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빌레라

소설

살얼음이 잡히고 땅이 얼기 시작한다.

서당 by 반야

마름달 스무하루

첫눈이 내렸다. 그런데도 아직 따스한 햇살이 비치는 탓에 눈이 소복하게 쌓이지는 않았다. 청룡 침소는 햇빛이 가장 빠르고 깊게 들어온다. 정한이 창문을 열어둔 채로 결계를 둔 덕에 따스한 햇살만 침소 내로 들어오고, 찬 바람은 빗겨나갔다.

창에는 민규가 야무지게 걸어둔 건시乾枾가 있었다. 겉에 눈이 묻어 반짝였으나 눈에 비치는 것이 작아 크게 불편하진 않았다. 침소 벽에 걸린 거울을 보던 정한이 살짝 고개를 틀어 바닥을 보았다. 창의 크기에 맞춰 생긴 그림자가 보기 좋았다. 그리고 그 그림자의 끝에는 백호 한 마리가 걸쳐진 상태였다.

지수는 항상 혼자 있기 적적할 때면 정한이 있는 청룡 침소에 왔다. 정한이 지수의 배 위에 얹어져 있던 약초학 생원들의 의복을 들어 올렸다. 살짝 번거롭고 귀찮은 과정이 필요하긴 했지만, 3년 정도를 입으니 얼추 익숙해졌다.

“어딜 간다고?”

“활인서.”

“이 추운 날에….”

“원래 가장 마지막 수업이라 대한에 하던 걸 옮긴 거야.”

막내들이 감기에 걸릴까 싶어, 정한은 나비 중에서 가장 일찍 온돌을 사용했다. 그 덕에 바닥이 따끈따끈했다. 저를 누르고 있던 옷이 사라져 몸이 자유로워진 백호는 몸을 돌려 배를 굽기 시작했다. 아, 지수야. 나 감투 좀. 정한의 말에 지수가 벌떡 고개를 들었다.

“감투는 왜?!”

“석민이가 옆에서 보고 싶대.”

혹시나 허튼짓을 할까 싶어 물은 것이었다.

“...아무리 잘해도, 3년과 4년의 간극은 클 텐데.”

“말했지. 그래도 괜찮대. 그냥 보다가 알아서 서당에 돌아가겠대.”

“그래…….”

정한의 대답을 들은 지수가 손쉽게 감투를 불러왔다. 그에게 건네주고는 슬그머니 일어났다. 곧 사시가 되면 정한은 밖으로 나갈 테다. 이참에 주작으로 가볼까, 하는 마음이었다. 정한이 지수의 동선을 따라 눈동자를 움직였다.

“나 승철이한테 가 있을게.”

“왜? 누각에 안 가고?”

“할 일도 없는데 굳이 가 있기 싫어.”

“그랭. 나도 나중에 돌아오면 주작으로 가야겠다.”

언제 끝나는지 아냐고 물어보았으나 정한은 당당하게 웃으며 모른다고 했다. 어차피 남은 생원들은 밖으로 나가질 않을 테니 지수도 그저 알겠다고 할 뿐이었다. 둘 다 도술을 써서 원하는 곳에 곧바로 갈 수 있었음에도 함께 있는 시간이 좋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두 다리로 청룡 침소에서 걸어 나왔다. 대강 얼굴도 보지 않고 스르륵 멀어지면서 지수는 남쪽으로, 정한은 중앙으로 갔다.


빈 주작 침소에 간 지수는 망설임 없이 빠져나와 무예를 하는 곳에 갔다. 주작에 없으면 뻔하지. 곧바로 승철을 끌고 나왔다. 울며 준휘에게 매달렸으나 준휘만 톡 떼서 명호와 찬에게 넘겨주고 데리고 나왔다.

“...왜? 무슨 일 있어?”

“내가 심심해서.”

답을 들은 승철이 다시 도망가려 하자, 지수가 포획을 써서 승철의 다리를 감았다. 동백에 걸려 다리가 굳은 승철이 홱 뒤를 돌아봤다.

