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빌레라

추석(2)

‘나빌레라’라는 마법, 알아요?

서당 by 반야

백호가 된 순영이 궁기와 맞붙자마자 떨어져 나갔다. 객석에 있던 나비들뿐만 아니라 경합장에 있는 셋마저도 경악을 금치 못했다. 환각의 숲에서 일부 한양 생원들에게 보여준 것만으로도 당황스러운데, 마법 서당 생원 모두가 보는 앞에서 백호의 형태를 보여준 꼴이 되었다.

궁수가 넘어가는 것을 보자마자 순영도 중심을 잃고 다시 제 모습으로 변했다. 그의 손에는 일찍이 낚아챘던 목각이 있었다. 궁기 부적이 붙어있는 것을 확인한 명호가 다급히 순영에게로 달려갔다.

“사형 돌았어요?!”

“명호는 사형한테 못 하는 말이 없네….”

믿는 구석이 있어서 그렇다며 순영이 웃었다. 툭툭 흙을 털고 일어나 고개를 들었다. 때마침 바로 위 객석에 나비들이 서 있었다. 지수와 눈을 마주치자, 씩 웃어 보였다. 지수도 그제야 안심이 됐다는 듯 씨익 웃었다.

“호시야. 수장아. 순영아.”

“...네. 사형.”

“나는 널 믿어. 하늘도, 널 믿어.”

순영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커다란 양손으로 순영의 볼을 감쌌다. 이마를 맞대고, 눈을 마주치며 웃어주었다.

“우리 호랑이, 잘 할 수 있잖아. 그치?”

“…….”

“나는, 호시가 무슨 일을 해도 네 뜻을 믿고 널 사랑할 거야. 너랑 한솔이가 내 전부야. 잘 해낼 수 있지?”

제주는 오랜 기간 우승을 해온 서당이었다. 경주는 한양에 비해 인원도 많았고 경쟁력도 더 셌다. 순영은 티를 내진 않았지만 속앓이를 꽤 많이 했다. 이기고 싶었는데, 자신이 없었다. 무예 나비들은 믿었다. 이만큼 저를 따라주고 믿어주는 생원은 나비들 뿐이었다. 그럼에도 감춰진 제주와 경주의 생원들이 두려웠다.

거짓말처럼, 지수의 말을 듣자마자 근심이 사라졌다. 나는 백호고, 호랑이고, 장산범을 찢어가며 내 청룡을 지켜냈다. 하늘은, 한양은, 나비들은, 지수는, 나는, 권순영을 믿었다. 할  수 있다. 두려울 건 없다.

다시 명호를 보았다.

“이제, 남은 것들을 처리해볼까?”

“하……. 네. 가요. 잘했어요.”

명호는 경합에서 무기가 아닌 무술만 사용하는 유일한 생원이었다. 맨손으로 참여했으면서 무섭지도 않은지 성큼성큼 잘만 돌아다녔다.

“명호, 괜찮을까?”

원우가 걱정스레 물었다. 지훈은 걱정하지 말라는 듯 웃었다.

“명호가 환각술을 잘 쓴대.”

“맞아. 쟤, 환각술 수업 때 날아다녔어.”

원우가 미심쩍다는 듯 민규를 빤히 보았다. 민규는 진짜라며 부연 설명을 해주었다. 명호와 환각술 수업을 했을 때 이야기는 할 때마다 즐거웠다. 그때의 짜릿함은 말로 표현할 수 없기에 더 그러했다. 저 날아다니는 듯한 생원이 제 친우라는 것을 동네방네 자랑하고 싶었다.

몸을 푸는 듯, 명호가 이것저것 나비들의 기술을 사용해보며 순영과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승철에게 전해 들었던 내용을 바탕으로 불 날개를 펼쳐보기도 하고 지훈의 뱀 포획에 지수의 동백꽃을 섞어서 똬리를 틀어보기도 했다.

원형의 경합장은 정확히 세등분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경계가 빠듯하게 처져 있었다. 그곳을 넘으면 해당 서당에서 감점된다고 했다. 명호가 순간 제가 사용하는 환각들이 서당 경계를 넘었을까 싶어 뒤늦게 살펴보았으나 주변에는 온통 나무들 뿐이었다. 빼곡히 차인 풀잎들을 뚫어지게 쳐다보아야 겨우 경계들이 보일 정도였다. 둘은 지금, 한양 영역의 한가운데에 있다는 것을 그제야 깨달았다. 그 사이에서 다른 생원들의 모습을 볼 수는 없었다. 완벽히 서당 간의 시야가 차단되었다. 가까이 있지 않으면 사흉수조차도 찾기 어려울 정도였다. 순영은 아까 잠시 백호의 형태로 둘러본 경합장을 떠올리며 그들을 찾기 위해 움직였다.

나비들은 사흉수를 볼 수 있었다. 아 저쪽에 있는데..! 승관이 안달이 난 듯 발을 동동거렸다. 승관의 말을 들은 것처럼 명호와 순영이 찬을 데리고 도철을 향해 가고 있었다. 요상하게도, 도철은 그들을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근데 왜 쟤들한테 안 오지?”

“사흉수 중 하나가 사라졌는데, 퍽 이쪽으로 오고 싶겠다.”

지훈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명호가 풀쩍 뛰어 경주 생원들에게 가는 도철을 잡아챘다. 오, 진짜 날아다니네. 원우의 혼잣말에 신난 것은 또 민규뿐이었다.

풀쩍 뛰어올라 하늘을 걷더니, 멀지 않은 곳에 있던 도철의 양 뿔을 잡고 한양의 영역으로 완전히 몸을 돌렸다. 포악한 성질을 부리며 포효하는 그것의 급소에 찬이 언월도를 꽂았다. 순영이 띄워준 것이었다.

