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여름 밤의 춤
어떤 평범한 기억은 결코 잊을 수 없는 추억이 된다. | 2021.05.23
아나히타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어쩌면 등골이 저릿할 정도의 악몽을 꾸고 일어난 것일지도 몰랐다. 그 이유가 무엇이 되었건, 아나히타는 눈을 감고 다시 평온한 안식으로 돌아가는 것에 실패했다. 두 해는 이미 산 너머로 져버린지 오래이고 하늘엔 별이 총총하건만.
어찌하여 이 시각에 나는 홀로 여기 남아 있는지.
아이들은 모두 자고 있었기에 생각은 작은 속삭임 정도로만 흘러왔다. 그것으로는 안정이 되지 않았다. 무언가 다른 게 필요했다. 자신을 안정시켜줄 만한.
그때, 시야에 한 물체가 들어왔다.
북이었다. 두 손으로 쥐어야 제대로 쥘 수 있을만큼 큰 북. 아주 어릴 적, 행동거지에 대한 교육을 받던 때 이후로는 손에 쥐어본 적 없는 것이었다. 당연하게도 그의 가문은 춤과 노래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으며, 아나히타 역시 노래를 불러본 적은 손에 꼽힐 정도였다. 스스로 흥에 겨워 부를 일은 더더욱 없었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북을 보자 오래 전 기억 속의 구절이 떠올랐다. 아나히타는 한 손에 북을 쥐고 살짝 두드려보았다. 몇십 년 전의 일인데도 손은 아직 쥐는 법을, 그 두드림을, 박자를 기억하고 있었다. 바람이 불듯, 파도가 솟구치듯 기억들이 자리에서 뛰쳐나왔다. 그는 북을 두드리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آی بانو”
단 한 번의 두드림. 그리고 단 한 구절의 가사. 왜 그 구절을 읊는 순간 그리도 마음이 가라앉았는지. 자신을 짓누르던 불안과 우울이 서서히 사라져가는 게 느껴졌다. 그 자리를 대신 채운 것은 흥이었다. 그는 조금 더 북을 두드리며 다음 구절을 읊었다.
“آی بانو”
처음에는 머뭇거리듯 통, 하고 두드리던 소리가 점차 박자를 맞추어 이어졌다. 통, 통, 토통. 둥, 둥, 두둥. 속삭이던 구절 역시 이제는 어느덧 노래가 되어.
ناز بانوچه گل من
سرسه کوچه گل من
دختر غنچه گل من
کوچه به کوچه گل من
그는 어느덧 노래를 부르고, 북을 두드리며 춤을 추고 있었다. 발은 소리없이 스텝을 밟고, 손으로는 북을 두드리며 천천히 복도를 나아갔다. 물론 다른 사람들을 깨우지 않게 조심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열린 창을 통해 바람이 들어왔다. 정원으로 나가자 북을 두드리는 소리는 더욱 커졌고 노래 역시 음색을 갖추어 날아올랐다.
아무도 없는, 두 개의 달과 별빛 아래의 장막에서 아나히타는 춤을 추었다. 그때만큼은 자신을 짓누르던 고민들도, 시름도, 악몽도 모두 날아간 것만 같았다. 발은 땅을 디디고, 훑고, 공기를 차고 올랐다가 다시 내려앉았다. 경쾌하게 손가락으로 북을 두드리며 몸을 한 바퀴 돌았다. 한 바퀴는 이내 두, 세바퀴가 되어갔다. 그렇게 온 세상에 혼자만이 있다는 듯, 아니 더 이상 세상과 자신을 구분하지 못한 채로 무아지경 속에서 춤을 추던 그때
“…아나히타?”
목소리가 들렸다. 생각이었을까? 무엇이었든 상관없었다. 음악은 끊겼다. 아나히타는 마치 미모사가 제 잎을 닫듯 순식간에 움츠러들었다.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무아의 상태에서 벗어나자 방금 전의 일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밤에, 그것도 모두가 자고 있을 시간에, 이 고요에, 적막에. 나는 무엇을 한 거지?
