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보잘것없는 사람이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나이트 사망로그

약 하루 전, 나는 네 명의 동료들과 함께 9층에서부터 한 층씩 내려가며 6층까지 탐색을 마쳤다. 그리고 9층에서 기다리던 다른 동료들은 아래층이 안전해졌다는 소식을 듣자 대부분 6층까지 내려가 새로운 곳을 거처 삼았다. 좋은 변화였다. 어마어마하게 큰 진전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한 개의 층에 갇혀 있는 신세는 면한 데다 탈출에 한 발짝 가까워진 셈이니까. 그리고 괴물을 물리칠 수 있는 방법을 알아낸 것도 큰 수확이었다. …비록, 이건 내가 알아낸 사실이 아니라 이사님들께서 조사하신 결과이지만.

아무튼, 주요 거처를 옮긴 덕에 대부분의 동료들은 6층에서 지내고 있었다. 잠을 청할 수 있는 간이 침도 넉넉하고, 식량도 더 발견한 덕에 이전보다는 조금 나아진 생활이었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믿었다. 희생을 감수하며 다녀온 모험에 그 정도 의미는 있었어야 할 테니까.

그리고 또 다른 이점도 있었다.

툭, 고개를 젖히자 뒤통수에 푹신한 의자의 감촉이 느껴졌다. 앉아있는 자리부터 등을 편안하게 감싸주는 의자는 언제나처럼 몸을 편안하게 해 주었다. 체중이 실리자 적당한 정도로 눌리는 쿠션은 폭신한 구름 위에 앉은 것만 같은 느낌을 주었고, 적당한 높이의 의자는 앉아있을 때에 불편한 곳 따위 없게 만들어주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공간에는 나뿐이었다.

9층 휴게실. 아무도 없는 곳. 이곳을 찾아온 것은 나의 의도였다. 휴식을 원하는 사원들은 거의 간이 침대가 있는 6층으로 향했으니까. 이미 하루를 꼬박 지낸 9층에 올라오려는 사람은 적을 테고, 그나마도 그저그런 시설의 휴게실에는 더더욱 오지 않으려 할 테니까. 사람도 좋아하고, 대화도 좋아하던 나지만 지금은 아무도 보고 싶지 않았다. 그저 홀로 생각을 정리하고 싶을 뿐이었다.

규칙적인 나의 숨소리와 간헐적으로 몸에서 나오는 지직거리는 오류 섞인 소리만이 공간을 채웠다. 아니, 실은 넓은 휴게실을 채우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사원들이 가득 들어찼을 때는 시장통마냥 시끄럽고 번잡하던 곳이었는데, 지금은 그 작은 오류 소리마저 메아리처럼 벽에 부딪혀 울리는 것이 어색했다.

어색함이 불안함으로 바뀌려 할 무렵, 감고 있던 눈을 떴다. 천장에 달린 조명이 눈을 아프게 찔러왔다. 조명을 직선으로 받는 자리가 부담스러워 손을 들어 빛을 가리려 했다. 하지만 시야에 들어온 내 손을 보자, 입에서 짧은 단말마가 새어나올 뿐이었다.

“아…”

오래 말을 하지 않아서일까. 갈라진 목소리가 굳어버린 목을 갈라 헤집고 나오는 기분이었다. 씁쓸한 미소가 입에 올랐다. 처음에는 손끝과 머리카락 끝에만 살짝 보이던 이 오류 덩어리는 어느새 온 몸을 뒤덮을 듯 영역을 넓혀갔다. 팔을 타고올라오는 보랏빛의 기분나쁜 색에 괜히 몸을 움찔거렸다.

입에서 한숨이 새어나왔다. 이런데도 몸에는 별다른 이상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도 섬뜩했다. 느껴지는 이상은 오직 정신적인 부분뿐이었다.

좋아하던 것. 그리고 싫어하던 것. 모든 게 뒤죽박죽이었다. 힘들 때면 더 사람들 속에 섞이려 노력하며 어떻게든 긍정적인 생각을 떠올려 보려 했던 과거는 까마득히 멀게만 느껴졌다. 주변의 대화소리는 감당하기 버거울 정도로 시끄러웠고, 긍정적인 사고는 무의미하게만 느껴졌다.