연습할 때 들은 바로는 그랬다. 승철이 급소를 공격하면, 떨어질 찰나에 준휘가 받아주는 것. 분명히 준휘가 활을 쏘아 없애기로 했는데, 제 시야에 준휘가 있었나 싶어 뒤늦게 몸을 버둥거렸다. 어디에도 주작은 보이지 않았다.

“어디갔…!”

찬이 언월도를 놓치는 바람에 도철의 입 속으로 떨어졌다.

입이 닫혀 갇히기 직전, 명호가 붉은 날개를 펼치고 손바닥에 불을 일으켰다.

뜨거운 열기에 도철이 입을 쩌억 벌렸다. 그새 순영이 올라타 찬을 붙잡았다.

한 손에는 찬을, 다른 한 손에는 그의 언월도를 들고 땅에 착지했다. 동시에 도철이 사라졌다. 명호의 손에는 도철 각목이 남게 되었다.

찬이 둘에게 각목을 건네받자마자 손에서 재처럼 사라졌다. 역시나 마법이 걸려 있었다.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들어 또다시 객석을 바라보았다.

정한이 양손에 각목을 잡고 찬에게 눈인사했다. 한양 생원들이 모여 있는 곳에, 청색과 적색 깃발이 꽂혔다.

“우와….”

“우리가 반이나 했네. 근데 준이는 어디 갔길래 안 보여?”

순영이 두리번거려도 준휘가 보이지 않았다. 아까 날아올랐을 때 보았냐 물어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일단 흩어져 보자며 둘을 해산시키려다, 다시 붙였다. 너희 둘은 붙어있으라면서. 명호는 저와 찬의 팔을 찰싹 달라붙게 하고는 멀어져가는 순영을 보더니 대뜸 찬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잘했다는 표시. 명호의 말에, 찬이 맑게 웃어 보였다.

“어……. 그, 괜찮으세요?”

제주와 한양의 경계 사이의 늪에 제주 생원이 끼어 있었다. 준휘가 그에게 팔을 건네주어도 제주 생원은 고개만 저었다.

“왜요... 얼른... 잡으시는게….”

“이럴 시간 없습니다. 얼른 가세요.”

제주 생원의 말은 듣지도 않는지 준휘는 이어서 질문했다.

“이 경계를 제가 넘으면 한양이 감점인게 맞습니까?”

“…….”

준휘가 제주의 영역으로 슬쩍 넘어가 손을 다시 건네었다.

“가볍게 접질렸다 하여도, 그렇게 눌려 있으면 더 다칩니다. 빨리요.”

제주 생원이 멈칫하며 망설이길 반복하다 결국 준휘의 팔을 잡았다. 힘을 주어 잡아당기려던 찰나, 도올이 그들을 향해 달려오기 시작했다. 두 자가 넘는 털을 휘날리며 쿵쿵 뛰어왔다. 땅이 울릴 정도였다. 고민할 새도 없이 준휘가 큰 활로 불화살을 쐈다.

거대한 불이 일어나면서 도올이 불타올랐다.

객석에서 비명이 들리는 것만 같았다. 준휘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제 앞에 있는 사람의 안위가 더 걱정되었다.

“혜강..씨? 맞습니까?”

“...어떻게 아셨습니까?”

“제 애인이 황룡이라 우연히 여기 들어오는 분들의 명적을 봤습니다. 저는 주작 문준휘라고 합니다.”

미소를 지으며 다시 손을 내밀었다.

“자, 이제 더 안심하고 잡을 수 있겠죠?”

마음을 내어준 제주 생원을 들어 올릴 수 있었다. 늪에서 빼주자마자 바싹 탄 도올 각목이 준휘의 앞에 떨어졌다. 잡아들려고 하다 아차, 하고는 제주 생원을 바라보았다. 떨어진 각목을 정해진 시간 내에 아무도 잡지 않으면, 그 사흉수는 무효가 된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얼른 주우셔야….”

“어차피 여긴 제주 생원의 터입니다. 당신이 잡으세요.”

“어떻게 그럽니까? 생원님께서 불을 피워 도올 주술을 없애셨는데.”

“이 멋있는 능력을 다른 생원들 앞에서 보여준 것만으로도 만족스러우니, 괜찮습니다. 저 안 주울 거예요! 얼른 주우세요!”

감사는 그걸로 받겠습니다. 꾸벅 인사를 하고는 다시 경계를 넘어 한양으로 돌아왔다.

사실 제 불화살 능력을 웬만하면 사용하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조금 전 상황에서 그랬다면 저도 그렇고 그 제주의 생원도 무사하지 않을 것 같아서 어쩔 수가 없었다. 사흉수는 주술이 걸린 환각 덩어리라 직접적으로 가해지는 화는 없을 테지만, 늪에 빠져 몸이 불편했을 그가 혼란마저 끌어안으면 얼마나 불편할지 준휘는 알고 있었다.

뿌듯한 표정으로 순영을 마주했다. 도올이 사라지는 과정은 보았다면서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잘 했다는 뜻?”

준휘가 교태를 부리며 순영에게 다가가자 또 거세게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잘했어.”

“그게 옳은 일이니까.”

“응. 명호랑 찬이한테 가자.”

마지막 하나가 남으면 서당 간의 경계가 사라지고 모두가 그것을 쫓을 수 있었다. 시기에 딱 맞게, 넷이 다시 만나자마자 경계가 전부 사라졌다.

승관은 한솔을 꽉 붙잡고 찬을 쫓았다. 혼돈에게 언월도를 내던지려는 찬을 보며 기겁했다. 한솔도 승관의 손을 단단히 겹쳐 잡았다. 모든 게 환각인 것을 알지만 긴장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정한은 몰입해 있는 석민의 곁으로 갔다. 조금 있다가 경합이 끝나면 또다시 서당 대표가 모여야 했다. 대신 가달라는 그의 말에, 석민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생각지도 못한 말이 귓속을 파고들어서,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계속 정한을 보았다.

