관직
상승국 마장: 궁중의 가마나 승마(乘馬)를 맡아보던 관청의 마굿간
군사좨주(軍師祭酒): 조조가 사공의 자리에 있을 때 군사좨주를 설치해 모사들의 장(長)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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