“너 이 마법 쓰기 싫어한다며! 나 하나 잡는데 이걸 왜 쓰는데!!”

“이 정도는 써야 네가 잡히지.”

다시 동백을 거두어줬다. 주저앉은 승철이 다른 애들은 어디 갔냐고 묻기에, 그를 일으키며 답을 해주었다.

“정한이는 활인서에 갔을 테고.”

“응. 석민이가 따라갔어. 무슨 일이 생길 것 같아서, 중앙에서 있을까 싶어.”

“그래서 날 데리고 온 거야?”

“응. 네 사제잖아. 석민이.”

맞는 말만 하는 지수에, 승철이 입술을 삐죽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씩 맞는 눈이 살짝 불편해서, 산傘 마법을 썼다. 쫙 펴진 원형의 갈모처럼 공중에 우산이 펼쳐졌다. 너... 이제 마법 좀 쓴다? 지수의 말에 승철은 대꾸하지 않았다.


순영은 중앙으로 오는 정한을 발견하고는 손을 흔들었다. 뒤에서 서책을 보던 지훈이 뭣하냐고 물으니, 휙 뒤를 돌아 그를 보았다.

“밑에 정한 사형이 있어.”

“올라오셔?”

“아니. 오늘 활인서 간다고 했어.”

지훈은 그렇냐는 듯 고개를 주억였다. 날이 차가워서 창을 닫는 것이 목적이었던 순영은 잊지 않고 창을 전부 닫은 후에 제 자리에 앉았다. 아무래도 마법을 쓰는 것이 완전히 익숙해지진 않아서 사소한 것들은 손으로 해결하려고 했다. 마땅히 할 일이 남아있지는 않았다. 혼자 꼼지락거리던 순영이 문득 생각난 것이 있는지 퍼뜩 고개를 들었다.

“그거 알아? 수국 양가梁家에서 온 생원, 다음 주에 혼인한대.”

“..이 겨울에?”

“모르지. 그냥 애들 사이에서 말이 돌길래 주워듣기만 했어.”

“...그러냐.”

지훈은 대수롭지 않게 듣고 넘겼다. 그러다 문득 순영의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들고 눈을 마주쳤다. 왜. 소리도 내지 않고 입 모양으로만 물었다.

“다들 혼인할 나이인 것은 알지만…. 죄다 꽃을 품은 집안이잖아.”

“왜. 내가 덜컥 모르는 집안과 혼인이라도 한답시고 사라질까 봐?”

“...응.”

“응?”

순영의 답에 지훈이 어이가 없다는 듯 웃으며 되물었다.

“능소화랑, 혼인을 한다고?”

“...할 수도 있지.”

지수는 따지고 보면 인간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이 아니기도 하고, 동백의 권위에 감히 도전할 집안이 드물어서 다들 추앙만 할 뿐 다가오지 못한다고 했다. 민규네 모란 또한 마찬가지였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어왔는데, 능소화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이 없어서 하는 소리였다.

지훈이 얕게 한숨을 쉬며 서책을 덮었다. 마침 누각에 아무도 없으니까, 라고 혼잣말을 하며 순영의 옆으로 갔다. 순영의 옆자리는 꽃무릇의 것이었다. 눈치 볼 것 없이 자연스레 옆에 털썩 앉았다.

“두 꽃이 만나면, 보통 강한 쪽을 타고 나.”

“응. 알아.”

“두 꽃 전부 피어나지 못하면, 아이는 태어날 수 없지.”

“응.”

이 정도는 순영도 아는 이야기였다.

“때론 강한 것의 순위를 매기지 못하여 두 꽃을 품고 나는 경우도 있고.”

“문준휘처럼.”

“...그렇지.”

지훈이 손바닥을 보였다. 능소화 색의 불꽃이 작게 피어올랐다. 민규가 간혹 사용하던 도깨비불 같은 느낌이었다. 이글거리는 불꽃을 보던 지훈이 다시 손을 콱, 움켜쥐었다. 불빛이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졌다.

“그걸로 가문의 자존심을 내걸어.”

“...자손이 품고 태어나는 꽃으로?”