“...별 일 아니야. 그냥, 끝나고 내려가서 애들 확인 좀 하려고. 생각보다 거칠게 노네.”

“아. 알겠습니다. 아까 사형이 목각으로 던진 곳으로 가면 됩니까?”

“응. 부탁할게.”

그새 궁지에 몰린 혼돈이 포효하며 먹구름을 만들었다. 그 때문에 달이 가려져 온통 어두운 상태에서 혼돈은 황금색의 날카로운 돌을 열두 생원들이 있는 곳으로 뿌려댔다.

“어?! 야, 야! 저거, 저거. 찬이한테 왔던 그 돌!”

“...저런거였다고?”

“대강 저런 모습이었어. 그때는 좀 작긴 했는데, 색이 진짜 똑같아!!”

지수의 목소리는 당황스러움을 숨기지 못했다. 처음 보는 것이었다. 그냥 작은 돌멩이일 줄 알았다. 준휘가 들고 다니는 활만큼 큰 돌덩이들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날카롭지 않고 둥글어서 그나마 다행일 정도였다.

경합장의 넷도 혼란스럽긴 마찬가지였다. 순영을 제외한 셋은 돌을 보자마자 알아차렸다. 물론, 저렇게 큰 것들이 그때 날아왔다면 모두가 다 봤을 터였다. 이들이 예전에 마주쳤던 황금 돌덩이들은 날카롭고 작았다. 실제로 보지 못하고 전해 들었던 나비들은 몰랐을 형태였다.

명호가 준휘의 소맷자락을 잡아당겼다. 준휘는 말없이 그 손을 잡아 내렸다. 대화를 나눌 시간이 없다고 생각했다. 다른 생원들은 각자 떨어져 있었으나 넷은 죄다 모여 있었기에 돌덩이가 한 곳으로 내리꽂히듯이 쏟아졌다. 땅바닥에 부딪히자마자 금가루처럼 펼쳐졌다. 이리저리 피하고 내치며 도망갔다. 숲이었기에 바닥에 나뭇가지며 돌이며 여러 장애물들이 많았는데, 하필 금가루 때문에 더 미끄러워졌다.

준휘는 알아서 잘 피해다닐 것이었다. 일찍이 명호와 찬의 등을 떠밀며 도망치던 순영은 돌뿌리에 걸려 크게 휘청하며 넘어졌다. 눈을 질끈 감았다가, 한참을 뜨지 못했다. 돌덩이들이 얼굴에 날아와야 할 시기가 한참 지나고도 남았다.

“...야.”

붉었다가, 하얗게 빛났다가. 번쩍이는 꽃 방패가 펼쳐져 있었다. 그 방패는, 오롯이 준휘만 짊어지고 있었다. 그 어떤 물체에 빗대지도 않았다.

“와, 순영아! 나 진짜 좆됐다!!”

곧장 준휘에게로 달려온 명호가 그의 등을 찰싹 소리가 나게 때렸다. 준휘가 이렇게 생각 없이 말한 것이 처음이었다. 제 힘만으로 꽃 방패를 만들어냈다. 엄청 거대해서 네 명을 보호하고도 충분히 남을 정도의 꽃 방패. 한양은 물론이고, 모든 생원의 이목이 그쪽으로 쏠렸다.

튕겨 나간 돌덩이들은 가루가 되지 않고 오히려 혼돈에게 돌아갔다. 마찰음과 굉음이 섞여 경합장 전체가 웅웅 울렸다. 혹여나 객석에 튕겨나갈까 싶어 수직이 될 정도로 방패를 들어올렸다. 다행히도 경합장과 객석 사이에 결계가 만들어져 있어 위험하지는 않았다.

그새 찬은 제 언월도를 장대삼아 풀쩍 날아들었다. 준휘의 꽃 방패를 발로 딛고, 공중에 붕 뜬 각목을 잡았다. 여전히 온전히 제 몸을 가눌 능력은 없어서 떨어지려던 찰나 명호가 날아서 그를 잡아 주었다. 얇은 팔이 단단하게 찬을 감싸 안았다.

경기장에 사뿐히 내려오고 난 후, 끝까지 찬의 상태를 확인하고는 벌러덩 뒤로 누웠다. 찬은 이번에도 사형들이 저를 도와줄 것을 알고 있었다. 믿었으니까. 얼결에 명호를 깔고 눕게 된 찬이 버둥거렸다. 순영은 그 위로 벌러덩 누우면서 소리 내어 웃었다. 이겼다. 봐, 할 수 있잖아. 이상하게도 저 멀리 있는 지수의 말이 들리는 것 같았다.

모든 각목이 사라지고, 깃발 세 개를 가지게 된 한양이 우승했다. 한양 생원들은 환호를 질렀으나 나비들은 그사이에 포함되지 않았다. 방패에 꽃이 있었으나 한 종류가 아니라는 것은 웬만한 마반인들은 다 알아차렸을 터였다. 나비들은 권력에 짓눌린 꽃잎에 휘말리는 걸 더욱이나 싫어했다. 그리고, 경합장 속에 있는 네 명의 안위가 걱정되었다.

