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빌레라

청명

맑은 날 맑은 밤

서당 by 반야

“저 생원님은 같이 안 가는 겁니까?”

“응? 아- 아마 담배 하나 태우고 오려는 것 같아. 그리고 그냥 사형이라 불러. 정한 사형이나 윤 사형이라고.”

“아아, 네. 알겠습니다.”

등롱을 따라 걸으니 낮에 보았던 명륜당이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침소에서 받은 물품 중에 작은 서당 지도가 있었다. 챙겨서 나오길 잘했다. 종이를 펼쳐 보니 파란 점 하나가 승관의 움직임에 맞추어 조금씩 이동하고 있었다. 제 움직임만이라도 보이도록 마법이 걸려있는 것이 신기했다.

 

“힘들어? 조금 앉았다가 갈까?”

민규가 명륜당의 돌계단 위에 앉으며 말했다. 단지 걸어오는 것만으로 힘이 들지는 않았으나 민규가 둘에게 쫑알쫑알 알려준 덕분에 평소보다 더 힘에 부치는 것 같았다. 승관과 찬이 고개를 끄덕이며 조심스레 민규의 옆에 걸터앉았다. 시원한 바람이 기다렸다는 듯 셋을 스쳐 지나갔다.

“여기서 강의를 들을 거야. 시간표 아까 봤지? 1년 생원들은 다 같이 강의를 들었던 것 같은데.”

“2년 생원부터는 다르게 듣습니까?”

“응. 2년부터는 나누어지지. 네 선택에 따라서.”

마법학, 천문학, 약초학으로 나누어서 듣는다며 손가락 세 개를 접어 보였다.

“사형은요?”

“나는 그냥 마법학. 그게 가장 무난해.”

“...오. 그럼 저분들은요? 무얼 하는 분들입니까?”

대나무로 된 긴 통을 등에 메고 모여 돌아다니는 생원이 몇 있었다. 가만히 훑어보면, 지금 서당 중심에 있는 생원들은 전부 목적지가 있는 것처럼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붓 들고 통 메고 다니는 생원들? 회화를 즐겨하는 거야. 통 안에는 화선지가 잔뜩 말려 있을걸?”

그리고 저쪽은 무예를 하는 생원들. 민규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생원들과 눈이 마주쳤다. 매섭게 생긴 사람들이었다. 그런 생원들이 점점 다가왔다. 승관이 쭈뼛거리며 찬의 소맷자락을 붙잡아 무의식적으로 당겼다. 백색 도포를 입은 생원 하나, 적색 도포를 입은 생원 둘. 다른 색의 도포를 입은 생원들이 낯설 수밖에 없었다.

“무예 끝나고 나오는 길이에요? 꽤 늦었는데.”

“엉. 오늘은 시간이 넉넉해서 하다 보니까 그렇게 됐네. 너는 여기서 뭐 해?”

“1년 애들이랑 서당 좀 둘러보고 있었어요.”

찬은 민규가 대화를 나누는 동안 기웃거리며 그들의 이름을 찾아보았다. 주작 생원들은 호패를 달고 있지 않은 듯했고, 겨우 백호 생원의 호패를 발견하고 빤히 이름을 읽어보려 하였으나 그 생원이 호패를 집어 드는 탓에 볼 수 없었다.

“권순영이다. 이름이 궁금했던거지?”

“...!”

순영은 죄송하다며 벌떡 일어나려는 찬을 겨우 진정시켜 앉히고는 넉살 좋게 웃었다.

“놀리지 말고 들어가자.”

“아- 이야기를 좀 더 해보고 싶은데.”

“네 침소에도 하나 들어왔다며.”

가야지. 주작 생원이 순영의 등을 토닥이며 억지로 승관과 찬에게 인사시켰다. 끝까지 조심히 들어가라고 당부하는 그들의 말에 민규는 대충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했다.

“사형. 저기는 뭘 하는 곳입니까?”

