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회

나이트 과거로그 겸 독백로그

#01. 첫날의 기억

열 살의 봄.

그 어린 나이에 처음 검을 잡았다.

당연하게도 진검은 아니었다. 아주, 아주 가벼운 목검. 그저 검을 다룬다는 감각만을 익혀주기 위해서 어머니가 내게 주신 검이었다.

크기는 물론 작았지만 당시에는 내 가슴께까지 올 정도로 길어보였고, 모양은 진짜 검처럼 날카롭고 예리했다. 번쩍 들어올리자 생각보다는 가벼운 무게에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어머니는 금세 나를 바라보고 웃으며 너를 위해 가볍게 준비했단다, 라고 말씀해 주셨다.

기뻤다. 이거라면 어머니처럼 될 수 있을 것 같아서. 언젠가 어머니와 어깨를 나란히하는 배우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와 자신감에 밝은 표정으로 웃었다. 그리고 어머니는 그런 내가 기껍다는 듯 마주 바라보고 웃어주셨다. 그 작은 웃음에도 하늘로 날아갈 듯 마음이 들뜨는 나이였다.

검을 가르쳐주신 분도 어머니였다. RPG게임 속 작은 마을의 경비병 역할을 맡으신 어머니는 동료 역할까지 맡지는 못 하셨기에, 주인공님과의 짧은 전투를 제외하고는 진행에 관여할 부분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 어머니께서는 나와 동생에게도 많은 시간을 쏟는 것이 가능하셨다. 그렇게 나는 매일 아침저녁으로 어머니와 단둘이 시간을 보냈다.

검을 잡자마자 어머니께 처음 배운 것. 그건 어쩌면 당연하고, 그만큼 잊기 쉬운 것이었다. 너무 당연해서 나는 홀로 층을 내려오는 순간까지도 잊고 있던 사실들.

‘나이트, 네가 검을 잡을 때 항상 기억하고 있어야 하는 게 있단다.’

‘네? 그게 뭔데요?’

‘검은,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무기야. 그러니까…’

‘아이, 그런 건 다 안다고요! 저는 그런 것보단…’

‘아니, 이건 진짜로 중요한 이야기야. 그러니까 잘 들으렴.’

어린 아이의 인내심은 깊지 않았다. 나는 입술을 삐죽였지만, 어머니는 아랑곳않고 내게 주의사항을 읊어주셨다.

첫째. 검은 기본적으로 무기다. 상대방을 상처입히거나 죽이기 위해 사용하는 것. 자기방어를 위한 거라 변명할 수도 있지만… 그 방어조차 공격을 통해 시도하자는 결심이나 마찬가지니까. 나를 지킬 때보다는 상대를 상처입힐 때 더 강하다. 그러니까 한 번 휘두를 때도 상대가 크게 상처입을 수 있다는 사실을 꼭 기억해야 한다. 또한 그렇기에 상대가 위협을 느끼리라는 것, 상대가 흥분하리라는 것도 예상해야 한다.

둘째. 검을 든 사람도 그 검에 다칠 수 있다. 당시에 내가 쓰던 목검은 그렇지 않았지만, 진검은 무겁고 날카롭다. 검을 쥔 사람은 으레 제가 더 유리하다는 생각에 도취되기 쉽다. 하지만 그렇다 하여 무턱대고 검을 휘두르다면 그 검을 감당하지 못 해 다칠지도 모른다. 무게중심을 조절하지 못 해 넘어지면 그 날이 검사를 향할 수도 있고, 잘못 휘두른다면 손목에 무리가 갈 수도 있다. 다행히 날에 베이지 않는다 하더라도, 단단한 검날은 그 자체로 훌륭한 둔기가 될 수 있으니. 상대를 공격하는 데에만 매몰되어 자신을 돌보지 않는다면 되려 화를 입을 수 있다.