씻겨나가듯 결계와 환각술이 사라지는 것이 보였다. 정한은 민규와 승관을 데리고 찬을 보러 갔다. 지수와 한솔은 순영을, 원우와 지훈은 명호를. 혹시나 다쳤을까 싶어 석민에게 일을 맡긴 것이었다. 정한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의원이 되고 싶다 생각했으니까. 어느 정도의 사고 수습은 해줄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승철은 힘없이 널브러져 있는 준휘에게로 갔다. 무의식적으로 준휘를 일으키려 했다. 우직한 몸 아래에 꽃이 피어 있을까 봐 두려웠다. 거대하게 펼쳐진 준휘의 문양에 있는 꽃들이 승철에게는 너무 익숙했다. 어떻게 이런 운명을 타고났나. 중앙에는 백일홍, 가장자리는 안개꽃. 제 사형들이 몇 번 보여주었던 문양에 있었다. 거칠고 다급한 승철의 손길에, 준휘가 겨우 눈을 뜨고 눈을 마주쳤다. 다행히도 다친 곳은 없었다.

“준아. 준아. 내 말 들려? 괜찮아?”

“...네.”

목소리가 갈라졌다. 그냥 불화살을 쏘고 방패도 만들었으니 힘을 너무 많이 써서 그런 것이라며 웃었다. 무의식적으로 방어 마법을 썼는데, 힘이 한순간에 들어가더니 거대한 꽃이 펼쳐졌다. 동생을 낳았나? 재혼..을 했을 수도 있나. 원우한테 물어봐야겠다.

이것저것 머리가 복잡했지만 티를 내지는 않았다.

“...너 진짜, 괜찮아..?”

“으응…. 별문제 없어요.”

“...너,”

느긋하게 움직여 제 앞에 앉아있는 승철에게로 안겼다. 승철의 배 아래에 힘이 들어갔다. 한 두 번 한 행동이 아닌데. 허리를 끌어안고 얼굴을 부비적대던 준휘가 고개를 들고는 웃어주었다.

“나 잘했지.”

“...응.”

“형이 너무 보고 싶었어요. 경합장에 들어온 순간부터,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몰라.”

그 말에, 왠지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힘이 다 빠진 채로 승철의 무릎에 거의 누워 있었음에도 겨우 팔을 들어 그 눈물을 닦아주었다. 미처 닦아내지 못한 한 방울이 준휘의 입술 위로 떨어졌다. 당황하며 닦아주려고 손을 들어 올리자 그걸 막은 준휘가 어색하게 싱긋 웃었다. 왜……. 승철의 뒷말은, 준휘에게 삼켜져 이어지지 못했다.

느릿하게 입술이 맞물렸다. 뜨거웠다. 준휘가 허리를 완전히 세워 바로 앉고 나서도 떨어질 생각은 하지 않았다. 승철은 눈을 뜨지 않았다. 눈썹을 엄지로 문지르며 눈 떠요, 하고 말해도 더 꼭 감으며 앓는 소리만 낼 뿐이었다. 어차피 다른 생원들은 우리한테 관심 없을 텐데…. 준휘는 그가 부끄러워서 이러나 싶어 그의 손을 잡아 제 볼 위로 얹어주었다. 한순간도 떨어지기 싫었다. 승철이 그대로 힘을 실어 준휘를 뒤로 넘겼다. 완전히 준휘의 몸 위로 올라탄 꼴이 되어버렸다. 그새 힘들까 싶어 눕힌 것인데, 갈증이 난 사람처럼 몸을 바짝 붙이고 입 속을 헤집어대는 준휘가 벅찼다. 승철의 허리께에 준휘의 손이 들어오기 전까지 입술은 떨어지질 못했다. 후에도 둘은 한참을 있다가 경합장에서 나왔다.

나빌레라

秋夕(二), 나빌레라라는 마법, 알아요?

열매달 스무하루

다음 날 밤, 어느덧 경합장이 다 정돈되어 있었다. 숲처럼 어스름하고 축축하던 터는 사라지고 민속놀이를 위한 경기장이 만들어져 있었다. 가마싸움, 강강술래, 차례, 씨름. 순서대로 경기를 즐기며 축제를 한다고 했다. 그걸 구경하기 위해 삼삼오오 모이기 시작했다. 다시 판이 꾸려졌다. 아래에 새로운 선수들이 모이는 것을 보고 있던 주작들에게, 아니꼬운 시선들이 많이 꽂혔다.

낮에는 별로 인식하지 못했다. 확실히 단오와는 분위기가 달랐다. 차례도 간단했고, 정말 잠시 쉬었다 갈 수 있도록 해주는 것 같았다. 먹을거리가 쉴 새 없이 나왔고, 흥이 넘치는 곡들도 연주되었다. 드넓은 서당에 걸맞게 꽃과 나무도 빼곡히 피어나 여백을 채우고 있었다. 경합에 나갔던 넷은 꽤 피곤했는지, 오후가 다 되어서야 비척비척 걸어 나왔다. 준휘는 승철과 거의 방 안에서만 있었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였다. 지수와 정한, 원우가 와서 준휘의 꽃을 알아보았고, 간간이 찬과 승관이 들뜬 표정을 지으며 들어와서는

“경주랑 제주 생원님들이 어제 경합 잘 봤다면서 주셨어요!”

하며 선물을 한가득 들고 오기에 내심 뿌듯하기만 했다. 밤 내내 생원들의 이목을 집중시켰으니 그럴 만 하다고 생각했다. 나오자마자 비난을 들을 것이란 생각은 단 한 번도 해본 적 없었다.

사실 셋 다 붉은 주작 도포를 입고 있어 그런 줄만 알았다. 주작의 깃으로 만들어진 서당의 도포는 어디서든 티가 났다. 그러나 지금은 그것 때문이 아니었다. 각 서당을 대표하는 의복을 입은 생원들은 차고 넘쳤다. 수군거리는 소리를 넘어서, 대놓고 손가락으로 가리키고는 잡종이라는 말을 하는 생원도 있었다. ‘잡종’이라는 저 말이, 대뜸 양반인이나 일반인을 비꼬는 것이 아니란 것은 곧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드물게 꽃을 두 개 품고 태어나는 생원이 있을 수도 있지, 왜 저렇게까지 혐오를 하나 싶었다. 준휘는 멍하니 서서 승철의 귀만 막아주었다. 옆에서 그 꼬락서니를 보던 석민이 화가 나서 정색했으나 그와 동시에 정한이 끼어들어서 대놓고 꽃도 없는 게 입만 살았다고 한 소리 하는 바람에 주변에 수군대던 생원들이 전부 사라졌다. 준휘가 그 때는 승철의 귀를 열어주었다.