명륜당 한가운데에 있는 큰 누각이었다. 누각 지붕 중앙에 꽂힌 황색 깃발, 그리고 그 아래 사방을 향해 꽂혀 있는 네 깃발이 펄럭이고 있었다.

“누각? 황룡들이 쓰는 공간이야. 낮에 침소 배정할 때 황색 도포를 입은 생원들, 봤지?”

“아.... 네.”

빤히 깃발들을 보던 승관이 미간을 찌푸렸다. 슬슬 그 주변 등롱부터 하나둘씩 흐려지는 느낌이었다.

“어우, 일어나야겠다. 들어가라네.”

인시寅時 정도가 되면 등롱이 점차 흐려지다가 대부분의 불이 다 꺼진다고 했다. 주변에 있던 다른 생원들이 제 짐을 챙겨 침소로 돌아가는 모습을 보며 셋 또한 청룡 침소로 돌아갔다.

 

침소에 들어갔을 때 정한은 보이지 않았다. 아까 본 누각에 있을 것이라면서, 그냥 먼저 잠들면 된다고 익숙하게 말했으나 승관은 예의가 아니라며 홀로 정한을 기다리려 했다. 결국 창밖을 보며 정한을 기다리다 책상 위로 곯아떨어져 잠이 든 탓에 새벽이 다 되어서야 들어온 정한이 낑낑대며 승관을 이불 위로 옮겨주어야 했다.

 

나빌레라

淸明, 맑은 날 맑은 밤

 

잎새달 여드레

첫 수업을 들은 날, 찬은 승관으로부터 한솔을 소개받았다. 셋이 있으니 어느 하나 모난 부위가 없어 하루 종일 붙어 다녀도 기분이 상할 일이 없었다. 강의가 끝나면 책방에 가서 가운데에 찬을 앉히고 양옆에서 공부하다 자정이 다 되어서야 침소로 돌아가기가 일쑤였다.

똑같은 나날들을 보낸 뒤, 어김없이 등롱이 꺼지기 직전 즈음에 청룡 침소로 들어온 승관과 찬이 숨을 헐떡였다.

“헉, 그래도 오늘은 일찍, 들어왔어.”

“...어. 등불이 별루 안 꺼졌어....”

찬이 답지않게 대강 대답하고는 피곤하다며 민규의 옆자리로 스르륵 들어가려 했다. 승관이 겨우 목깃을 잡고 흔들며 씻고 자라고 종용하였으나 찬은 웅얼거리며 잠자리에 들었다.

승관은 어쩔 수 없이 홀로 세안하고 와야 했다. 혹여나 제 행동으로 인해 둘이 자는 데 불편함을 느낄까 싶어 최대한 조심스레 책상 앞에 앉았다. 밤바람에 감기에 걸리지 않도록 창을 닫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번에는 기필코 정한 사형과 함께 잠에 들겠다는 다짐으로 꺼내든 서책을 한참 동안 읽다가, 눈이 뻑뻑해진 느낌에 고개를 슬쩍 뒤로 젖혔다.

“어! 오셨습니까?”

때마침 들어온 정한과 눈이 마주쳤다.

“안 자고 있었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제 오시는 겁니까?”

“엉. 오늘까지 정리할 것이 있어서. ...창은 왜 다 닫고 있어?”

“민규 사형이랑 찬이가 추울까 봐요.”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으로 정한을 바라보다, 눈치를 보며 슬쩍 소심하게 창들에 손을 얹었다. 정한은 그런 승관이 마냥 귀여웠다.

“밖이 장관인데 무엇 하러 답답하게 있어. 나가자.”

승관을 일으켜 세우고 도포를 둘러주었다. 최대한 조용히 방에서 나와 계단을 내려오며 도포를 고쳐 입은 승관이 밖을 보더니 발걸음이 멈추었다. 생원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일제히 나와 돌아다니고 있었다. 황룡이 아닌 다른 생원들이 이 시간에 밖을 돌아다닌다는 것이 너무나도 낯설었다. 정한은 익숙하다는 듯 승관을 붙잡고 생원들 사이를 지나쳐 갔다.