탁, 탁. 괜한 초조함에 발을 톡톡 바닥에 두드렸다. 내가 느끼기에도 나의 상태는 많이 나빴다. 그리고 점점 나빠지고 있었다. 분명 처음에는 아무런 이상도 없다 느껴졌지만, 몸이 오류에 침식되어갈수록 정신이 뒤틀리는 감각이 심해져만 갔다. 내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던 게임과 가족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이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스멀스멀 올라왔고, 기억은 커다란 구멍이 난 듯 군데군데 빈 곳이 가득했다. 이마저도 오류의 효과인지, 아니면 불안함과 스트레스에 내 뇌가 기억을 거부한 것일지도 알 수 없었다.

…우리 부서에 원래 이사님이 계시지 않았던가? 왜지. 다른 부서들은 전부 담당 이사님이 계시는데. 처음 대피할 때 액션부서를 이끌던 건 누구였더라. 분명 웃으며 내게 이름을 묻던 사람이 있었던 것 같은데, 왜 그것도 누구였는지 모르겠지.

픽셀 이사님이 보여주셨던 파일들. 왜 나는 그에 대한 기억이 없을까.

본능에 가까운 직감이 말했다. 이대로라면 오류에 전부 집어삼켜지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될 지… 가늠도 되지 않았다. 죽는 걸까? 아니면 오류가 나의 의식을 대신 조종하게 될까? 기억이 완전히 사라지고 백지 상태가 되는 건 아닐까. 어쩌면 그저, 이대로 거대한 오류 덩어리가 되어 이 공간을 오염시킬지도 몰랐다. 선례가 없으니 짐작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고, 그 짐작이 좋지 않은 쪽으로 흘러가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오른손을 꽉 쥐었다. 스파크가 튀며 오류 덩어리가 지직거리는 소리를 냈다. 후회하는 건 아니었다. 내가 아니라면 다른 사람이 그 오염된 팔찌를 만져야 했겠지. 수상함을 느끼고서도 손을 뻗었다. 누군가가 다쳐야 한다면 내가 다치고 싶었으니까. 내 목숨을 담보로 걸어서라도 사람들을 지킬 수 있었다면 그것으로 족했다.

“덕분에 다른 분들은 오류에 잠식되지 않고 무사히 돌아올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중얼거림이 입에서 새어나왔다. 아마도 진실에 가까운 말이기는 했다. 팔찌를 되돌릴 방법은 너무 늦게 발견했었고, 내가 하지 않는다면 대신 팔찌를 집어들겠다 주장하는 사람이 나와 같은 상황이 되었을 테니까. 내가 있는데도 내가 나서지 않아서 다른 사람이 다치는 것.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일이었다. 그러니 그런 상황을 피한 것만으로도… 최악의 선택은 아니겠지.

씁쓸한 미소가 입에 올랐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은 두렵지 않느냐면… 지금도 너무나 두려웠으니까.

미지의 공포. 누군가가 불안해하는 내게 일러준 것. 그 말대로였다. 이런 상황이 일어났다는 사실과 바깥 상황을 알지 못 한다는 것도 버거웠는데, 내가 과연 어떻게 변해갈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으니 아주 창문이라도 넘어 밖으로 도망치고 싶을 정도로 심장이 떨렸다. 혹시 괴물로 변하는 건 아니겠지. 그것만은 피하고 싶은데…

오한이 들어 몸을 살짝 떨었다. 애초에 왜 팔찌를 처음 봤을 때부터 물을 뿌려볼 생각을 하지 못 했을까. 천천히 살피자고 해 놓고서… 복잡한 상황이었다 해도 두고 가자는 생각을 하지 못 한 걸까. 내가 똑똑했다면. 조금 더 지혜로웠다면. 더 나은 방향으로 해결할 수 있었을까. 돌이킬 수 없는 걸 알아서 생기는 후회만이 내 머릿속을 채우며 눈을 지그시 감았다.

어릴 때부터 그랬다. 나는 태생적으로 머리가 좋지 않은 아이였고, 그래서 무언가 일이 일어나고 나서 후회하는 빈도가 지나칠 정도로 높았다. 그래서 머리가 좋은 아이들이 높은 학업 성취도와 함께 승승장구할 때도, 특출나거나 특별하지 않은 아이로 남았다. …아니, 실은 어리버리한 성격 탓에 사고를 치는 빈도가 잦아 꾸중을 자주 듣는 편이었다.