“어. 자식새끼가 품고 나는 꽃으로 부부들의 꽃 중 누가 우위에 있는지를 확인해.”

순영이 경멸하는 표정을 지었다. 지훈에게가 아니라, 마반인들에 대해서.

“능소화는 숫자로 밀어붙여서 힘을 유지해왔어. 약한 꽃 강한 꽃 가리지 않고 씨를 퍼트려서.”

“…….”

“사랑하지도 않는데 그런 식으로 가문을 유지하니까, 마반인들 사이에서 인식이 좋지 않은 거야.”

순영은 그제야 지훈이 받았던 시선들이 이해가 갔다. 그리고, 왜 가족과 연을 끊고 독각과 살다 이제는 휴가를 받아도 집으로 돌아가지 않는지도. 지훈은 심각한 순영의 표정을 보고 웃을 뿐이었다.

“...아무튼 그냥 그렇다고. 혼인 이야기를 하길래, 마침 아무도 없어서 해준 말이야.”

“…….”

“감히 누가 능소화를 좋아해 주겠어.”

“...여기 있잖아.”

지훈이 일어나려던 것을, 순영이 덥썩 잡아 다시 앉혔다. 얼굴을 가까이했다. 당황한 지훈이 몸을 바르작거렸다.

“지금 네 옆에 있다고. 온전히 너로 봐주고, 좋아해 줄 사람.”

가만히 그 고백을 들은 지훈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끔뻑이더니, 또 작게 입꼬리를 올리며 웃기만 했다.

“나도 너희가 좋아. ...이렇게 날 받아주는 사람은 나비뿐이거든.”

그 뜻이 아닌데. 이번에는 일어나는 지훈을 붙잡지 못했다. 저 말도 낯간지러운 말을 못 하는 지훈에게는 엄청난 용기가 필요했을 테니까. 가만히 앉아서, 붉어진 지훈의 귀 끝만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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小雪, 살얼음이 잡히고 땅이 얼기 시작한다.


정한의 생각보다 생원들이 많이 모이지 않았다. 너무 일찍 나온 건가 싶어 수시를 확인하려던 찰나 누군가 정한의 등을 툭 쳤다. 같이 강의를 듣는 약초학도였다. 정한이 나비 없이 홀로 있는 경우는 거의 없어서 때마침 온 것 같았다.

“왜 이렇게 일찍 왔는가?”

“일각 정도 일찍 온 건데. 자네는?”

“사제들이랑 식사를 하고 시간이 애매해서 그냥 나왔네. 불편해할까 싶어서.”

정한은 가만히 그 생원의 말을 듣기만 했다. 한참을 쫑알거리던 그가 정한의 어깨를 잡고 휙 돌려 눈을 마주하더니 물었다.

“금강초롱이 답지않게 의욕이 없군. 무슨 일 있나?”

“...나?”

정한이 손가락으로 제 얼굴을 가리켰다. 갑자기 무슨 소릴 하나 싶었다.

“응. 매화라도 물려받기로 했나? 세상 다 산 사람처럼 굴지 않나, 지금.”

“에이... 내가 무슨….”

정한이 시시하게 대답하고 넘겼다. 예전보다는 여러모로 유해지긴 했다. 아마 평소였으면 누각에서 글 한 자라도 더 읽다가 남들이 다 모이고 출발할 때쯤 나와서, 홀로 움직였을 테니까. 이 생원의 눈에는 본인에게 크게 벽을 두지 않는 것이 이상하게 느껴질 만도 했다. 종종 승철이랑도 했던 이야기였다. 미래에 안전이 어느 정도 보장되고 나니 세상이 한결 밝고 예쁘다고. 준휘 덕은 아니고? 하고 장난을 쳤다가 주먹으로 한 대 맞기도 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작게 고개를 저었다.

손바닥에 떨어지는 눈 한두 송이를 털어냈다가 다시 받기를 반복하니 어느새 사시가 되어 약초학 생원들이 모였다. 정붙일 생원이 아무도 없는데 그곳에서 누군가를 이끌어가고 싶지는 않았다. 적당히 중간에 섞여 따라갔다.