셋째. 검을 포기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마라. 자칫 아리송하게 느껴질 수 있는 말이었지만, 어머니의 의지는 확고했다. 검은 가져다만 대어도 사람을 해칠 수 있는 무기이고, 그렇기 때문에 누구나 검의 완벽함에 의심을 품지 않는다고. 자신이 실패했을 때 그 이유를 자신의 실력 부족 또는 검의 낮은 품질로 돌리지, 검이라는 무기 자체가 가진 한계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는다 했다. 하지만 검 또한 수없이 많은 결함을 가진 무기다. 날이 차지하는 면적이 크니 손잡이밖에 잡을 수 없어 행동 패턴이 단조롭고, 무조건적인 근거리 싸움이 필요해 위험에 자신을 노출시킨다. 그러니 내가 위험하거나 힘들어진다면, 더 이상 검으로 해답을 낼 수 없을 거라 생각한다면 과감하게 검을 버리라 말씀하셨다.

그때의 나는 그 말을 머리로는 이해할지언정 진심으로 받아들이지는 못 했다. 그저 빨리 검을 휘둘러보고 싶을 뿐이었다. 그래서 고개는 끄덕였지만, 어머니의 당부는 가볍게 흘려버리고 말았다.

기억하고 있었어야 했는데.


#02. 대련의 추억

열 한 살의 가을.

어머니는 그제야 내게 첫 대련을 허락하셨다.

상대는 두 명. 통칭 ‘빛의 기사님’이라 불렸던, 주인공님의 동료 역할 배우님께도 두 명의 딸이 있었고, 내 또래라는 것을 이유로 만나 짧은 대련을 갖기로 했다.

두 자매는 쌍둥이로, 나보다는 세 살이 많았다. 검을 잡은 지는 3년 정도 되었다나. 어머니는 내가 실망할 것을 우려하셨는지 재차 내게는 버거운 상대라는 것을 강조하셨다. 하지만 검술은 대련하며 느는 법이니까, 경험을 위해서는 나쁘지 않을 거라며 나를 응원해주셨다.

낙엽이 떨어지는 공터에 모였다. 나와 어머니, 빛의 기사님, 그리고 쌍둥이 자매까지. 원래는 주인공님이 초반 보스 역할의 배우와 전투를 치르는 곳이었지만, 게임 운영을 하고 있지 않으니 대련을 하기에는더없이 좋은 장소였다. 공간도 넓고 바닥도 잘 다져져 있으니, 다른 곳을 찾을 이유는 없었다.

내가 들고 간 검은 겨우 한 달 전에 받은 내 세 번째 검이었다. 첫 번째 검은 수련을 거듭하며 너무 많이 닳아 버려야 했고, 두 번째 검은 힘조절을 잘못해 부러뜨렸기에. 굳은살이 잔뜩 박힌 손에 들린, 처음보다는 조금 커진 검을 바라보며 대련 전에 마음을 진정시켰다. 수없이 휘두르고, 내리치고, 베어냈다. 하던 대로만 하면 된다.

긴장과 설렘이 섞인 마음을 품고 공터 중앙으로 향했다. 서로의 이름을 소개하며 인사했고, 어머니가 가르쳐주신 예를 표하고서야 대련이 시작되었다. 조심스럽게 검을 들었고, 서로에게 겨누었다. 그리고 그동안 배워온 모든 것을 쏟아붓는 자리가 되었다.

처음 겪는 실전은 어려웠다. 하지만 버겁지는 않았다. 몸이 이끄는 대로, 나는 나보다 반 뼘은 큰 언니의 검을 피하고 정확한 타격을 가할 수 있었다. 온 몸의 신경이 곤두섰고, 많이 맞춘 만큼 많이 맞기도 했다. 하지만 괜찮았다.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겨우겨우 승리를 따내고 꼬질꼬질해진 몸을 이끌고 어머니께로 돌아갔다. 어머니는 웃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으셨다. 내가 바란 것은 그저 칭찬 한 마디였지만, 어머니는 되려 내게 질문하셨다.

‘어땠니?’

예상과도, 기대와도 다른 반응에 주춤했지만 입은 솔직한 마음을 내뱉었다.

‘어려웠어요.’

어머니는 그제야 내게 잘했다며 칭찬해 주셨다.