그 자체로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야망이 있는 것도 아니고, 튀고 싶은 것도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어른들이 똑똑한 친구들에게 칭찬을 해주면서도 내게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는 것은 생각보다 큰 상처로 남았다. 사랑받고 싶었고, 사랑하고 싶었던 나이부터 느껴온 차별 속 서운함은 마음속 깊이 뿌리박혀갔다.

아무에게도 이 이야기를 한 적이 없었다. 당연했다. 내가 생각해도 보잘것없는 이야기였으니까. 세 살이나 어린 동생과 어릴 때부터 비교되는 내 처지가 한심했고, 그런데도 결국 뛰어넘지 못 하는 내 태생이 부끄러웠다. 그래서 어머니가 제안한 나이보다도 더 이르게 검도를 시작했다. 또래들에 비해 내세울 수 있는 것은 운동신경 정도였으니까. 검도가 역할로 나쁘지 않은 유명세를 가진 게임의 배우 역할을 따낸 어머니라면, 검도에서 뛰어난 성적을 거두었을 때 나를 칭찬해주시고 아껴주시리라 믿었으니까.

아주 틀린 짐작은 아니었다. 하지만 한계가 있었다. 내 인간관계는 가족이 전부가 아니었으니까. 어머니의 사랑만으로는 감당되지 않는 것도 있었다. 친구들, 선생님들, 선후배들… 그들 모두에게 사랑받고 싶다는 욕심은 건재했으니까. 그때는 그게 욕심이라는 것도 몰랐다. 미움받는 게 지나치게 두려웠고, 모두가 나를 사랑해줬으면 했다.

그래서 내린 결론은, 내가 먼저 그들을 사랑하자는 것이었다. 웃는 낯에 침 못 뱉는다고… 밝게 다가간다면, 미소지어준다면, 긍정적인 사고와 칭찬으로 무장한다면… 나를 사랑하지 않을 리 없었으니까. 몇 번의 시행착오 끝에 나름의 답을 찾았고, 그 이후로는 모두를 사랑하자는 마음가짐으로 살아갔다. 한 번 익숙해지자 그리 어렵지 않았다. 힘들더라도 먼저 나서고, 타인을 돕고, 가장 앞서서 위험을 감수하는 것. 나름의 보람도 있었다. 검도 따위로 사랑받으려 노력했던 게 우스울 만큼 효과적이기도 했다. 도움이 되는 사람을 밀어내는 이는 없었으니까.

…검도. 그 생각에 감고 있던 눈을 떴다. 내가 사랑하는 나의 취미. 이제는 스무 해나 해온, 내 인생에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 왼손을 뻗어 내 옆을 더듬거리자, 단단한 검이 만져졌다. 그대로 검을 들어올렸다. 무기력하게 의자에 놓았던 고개를 들었고, 등받이에서도 몸을 일으켜세웠다. 그래도 아직 검도가 싫어지지는 않아서 다행일까.

천천히 검을 뽑으며 입가에 미소가 올랐다. 진검은 아니었다. 사람을 해칠 가능성이 지나치게 높은 무기를 가지고 다닐 이유는 없으니까. 이건 소재가 철일 뿐이지, 그저 단순한 연습용 검이었다. 진검보다 무게는 가볍고 날은 무뎠다. 사람을 해치려면 해칠 수는 있겠지만… 쉽지 않겠지. 의미없는 가정에 작게 헛웃음을 흘렸다. 사람을 해칠 일이 뭐가 있다고. 배우의 꿈을 접은 건 오래전이었다. 연기 실력에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몇 년이나 외면했지만, 끝내 포기할 수밖에 없었을 정도였으니까.

검도 실력에는 문제가 없었다. 그건 확신할 수 있었다. 또래들 중에서도 나는 가장 뛰어난 축에 속했고, 오랫동안 최고의 자리를 놓지 않았으니까. 어머니의 사랑을 받으려 시작했던 활동이지만 진정 그 활동 자체를 사랑하게 된 것도 오래된 일이었다.