북을 두드리고, 시끄럽게 노래를 부르고, 경박하게 춤을 추었다고? 내가? 수치심이 밀려들어왔다. 목소리의 주인이 다가올때까지, 아나히타는 겁 먹은 짐승이라도 된 것처럼 그 자리에 서서, 얼어붙어 있었다. 오로지 시선만이 제 앞에 나타난 새로운 그림자를 따라 움직였다.
"다들 자고 있을 시간인데, 여기서… 뭐 해?"
그 목소리는 피네의 것이었다.
피네 역시 어떤 이유였는지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던 차였다.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부르는 낯선 가락이 들렸고, 마치 홀린 듯 가락을 따라 나오니 아나히타가 있었다.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는.
피네는 어색한 표정으로 아나히타와 시선을 마주했다. 처음이었다. 아나히타가 노래하는 것도, 춤을 추는 것도. 그는 단 한번도 자신에게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없었다. 그가 노래나 춤을 좋아하는지도 알지 못했다.
하지만 피네는 보았다. 시리도록 비치는 달빛 아래에서, 아나히타는 웃고 있었다. 평소의 부드러우면서도 어쩐지 희미한 웃음이 아니었다. 그래서 금방이라도 손을 놓치면 사라질 것 같은 두려움을 주는 웃음이 아니었다. 춤을 출 때의 그 미소는 살아있는 자의 것이었다. 창공을 자유로이 나는 새의 미소였다. 지금까지 단 한번도 본 적이 없는 것이어서, 피네는 아나히타가 낯설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 모습은 자신이 아는 아나히타가 아니었다. 모든 족쇄를 벗어버렸을 때의 너는 이런 모습인걸까. 이게 진정한 너인 걸까.
그러나 자유롭게 노니던 새는 음악이 끊기자 다시 새장으로 도망치듯 날아들었다. 자신이 끊어버린 흐름이었다. 이제 그 새는 어쩐지 겁을 먹은 눈빛으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피네.”
자신의 얼굴을 본 아나히타의 경계가 조금 풀어지는 게 보였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그는 여전히 겁을 먹고 있었다. 마치 보이고 싶지 않은 모습을 들킨 것처럼...
피네는 무슨 말을 꺼내야할지 몰라 망설였다. 머릿속에서 수많은 인격들이 튀어나와 제 의견들을 소리높이고 있었다.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겨우 나온 말은
“어, 춤…추고…있었나봐…?”
“…봤구나.”
“으, 응….”
그리고 침묵.
“…미안해.”
“네가 왜 미안해하는 거야?”
“하지만, 밤중에 시끄럽게 하고, 너도 깨워버리고… 경박하게 춤 같은 거나 추고….”
“…하, 너는 정말이지…. 나는 괜찮았어.”
“…정말?”
“정말이야! 또…또 보고 싶을 정도로.”
“…어”
이렇게 바보 같을수가 있나. 자신이 내뱉은 말에 피네는 제 이마를 치고 싶어졌다. 흠칫, 하고 떠는 아나히타를 보자 그 생각은 제 혀를 깨물어버리자는 충동으로 이어졌다. 바보, 바보, 머저리! 머저리같은 피네! 도대체 어쩌자고 그런 말을 꺼내선! 이제 어떡하지? 어떻게 되는거지? 머릿속이 서서히 뒤엉켜갔다. 머릿속 인격들이 웅성이며 시끄럽게 떠들기 시작했다. 그 가운데에서 28번이 비명을 지르듯 큰 소리로 외쳤다. 닥쳐, 닥쳐, 닥치라고!!!
“……볼래?”
“됐다. 내가 미안- 어, 뭐라고?”
순식간에 소란이 가라앉았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대답이었다. 피네는 잠시 얼떨떨한 표정으로 아나히타를 바라보았다. 머릿속에선 인격들이 방금 전에 대답에 대해 속삭이고 있었다. 아나히타가 자신과 눈을 마주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 얼굴에서 많은 것이 읽혔다. 아나히타는 수줍어하고 있었고, 도망치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그는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정신이 돌아왔다.
“역시 그건 좀 그런…”
“좋아!”
다시 도망치려고 하는 아나히타를 붙잡으며 피네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진심이야. 한번만 더 그 모습을 보여줘. 네가 자유로이 나는 모습을, 달빛 아래에서 춤 추는 모습을, 나이팅게일처럼 노래하는 모습을. 피네는 진심을 담아 말했다.
