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리아 델피니 라이네케

The Point of No Return

줄리아 라이네케가 힐데가르트 마치에게, 7학년 | 2024.08.06

  • 퀴어(동성애자)에 대한 직접적이고 적나라한 혐오 표현, 투병 상태에 대한 묘사, 보호자를 향한 폭력적인 발언, 국가폭력 및 역사적 범죄의 피해자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발언이 등장합니다. 열람에 주의 바랍니다.


언어는 기억을 매개한다.

“Julia,”

우리가 공기처럼 호흡하고 살아가는, 사고의 근간을 이루고 삶의 모든 부분을 구성하는 제1언어를 제외하면, 모든 언어는 제각기 다른 기억을 가진다. 처음 그것을 배우게 되었던 때, 그 언어로 들었던 말들, 읽었던 글들, 그 언어를 사용한 순간들이 모두 합쳐져 하나의 심상을 이룬다. 언어란, 그 특수한 청각적 신호의 조합은, 그렇기에 기억과 떼어놓을 수 없다.

“Meine liebe tochter…….”

그러므로 당신의 행위는 줄리아로 하여금 하나의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그 언어. 아버지의 언어. 아버지에게 가닿기 위해, 아버지를 이해하기 위해, 그를 보다 위로할 수 있기 위해 배워야 했던 언어. 그렇기에 아버지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그 언어에 대한 기억을.

율리아, 사랑하는 우리 딸…….

색색거리는 입술은 창백한 푸른색이었다. 파리한 얼굴은 평소보다 어두운 빛을 띠었다. 힘없는 헤이즐빛 눈동자가 굴러 그를 마주했다. 율리안은 말했다. “Julia, meine liebe tochter…… es tut mir leid.” 율리아, 사랑하는 우리 딸…… 미안하다. 그것은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그가 줄리아의 앞에서 처음으로 발음한 문장이었다.

율리안은 독일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그는 ‘라이네케’라는 성을 듣기 전까지는 다른 이들이 그가 독일인이라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행동했다. 그것은 거의 강박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럼에도 독일어가 튀어나오는 순간은, 영어조차 떠올리지 못할 정도로 깊이 잠겨있다가 겨우 그 밖으로 올라올 때. 그 거친 발음의 언어는 그가 헤치고 나와야만 했던 과거의 편린을 그렇게 잠시 드러냈다.

어릴 적, 줄리아는 궁금해했다. 왜 당신은 그리도 슬피 그 언어를 말하나요? 왜 평소에는 한 마디도 하지 않나요? 당신에게 독일이란 무엇인가요? 왜 나에게는 그 나라의 언어도, 역사도, 아무것도 가르쳐주지 않나요? 결코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으나 수없이 스스로에게 던졌던 의문들. 그리고 꺼내지지 않았기에, 끝내 대답 될 수 없었던 질문들.

 

“내가, 그 인간과 다르지 않다고.”

천천히, 얼굴에 웃음이 번진다. 그것은 해맑은 미소도, 빈정이는 조소도 아니었다. 그것은 광소狂笑였다. 시작은 작게. 그리고 점점 세게. 웃음이 커진다. 그는 당신을 밀치려는 시도도 하지 않았다. 그는 고개를 젖히고 크게 웃었다. 미친 듯이 웃었다. 한참을, 한참을 그렇게 웃고 나서.

“그거 알아, 마치? 우리 아빠가 어떤 작자였는지 말이야.”

똑바로 당신을 쳐다보았다.

 

당신의 의도는 성공했을 것이다. 본래라면, 그가 에스마일 시프로부터 ‘그 이야기’를 듣기 전이었다면. 당신이 내뱉은 그 문장에는 그런 힘이 있었다. 그의 얼굴을 딱딱하게 굳게 할 힘이. 그를 다시금 과거로 빠뜨리는 힘이. 풀리지 않는 의문. 그가 풀기를 포기한 의문. 그가 외면해 온 의문. 그 앞에 끊임없이 나타났던 의문. 그를 계속해서 침범했던 의문. 그래서 그를 괴롭혔던 의문.