“어디로 가는 중입니까?”

“따라와 봐. 좋은 거 구경시켜 줄게.”

고개를 두리번거리면서도 착실하게 정한을 따라갔다. 가는 길 사이사이 나무마다 걸려있는 작은 청사초롱이 유독 밝게 빛이 났다.

 

“다 왔다.”

승관이 고개를 들었다. 오색 빛의 풍등이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와... 이게 다 무엇입니까?”

“예쁘지?”

승관이 홀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주작에서는 매년 환영 인사로 여드레 저녁에 풍등을 띄우거든.”

나무 아래에 자리를 잡고 나서는 본격적으로 풍등만 보았다. 죄다 똑같이 생긴 풍등임에도 승관은 움직일 생각이 없어 보였다.

“찬이도 데리고 올 것을 그랬나.”

“내일도 할걸?”

“응. 올해는 사흘 정도 해요.”

두 청룡은 소리가 나는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첫날 민규가 말을 건네었던 주작 무예학도였다. 대화하는 것을 보면, 정한과도 친한 사이인 것 같았다.

“안 피곤해요? 승철 사형은 자요.”

“아, 준휘구나. ...아직은 괜찮아. 그래서 둘만 온 거야?”

“네. 호시는 무예가 끝나자마자 침소로 돌아갔습니다. 우지랑 원우도요.”

승관이 몸을 살짝 기울여 준휘의 옆에 서 있는 또 다른 주작을 보았다. 이석민. 호패에 있는 이름을 읽은 승관이 멀뚱멀뚱 그들을 보자, 정한이 승관을 손짓하며 석민에게 물었다.

“승관이. 알아?”

“네. 첫날 봤죠.”

“풍등 띄우는 거, 한 번 해볼 수 있을까?”

석민이 준휘를 바라보자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허락의 의미를 전했다. 승관은 거듭하여 정말 다녀와도 되냐고 묻다가 한 번 더 물어보면 보내주지 않겠다는 정한의 말을 듣고 나서야 벌떡 일어나 석민을 따라갔다.

 

“정말로 저를 본 적 있습니까?”

“응. 명륜당에서도 봤고, 서낭당 아래에서도 보았지.”

“...저를요?”

“네 이름, 입학 전부터 어렴풋이 알고 있었어.”

“어? 어떻게 알았습니까?”

“내가 도겸이거든. 황룡은, 대외적으로 사용하는 이름이 따로 있어서.”

승관이 놀란 듯 입을 다물지 못했다. 한참을 도록도록 눈만 굴리다 이내 입술을 삐죽였다.

“...헌데 그날 제게 통지서를 준 분은 다른 분이셨던 걸로 압니다.”

“그날 내가 열병을 심하게 앓았어서 다른 생원이 간 것이야. 네게 갔던 그 생원이 네 생김새를 알려주어서 서낭당 아래에서 찾아본 것뿐이고.”

“제 생김새...?”

“동글동글.”

동글...? 승관이 괜히 제 얼굴을 만지작거렸다. 그새 석민은 청색 풍등을 보여주었다. 청룡이니 푸른색 주면 되나? 접힌 풍등들을 보며 고민하던 승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 풍등 끝을 펴서 잡고 있어 봐.”

석민이 붉은 도포 속에서 마구를 꺼냈다. 대강 붓을 휘두르자 초의 심지가 반짝이며 불이 붙었다. 자, 이제 손 떼도 돼. 금세 부풀어 오르는 풍등을 보던 승관이 살포시 하늘을 향해 놓았다. 또 넋을 놓고 풍등만 보는 승관에, 석민이 팔뚝을 콕콕 찔렀다. 소원도 빌어야지. 그의 말에 승관은 곧바로 눈을 감았다. 꼭 감은 승관의 눈을 보던 석민도 함께 눈을 감고 조금 전에 빌었던 소원을 되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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