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나는 대답했다.
0.
이제는 까마득히 멀게 느껴지는, 내가 처음 아카데미에 입학했던 그 날. 나는 그때까지 한번도 친구가 있어본 적이 없었다. 내 가문은 갈리프레이의 여타 가문들처럼 태어나는 아이들의 수가 극히 적었고, 그나마 있는 사촌들과는 언제나 서먹했다. 나는 처음부터 아이가 아닌 한 가문의 후계자로서, ‘착한 아이’로 키워졌으므로.
아카데미에 처음 들어갈 때도 별 기대를 했던 것 같진 않다. 내 관심사는 언제나 나를 바라보는 어른들에게 있었고, 그들에게 잘 보이고 싶었을 뿐이었다. 친구들과 잘 지내는 것도 처세의 일환이겠지, 여기서 인맥을 쌓으면 가문에서 좋아하겠지. 그래, 처음은 분명 그런 마음이었었는데.
너희는 내게 다가와주었다. 나를 무시하지도, 재수없게 여기지도, 잘난 척 한다고 싫어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나를 멋있다고, 똑똑하다고, 네가 있어서 행복하다고 말해주었다. 그때 나의 수단이었던 너희들은, 목적이 되었다. 사실 나는 너희들을 처음부터 사랑하고 있었던 것이다.
1.
그리고 내가 사랑하게 된 너희들에는 너, 피나이레트나세네트가 있었다.
너와 처음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린다. 내가 별 생각없이 한 인사에, 너는 진심으로 감탄해주었다. 너의 수줍어하는 어투와 내 인사를 보며 반짝이던 눈을 기억한다. 그리고 나서 함께 네 인사를 만들었던 것도, 참가상이라며 주었던 사탕도 기억한다. 그리고 그 사탕이 얼마나 맛있게 느껴졌는지도.
네가 나를 동경하는 눈빛이 좋았다. 최고의 지성이라는, 나조차 믿지 않던 그 유치한 수식어를 듣고 멋있다고 말해주어서 기뻤다. 어쩌면 그때부터, 나는 너를 귀애했을지도 모른다.
시간의 틈을 보기 전이 떠오른다. 그때 너는, 우리 모두를 사랑한다고 대답했었다. 그 말이 어찌나 사랑스럽게 느껴지던지. 너와 함께 한 1년이 즐거웠다는 내 말은 진심이었다. 너는 더 이상 수수께끼를 좋아하지 않게 될까, 있는 그대로의 네가 아니게 될까 두려워했고 나는 그런 너를 달래주고 싶었다. 우리 모두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그저 어른으로서 한 걸음 더 딛을 뿐이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래서 나는, 그때 네게 시간의 틈을 본 뒤에도 같이 수수께기 놀이를 하자며 이야기했었다.
2.
왜 나는 시간이 잔인하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을까.
3.
네가 아닌 레메디를 만났을 때, 나는 두려웠다. 수수께끼를 좋아하던 피네, 수줍어하면서도 눈을 반짝이던 너는 어디로 간건지 무서웠다. 레메디는 그런 나를 안심시키려 정신을 열어주었지만, 그 안에서 너는 목이 찢어져라 비명을 지르며 울음을 쏟아내고 있었다. 그러니 내가 어찌 너를 걱정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시간의 틈에서 너는 무엇을 보았길래 저리도 악을 쓰는 건지, 네 정신이 이대로 찢겨버리는 게 아닌지, 피네는 사라지고 레메디만이 남는 것이 아닌지. 나는 너무나 겁에 질려 레메디를 붙잡고 울먹였었다. 그가 나를 안심시켜주지 않았다면, 네가 돌아올 것이라 확언하지 않았다면 나는 결국 울음을 터뜨려버렸을 것이다.
그리고 레메디의 말대로 너는 돌아왔다. 내가 알던 피네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너는 레메디를 머저리라 불렀다. 그와 내가 너를 생각하던 마음은 신경도 쓰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시간의 틈은 너를 산산조각낸 다음, 이전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만들어버렸다. 네가 다시 돌아왔던 그 순간부터 나는 그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너와 친구로 남아있고 싶었다. 너와의 관계를 잃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부탁했다. 네게 빌었다. 어차피 처음부터 내게 자존심이란 건 없었으니까.
“네가 나를 친구로 생각하지 않더라도, 나를 피하지 말아줘. 부탁할게.”
나는 그렇게나마 네 곁에 남아있기를 바랐다. 너의 친구로서. 비록 네가 나를 무시하고 밀쳐내더라도, 우리의 관계가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더라도. 그저 네 곁에 나의 자리가 있다면, 친구라는 이유로 네게 계속해서 다가갈 수 있다면 충분했다. 그래서 나는 대답했다.
“후회하지 않아.”
그것은 고집이었을까, 진심이었을까? 내 말에 네가 보였던 표정을 기억한다. 너는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다, 손을 만지작거리다, 결국 한숨을 쉬며 고개를 돌렸었지.
순간 언뜻 이전의 네 모습이 겹쳐보였던 것 같기도 했다. 수줍으면서 상냥했던, 7살의 피네가, 여전히 네 안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더 너를 붙잡으려 했던 걸지도 모른다.
4.
그리고 42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나는 꾸준히 네게 다가갔다. 언제나 미소지으며, 상냥하게. 7살때의 내가 그러했듯이. 하지만 변한 것도 있었다. 나는 더 이상 네 안에서 과거의 피네를 찾으려 하지 않았다. 나는, 이전에 네가 이야기했던 것처럼, 그리고 다른 누군가의 말처럼 변화를 받아들였다. 앞으로 나아갔다. 나는, 지금의 너. 피나이레트나세네트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런 너를 여전히 귀애했다. 그 마음만큼은 변하지 않았다.
5.
그렇게 우리는 다시 이 순간으로 돌아온다. 반짝이는 유리의 빛에 둘러싸인 연회장으로. 네가 내게 수십년간 건네지 못했던 말을 전하는 순간으로.
대답을 기다리는 너는 떠는 것 같았다. 아니, 이미 함께 춤을 추었을 때부터 그랬었지. 너의 생각대로, 나는 알고 있었다. 어떻게 모를 수가 있겠는가. 나의 손은 언제나 네 것을 잡고 있었으며, 내 눈은 언제나 너를 향해 있었는데. 어떻게 그 사실을 모를 수가 있을까.
조용히 입을 열었다. 얼굴에는 미소를 띤 채.
“피나이레트나세네트, 피네.”
내 대답은 언제나 정해져 있었어. 네 파트너가 되기로 한 순간, 후회하지 않는다 말했던 그 날, 어쩌면 그 이전부터.
“나도 너를 좋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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