“보고싶어.”
날 위해 춤을 춰줘, 아나히타.
시작은 조심스러웠다.
먼저 북을 두드리는 것부터. 통, 토통,
탁. 박자가 삐걱였다. 아나히타는 힐끗 피네를 바라보았다. 아무도 없을 때 홀로 노래하고 춤추는 것과, 누군가를 의식하며 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었다. 어쩐지 목은 굳은것만 같고, 손은 삐걱거렸으며, 발 역시 헛도는 것처럼 느껴졌다.
운을 띄우는 데는 정말 많은 노력이 필요했다. 다시.
아나히타는 북을 두드렸다.
통, 토통, 통, 토통, 통, 토통.
시작은 북 부터.
그 다음은,
سه پنج روزه که بوی گل نیومد گلم
صدای چهچه بلبل نیومد گلم
처음에는 잔잔하게 시작했다. 이 노래는 본디 흥겨운 가락과 함께 시작하지만, 그는 잔잔하게 부르는 것을 더 좋아했다.
بریم از باغبون گل بپرسیم گلم
چرا بلبل به سیل گل نیومد گلم؟
잔잔하게 시작한 곡은 점차 흥을 띠기 시작했고, 손은 북 위를 날듯이 두드리고 있었다.
이제는 발이 나갈 차례였다.
ناز بانوچه گل من
سرسه کوچه گل من
한 걸음, 발이 사뿐 땅을 내딛었다.
두 걸음, 발이 땅을 가볍게 훑었다.
세 걸음, 다시 이전의 발이 땅을 딛고, 타닥 하는 가벼운 리듬을 만들어냈다.
북을 든 손이 흐름에 따라 움직였다. 옷자락은 동작이 일으키는 바람에 힘입어 펄럭였다. 베일이 휘날리고, 장신구들이 짤랑거렸다.
노랫소리가 커졌다.
آی بانو
처음 떠올렸던 그 구절이었다. 이 노래의 제목이기도 한 구절. 언제부터 전래된건지조차 모를만큼 오래된 이 노래는 흥겨운 가락과 함께 참으로 슬픈 가사를 담고 있었다. 어떤 연인의 헤어짐에 대한 이야기. 사랑하는 이를 어떤 식으로든 떠나보낸 이의 이야기를 아나히타는 노래했다.
아, 여인이여. 당신만이 사랑의 세계이니. 당신의 귀여움으로 야단법석을 떨어주오. 나의 마음이 구멍나버렸답니다.
그렇지만 지금 가사는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순간이었다. 북을 두드리고, 팔을 휘두르고, 발을 움직이고, 그 소리들에 잠기우는. 그렇게 스스로를 달래고 그 곁에 있는 사람을 달래는.
바로 이 순간.
아나히타는 춤을 추었다.
자신을 위해서, 그리고 피네를 위해서.
피네는 춤을 추는 아나히타를 바라보았다.
아, 그래. 이 모습이다. 하늘을 나는 새의, 바다에서 뛰노는 돌고래의 모습. 진정으로 자유로워 보이는 이의 모습. 오로지 이 세상에 자신과 춤 뿐인 것만 같은 바로 그….
피네는 처음으로, 정말 처음으로 불투명한 호수 너머의 무언가를 마주했다고 생각했다. 그 너머에 닿은 것 같았다.
아나히타에게 이런 모습이 있었구나. 이렇게 너는, 또 내가 알지 못하던 것을 새롭게 보여주는구나. 피네는 자신을 감싼 채 휘몰아치는 이 감정을 표현할 단어를 찾지 못했다. 그저 단 한 순간이라도 놓치고 싶지 않다는 듯 집요한 시선만이 아나히타를 좇을 뿐이었다. 그 모습은 꼭 홀린 사람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물살을 가르듯 부드러운 움직임으로 발이 움직였다. 아나히타는 소리없이 발을 내딛고, 휘돌고, 공중을 향해 올렸다가 내렸다. 통, 토통, 토토통. 일정한 리듬의 북소리가 귀를 파고들었다. 손가락이 북을 두드렸다 반동으로 튀어오르는 것이 보였다. 섬세한 손짓은 그 아래 담긴 감정을 하나하나 다 표현해내고 있었다. 거기에 짤랑이는 장신구들이 노래 사이사이로 어긋남 없이 자연스레 끼어들어 신비로운 화음을 만들었다. 두 개의 달은 그 광경을 조용히 지켜보듯, 찬란한 흰빛으로 아나히타를 비추었다.