그리고 말씀하셨다.

이 대련으로 무언가를 배울 수 있다는 것, 그게 가장 중요한 거라고. 승리보다도, 대련의 결과보다도 훨씬 중요하다고.

어린 나는 어렵다는 말밖에는 하지 못 했지만, 어머니는 이미 보신 것이었다. 실전에서는 연습해온 실력의 반도 채 발휘하지 못 하기 마련인데, 그때 내가 어떻게 대처하는지. 내 공격이 막혔을 때 어떻게 판단하는가. 상처를 입었을 때 무슨 반응을 보이는가. 한 번도 배운 적 없는 당황스러운 상황의 연속은 내가 지금껏 연습해온 것과는 거리가 있다는 것. 그걸 느낀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여기셨다. 그리고 어머니는 덧붙이셨다.

‘누군가를 향해 검을 겨눌 때는 항상 기억하려무나. 네가 그 대결로 인해 무엇을 얻고 있는지.’

그럼에도 얻을 것 하나 없는 전장에 뛰어든 것은 나였다.


#03. 도피와 발전

스물다섯 살.

‘축하해. 수호대… 합격했다며.’

‘…축하는 네가 받아야지. 에이전시랑 계약 완료했다며. 벌써 게임도 배정받았고…’

수호대에 합격하고, 통근이 무리라 판단해 이사 준비를 할 때 동생과 나누었던 대화였다. 이제는 한솥밥을 먹는 식구가 아니라 각자의 삶을 위해 나아가야 할 때.

‘…언니. 이거 가져.’

그때 동생이 내게 목걸이 하나를 내밀었다.

‘어…? 이거, 네 거잖아…!’

작은 새, 정확히는 오리 모양의 나무 피규어가 달린 목걸이. 내 목검을 만들다가 남은 나무를 어머니가 어설프게 다듬어 자신도 목검이 가지고 싶다 떼를 쓰던 어린 동생에게 주신 것이었다. 아직까지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도 놀라웠지만, 내게 그 목걸이를 내민다는 사실이 더욱 믿기 어려웠다. 그 목걸이를 어찌나 아꼈는지 잘 때도 손에 꼭 쥐고 자던 녀석이었는데.

‘나야 이 근처에서 일하잖아.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올 수 있어. 그런데 언니는 멀리 가니까… 우리를 기억할 수 있는 수단이 있으면 좋겠어서.’

‘나, 나야 고맙지만… 진짜 괜찮겠어?’

‘당연하지. 그리고 이거… 하나 약속해달라는 의미이기도 하거든.’

무슨 약속? 갑작스러운 말에 손으로는 작은 오리를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 동생은 오래 생각해온 게 있다는 듯이 쉽게 말을 내뱉었다.

‘언니는 언니로 남아줘.’

‘…그게 무슨 말이야.’

‘저번에 언니가 나한테 그랬지. 이럴 거면 개명이라도 할까, 하고.’

‘그, 그랬지…?’

배우 일을 포기하고 나서였다. Knight. 명예로운 이름. 하지만 동시에 배우가 되고싶어하던 과거의 나를 담은 이름. 이름이 불릴 때마다 내가 꿈을 포기해야 했다는 사실과 그 이유까지 한꺼번에 떠오르는 느낌이 너무도 싫어 차라리 이름을 바꿀까, 하고 하소연한 적이 있었다. 홧김에 내뱉은 말이라 진심도 아니었지만, 기억해준 동생의 얼굴이 너무나도 진지해 그렇게 고할 수가 없었다.

‘바꾸지 마. 실패했다 해서 언니가 노력했던 과거가 사라지는 게 아니잖아. 그거, 언니의 첫 검과 같은 재질이라면서. 얼마나 많이 썼는지 너덜너덜해진 그거 말야.’

동생의 말에는 힘이 있었고, 나는 고개를 끄덕거릴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모두가 나의 노력을 봐 주었지만, 시간이 지나며 성취가 떨어지자 모두는 내 노력을 쓸 데 없는 발버둥으로 취급했기 때문에. 그래서 내 노력을 알아주는 동생이 너무도 고마웠다.