하지만, 동생은 나보다도 뛰어났다. 차마 부정할 수도 없는 사실이었다. 한참 성장하던 청소년기에야 내가 우위를 점할 수밖에 없었지만… 동생이 성인이 되고 나서 얼마 되지 않아 치른 대련에서, 나는 아슬아슬하게 패배했다. 그때까지도 배우의 꿈을 놓지 않았던 내게는 큰 충격이었지만 애써 웃었다. 그리고 동생의 성취를 축하해 주었다. 마땅히 축하받아야 할 일이었으니까. 한심한 열등감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내가 훨씬 먼저 준비했던 게 신경쓰여 이미 프로의 세계로 나가도 손색없는 실력을 가지고도 그때까지 제대로 된 에이전시와 계약하지 않았던 동생에게 무거운 짐을 주고 싶지는 않았다.

내 열등감 따위가 관계를 망치게 둘 순 없었으니까. 나만 참으면 되니까. 동생의 재능은 그 자체로 빛났고 나는 그 빛을 가리고 싶지 않았다.

‘언니는 좀 더 영악하게 살 필요가 있어.’

언젠가 동생이 했던 말이 귓가에 울리는 것 같았다. 수호대에 입사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휴가 차 본가에 내려가 동생과 검도 대련을 한 이후였다. 그때도 패배는 내 몫이었고, 동생은 지쳐 쓰러진 내게 물을 건네며 그렇게 말했다.

‘무슨 뜻이야?’

‘말 그대로. 너무 손해만 보고 살지 말라고. 보는 사람 답답하니까.’

왜 이제 그 말이 생각나는 걸까. 추억이라 말하기에는 쌉싸름한 기억에 두 손으로 눈을 비볐다. 동생이 나를 한심하게 보고 있다는 막연한 느낌, 내지는 피해망상이 있었지만… 그때만큼 그 기분을 강하게 느낀 순간은 없었다. 똑같이 싸웠는데도 훨씬 멀쩡한 모습에… 그리고 시니컬한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는 얼굴에. 당황하여 말을 더듬었다.

‘나, 나 손해…는? 안 보고 사는데? 다 좋아서 하는 거…인데.’

‘거짓말. 언니 진짜 연기 못 하는 거 알지?’

지금 다시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얼굴에 열이 몰렸다. 그때도 얼굴이 잔뜩 빨개져서는 고개를 떨구고 입을 꾹 닫았었다. 아직도 동생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 했던 나는 괜한 오기로 동생이 틀렸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다. 그래서 그렇게 사는 게 내게도 좋다 억지로 믿었고, 내가 그 삶을 사랑한다 스스로 수백번 상기시켰다.

그리고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그 모든 억지가, 자기세뇌가, 진실이 되었다.

“하하…”

기쁜 웃음소리가 입에서 새어나왔다. 사람을 의심하는 것보다는 믿는 게 쉬웠고, 미워하는 것보다는 사랑하는 게 쉬웠다. 모두가 어떤 행동을 하든 나름의 이유가 있다 생각한 이후로는 사소한 일로 성을 내지 않게 되었고, 조금 서운한 일이 생겨도 믿고 기다릴 수 있게 되었다. 좋은 쪽으로 생각하는 것. 어쩌면 고작 자기방어일지도 모르지만… 지금의 내가 살아갈 수 있게 만들어준 가장 큰 원동력이었다.

막 수호대에 입사했을 때, 내 상태는 정말이지 최악이었다. 필기 점수는 턱걸이에, 어쩔 수 없이 찾은 대안이라 그리 만족스럽지도 않았고, 하루가 멀다하고 저지르는 실수 탓에 혼나는 건 일상이 되어버린 후였다. 눈치가 보여 꾸역꾸역 버티고는 있었지만, 갈수록 의기소침해지는 성격에 자존감도 한없이 낮아질 뿐이었다.

지금도 큰 비난을 듣거나 겁을 먹으면 그때의 습관이 나왔다. 몸을 움찔거렸고, 시선을 피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을 깨달은 이후로는 내일이 두렵지 않았다. 모든 일은 마음먹기에 달렸다 하지만, 정말 마음가짐 하나만으로 삶이 이렇게 바뀔 줄은 나도 몰랐었다. 사람이란 의도적으로 타인에게 해를 입히려 하지는 않는다. 그걸 깨닫게 된 것만으로도 내 삶은 크게 달라졌다. 그들의 행동에 상처입기보다는 의도를 알고 함께 해결하려 노력할 수 있었으니까. 그들의 성취에 진정으로 기뻐하며 그들의 성취가 개인의 것이 아닌 수호대라는 공동체에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느꼈으니까. 내가 조금 손해를 보더라도 그들의 기쁨을 위해서라면 나도 기쁜 마음으로 기꺼이 손해를 받아들일 수 있었다.