어쩐지 모든 것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이 순간을 영원히 잊지 못할것처럼.
이 몸짓, 이 노래, 이 사위. 북 소리, 하다못해 자신의 피부를 스치는 이 바람마저도 기억에 새겨져 결코 닳거나 지워지지 않을 시간으로 남을 것이다. 천년이 지나고 만년이 지나고 억겁의 세월이 흐르더라도, 이 순간만큼은. 우리가 즐기고 있는 이 순간만큼은 그 누구도 앗아가지 못하리.
이것은 영원에 남을 기억이었다.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이 있다면 오직 이 순간 뿐일 것이다.
아무리 영원 같은 시간이라 하더라도 끝은 찾아오는 법이다. 노래는 슬슬 막바지를 향해갔다.
خداوندا دلم غم داره امشو گلم
که یارم رفته ناپیدایه امشو گلم
하늘을 향해 솟구치던 새는 이제 다시 물가에 앉았다. 슬픈 가사를 노래하는 목소리는 잔잔하면서도 뚜렷하게 귀에 꽂혔다. 홀로 빙글빙글 돌던 아나히타는 이제 피네 옆에 앉아 있었다. 무릎에 내려놓은 북을 두 손으로 두드리자 흥겹게 뛰놀때와는 어딘지 다른 소리가 북에서 흘러나왔다. 박자도 다시 느려졌다.
통, 통.
کنار چشم مو حاصل بکارین گلم
که آب چشم مو دریایه امشو گلم
차디찬 밤의 공기를 뜨거운 숨이 갈랐다. 피네는 숨이 눈 앞에서 피어오르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열이 오른 숨을 토해내며 아나히타가 가사를 읊었다.
아나히타의 눈은 밤의 빛을 반사해 반짝이며 빛났다. 평소와 같은 달무리의 빛이 아닌, 구름 없이 환하게 빛나는 달의 빛이었다. 그 빛이, 행복감이, 즐거움이 피네에게 전해져왔다.
가사가 끝나고 아나히타는 마지막 음들을 흥얼거렸다. 아주 가벼우면서 느릿한 진동이 함께 들려왔다. 손가락이 가죽 위를 날듯이 노닐었고, 가죽을 통해 전달된 소리는 허공을 향해 울려퍼졌다.
노래를 마친 아나히타가 살짝 숨을 몰아쉬었다. 사방이 고요했다. 하다못해 찌르르 하는 동물들의 울음소리마저 들리지 않았다. 마치 온 우주가 그들의 노래를 듣느라 조용해진 것처럼. 물기가 느껴지는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는 소리만이 들릴 뿐이었다.
피네는 조용히 아나히타를 바라보았다. 달빛 아래에서 그의 가슴이 작게 오르내리는 것이 보였다. 거칠던 호흡은 점차 잦아들더니, 이제는 숨을 쉬는 소리도 거의 들리지 않았다.
그는 별을 보고 있었다. 붉고 푸른 하늘을 수많은 별들이 밝히고 있었다. 연약하고 금방이라도 꺼질 것 같지만, 무엇보다 확실히 타오르는 빛. 우리의 삶보다 더욱 긴 시간을 살아가는 거대한 천체들.
청회색 눈에는 반짝임이 가득 담겨있었다. 여전히 식지 않은 흥분으로 이루어진, 폭죽과도 같은 빛이었다. 그 빛이 오롯이 담긴 시선이 피네를 향했다.
때마침 바람이 살랑 불어왔다. 어둠 속에서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흔들렸다. 선선한 바람을 느끼며 둘은 서로를 마주보고 있었다. 먼저 고개를 돌린 건 아나히타였다. 어쩐지 대답이 듣기 두려운 듯, 제 시선을 피하는 아나히타를 보며 피네는 입을 열었다.
“아름다웠어.”