활인서는 고뿔로 고생하는 사람이 많았다. 딱히 나서서 실습에 참여하지는 않았다. 종종 다른 생원에게 질문이 들어오면 속으로 정답을 맞히는 것에만 만족하던 참에, 힘없이 들어오며 입구에서 까무러친 사람이 생겼다.

문틀에 서 있던 정한이 다급히 뛰어갔다. 두어 명이 더 따라 나와서 그를 도왔다. 안으로 들여서 자세히 확인해보니, 숨이 미약하며 낯빛이 퍼렇고 어두웠다. 피부에는 좁쌀도 돋은 상태였다. 시궐尸厥이다. 정한이 읊조렸다. 쿵, 정한의 뒤에서 묵직한 소리가 났다. 놀란 석민이 낸 것이겠지. 뒤는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미리 경고했던 것이었으니까. 부러 뒤돌아 확인하려 들지도 않았다.

다급히 그의 처방을 찾아보았다. 이미 여러 번 환혼탕을 받아먹은 적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나이도 꽤 있는 편이었고. 손발이 차게 식어 돌아올 생각을 하질 않았다. 급히 밖으로 뛰쳐나갔다. 바로 옆에 있는 약방에 가서 증상을 말했다. 그 후에도 왔다갔다 움직이며 노인을 살리려고 애썼다.

환혼탕을 받아 환자가 있는 방문을 열었을 때는 이미 그가 사망한 후였다. 그 공간에 있던 모든 생원이 죽음을 처음으로 마주한 것이 아니었기에, 울적함 속에서 처리를 시작했다.


갑자기 지수가 뒤를 돌아보았다. 왜? 승철이 묻자, 지수가 전신에 힘을 주어 제 앞을 가두는 행동을 취했다. 뭣 하냐고 묻기도 전에 지수가 제 눈높이에 손을 올려 잡아뜯었다. 땀에 젖은 석민이 튀어나왔다. 지수의 손에는 감투가 들려있었다. 미친놈, 감투를 쓰고 있는데 어떻게 안 거야? 승철이 생각했다.

“도와주세요. 살려주세요. 찬이가 있어야 해요. 찬이, 사람이 죽어요.”

정한을 따라간 곳에서 사람이 죽었구나. 석민의 머릿속을 읽은 지수가 생각했다. 대강 전해 들었던 승철도 눈치챈 상태였다. 석민이 그새 넋이 나간 표정으로 지수의 품에서 떨어져 나가려 했다.

“겸아, 잠깐만!!”

지수가 거세게 석민의 양 팔목을 붙잡았다. 울망울망하던 얼굴에 기어코 눈물이 흘러내렸다. 하지만 마음이 약해지면 안됐다. 감히 누가 인간을 살려? 지수가 또렷하게 석민과 눈을 맞췄다.

찬이 나빌레라를 쓸 수 있다는 사실은 나비들은 다 알고 있었다. 석민의 머릿속에는 온통 그에게 그 힘을 빌려 방금 본 환자를 살릴 생각뿐이었다. 당연히 하면 안 되는 생각이다.

“인간의 목숨을 함부로 건드리면 안 돼.”

“우리는, 사람을 살릴 의무가 있어요.”

“못 살리잖아. 그럼, 그 사람은 죽을 운명인 거야.”

석민이 말을 잇지 못했다.

“감히, 어찌하여 네가, 죽은 인간을 살리려 들어.”

“......그런, 모질고 무책임한 말이 어디 있어요…….”

머릿속으로 생각은 하고 있었겠지만, 실제로 듣고 나니 더 상심이 큰 모양이었다. 주르륵 흘러내리는 그를 잡아 등을 토닥여주었다.

승철과 지수는 석민을 데리고 주작 침소로 갔다. 지수가 일부러 석민을 잠들게 했다. 정한이 돌아오면 그때 제대로 말해주겠지. 약초학에 대한 것을 배울 때는 항상 정한의 말을 철석같이 들었으니 그걸 믿어보기로 했다.