지금 상황에 적용하자면 어떨까? 문득 떠오르는 생각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부정적인 생각만 가득하던 머릿속을 환기해야 할 것 같았다. 내가 손해를 보더라도… 도움이 되려면. 물론 가족들도 소중하고, 소식을 듣지 못 해 초조했지만 수호대도 나의 소중한 동료들이었다.

곧게 뻗은 검날이 내 시선을 사로잡았다. 오래 써서 흠집도 많고, 검집에는 손때가 타 있었지만 그래서 더 내 손에 꼭 맞았고 쓰기 편했다. 이렇게 할 말은 아니지만… 제대로 된 무기가 아닌데도 싸움이 일어난다면 웬만한 동료 직원 한 명 정도는 능히 제압할 수 있을 정도로.

나이트.

Knight…

당신의 직업을 딸이 계승하기를 원했던 어머니가 지어주신 이름. 어릴 때는 그 이름처럼 멋진 기사 역할을 맡아 게임에서 배우로서 활약하고 싶었다. 내가 읽었던 이야기에서 나오는 기사들은 명예롭게 나라를 지키거나 용맹하게 공주를 구해오곤 했으니까. 하지만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건 꼭 배우가 아니어도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아무리 다쳐도, 어떤 위험에 빠져도… 그 기사들은 항상 용맹함을 잃지 않았고, 약자들과 동료들을 위해 싸웠다. 그리고 그건 나도. 지금의 나도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어제 들은 말을 다시 떠올렸다.

‘괴물들을 처리하는 첫 번째 방법은 직접 싸워 처리하는 것’

나는 기술과는 거리가 있었다. 힘 자체는 더 강해도, 절대 동생을 이기지 못 하는 것도 그 이유였으니까. 분무기를 쓰고, 물건들을 뒤지며 전진하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웠다.

그러니까 내가 도움이 되려면, 남은 선택지는 이것뿐이겠지.

“싸워보자.”

결연한 목소리가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이제 언제 오류에 완전히 잠식될지 모른다. 최악의 방향으로는 내가 괴물이 될 수도, 아니면 이곳을 전염시키는 오류 덩어리가 될 수도 있는 상황. 그런 위험을 감수하기는 싫었다. 내가 사랑하는 동료들에 피해를 끼칠 테니까. 그리고 너무 끔찍한 최후니까.

어차피 지금대로라면 그건 머지않은 미래일 터였다. 그러니까 그 전에 괴물을 하나라도 처리하거나… 적어도 데이터라도 수집할 수 있다면 도움이 되기야 하겠지.

좋은 사람이 되고 싶은 것. 그건 내가 항상 가져온 욕심이었다. 모든 좋은 사람들에게 좋은 사람으로 보이고, 그렇게 좋은 관계를 쌓는 것. 하지만 이제는… 이런 선택을 내린 이상 의미없겠지. 아쉬웠지만, 그래도 내 결정을 번복할 생각은 없었다. 그 이상으로 나는 이 사람들이 살았으면 했으니까. 기왕이면 다치지 않고, 무사하게.

두려웠다. 결연함과 두려움은 별개였으니까. 하지만 멈췄을 때, 포기했을 때 다가올 미지의 공포가 더욱 클 수밖에 없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고 싶지 않았으니까. 희생한다면, 피해를 입는다면 그게 차라리 나였으면 했으니까. 기도하듯 잠깐 두 손을 맞잡고 심호흡했다. 이렇게 떠난다면, 나는 어떤 사람으로 기억될까…라는 의문과 함께.

검을 들고 계단으로 향했다.

8층, 7층, 그리고 6층까지 쉼없이 내려갔다. 그곳에 잠시 멈추어 섰다. 5층의 계단은 이전에 8층으로 가는 계단이 그랬던 것처럼, 보랏빛 오류들로 가득했다.

“할 수 있어…”

낮게 읊조리자 작지만 용기가 부풀어 올랐다.

동료들을 지키는 기사처럼. 그들의 행복을 바라는 내 마음을 따라서.

전진하자.

그렇게 발을 내딛었다. 아직 탐색되지 않은 5층으로. 어쩌면 그 아래로.


다시는 돌아오지 못 할 영혼에 애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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