진심이 담긴 목소리에 다시 시선이 돌아왔다. 놀란 토끼마냥 눈을 깜빡이는 아나히타를 보자 어쩐지 말이 퉁명스럽게 나왔다.
“내가 거짓말하는 걸로 보여?”
“그건 아니지만…”
“정말이야. 예뻤어. 지금까지 내가 본 그 무엇보다.”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마음을 담아 이야기했다. 그가 또다시 움츠러들지 않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더 자주 보고 싶었다. 그 미소도, 그 몸짓도. 아나히타가 다른 사람에겐 결코 보이지 않을 모습을, 자신에게 보여주었다는 사실이 좋았다. 더욱 특별한 사람이 된 듯한 기분이었다. 모두에게 감추어진 장막 뒤편을 홀로 볼 수 있었다는 기쁨. 그리고 더욱 그것을 보고 싶다는 욕망. 나는 네가 환히 웃고, 춤추고, 노래하는 게 보고 싶다. 오늘과 같은 순간들을 더 많이 함께하고 싶다.
“…진심이야, 믿어줘.”
“응, 믿을게.”
잠깐의 침묵 끝에 돌아온 대답은 예상보다 더욱 명료했다. 시선 끝에서 아나히타가 웃는 것이 보였다. 쑥스러워하면서도 선명한 웃음이었다. 이 또한 살아있는 자의 것이었다. 너무나도 생기가 넘치는 그 웃음에
“피네?”
피네는 어느새 자신이 아나히타에게 너무 가까이 붙었다는 것을 깨달났다. 그의 볼과 제 입술 사이 간격이 한 뼘은 되었을까? 깜빡일때 움직이는 속눈썹, 얼음과 같은 빛의 투명한 눈동자, 호흡하며 내쉬는 숨까지, 너무나 가까웠다.
자신의 숨에 피부 위 솜털이 흔들리고, 눈동자는 시선을 어디 두어야할지 모르겠다는 듯 떨렸다.
피네는 한순간 망설였다. 여기서 더 다가가도 되는 걸까? 그러면 어떻게 되는 거지? 타임로드에게는 생식이라는 개념이 없고, 스킨십 역시 낯설었다. 이런 순간에 대한 지식을 아나히타는 물론이고, 피네 역시 어떻게 대처해야할지 몰랐다.
잠시 망설이던 피네는 아나히타의 볼에 짧게 입맞추고는 다시 뒤로 물러섰다. 어색한 공기가 둘 사이를 가르고 있었다. 피네의 머릿속에서는 또다시 인격들이 뒤엉켜 싸워 머리가 어지러웠다. 두통이 일 지경이었다.
아나히타는 가만히 피네를 바라보았고, 이번에는 피네 쪽에서 쑥스러운 듯 아나히타의 시선을 피했다.
“실, 실수한거야. 싫었어도….”
“아니.”
쪽. 피네의 볼에 부드러운 무언가가 닿았다 떨어지는 감촉이 느껴졌다.
“그렇게 말해 주어서 고마워.”
그는 데이기라도 한 것처럼 화들짝 놀라며 아나히타를 바라보았다. 아나히타는 그저 차분하게 웃고 있었다.
달빛처럼 환하던 눈빛은 다시 은은하게 가라앉았다. 다만 여전히 남아있는 반짝임이, 아까 전의 모습이 환상이 아닌 실제였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그 미소. 하늘을, 대지를, 바다를 자유롭게 노니는 자의….
두 심장이 세차게 뛰는 것이 느껴졌다. 이 감정은 무엇일까? 형용할 수 없는, 아까부터 계속 느껴지던 이 감정…. 어색하다. 그러나 불쾌하지는 않다. 달아나고 싶으면서도, 이 순간이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피네는 슬금슬금 손을 뻗어 아나히타를 잡으려 했다. 너라면 이 해답을 알고 있을까? 하지만 그 전에 자신의 손을 덮는 촉감이 느껴졌다.
아나히타가 피네의 손 위로 손을 올렸다. 여전히 따스한 미소로. 처음에는 가볍게 쥐는 것 같더니, 이내 소중한 것을 감싸는 것처럼 살짝 힘을 주었다. 다시 고개는 밤 하늘을 향한 채, 아나히타가 말했다.