“...난 가끔, 네가 우리 편이라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어.”

“헹, 그러냐.”

귀가 열린 승철이 처음 들은 소리가 정한의 일침이었다. 냉소적으로 웃으며 답한 정한이 승철의 목에 팔을 두르고 길 가로 빠져나왔다.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질질 끌려 나온 승철이 어정쩡하게 선 자세가 되었다.

“...왜?”

“준휘랑 밤에 잠깐 나갔다 올래?”

“어? 왜?”

“...나도 승관이랑 나갈 거야. 그냥.”

너 어제까지 마음고생 심했잖아. 정한의 말에, 승철이 잠시 고민하는 듯 볼을 부풀렸다 빼기를 반복하며 멍하니 서 있었다.

“이 경기, 술시에 시작하거든? 지금 나가서 자시가 될 때 이 앞에서 모이자.”

“...지금 몇 신데?”

“유시에서 술시로 넘어가기 직전이야.”

솔깃했다. 석민은 그새 민규와 명호를 찾아 그쪽으로 간 상태였다. 홀로 남은 준휘가 승철의 어깨에 턱을 올리고 정한과 눈을 마주쳤다. 승철은 익숙한 듯 가만히 받아주었다.

“좀 솔깃한데…. 너는 뭐 하게?”

“나? 승관이 어머님 뵈러 갈 거야.”

망종에 다들 집에 갈 때 승관은 홀로 서당에 있어야 했다. 너무나도 먼 곳이라 오늘 같은 날이 아니면 데리고 올 수도 없다는 것을 아는 정한이 먼저 제안했다. 승관은 거절할 이유가 없으니 고개를 끄덕인 것이고.

승철이 준휘에게도 물어보니 당연히 좋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대답을 듣자마자 곧바로 승관을 찾아서 서당을 나섰다. 

준휘는 승철을 데리고 바다가 있는 곳으로 갔다. 늦은 밤이라 아무도 없었다. 대강 파도가 들어오지 않는 끝자락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제 품에 안겨 오는 승철을 받아주며 머뭇거리던 준휘가 제 삶에 관해 이야기를 해주었다. 반년도 채 되지 않았을 때 버려져 죽은 것부터, 저승에서 구삼승할망과 함께 살다 독립하였고 현재 제집은 사월촌에 있다는 것까지. 종종 명호가 생각이 많은 것 같다 싶으면 집을 내어준다고 했다. 제 몸에 상처를 내어 불멸의 몸인 것 같다는 것을 증명하려고도 했지만, 정한 못지않게 놀랄 것 같았기에 구두로만 알려주었다. 제 사형이 놀라는 것은 원하지 않았다.

준휘의 생각과 달리 승철은 담담하게 들어주었다. 확실히 마법을 접한 지 얼마 안 된 일반인 치고는 빨리 받아들이는 듯했다. 근래 몇 달간 휘몰아치듯 삶과 신의 영역을 드나들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더군다나, 본인이 친우들과 함께 신을 보시는 운명이란 것을 알게 되었단 부분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런 일이 있었다고.”

“언젠가는 사형한테 말해주고 싶었어요. 지금이 될 줄은 몰랐는데….”

준휘가 말하는 내내 고운 모래만 손으로 쓸던 승철이 그제야 고개를 들어 그와 눈을 마주쳤다.

“근데 왜? 왜 지금 말해 주는 거야?”

“사형이 어젯밤에 저를 너무 걱정했잖아요. 난 진짜 괜찮은데.”

“...씻을 때 보니까 이상할 정도로 몸에 상처 하나 없긴 했어. 애들이 다 받아준 찬이도 몸에 멍 자국은 있었는데, 넌 아예 없었잖아.”

“응. 그때 너무 유심히 보길래 말하는 거예요. 나 진짜 괜찮아요.”

확실히 시선이 평소보다 노골적이긴 했다. 순영도 피로감과 근육통이 평소보다 심해서 몸이 무거워 보였고, 명호와 찬은 온종일 누워있었다. 반면에 준휘는 별 타격이 없어 보였다. 평소에도 힘들거나 아픈 걸 이야기하지 않았기에 더 유심히 봤던 것이었다. 그래도 나름 티를 내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부끄러움 때문에 얼굴에 열이 오르는 것을 애써 무시하면서, 손을 뻗어 왼쪽 가슴께에 올렸다.

“...그럼, 지금 이렇게 안았을 때 심장 소리가 안 들리는 것도,”

“진작에 멈추었으니까요.”

“…….”

“귀신이랑 사귀는 건 아니니까 괜찮지 않아요? 육체는 멈추었으나 정신은 잘 살아있어요.”

“난 평생 너랑 살 수 있어?”

“응. 이승의 인간과 저승의 인간이라 결이 다르긴 해도, 어쨌든 숨이 붙은 채로 함께 살아가는 건 같으니까요.”

“...난 그것도 모르고, 너한테 좋아하지 말라고....”

제가 했던 말이 준휘에게 상처가 됐을 것만 같았다. 잘 알지도 못한 상태에서 다 알 것이라 생각하고 뱉은 순전히 이기적인 생각이었다.

“미안해.”

“아니.

승철의 손을 잡아서 제 볼 위로 얹었다. 따뜻한 손이 서늘한 준휘의 피부에 닿았다.

“그거 말고 다른 말 해줘.”

“…...사랑해.”

