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어나지 않았던 일
줄리아 라이네케가 에스마일 시프에게, 7학년 | 2024.08.06
퀴어(트랜스젠더, 동성애자)에 대한 직접적이고 적나라한 혐오 발언 및 물리적인 폭력에 대한 묘사가 등장합니다. 또한 이들을 향한 박해와 차별이 직접적으로 언급됩니다.
감금, 고문, 강간, 학대, 학살 등의 국가폭력과 연관된 묘사가 직접적으로 등장합니다.
전반적으로 열람에 상당한 주의를 요하며, 젠더퀴어 및 퀴어 당사자이거나 위에서 언급한 항목과 연관된 경험이 있으신 분들은 정신적으로 안정된 상태일 때 일독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사건’의 기억은 어떻게 해서든지 타자, 즉 ‘사건’ 외부에 있는 사람들과 함께 나누어 갖지 않으면 안 된다. 집단적 기억, 역사의 언설을 구성하는 이는 ‘사건’을 경험하지 않은 살아남은 사람들, 곧 타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들과 그 기억을 공유하지 않으면 ‘사건’은 없었던 일로 되어버린다. 일어나지 않았던 일이 되어버린다.
― 오카 마리, 『기억·서사』
옛날이야기를 하나 해 보자.
―
지금으로부터 40년 전, 한 소년이 살고 있었다.
그는 베를린의 평범한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났다. 사람들이 흔히 말하고는 하는, 엄격한 아버지와 다정한 어머니 아래에서, 두 명의 형과 한 명의 누이동생을 두고서. 동네의 남자아이들 사이에서 소년은 다소 동떨어진 위치에 있었다. 아이들이 무리를 지어 골목을 뛰어다닐 때, 그는 조용히 아버지의 서재로 숨어 들어가 릴케의 시집을 펴서 읽었다. 아이들이 학교에서 서로 치고받으며 싸울 때 그는 교과서에 쓰인 시와 희곡을 한 자라도 더 읽기 위해 고개를 숙였다. 소년은 얌전했고, 말수가 적었으며, 운동을 좋아하지 않았다. 학교에서는 문학과 철학에 뛰어난 성적을 보여 선생들의 사랑을 받았다. 모두 소년이 실업학교를 졸업한 다음에는 인문계 김나지움을 거쳐 대학에 갈 것이라 의심하지 않았다.
아이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소년이었지만, 그에게도 절친한 친구가 한 명 있었다. 그의 친구였던 소년 또한 그와 비슷하게 조용하고 잘 나서지 않는 성격이었다. 시와 희곡을 좋아했고 철학에 대한 깊은 사색을 즐겼다. 그들은 학교 뒤뜰에서 종종 다양한 시인들의 미학과 여러 사상에 대해 생각을 나누었다. 소년은 그의 친구에게서 드러나는 여러 시에 대한 해석과 깊은 문학적 상상력을 좋아했다. 그의 친구는 소년의 독창적인 발상과 때로는 과감할 정도로 앞서가는 태도에 깊은 인상을 받는 것 같았다. 그들은 그렇게 서로를 보완했으며, 그렇기에 서로를 소중히 여겼다.
그러나 그들이 온전히 동질적인 존재인가 하면 그렇지는 않았다. 소년은 그의 친구가 가지는 ‘계집애 같은’ 면모에 불만이 있었다. 그 역시 말수가 적고 소심하다는 이유로 다른 남자아이들로부터는 너무 계집애 같다는 소리를 종종 듣고는 했지만, 소년의 친구와는 달랐다. 티를 내지 않으려 해도 드러나는 사실들이 있었다. 그의 친구는 자신을 가리킬 때 der이라는 관사를 쓰는 것을 싫어하는 것 같았다. 소년과 같이 여자아이들을 구경할 때도, 그의 시선은 마치 그들을 욕망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질투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소년은 이해할 수 없었다. 너는 남자잖아. 나와 같은 남자잖아. 그런데, 어째서?
그즈음이었을 것이다. 그 누구보다도 가깝게 여겼던, 가장 깊은 속마음까지 털어놓을 수 있었던 친구가 어딘가 멀게 느껴졌던 것은. 더 이상 소년의 친구가 ‘친구’처럼 여겨지지 않았던 것은.
―
“네게 할 말이 있어.”