언어를 통해 당신이 상기시킨, 그 질문들.

그 사이로 빠뜨리는 힘이.

“홀로코스트에 대해 굳이 설명할 필요는 없겠지. 머글 학교에서 질리도록 가르치는 내용이니까.”

그러나 이제 그는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안다.

“어떤 잡종이 나한테 그러더라? 그 인간에 대해 내가 들어야 할 이야기가 있다면서.”

디펄소. 그는 당신의 심장 가까이에 지팡이를 가져다 대고 그 주문을 날렸다. 이것이 디펄소가 아니라 스튜페파이였다면 죽을 수도 있는 거리였다. 그는 여전히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마치 이 모든 것이 우스꽝스러운 촌극이라는 듯이. 그래서 너무나도 우스워 죽겠다는 것처럼.

“그 인간이, 거기 있었대. 수용자로서 말이야. 호모 새끼라는 이유로 거기 가서, 나치 독일이 사라질 때까지 그곳에 있었대. 그래서 그랬던 거야. 그래서 그랬던 거라고. 그 모든 빌어먹을 행동들이, 거기에서 시작된 거야.”

나는 이해 못 하겠어. 뭐가 그렇게 두려운지. 왜 뉴스를 보다가도 괴로워서 방에 숨어버리는지,
왜 검은색 가죽 코트를 입은 사람을 보고 날 꼭 붙잡았는지, 왜, 그날, 그날…….

 

“전부 그 인간이 약해빠졌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던 거야.”

플라그란테. 플라그란테. 플라그란테. 그는 다시금 당신을 향해 그 저주를 날렸다.

“마치 너처럼. 너 같은 잡종들처럼,”

플라그란테. 플라그란테. 플라그란테. 플라그란테. 계속되는 저주 속에서 웃음은 점차 일그러지고, 뒤틀리고,

너무도 약해빠져서, 그거 하나 견디지 못해서! 그 꼴이 난 거야.”

 

저주에 증오가 실렸다. 그는 지팡이를 거칠게 휘둘렀다. 무자비한 주문들이 당신을 향해 쏘아졌다.

“겨우 그것 때문에, 겨우 그것 때문에!

 

세상에 이런 고통이 있었습니다. 지금 당신이 다른 이들을 거리낌없이 해치듯이,
세상이 그 사람을 해치고 그 사람이 당신을 해쳤으매 즉 세상이 당신을 해쳐서.
당신은 이런 연원으로 아팠습니다.

“겨우, 겨우 그따위 나약함 때문에!”

미안하다. 줄리. meine liebe tochter…….

그는 당신에게 똑바로 지팡이를 겨누었다. 내뱉는 말은 주문과도 같았다.

“난 절대 그렇게 되지 않을 거야. 힐데가르트 마치. 난 그 인간이랑 달라. 네가 네 삶을 다해 무엇을 하려는지는 몰라도, 난 내 삶을 다해 그렇게 할거야. 그 어리석고, 나약하고, 그래서 나를 괴롭히고, 수렁으로 빠뜨리고, 우울하게 하고, 이유없이 불안하게 만들고 금방이라도 죽어버릴 인간처럼 살지 않기 위해 내 인생을 바칠 거야.”

흉터가 아릿하게 아파 왔다. 가면 쓰고 낙인 찍힌 자들이 ‘입단 의식’이라 낄낄대며 말한 것의 흔적이었다. 저주를 맞고, 바닥에 나뒹굴고, 피를 토하고. 그랬던 모든 일이 남긴 흉터였다. 어쩌면 당신은 그의 손목에 아로새겨진 그 흔적을 조금은 보았을지도 모른다. 그것을 눈치챈다는 것은 또 다른 일이지만.

그는 당신을 향해 으르렁거렸다. 그것의 청자는 당신이면서, 동시에 그 자신이었다. 그는 스스로에게 맹세하듯 말했다. 선언하듯 말했다.

“그것을 위해서라면, 뭐든 견딜 수 있어.”

그러나 그 말이 절규와도 같이 느껴졌다면, 비명처럼 들렸다면

그것은 단순한 착각에 불과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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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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