승철이 석민을 눕히고 지수가 눈물을 닦아줬다. 가만히 잠든 그 얼굴을 보다 지수가 문득 입을 열었다.

“...너 2년 생원일 때 생각난다.”

“왜?”

“백룡이 사망한 날, 너도 저리 울며 나한테 말했잖아.”

“...아.”

지수는 제 아비가 사망했을 때 강의를 듣고 있었다. 지수는 인외 사이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그의 기운이 사라짐을 느낄 수 있었다. 크게 몸을 움찔거리더니 낮게 읊조려서 알려주기만 했다. 양옆에 앉아있던 청룡과 주작만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했었다. 그것도 잠시였다. 정한은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어깨를 쓰다듬기만 했다.

백룡과 백호의 피가 섞였다 해도, 표면적으로는 백호의 형태를 타고났다. 게다가 백룡은 지수가 태어나기 전부터 사라진 상태였으니 남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얼굴도 이름도 아무것도 모르는 용에게 굳이 찾아갈 필요가 없었고, 장례 또한 관심 없었다. 승철은 계속 지수를 확인하고 물어봤다가, 지수에게 한 소리 듣고 나서는 눈물을 뚝뚝 흘렀다. 어찌 그리 모진 말을 할 수 있냐고.

“그때는 네가 그..분과 어떤 관계인지 명확히 몰랐으니까.”

“그렇겠지.”

“...요새, 주작들이 여러모로 속을 썩이네.”

“엉?”

“생원 앞에서 나빌레라를 쓰려 들지 않나, 인간의 자연스러운 죽음에 반항하려 들지 않나.”

준휘와 석민을 말하는 것이었다.

“다 너한테 막혔잖아. 나쁘게 보지 마.”

승철이 눈썹을 축 내리며 말했다. 그 모습이 싫지 않아서, 대충 미간을 툭 건드리며 웃어주었다. 그래. 사제를 나쁘게 보지 말아. 정한이 돌아왔다. 옷에 혈흔이 묻어 갈아입고 오느라 조금 더 늦었다고 했다. 석민이 누워있는 모습만을 보고 너가 기절시켰냐? 하고 묻는 것을 보니, 완전히 파악한 듯했다. 둘이 있으면 누구 하나 잠재우는 것 정도는 식은 죽 먹기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지수는 정한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제가 궁금한 것을 물어보았다. 승철과 정한의 생각은 마음대로 읽지 않기로 약속해서, 이럴 때는 읽지 않고 묻는 것이 더 익숙했다.

“...돌아가셨어?”

“어? 아, 어.”

“그런데 넌 왜 이리 무던해.”

조금 전 석민에게는 그리 단호하게 대답했으면서, 죽음에 무뎌지지는 않았으면 해서 하는 질문이었다. 특히 승철과 정한에게 더욱 바라는 것이었다. 정한은 한참 동안 지수를 보더니 입을 열었다.

“...야. 나도 속상하고 안타깝지. 그치만 고인의 가족들께 상황을 알려야 했고 설명도 해야했어. 우리는 거기서 무너지면 안 된단 걸 잘 아니까 그냥 마음을 삭이는 거지.”

“…….”

“네가 뭘 걱정하는지는 알겠어. 굳이 마음 쓰지 말라고 하는 소리야.”

쾅! 씁쓸한 표정으로 겨우 웃던 정한이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창이 거세게 닫혀 승철이 쳐둔 결계가 흩어졌다. 시선이 전부 그쪽으로 몰렸다. 승철의 결계를 깨는 자는 준휘 말고는 없었다. 그렇다고 해도, 준휘가 뜬금없이 창문에 있는 결계를 깰 인물은 아니었다.

“안녕, 아가야.”

이곳에서 들리면 안 될 목소리가 들렸다. 여성의 목소리. 무의식적으로 지수를 보았다. 지수는 익숙한 듯 허공을 보고 있었다.

곧이어 숨어있던 형체가 모습을 보였다. 닫힌 창문 바로 앞에 서 있었다.