그러던 어느 날의 일이었다. 소년의 친구는 소년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그들이 항상 즐겨 이야기를 나누고 토론했던 학교 뒤뜰에서였다. 변성기가 찾아온 친구의 목소리는 낮았다. 그는 그즈음 말수가 없어져 있었다. 소년과 함께할 때를 제외하고는 학교에서 거의 말을 하지 않고 지나갈 때도 많았다. 그 또한 소년이 이해할 수 없는 몇 가지 사실들 중 하나였다.
“미안해. 이야기하지 않고 싶었는데, 너무 무서운데, 그래도 도저히 말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서…….”
소년의 친구는 물에 젖은 것처럼 축축한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그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마치 그 다음에 올 말을 꺼내는 것이 두려운 것처럼, 소년이 보일 반응을 벌써부터 알고 있다는 것처럼.
“좋아해, 마르틴. 오래전부터, 너를 좋아했어.”
아.
퍼즐이 맞추어졌다. 순식간에 전신을 타고 혐오감이 올라왔다. 그동안 그가 소년에게 보냈던 눈빛, 소년에게 다가오는 여자아이들에게 보이던 알 수 없는 질투, 미묘하게 느껴지던 그, 무언가 들어맞지 않는다는 감각……. 그런 거였어? 소년은 생각했다. 둘도 없을 친구라고 느꼈던 아이가, 나를 이해해 줄 거라 생각했던 아이가, 사실 호모 새끼였던 거야? 우리가 함께했던 시간 동안, 너는 나를 향해 그딴 더러운 욕망이나 품고 있었어?
주먹이 날아간 것은 순식간의 일이었다. 소년은 자신이 느낀 배신감만큼 그를 때리고 또 때렸다. 입술에서 피가 흘렀다. 소년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렀다. 소년은 주먹으로 그의 얼굴을 날리고, 발로 차고, 마구 짓밟았다.
“Schwuchtel 호모 새끼.”
탁. 친구의 얼굴에 침을 뱉은 소년은 그대로 자리를 떠났다. 두려움과 슬픔에 펑펑 우는 친구를 외면한 채로. 분노와 배신감, 혐오감에 휩싸여 몸을 덜덜 떨면서.
소년의 이름은 마르틴 뮐러, 율리안 라이네케의 소꿉친구이자 첫사랑이었다. 그는 머지않은 미래에 인문계 김나지움을 졸업하고 나치당에 입당한다.
―
소년은 청년이 되었다. 때는 1943년, 그는 친위대에 소속되어 여러 작전에 투입되다가 부헨발트 수용소의 수용자들을 관리하는 임무로 넘겨졌다. 매일 같이 기차가 사람들을 토해내면, 그는 그들을 마치 양 떼 몰이하는 개처럼 수용소로 몰아갔다. 자리에서 이탈하거나 명령을 거부하는 자들을 즉결 처형하는 것이 그의 주된 역할이었다.
그는 더 이상 릴케를 읽지 않았다. 철학에 대해 눈을 빛내는 일도 없었다. 마치 율리안 라이네케와 있었던 일은 존재하지 않았다는 듯이. 그는 매일 같이 그저 피로한 얼굴로 주어진 임무를 수행했다. 수용자들을 괴롭히고, 장난치듯 고문하고, 강간하고, 죽였다. 그의 얼굴은 점점 다른 친위대들과 같아졌다. 잔혹하면서도, 무감각한 얼굴. 그것은 범죄자의, 살인자의, 학살자의 얼굴이었다.
그가 율리안 라이네케를 다시 만난 것은 바로 그 얼굴을 하고서였다. 겁에 질려 그가 몰아가는 데로 뛰어가는 사람들 사이에서, 그는 율리안을 발견했다. 율리안은 그가 기억하는 모습에서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더 마르고, 더 초췌해졌으며, 금방이라도 죽을 것 같았다는 점만 제외한다면. 그가 잡혀 온 죄목을 아는 것은 마르틴으로서는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그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Schwuchtel.”
그가 총을 쏘자 율리안 곁에서 도망치려던 사람 하나가 쓰러졌다. 율리안은 공포에 질린 얼굴로 위를 보았다. 순간, 시선이 마주친 것 같았다. 아니, 분명 마주쳤다. 그 먼 곳에서도 그는 율리안의 표정을 볼 수 있었다. 그것은 공포이면서 낙담이었다. 한없이 깊은 절망에 빠진 얼굴이었다. 율리안은 말하는 듯했다.