“응. 그거면 됐어요.”

준휘가 은근슬쩍 말을 놓는 횟수가 잦아졌다. 제 사제들이 저를 어찌 부르는지는 관심이 없었어도 본인은 사형을 착실히 챙겨서 부르는 생원이었는데. 승철은 그 부분에 대하여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좋아했다. 온전히 제게만 편히 대하는 느낌이 들어 좋았다.

“어제 경합장에서 너랑… 그거, 하고 나서 심장이 너무 빨리 뛰었어.”

“알아요. 나랑 몸 딱 붙이고 있었잖아요.”

“우리만 있었으면 더한 것도 하고 싶어질 정도로 좋았어.”

“어이구. 그건 나중에 하기로 했는데.”

승철이 약관이 되고 나서는 뭐든 하자고 약속했다. 서당에 입재할 때 혼인을 한 상태인 생원들도 많았고, 지금 한창 적정기를 지나는 중이란 것은 알지만 같이 방을 쓰는 석민도 있고. 이렇게 보는 눈이 많은 곳에서 눈치를 보며 다급하게 사랑을 나누고 싶지는 않았다. 서로 다른 생원에 대한 배려였다.

그 때문에 항상 좋아 죽을 정도여도 한참을 품에 안기만 했다. 살을 맞붙이고 혀를 섞은 것은 처음이었다. 승철은 그 순간을 곱씹어 생각할수록 제 아랫입술이 불타는 느낌이 들었다.

“…….”

“한 번만 더 해.”

당찬 승철의 제안에도 준휘는 입을 다물고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았다. 몸을 일으킨 승철이 준휘의 허벅지 위에 앉아 얼굴을 더 가까이했다. 또 해도 돼? 잔뜩 안달이 났으면서도 끝까지 동의를 구하는 승철에게 준휘는 기꺼이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바로 앞에서 바닷물이 모래에 찰박이는데, 신경이 온통 승철에게만 집중되어 어느 순간부터 들리지 않았다. 혀가 엉키고 뒤섞여 질척이는 소리밖에 나지 않았다. 온통 뜨거운 입안을 헤쳤다. 한참을 그러다가, 겨우 떨어뜨려 놓고도 부족한지 반쯤 풀린 눈으로 준휘를 바라봤다.

“형. 귀 빨개졌어요.”

“...네가…….”

“응?”

준휘가 되묻기도 전에 승철이 와락 안겼다. 붉게 물든 귓바퀴를 입술로 살짝씩 물며 끈질기게 답을 요구했다. 내가 뭐요? 하고 다시 물어봐도 고개만 젓다가, 이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네가 너무 좋아서 그래…….”

“나 때문이야?”

“응…….”

사형이 그렇다면 내 잘못이지, 뭐. 준휘는 마냥 웃으며 승철의 등을 쓸어주었다. 조금 있으면 돌아갈 시간이니 그전까지만이라도 더 몸을 바짝 붙이고 있자며, 더 끌어안았다. 승철은 숨이 차다며 몸을 움직이려다가도 끝내 준휘의 품에 착실히 안겨 있었다.

열매달 스무이틀

지수는 황룡의 일에 대해서는 항상 별말 않고 일했다. 정한에게 네가 일 좀 해달라는 지비를 받고는 곧바로 지훈과 석민을 데리고 송들에게로 갔다. 한솔과 찬은 승관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한양에서 생활하던 것과 다른 것이 없었다.

마지막으로 활쏘기와 씨름, 조리희 등을 한다고 했다. 지수가 무거운 과녁을 들어서 옮겨주고, 석민은 불을 이용해서 밧줄 끝부분을 태워가며 길이를 맞추어 주었다. 지훈은 제주의 정악학도들 사이에서 악기를 나르는 것을 도왔다.

“...어때요? 우리 생원들이 만든 음악입니다.”

“바다가 담긴 것 같습니다.”

“그럼, 산 속의 음악은 어떤가요?”

당신들의 음악을 들어보고 싶다는 의도였다. 제주 생원들이 기대에 찬 눈빛으로 지훈을 바라보았다. 지훈은 망설이다 가까이 있는 가야금으로 다가갔다. 다른 생원들은 지훈을 위해 음악을 꺼주었다.

“한양의 정악 생원들이 연주하는 것을 제 홀로 할 수는 없으니, 제가 홀로 만든 곡을 연주할까 합니다.”

“생원님은 가야금을 연주하십니까?”

“...그냥 이것저것 하는데, 그중에서도 제 손에 가장 많이 닿은 악기가 이것이라서요.”

어릴 적부터 만진 것은 가야금이 유일했다. 나머지 악기들은 귀로 듣기만 할 뿐 제대로 배우고 만져본 적이 없었다. 서당에 들어와서 혼자 만져보고 터득한 악기들이었다. 게다가 지금은 준비 중에 잠시 연주하는 것이니 가야금만큼 적격인 것이 없었다.

지훈의 음계를 들은 생원들은 끝나고 나서도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살짝 아쉬운 표정을 짓던 지훈은 그들을 흘긋 보더니 마법을 걸어 가야금 음악을 유지한 후 손에서 해금을 만들어냈다. 종종 사용하던 물건을 소환하는 마법이었다. 마반인들이 만들어낸 마법이라 가문의 문양이 대놓고 번쩍였다. 지훈은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곧바로 가야금 위에 해금의 소리를 겹쳤다. 가야금만 연주했을 때 아쉬웠던 부분을 해금이 채워줬다.

“정말 현무 생원님이 만든 곡입니까?”

“...네. 한양 생원들과 만든 곡은 후에 저희 서당에 올라오시면 들려드리겠습니다.”

“이걸, 혼자 만들었다고요?”

제주 생원들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재차 물었다.