승철이 숨을 헙, 하고 참았다. 예전에, 오방식시를 할 때 꿈속에서 보았던 인물이었다. 턱까지 오는 머리카락. 지훈보다 조금 작은 체구에, 준휘를 닮은 눈. 붉은 옷도 여전했다. 그는 가까이 다가와서는 석민의 이마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이렇게 물러터진 놈이, 내 수장이 된다는 게 조금 걱정스럽군.”

“…….”

“안녕, 신령아. 우리 구면이지?”

그가 승철을 보며 웃었다. 그리 기다려왔던 제 영수를 보았는데, 너무 긴장되어 말이 나오질 않았다. 그는 아무런 반응이 없는 승철을 이해한다는 듯 웃었다.

“아가, 너도 오랜만이고.”

“...어쩐 일입니까?”

“주작 애들 보러 왔지. 종종 왔는데, 너한테 이곳에서 들킬 줄은 몰랐다.”

“그리 소란스럽게 오시는데 어찌 모릅니까.”

“네가 있어서 부러 티를 낸 것이지.”

백호의 머리를 북북 쓰다듬으며 말했다. 정한은 그새 조용히 승철의 옆에 가서 앉았다. 청룡을 마주했을 때와는 너무 다른 분위기였다. 청룡은 정한을 위해 분위기를 풀어주고 자연스레 대해주었는데, 주작은 주변을 죄다 녹일 것처럼 위압감을 뿜어냈다.

주작은 석민을 보았다.

“얘는, 깜부기불조차 지나치지 못할 아이란다.”

그리고, 다시 승철을 보았다.

“그리고 넌, 잉걸불 같은 아이잖아.”

더 헌신적인 생원이 수장을, 더 겁이 없는 생원이 신령을 맡는 것이라고 했다. 갑자기 들이닥쳐서는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지만, 주작만 누가 수장이고 신령인지 알지 못했기에 잠자코 듣기만 했다. 처음에는 조금이라도 먼저 태어난 자가 수장이, 그 이후에 태어난 자가 신령이 되는 줄만 알았는데 지훈과 원우를 보니 그것만은 아닌 것 같아서. 게다가, 나비 중 가장 막내인 찬이 수장이 될 운명이라 하니 궁금증은 더 걷잡을 수 없이 커진 상태였다.

“...일부러 재웠니?”

“네. 시간이 좀 흘러서, 아마 일각 정도 후면 일어날 것입니다.”

“그 전에 가야겠군.”

승철에게, 석민이 깨어나면 잘 알려주라고 했다. 왜 벌써 가냐는 지수의 말에 주작은 정한을 흘긋 보더니 말했다. 저 어린 청룡이 날 여간 불편해하는 것이 아니야, 라고. 수백 년을 산 영수가 제 눈앞에 있는데 불편해하지 않을 인물은 지수 외에는 없을 터였다. 주작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고. 주작은 제가 사방신 중에서도 특히 남들에게 편하지 못한 존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저 아이가 깨어나면, 네가 할 말이 많을 테니 그전에 떠나주어야지. 안 그러냐?”

모든 신은 다 저런가. 그는 아무런 정보도 전해듣지 못했을 터인데 모든 것을 통달한 듯 말했다. 흘러가는 상황를 자유롭게 움직이는 것만 같았다.

주작은 제 형태를 다시 숨겼다. 창에 걸터앉았는지, 살짝 문이 흔들렸다.

“아 맞다 아가야.”

“네?”

“이거. 백호가 주란다.”

그는 품에서 꺼낸 서찰 하나를 지수의 품에 툭 던져주고 찬란한 날개를 펼쳐 날아갔다. 지수는 그의 모습을 볼 수 있었으니, 그가 서낭당 나무로 들어가 하늘로 올라가는 것까지 본 후에야 서찰을 펼쳤다.

백호 영수가 보낸 것이었다. 뭔데? 하고 정한이 얼굴을 가까이하자, 말없이 보여주었다. 대설이 되면 수장과 신령이 될 현재 서당의 황룡 일곱 전부 천상으로 올라오라는 내용이 적혀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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