‘어째서 네가, 여기에 있는 거야?’
그는 순간적으로 총을 율리안에게 겨누었다. 이대로 쏴버릴까? 그래도 되지 않을까? 어차피 수용자 하나 따위, 더 죽는다 해서 문제 될 것은 없을 텐데……. 그러나 생각은 잠깐이었다. 그는 다시 총을 거두고 수용자들을 향해 소리쳤다. 훗날 수많은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결코 지워지지 않을 목소리로.
“빨리빨리 움직이지 못해!”
그것은 자비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가 겪을 고통을 알기에 내린 결정이었다. 호모 새끼. 어디 한 번 더 살아남아 봐.
너는 내가 지금 널 죽이지 않은 걸 후회하게 될 거야.
―
율리안 라이네케는 1941년 대학에 진학하자마자 동성애 혐의로 체포되었고, 1943년에는 부헨발트 수용소로 이감되었다. 그는 그곳에서 1945년 4월 해방되는 순간까지 있었다. 의복에는 분홍색 역삼각형이, 왼팔에는 27111이라는 숫자가 새겨진 채로.
기억은 침묵되었다. 그는 유대인이 아니었다. 유대인으로 대표되는 홀로코스트의 기억은 그를 수용하지 않았다. 그는 정치범도 아니었다. 온갖 수용소와 게토에서 일어났던, 위대한 봉기의 역사에 그는 포함되지 않았다. 그는 ‘동성애자’였다. 나치가 패망한 뒤에도 독일을 비롯한 세계 곳곳에는 동성애를 처벌하는 법이 잔존해 있었다. 그는 고통받았으되 그것을 말할 수 없었다. 발화는 곧 치욕이었다. 그것은 자신의 가장 깊은 치부를 까발리는 일이었다. 그렇기에 그는 침묵했다. 1943년부터 1975년, 32년이라는 세월 동안. 그와 어떠한 연고도 존재하지 않는, 그러나 그와 가장 가까운 한 소녀를 만나기 전까지.
당신을 만나기 전까지.전까지
그렇게 당신은 침묵을 강제당한 기억의 유일한 해설자Narrator가 되었으며.
당신의 입을 통해, ‘사건’은 마침내 있어야 할 곳을 찾았으므로.
―
줄리아 라이네케는 에스마일 시프를 바라보았다. 표정에는 혼란이 가득했다. 그것은 그가 오래도록 묻지 못했던 질문에 대한 답이었다. 당신에게 독일이란 무엇인가요? 당신은 왜 독일을 떠나왔나요? 2차 세계대전이 있는 동안 당신은 어디에 있었나요? 왜 군대를 가지 않았나요? 당신은 나치였나요? 홀로코스트 때 당신은 무얼 하고 있었나요? 왜 독일어를 이야기하지 않나요? 왜 그리도 슬퍼하나요? 왜 더운 여름에도 셔츠를 걷지 않나요? 무엇을 바라보고 있나요? 무엇이 당신을 그렇게 힘들게 하는 건가요……. 그가 알 수 없었던 것에 대한 해설이었다. 어째서 ‘전쟁’이라는 단어가 이토록 두려운지, 불에 타는 냄새가 어째서 그렇게도 역하게 느껴졌는지, 큰 소리에 놀라던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어째서 그토록 알 수 없는 불안이 나를 휩싸 안았는지…….
그러나 당신의 말이 옳다. 에스마일 시프. 이 사실이 그 자체만으로 무언가를 바꾸기에는 너무 늦어버렸다. 나약함에 대한 혐오는 이미 그의 뿌리를 구성하였고, 진실을 알았다 해서 그것을 가벼이 떨쳐버릴 수는 없었다. 악행에는 가속이 붙는다. 브레이크를 밟기에는, 이미 지나칠 정도로 전속력으로 달리고 있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그 가속 아래에 깔려 있었다. 돌이킬 수 있는 지점은 오래전에, 지났다. 우리는 어른이 되기 전에 우리가 설 곳을 정했으니까요. 단지,
단지 그럼에도.
“…… 리베라코르푸스. 아레스토 모멘텀.”
이번만큼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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