‘부적이야. 내가 주는 부적. 언니의 노력을 헛되지 않게 해 줄 거라 생각해.’

평소 미소보다는 무표정이 많았던 동생이지만, 그때만큼은 따스하게 웃고 있었다. 그 모습에 괜히 눈물이 터졌다. 삼십 분쯤은 동생을 붙잡고 울었을 정도로.

‘언니의 과거도 지금의 언니를 이루는 발판이잖아. 과거를 후회하지 말고 나아가.’

나를 위로하려 끌어안은 동생은 그렇게 말했다. 부정하지 말고 온전히 받아들이자고. 그곳에 매몰되어 있는 대신 얻을 것을 얻고 떠나가라고. 새로운 시작을 해야 하는 내게는 더없이 위로가 되는 말이었다. 그래서 그 자리에서 약속했다.

과거에 연연하지 않겠노라.

현재를 최우선으로 생각하겠노라.

그러자 동생은 웃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주객전도가 된 것 같은 느낌에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동생은 뭐 어떠냐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이러라고 가족이 있는 거잖아, 라면서.

그 모습이 기꺼워 그 자리에서 한 가지를 더 약속했다.

지금의 나를 있게 해준 우리 가족을 절대 잊지 않을 것이며, 잠시 수호대 일을 하더라도 내 1순위는 영원히 너일 거라고.

결국 그 모든 것은 단 한 마디도 지켜지지 못 했다.


#04. 하소연

스물여섯 살.

입사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동생이 자취방에 놀러왔다. 물론 말이 그렇지, 혼자 사는 내가 신경쓰여 와본 것이었을 터다.

그때의 나는 아무런 여유가 없었다. 신입이라 일도 모르고, 눈치도 없어 이리저리 치이기만 했다. 말이 수호대지, 액션부서 말단은 그저 세트장을 짓는 막노동 인부에 지나지 않았고 나는 그 단순한 임무에서 조차 수많은 실수를 하고 있었다.

어느 하루는 못을 잘못 박고. 다른 하루는 자재를 잘못 가져오고. 보고서를 잘못 올리거나… 길을 잃어 늦는 실수들. 하나하나는 사소할지 몰라도 매일같이 그런 일이 일어나자 몸보다는 마음이 먼저 지쳤다.

‘일은 할 만 해?’

‘…당연하지!’

‘거짓말 하지 말라니까…’

‘미안…’

동생은 고개를 숙이는 내 모습에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곁에 앉으라는 듯 침대를 두드렸다. 죄인처럼 몸을 움츠리고 곁에 앉자, 동생은 아무 말 없이 내게 기댔다.

당황스러워 입만 뻐끔댔지만, 동생이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

‘나는 힘드네.’

그 말에 놀라 아무 말도 하지 못 했다. 내 기억 속에서는 항상 당당하던 동생이 그런 말을 꺼낼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기 때문에.

‘적응하는 게 쉽지 않아. 새로 만들어진 게임이라 다들 정신이 없네.’

동생은 담담하게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급하게 만들어진 게임이라 질서라 할 것도 없고, 우리가 자란 마을보다 훨씬 좁은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게임이라 답답하다고. 게다가 하필 맡은 역할은 악역이라, 생각보다 심적으로도 쉽지 않다고.

동생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나도 입을 열었다. 실은, 전혀 적응하고 있지 않다고. 배우 일을 준비하며 배운 게임계 관련 일 덕에 겨우 필기시험을 턱걸이로 통과했지만, 평생 배우를 준비해온 몸은 도저히 수호대 일에 적응할 수가 없었다.

‘어제도 팀장님한테 혼났어… 그것도 세 시간이나 내리.’

자책이 섞인 웃음을 겨우 내뱉으며 그렇게 말하자, 동생은 조용히 나를 토닥였다. 솔직하게 말해줘서 고맙다는 말과 함께. 그리고 물었다.

‘언니는 후회해?’

‘후회… 글쎄.’