“간혹 홀로 서당에 있을 때 만들었습니다. 혼자서는 마땅히 할 일이 없어서요.”

“…….”

생원들의 시선이 낯설고 부끄러웠던 지훈이, 소리를 서서히 줄이더니 완전히 맺도록 만들었다. 제주의 공간에서 제 영역을 크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당신들에게 제 음악은 어땠습니까?”

“한양이 느껴졌습니다.”

퍽 솔직한 답변이었다. 나쁜 뜻이 아닌 것을 알기에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무어라 말을 하기도 전에, 생원이 나각을 지훈의 손에 쥐여주었다. 제주의 정악학도들의 수장이었다.

“왜 제게 이걸 주십니까?”

“사실 생원님의 음악에, 바다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생원님의 가야금 연주곡에는 숲이 있고, 하늘이 있고, 또….”

“…….”

“해금이 섞이자 그 찰나에 바위를 담고, 바람도 담았습니다. 당신의 세상이 온전히 담겨있는 것 같았습니다. 듣는 내내 황홀하고 행복에 겨웠습니다. 이 나각으로, 바다도 담긴 완전한 세상을 만들어주십시오.”

과연 수장이었다. 지훈은 나각과 해금을 동시에 손에서 없애고는 고개를 숙여 감사 인사를 표했다. 괜히 벅차오르는 느낌이 들어 입이 쉽게 열리지 않았다. 생원들은 그런 지훈에게 웃으며 다시 말을 건네었다.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이제, 제주에 바다를 담으러 가볼까요?

나비들은 축제에 별 관심이 없었다. 다른 생원들은 이게 끝이라는 말에 죄다 미리 짐을 싸두고 뛰쳐나와서 즐기기 바빴다. 나비들은 차근차근 잊은 것은 없나 확인해가며 열세 명의 짐을 전부 정리했다. 사정없이 노닐다 보니 어느덧 돌아갈 시간이었다. 마지막으로 경합을 빛내준 넷에게 연력年曆과 부채를 선물로 주며 추석 축제를 마무리했다.

돌아가는 길에는 짐이 적어도 올 때의 두 배 정도는 되는 것 같았다. 이번에는 사방색으로 균형을 맞추어 가자는 정한의 말에, 나비들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알아서 나누어 탔다.

“재밌었어?”

원우가 승관과 한솔에게 물었다. 그의 물음에, 옆에 있던 승철도 고개를 들어 둘을 확인했다.

“그러게. 승관이는 어머니들도 뵀다며.”

“넹. 좋았어요. 행복했죠.”

승관이 배시시 웃었다. 거의 반년 만에 본 가족이었다. 이제 또 그만큼 못 볼 거라 생각하면 한없이 미련이 남을 터였으나 승관은 그러지 않았다. 승관은 온전히 행복한 기억 하나만을 갖고도 평생을 살아갈 수 있는 생원이었다. 승철은 다행이라는 듯 웃으며 고개를 주억였다.

“한솔이는?”

“...좋았어요.”

“이번에 한솔이랑 별말을 못 해본 것 같네.”

경합을 제외하고는 같이 있었던 시간이 많이 없긴 했다. 승철은 계속 준휘와 있었고, 원우는 민규나 순영과 있었다. 한솔은 개의치 않았다. 다른 나비들이랑 맘껏 놀았으니 그것만으로도 족했다.

“...사형. 하나만 물어봐도 돼요?”

“응. 얼마든지.”

승철도, 원우도, 하물며 승관까지 웬만한 마법에 대해서는 알고 있을 것만 같았다. 차마 지수에게는 못 물어보았던 것을 감히 질문하려 했다. 막상 입을 떼려니 뱉기가 두려워 벌려지지 않았다. 애꿎은 침만 삼켰다. 주먹을 꽈악 말아쥐었다. 갑작스런 질문에도 셋은 어서 말해보라며 손짓했다.

“......나빌레라라는 마법, 알아요?”

승관이 두 눈을 동그랗고 크게 뜨며 한솔을 보았다. 휙, 거칠게 돌아가는 고개가 여실히 느껴졌다. 승철과 원우를 마주 보고 있었기에 그들의 표정도 단번에 드러났다. 그다지 긍정적으로 표현할 얼굴은 아니었다. 승철이 낮아진 목소리로 그런 거 어디서 들었냐며 조곤조곤 물어오기에, 한솔은 그저 서책에서 봤다고 둘러댔다.

“사형은 지수 사형이 있는 곳으로 탈 줄 알았는데.”

“웅. 나도 그러려고 했는데 쫓겨났어.”

솔직한 정한의 답변에, 지훈이 슬쩍 그를 보더니 픽 웃었다. 진짠데 왜 웃어? 홍 사형께 거부당한 윤 사형이 웃겨서요. 지훈이 옅게 웃으며 나각을 소환시켰다. 옅은 능소화의 향이 감긴 나각을 본 석민이 그것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언제 구했어요? 처음 봐요.”

“제주 생원들께 받았어.”

“오! 한번 해봐.”

순영도 기대에 찬 눈으로 보았다. 항상 그랬다. 지훈은 눈으로 보기만 했던 악기를 나비들 때문에 연주하기 시작한다. 가야금을 제외한 모든 악기가 그랬다.

“...나각을 부는 건 처음인데, 잘 되려나 모르겠네.”

입에 나각을 대려다가 잠시 떼어내고는 정한을 바라보았다. 바로 맞은편에 앉아있던 정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뒤에 지비가 있어요.”

그 말을 끝으로 곧장 나각을 불었다. 정한은 지훈의 음악을 들을 새도 없이, 허리를 숙였다. 지비를 함부로 만지면 안 된다. 제게 온 것이라면 머리통 위에 떨어질 테고, 지훈에게 온 것이라면 그를 지나칠 것이었다. 순영과 석민이 지비를 받을 일은 거의 없으니까.