“오늘 달이 참 예쁜 것 같아.”
대답을 바라고 한 말은 아닌 것 같았다. 대답을 바라고 있었다 해도 할 수 있는 게 없었지만 말이다. 피네의 머릿속은 폭죽처럼 터지고 있었다. 파도처럼 자신을 휩쓰는 감정 앞에서 그는 작디 작은 하나의 부표였다.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피네는 겨우 힘을 짜내 입을 열었다.
“…그러네.”
아나히타의 말은 사실이었다. 두 개의 달이 은은한 빛으로 세상을 비추고 있었다. 둥근 달은 그 무늬까지 눈에 들어올 정도로 컸다. 오늘이 달이 가득 차는 주기였던가. 피네는 속으로 생각했다.
시선을 살짝 돌리자 하늘을 수놓아내리는 무수한 별들이 보였다. 별들은 왕을 지키는 신하처럼 달의 주변을 촘촘히 감쌌다. 은하수가 하늘에 쏟아져내렸다.
다른 이들은 모두 자고 있었다. 깨어 있는 이들이 있다 해도 일에 바빠 이 광경을 보지 못할 것이다.
오로지 둘만을 위해 존재하는 어둠의 장막이었다. 두 달과 별 하나 하나까지도 그들의 것이었다.
찬란히 빛나는 베일 아래에서 아나히타와 피네는 손을 잡았다. 조금 차가운 손과 반대로 뜨거운 온기를 지닌 손. 두 손의 열기가 뒤섞였다. 서로의 온도가 서로에게 옮겨갔다. 마치 둘 사이의 적절한 거리를 찾는 것처럼.
또다시 바람이 불어왔다. 펄럭이는 아나히타의 머리쓰개를 보자 조금 전 이 밤하늘 아래에서 춤을 추던 모습이 선연하게 떠올랐다.
피네는 잠시 두 눈을 감았다. 며칠이 지나면 우리가 50세가 된 것을 기념하는 무도회가 열릴 것이다. 그곳에서 네가 추는 춤 또한 오늘과 같은 느낌일까?
알 수 없었다.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결심이 섰다.
피네는 눈을 뜨고 다시 밤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자신이 할 말을 찾은 것 같았다. 이걸 위해 오늘 잠을 설친 것일지도 몰랐다.
“이제 돌아가는 게 좋겠다, 그렇지?”
아나히타의 말에 피네는 상념에서 깨어났다. 슬슬 자신을 감싸는 졸음을 느끼고 있던 참이었다. 피네의 손을 덮던 아나히타의 손이 다시 물러나고, 그가 자리에서 일어서는 게 보였다. 아쉬움에 손을 뻗었지만 붙잡진 않았다. 이미 이 순간은 끝났다는 사실을, 둘 모두 알고 있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이 깨지 않게 조심하며 복도를 걸었다. 특별한 말은 더 오가지 않았다. 앞장서 걷는 아나히타의 뒤를 피네가 따랐다.
그는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기 전 피네에게 짧게 인사했다. 저 미소를 내일도 볼 수 있을까? 회의를 느끼며 피네는 퉁명스레, 하지만 평소보다는 유한 투로 대답했다.
아나히타의 방 문이 닫혔다.
피네는 이제 홀로 텅 빈 복도를 걷고 있었다. 아나히타가 춤을 추며 나오던 바로 그 복도였다. 홀로 복도에 있다는 사실에 딱히 고독을 느끼지는 않았다. 그의 머릿속은 수많은 계획들을 세우고 지우고 조합하느라 바빴다.
그는 손가락을 꼽아가며 앞으로 할 일을 정리했다. 먼저 초대장을 보내고, 그걸 수락하면 그 다음에는…. 마지막 손가락이 접힐 때쯤 피네는 자신의 방에 도착했다.
책상에 앉아 무언가를 적고는, 침대에 누웠다. 눈을 감고 다시 한번 복기하듯이 장면들을 떠올렸다.
유난히 밝은 밤의 빛 아래에서 울리는 북 소리와, 내딛던 걸음과, 휘날리는 천 자락과… 그 모든 것의 주인공. 아나히타. 피네는 그를 생각했다.
드디어 잠이 쏟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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