‘나는 후회 안 해. 돌아가도 같은 선택을 할 거라는 걸 알거든. 어떻게든 이 일을 했을 거야. 언니는?’

그 질문에는 쉽사리 답할 수가 없었다. 이 모든 걸 알고 다시 돌아간다면… 나는 과연 여전히 수호대원이 되는 선택지를 고를까. 한참을 머뭇거렸지만 결국 내가 뱉을 답은 정해져 있었다.

‘응… 아마도. 내가 일을 못 하는 게 스스로 힘든 거지, 일 자체는 너무 좋아. 게임의 가장 가까이에서 살아숨쉴 수 있다는 게… 너무, 너무 좋아.’

배시시 웃었다. 그 말만은 진실이었으니까. 게임이 좋았다. 모두가 힘을 합쳐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그 순간이 너무나도 좋았다. 세트장을 지을 때조차 이곳에서는 어떤 이야기가 쓰여질지, 누가 이곳을 밟게 될 지 기대되었고 길을 잃어도 다른 게임들을 구경한다는 생각에 마냥 즐겁기도 했다. 때때로는 내가 한때 배우 일을 희망했다는 것조차 잊을 정도. 그만큼 게임은 내게 큰 의미였다.

‘잘 됐네. 그럼 그냥 버티면 되겠어.’

‘…그러게.’

‘언니는 이미 최선의 선택을 한 거야. 버티다 보면 날이 오겠지.’

그 말에 눈을 감고 그저 침대 위로 풀썩 쓰러졌다. 졸지에 동생까지 함께 쓰러져 내게 장난스러운 비난을 보냈지만, 그저 웃어넘겼다.

돌이키지 않을 선택은 후회하지 말자. 그냥 지금의 상황에서의 최선을 찾자. 그렇게 결론내리고 나자 머리가 맑아지며 명쾌해졌다. 지금은 미숙해도 시간이 지나면 익숙해지겠지. 그런 날이 온다면 지금 이렇게 민폐를 끼치는 것도 갚을 수 있겠지. 힘드셨을 팀장님과 선배님들도 도와드리고, 나처럼 어려움을 겪는 후배들도 돕자.


#05. 후회

검이 부러졌다.

단 한 번만의 일격으로.

괴물에게 박아넣은 칼은 약했고, 두 동강이 나고 말았다.

열려있는 헬스장의 문을, 정확히는 내가 열어버린 문을 망연자실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익숙함이 이끈 발걸음은 보랏빛의 계단들을 지나 내가 이 건물에서 가장 오랜 시간을 보낸 층으로 가게 만들었고, 목숨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보다도 훨씬 강한, 내가 동료들에게 위협이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은 기어이 괴물이 있는 곳의 문을 열게 만들었다.

검이 부러지며 충격을 온전히 감당하지 못 한 몸이 앞으로 쓰러지며 괴물을 향했다. 그제야 어머니께서 내게 당부한 것들이 생각났다. 세 가지 모두 지키지 못 했다는 씁쓸한 사실과 함께.

첫째, 검은 무기이며 다른 이들을 위협할 수 있다.

나름의 통증은 있었는지, 검에 맞은 괴물은 훨씬 큰 소리를 내며 광분했다. 그리고 내게 돌진했다.

둘째, 자신도 검에 상처입을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내 힘을 이기지 못 하고 앞으로 쓰러지는 모습이 얼마나 꼴사나운가. 다른 생각에 매몰되어 기본에 대해 생각하지도 않고 공격부터 내지르다니.

셋째, 검은 만능이 아니다.

아무런 데이터가 없는 것은 내 쪽도 마찬가지인데. 어쩌자고 덤볐을까.

게다가 배울 것이 있는 전장도 아니었지, 이곳은.

정말 희망적인 상황에서야 하나쯤 죽일 수 있을까? 운이 좋으면 둘? 그런데 내가, 죽을 생각을 하고 내려온 내가, 배우려 온 것은 맞나? 아니지. 오히려 도망친 거다. 혼자 죽을 용기가 없어서. 괴물에 내 명을 맡기려고.