지비는 기다렸다는 듯 정한을 스쳐 지훈의 발등 위로 떨어졌다. 익숙한 꽃무릇이었다. 나각 연주를 멈추지 않고 종이를 펼친 지훈이 나각을 입에서 떼어냈다. 옆에 앉아 있던 석민이 무례함을 무릅쓰고 슬쩍 곁눈질로 보았으나 다시 시선을 거두었다.

“왜. 뭔데?”

“...한문...이라 다 못 읽겠어요.”

석민이 알 턱이 없는 어려운 한문이 가득했다. 정한은 아쉬운 듯 어깨를 으쓱이고는 곧바로 관심을 거두었다. 지훈의 표정이 꽤 심각한 것도 한몫했다. 눈치가 빨랐기에, 평소 같았으면 진작 읽어주었을 지비를 보기만 했다. 심각하게 구겨진 그의 미간을 꾹꾹 눌러주는 순영의 팔목을 낚아챘다. 지필묵 있냐. 하고 물으면서.

배에 타자마자 곯아떨어졌던 민규가 덜컹거리는 나룻배 때문에 슬쩍 눈을 떴다. 옆에서 제 몸을 베고 자는 찬이 깰까 싶어 조심스레 몸을 일으켰다.

“일어났냐?”

“응.... ...왜 그렇게 봐?”

곧장 주변을 둘러보니 지수와 준휘가 몸을 구겨서 나룻배의 양쪽으로 누워있었다. 홀로 깨어있던 명호가 손에 쥔 종이들을 건네주었다. 뭐냐는 듯 보자, 명호가 연신 사과하며 말했다.

“미안해. 사형들이 네게 보내준 지비인데.... 내가 건드려서 글자가 사라졌어.”

그제야 종이들을 자세히 보았다. 꽃무릇과 능소화. 급한 일이라면 지수나 준휘에게도 보냈을 텐데, 제게만 보내고 말았으니 별일 아닐 것이라며 안심시켜 주었다.

“근데, 우리 지금 어디로 가는지 알아?”

“엉?”

“처음 보는 길이라서.”

명호의 말에 주변을 둘러보았다. 곧장 서당으로 가는 길이 아닌 것만 같았다. 분명 제주로 갈 때는 본 적 없던 마을이 보이기 시작했다. 큰 강을 따라 올라가야 하는데, 환각의 숲도 마반촌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여기가 어딘지 알겠어?”

“......어? 홍월천이다.”

질문을 했던 명호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돌렸다. 기다렸다는 듯 나룻배가 덜컥이며 뭍으로 가기 시작했다. 크게 요동친 탓에 잠에서 깬 지수가 몸을 채 일으키기도 전에, 민규가 먼저 허리를 세워 자세를 바로잡고는 하나하나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 우리 집이거든. 저 옆에는…….”

“우리 집이지.”

낮은 목소리가 제 뒤에서 들려왔다. 온몸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수백, 수천 번을 들었기에 곧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음에도 굳은 몸을 맘껏 움직일 수는 없었다.

“내려.”

“엉?”

원우였다. 멍한 민규의 눈 앞에 손을 휘적휘적 흔들어가며 그가 잠에서 깨어났는가를 확인했다.

“잤냐? 지비 안 봤어?”

“아… 둘 다 명호가 실수로 만져서 사라졌대. 왜?”

그 말을 들은 원우가 민규의 손을 잡아 일으켜 뭍으로 나왔다. 지훈도 함께였다. 지수에게 귓속말로 길게 이야기해주더니, 곧바로 나룻배들을 다시 보내주었다. 떠나가는 나비들을 멍하니 보다가 고개를 돌려 원우와 눈을 마주쳤다.

“급히 물어볼 것이 있어서. 네 독각, 지금 집에 계신대.”

“어? 엉. 추석이라 잠깐 오셨지. 어떻게 알았어?”

일찍이 지비를 날려 물어보았다며 알려주었다. 민규가 염설과 아는 사이인 것처럼, 원우도 민규네 독각과 안면을 튼 사이이긴 했으나 이렇게 개인적으로 연락을 주고받는 줄은 몰랐다.

게다가 원우가 나룻배를 세 척이나 돌려서 제 마을로 향하게 했다. 정한과 지수가 공을 들여 만들어둔 나룻배 경로를 억지로 홀로 틀었다. 절대 그럴 형이 아닌데. 민규가 미간을 찌푸리며 원우를 돌려 세우고 무언가를 물어보려 했으나, 그 전에 먼저 입을 열었다.

“별 일 아니니 걱정 마. 그리고 가는 김에 너도 가면 좋잖아.”

“그게 무슨….”

지훈은 그저 따라온 것이라 덧붙였다. 민규가 전부 알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눈치는 채고 있었다. 저와 달리 물건 독각을 모셨고, 얼마 전 그의 끝을 마주했고. 가족과 사이가 좋지 않아 홀로 서당에서만 지냈다. 민규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 밤에 너희 집에 자는 건 좀 그러니까, 내일 아침에 갈게.”

“…응? 상관 없을 텐데.”

어릴 적부터 함께 나고 자라기도 했고, 민규가 서당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매주 만났던 사이였기에 스스럼없이 서로의 방에서 잠을 청했다. 민규네 가족도 원우를 제 가족처럼 봐주기도 했고. 그런데도 원우는 고개를 저었다. 얘가 불편하대, 하면서. 그제야 민규가 뒤늦게 깨달은 것처럼 탄식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훈과 원우에게 대강 손을 흔들며 인사하고 헤어진 후에, 몇 걸음 떨어지지 않은 제집으로 향했다. 갑작스레 제집에 온 것이 당황스럽긴 했으나 그 티를 내지 않고 곧바로 대문을 열고 집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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