어머니의 가르침을 하나도 따르지 못 했다는 자괴감에 표정이 일그러졌다.

동생과의 약속을 지킨 것도 아니었다.

과거에 연연하지 않겠다라…

그랬다면 이 검을 들고 내려오지 않았겠지. 내 배우 준비 기간을 상징하는 이 검을 들고 내려오지 않았겠지. 이건 내가 채 버리지 못한 과거의 미련을 상징한다. 누군가를 지켜주겠다니. 이 얼마나 바보같은 생각인가. ‘수호대원’이라 해 ‘수호’하겠다 다짐한 게 아니다. 그냥… 그냥, 내가 원했던 일을. 어릴 때부터 염원했던 일을 지금이라도 하고 싶었을 뿐.

게다가… 결국 동생을 보러 가지도 못 했다. 만약 진짜로 그 애가 나보다 우선이었다면 이런 일이 일어나자마자 어떻게든 건물에서 탈출해서 녀석의 안위를 살폈겠지. 그런데 나는 그러지 못 했다. 무서워서. 내 목숨이 너무 소중해서.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어렸다. 그 감정은 짙은 후회였다.

다시 돌아간다면, 나는 이런 선택을 하지 않을 터였다. 적어도 이렇게 무모하게 오진 않았겠지.

내가 여기서 죽으면 나를 기억해줄 사람이 있을까?

괴물에게 닿기 직전, 그런 생각이 스쳤다.

내가 준 선물 정도로 나를 기억해주실까. 그 작은 게 뭐라고.

아니면 선물이라기에는 뭐하지만, 그 팔찌? 그걸 보면서 나를 기억해 주실까?

…대신 감염되었다거나, 살리지 못 했다는 생각만 하지 않으시면 좋겠는데. 원하시던 팔찌를 내가 위험하다며 채갔기에 내가 감염된 것이었고, 동시에 그분께는 롤백 파일이 있다는 것을 아는데도 구태여 달라 하지 않았으니까. 그렇게 말하면 괜히 죄책감만 심어드릴 것 같아서. 어쨌거나 내 선택으로 감염된 것을 책임을 떠넘기는 것처럼 느끼실 것 같아서 함묵했으니까.

지키지 못 한 약속도 너무 많았다.

‘타인이 좋은 사람이라 믿어도 괜찮다는 걸, 제가 보여드릴게요.’

무슨 자신감으로.

내가 좋은 사람이라 스스로 믿어버리고, 끝까지 살아남을 수 있을 거라… 그분과 오래 얼굴을 볼 거라 생각한 오만이었다.

‘같이 과자점에 가요. 이 일이 끝나면요.’

원하시는 것, 다 사드리기로 했는데.

이럴 거면 그 약속을 하지 말 걸 그랬다. 괜히 약속해서 기대만 심어드리고…

‘인형을 주신다고요? 너무 좋아요! 꼭 보답을 드려야겠는데요.’

…내가 없어져도, 죽어도 인형을 만드실까? 나를 생각하시면서?

차라리 그러지 않으셨으면 싶기도 한다. 그 자리에 없는 사람을 위해 공예를 하는 것은 너무 슬프니까.

‘언제 수영장이라도 같이 가요.’

죄다 지킬 수 없는 약속투성이.

푸르른 희망의 약속들은 새빨간 거짓말이 되고 말았다.

.

.

.

괴물에게 닿았다. 그리고 강한 통증이 느껴졌다.

눈을 감았다.

쪽지라도 한 장 써 두고 내려올걸.

말리실까 봐, 혼날까 봐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내려온 과거의 내 선택이 후회스러웠다.

그래놓고 데이터 수집이니, 뭐니 하는 자기합리화 하며…

내가 여기서 죽으면 누군가 내 시신은 수습해 줄까? 나는 돌아갈 수 있을까?

영원히 잊혀지기는 싫은데…

죽음 앞에서야 솔직해진 내가 후회스러웠다.

하지만 언제나처럼,

후회는 되돌릴 수 없는 것에 대한 미련일 뿐이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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